103화 : 오크 대사제와의 회담
“왜 그리 고민하는 얼굴이야?”
“오크들을 죽일까 말까 고민 중인데.”
“다 죽일 필요 있나? 경험치 많이 줘?”
“딱히?”
무작정 학살해댄다고 오크의 신에게 미움 받거나 하진 않았다.
고블린의 신과 달리, 오크의 신은 학살의 전사를 오히려 높이 평가하므로.
하지만 은혁이 원하는 건 오크 대사제와의 대화였다.
“그럼 미션만 마저 깨자고. 아, 백색 오크 군주는 네가 가르쳐 준 방식대로 처치했다.”
“음, 확인했어. 잘했어.”
백색 오크 군주는 부하들을 매복시키고 함정을 깔아두는 타입이었다.
염훈은 그냥 [2초 무적] 걸고 함정 중심부로 날아가서 굴렀다.
가까운 함정은 [2초 무적]으로 견디고, 먼 함정은 [홀리 웨이브]로 무력화시켰다.
그러자 당황한 백색 오크 군주에게 디버프가 걸린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뜨고, 호위병들부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틈에 염훈은 백색 오크 군주를 일격에 죽인 뒤, 다시 여기 온 것이다.
“이제 하나 남았지?”
“음. 회색 오크 군주.”
“근데 오크 군주를 넷 다 죽이는 이유가 뭐야? 미션창 보니까 하나만 죽여도 된다는데.”
은혁, 염훈, 오페아 길드 연합은 이미 23층을 완전히 클리어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은혁이 고집스럽게 오크 군주들을 모두 처치하려는 이유는…….
‘그래야 24층 메인 미션이 히든 미션과 연동되니까.’
24층 메인 미션은 오크 대사제를 죽이는 것이지만, 은혁은 죽이는 대신 대화를 먼저 시도해 볼 작정이다.
오크 대사제와 대화하려면 24층 히든 미션 루트를 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위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오크 대사제 앞에서 실력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모든 오크 군주를 죽인다.’
“일단 이동하자.”
오페아 길드 연합은 도망치는 오크들이 남긴 흙먼지를 쫓으며 싸웠다.
은혁과 염훈은 서두르지 않고 그 뒤를 쫓았다.
잠시 뒤, 회색 오크 군주가 나타났다.
“오크들이여! 들으라! 오늘이 멸망의 낮이다!!”
‘멸망의 낮’이란, 오크들의 전설에 나오는 전장을 뜻한다.
전쟁에 특화된 오크가 멸망하는 순간이라고 하면 부정적으로 들리지만, 오크 기준에서는 최고의 날이다.
멸망이 걸릴 정도로 큰 싸움판이 열리는 날이라는 뜻이므로, 오크의 신 오키니움이 내려다보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오키니움이여! 우리를 보소서! 우리가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보소서!!”
회색 오크는 전투의 쾌락이나 생존을 입에 담지 않았다.
멸망의 낮에 걸맞은 최후만을 외쳤다.
쿠오오오……!!!
오크들이 포효했다.
오크들은 오늘이 멸망의 낮임을 확신했고, 오키니움이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진심으로 믿었다.
“읏……!”
플레이어들이 경계 자세를 취했다.
오크들의 기세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믿을 건 은혁이 회색 오크 군주를 빠르게 죽이는 것뿐이었다.
“오키니움의 이름으로! 돌격!!!”
그게 회색 오크 군주의 유언이 되었다.
빠지직!!
갑자기 벼락이 떨어져서 회색 오크 군주의 머리통을 터뜨렸다.
“……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
플레이어들은 물론, 오크들도 이 상황을 이해 못 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사박사박…….
어디선가 회색 로브를 두른 자가 나타났다.
“감히 허락도 없이 오키니움의 이름을 입에 올리다니. 한심한 놈.”
오크 대사제였다.
사제가 입을 법한 로브 차림에, 오크치고는 키가 작았기에 멀리서 보면 사람처럼 보였다.
“오키니움이여. 허락도 없이 멸망의 낮을 입에 올린 대역죄인을 처단했나이다.”
오크 대사제는 짧게 기도를 올리더니 은혁을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당신이 한 짓은 모두 보고 있었소. 위대하신 오키니움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일대일 회담을 요청하오.”
-분기점에 도착하셨습니다!
-24층 메인 미션과 24층 히든 미션 중 하나를 선택하셔야 합니다!
-A. 24층 메인 미션 루트로.
-B. 24층 히든 미션 루트로.
은혁은 히죽 웃었다.
24층 히든 미션 루트는 회귀자인 은혁도 처음 가보는 길이었다.
‘B를 고른다.’
* * *
<24층 히든 미션 : 오크 대사제와의 회담.>
-목표 :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오크 대사제와의 일대일 회담을 마무리할 것.
-성공 시 보너스 : ???
-실패 시 페널티 : 히든 미션이 실패하고, 24층 메인 미션으로 이어짐.
-제한 시간 : 없음.
커다란 바위 속에 있는 5평 넓이의 동굴.
그곳이 오크 대사제의 거처였다.
은혁과 오크 대사제는 가부좌를 틀고 마주 앉았다.
-히든 미션이 시작됩니다!
-히든 미션 전용 아이템 ‘대화의 방석’이 제공됩니다!
-히든 미션 전용 버프 [평화의 공기]가, 대화 장소인 동굴 내부에 발동됩니다!
히든 미션용 아이템과 버프 모두 철저하게 회담을 위해 제공된 물건이었다.
은혁과 오크 대사제 모두 대화의 방석에 앉아 있었기에, 대화가 끝날 때까지는 둘 다 거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동굴에 가득 찬 [평화의 공기] 때문에 기습 공격을 가할 수도 없었다.
‘감회가 남다르군.’
은혁은 오크 대사제를 가까이서 보며 뭐라 말하기 힘든 감회를 느꼈다.
회귀 전의 오크 대사제는 그야말로 철벽 그 자체였다.
회색 오크 군주 하나를 염훈과 겨우 쓰러뜨렸을 때, 오크 대사제가 나타나 장난치듯 오크 군주를 부활시키는 장면은 정말 끔찍했다.
‘그랬는데 이제는 오크 대사제와 일대일로 회담을 하게 되다니.’
은혁이 그 생각에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오크 대사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크 부족의 역사상, 이곳에서 인간과 일대일 회담이 열린 건 이번이 처음이오.”
“과분한 영광이군.”
“빈정거리는 거요?”
“해석은 자유. 빨리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후…… 그러지.”
대사제는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위대한 오크의 신, 오키니움께서는 전쟁 중이시오.”
“드래곤하고?”
“……!!”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는 묻지 마시오. 배경 설명은 간략히 하고 원하는 거나 빨리 말하란 거요.”
“아, 아니. 묻지 않을 수가 없군. 그건 드래곤 컬트와 성좌 간의 문제! 일개 플레이어인 그대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요?!”
‘그야 회귀자니까.’
은혁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일개 플레이어라기엔 좀 강해서. 랭커라고 들어 보셨는지?”
“으음……!”
오크 대사제는 조금 더 진지한 자세를 취했다.
“오키니움께서는, 드래곤 컬트의 한 분파인 흑룡파와 전쟁 중이시오. 오키니움의 차원에서 치러지는 전쟁인지라 아무래도 오키니움께서는 유리하게 풀어나가는 중이시지.”
뿐만 아니라, 최근 흑룡파는 위세가 그리 높지 않았다.
전투적인 집단답게, 네임드급, 중장년급 드래곤들이 많이 죽거나 지고의 위상 손에 생포된 탓이다.
“허나, 위대한 오키니움께서도 확실한 반격을 가할 여력이 솔직히 없는 상태이시오.”
“그래서 플레이어인 나에게 용병으로 뛰어 달라 이거구만?”
“정말 대단하시군. 마치 내가 하려는 말을 다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은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회귀 전 본래 역사에서는, 지금으로부터 얼마 뒤에 행복 길드의 해피가 싸움 한복판에 뛰어든다.
심심하다는 이유로 오크를 가호하는 성좌, 오키니움의 차원에 멋대로 놀러 간 것이다.
그리고 오키니움, 흑룡파, 해피의 3파전이 펼쳐진다.
‘문제는 이 회귀 전 지식을, 어떻게 내가 이롭게 활용하느냐인데.’
“현재, 그대처럼 강력한 플레이어들을 9명 구했소.”
“9명?”
“5층에서 올라온 랭커들, 그리고 저 높은 3군주의 세력에 속한 자들 중 일부. 그렇게 9명과 계약을 맺은 상태요.”
21층~24층 통합 층을 가뿐히 혼자 클리어한 랭커들 중에 대사제와 계약한 이들이 이미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에 대한 회귀 전 지식이 은혁에게 없는 이유는?
‘활약도 못 하고 싹 다 죽으니까.’
오키니움, 흑룡파, 해피가 참전한 삼파전에서 어중간한 랭커 9명 정도는 개전 초반에 휩쓸려 죽는다고 봐야 한다.
‘좀 더 간을 보는 게 낫겠다.’
행복 길드의 길드장 해피와 얽히는 일은 최대한 피하는 게 낫다.
해피는 7대 길드의 일곱 길드장 중에서 사실상 최강자다.
제멋대로 활동하는 자라는 점에서 더 위험하므로, 이 건은 회귀 지식을 갖춘 은혁이라도, 아니, 회귀 지식을 갖춘 은혁이었기에 최대한 신중하게 대응하는 게 정답일 터였다.
“지금 바로 계약해야 하는 거요?”
“그렇게 해주길 바라오만.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소?”
“단순히 오키니움 VS 흑룡파의 구도라면, 오키니움 편에 서지 못할 것도 없지. 하지만 싸움 도중에 갑자기 제3의 세력이 끼어들어서 삼파전으로 사태가 커진다면?”
“허허, 걱정도 태산이시군.”
“만약의 경우라는 게 있잖소.”
“그렇다면 그야말로 막장 사태겠지. 하지만 생각해 보시오. 어떤 미친 세력이, 오크의 성좌 오키니움과 흑룡파가 전면전을 벌이는 마당에 끼어들겠소?”
‘얘가 상상력이 부족하네.’
실제로 그런 일이 얼마 뒤에 발생한다는 걸 은혁은 알았기에 피식 웃었다.
“나는 좀 담이 작은 편이라서. 그런 만약의 경우에 좀 민감하군요.”
그러자 대사제의 표정이 대놓고 비웃음으로 변했다.
대사제가 인간이었다면 은혁의 말투가 일종의 비아냥임을 알았겠지만, 아무리 똑똑해도 오크 관습에 익숙한 오크 대사제는 은혁에 대한 평가를 확 뒤집었다.
“내가 그대를 잘못 봤군.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작자 같으니. 이토록 담이 작은 자를 어찌 오키니움 님을 위한 용병으로 쓸 수 있단 말인가?”
“음?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그래도 오크 군주를 셋이나 죽였는데.”
“흥! 오크 군주 따위, 어차피 내가 선출하는 존재에 불과하오. 내가 선출하기만 하면 24시간 뒤에 새로운 오크 군주가 나오지!”
“허, 정말이오? 당신이 직접 오크 군주를 선출한다고? 그 정도의 권능을 지닌 것 같진 않은데?”
은혁이 도발했다.
“흥, 언제 내가 나만의 권능으로 오크 군주를 만든다고 했소? 이 어리석은 자여! 나는 오키니움 님의 권능을 삼가 빌려 오크 군주를 만드는 거요.”
“흠, 당신이 그 정도로 오키니움 님과 가까운 존재란 말입니까?”
“그렇소! 나는 이 차원에서 유일하게 오키니움 님과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요! 직접 보시오!”
오크 대사제는 화풀이 겸, 자기 위력을 선보일 겸, 기도를 읊었다.
“위대하신 오키니움이시여. 새로운 오크 군주 넷을 선출하고자 합니다! 허락을 요청하나이다!”
대사제에게 정순한 신성력이 모였다.
‘와, 제법이네.’
은혁은 속으로 감탄했고, 오크 대사제의 신성력은 더욱 팽창했다.
파앗!!
-오크의 성좌, 오키니움이 [강신]합니다!
오크 대사제는 영혼과 마음의 절반을 비우고, 그 자리에 오키니움을 받았다.
[강신] 스킬에 익숙한 플레이어만이 할 수 있는 능숙한 스킬 전개다.
오크 대사제는 오키니움을 받아들이고 대화했다.
“위대한 오키니움이시여! 새로운 군주를 선발하고자 합니다! 허락해 주……!”
“오키니움이시여!! 해피를 주의하소서!!”
은혁이 냅다 외쳤다.
오크 대사제가 경악했다.
“당신 지금 뭘 하는……!”
오크 대사제가 말리려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은혁과 오크 대사제 모두 ‘대화의 방석’ 위에 앉은 상태.
그리고 오키니움은 오크 대사제의 몸속 절반을 타고 들어와 앉은 상태이므로 얼마간 대화의 방석 효과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은혁은 그것만 믿고 버럭 외쳤다.
“오키니움이시여!! 행복 길드의 길드장 해피를 주의하소서!!! 해피를 주의하소서!!!”
영어로 ‘행복’을 주의하라고 외치는 은혁의 표정과 목소리는 기괴해 보였다.
“다, 닥치시오! 왜 끼어드는……! 아아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