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 평화 길드장 피스메이커 (3)
“뭣?!”
피스메이커는 경악했다.
은혁의 청염백광단검이 피스메이커의 수갑을 찍었기 때문이다.
키이이이잉……!!
관리국이 직접 제작한 수갑이었지만.
-13등급 억압형 관리 수갑의 내구도가 0%가 되었습니다!
-파괴 유예 시간 발동!
-관리자는 시간 내에 즉시 수갑을 복구하십시오! 반복합니다! 관리자는 즉시 수갑을 복구하십시오!
경고음이 주르륵 흘러나왔지만, 담당 관리자는 피스메이커에 의해 추방된 상태다.
-파괴 유예 시간이 지났습니다!
-내구도가 0%가 되었기에 수갑은 파괴됩니다!
파캉!!!
피스메이커를 억누르던 수갑이 박살 났다.
“지금 뭘 한 거지?”
피스메이커가 물었다.
무척 놀란 목소리라, 피스메이커 자신도 생소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뭐겠습니까? 평화와 호혜의 정신으로 자비를 베푼 거죠.”
“평, 뭐?”
“평화와 호혜요. 평화 길드장이면서 그게 그리 생소합니까?”
피스메이커는 혼란스러워서 뭐라고 따져야 좋을지 알기 어려웠다.
그래서 은혁이 멋대로 떠들었다.
“저는 무력으로 통일하겠다고 했으며, 당신처럼 기습과 학살은 하지 않겠다 했습니다. 그 증거로, 수갑 찬 노인인 당신의 약점을 공격하는 대신, 오히려 약점을 부수고 자유를 되찾아 줬습니다.”
은혁은 헤비 체인 소드를 회수한 뒤 선언했다.
“이 평화의 미궁에서, 진정한 평화의 정신을 펼친 쪽은 저입니다.”
“……!!”
“인정? 응, 인정.”
은혁은 멋대로 자화자찬하듯 인정해 버렸다.
주변에 듣는 귀도 없겠다, 자기가 자기 얼굴에 금칠하고 허풍 떠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부연 설명이 필요한 것 같군요. 당신은 나보다 강한 적입니다. 하나, 당신은 강자로서 약자에게 자비를 보인 적 없습니다. 반면에 저는 역으로 약자이면서도, 수갑을 차고 고뇌하는 한 어른에 대한 긍휼의 정과 평화에의 염원으로 당신을 해방시켜줬습니다.”
은혁은 의도적으로 평화의 미궁을 돌아봤다.
“당신이 평화의 미궁을 만든 이래로, 저만큼 확실한 방식으로 평화의 뜻을 펼친 자가 있습니까?”
“으음……!!”
없다.
애초에 피스메이커가 있는 지하층은 숨겨진 곳이었으니까.
‘은혜? 감히 은혜라고?’
피스메이커는 뭐라 말하기 힘든 불쾌감을 느꼈지만, 반박하기 애매했다.
수갑은 스스로 찬 것이지만, 사실 내심 후회했다.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관리국 요원의 방문과 지상의 음악회를 기다려왔고, 그래서 은혁이 스피커를 부쉈을 때 솔직히 화가 났었다.
그래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이 기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은혁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주장을 전부 인정해야 한다.
피스메이커는 자신이 상당히 유치한 고뇌를 하고 있음을 깨닫고 경악했다.
‘놈이 평화적 의도로 날 해방시켜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나? 그런데 인정하긴 솔직히 싫다.’
피스메이커는 그래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얄밉게도, 은혁은 그 침묵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좋을 대로 떠들어댔다.
“보아하니 제가 베푼 은혜와 갑작스러운 자유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우신 것 같군요. 오늘은 무승부로 마무리 짓고 훗날 자웅을 겨루는 게 어떻겠습니까?”
무승부는 사실 말도 안 된다.
이미 은혁의 체온은 42도.
일반인이면 실신해서 경련을 일으키고 있어야 정상이다.
사실 피스메이커가 침묵을 유지하기만 해도 은혁은 체온이 꾸준히 상승해서 죽는다.
피스메이커 또한 이를 알고 있었다.
‘음? 그게 최선인 것 같은데?’
어차피 주변에 목격자는 없다.
이대로 은혁이 죽어 버리면 그만이다.
시체야 바이러스로 녹이고 분해하면 뼈까지 사라진다.
하지만.
“……무승부를 받아들이지.”
피스메이커는 평화 길드장으로서 말했다.
“자네 표현대로라면, 나는 자네에게 은혜를 하나 빚진 거로군?”
“그렇죠.”
“그 대가로 자네 몸에 걸린 바이러스를 해제해 달라고 요구할 테지?”
피스메이커는 은혁의 몸에서 바이러스를 해제할 준비를 했다.
사실 피스메이커가 무승부를 받아들인 이유는, 쉽게 뒤집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은혁을 치료해줌으로써 은혜 관계를 리셋시키는 것.
그럼 피스메이커로서는 자유만 얻고 잃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은혁을 죽이는 건 그 이후에라도 가볍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은혁은 고개를 저었다.
“치료 따윈 필요 없습니다.”
“뭐라고?!”
은혁의 대답은 또다시 피스메이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이대로 방치되면 자넨 죽을 텐데?”
“그거야 내 사정이고. 당신이 내게 진 빚을 갚고 싶다면, 다른 조건이 있습니다.”
“뭐지?”
“당신은 앞으로, 제가 허락할 때까지 5층 길드연합국에 출입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게 조건입니다.”
“뭐라고?”
“당신은 길드연합국에서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다시 5층 길드연합국으로 가면, 당신이 또 학살을 저지르지 않더라도 큰 혼란이 찾아올 겁니다. 즉, 현재 길드연합국의 평화가 깨집니다.”
“음……!”
“그러니 제 허락 있기 전까지는 5층에 출입 금지. 놀고 싶으면 다른 데서 놀 것. 그게 당신을 해방시키는 제 조건입니다.”
“자신의 감염된 몸을 치료하는 대신 길드연합국의 평화를 바란다고? 그게 그대가 바라는 거란 말인가!”
“네.”
“크윽……!!”
피스메이커의 내면에 평화가 사라지고 증오가 들끓었다.
은혁이 힘겹게 웃었기 때문이다.
‘너와 나의 차이를 알겠냐? 너는 평화를 빌미로 학살을 저지른 미친 학살자고, 난 상식적인 선에서의 평화와 균형을 중시한다. 너와 내가 똑같다고 했던 네 주장이 얼마나 틀린 건지 이것만 봐도 알겠지? 난 너보다 레벨도 낮고, 당장 죽을 정도로 아픈 와중에도 나랑 상관없는 이들의 평화를 택했다. 격의 차이를 알아라.’
피스메이커는 은혁의 웃음에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고 느꼈고, 실제로도 그랬다.
“좋다. 그렇게 하지.”
“그럼 안녕히 가시고 자유를 만끽하시길.”
“자네가 죽는 걸 확인한 다음에 떠나지.”
피스메이커는 죽어가는 은혁을 기다렸다.
회색 눈동자에서 놀람과 흥분은 사라지고, 생명체라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관찰하는 냉철함만 남았다.
“크윽.”
은혁은 손으로,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막으려다 포기했다.
“후후…….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만, 그냥 공짜로 바이러스를 치료해 줄 생각은?”
“절대 없다.”
“하하…….”
은혁은 털썩 쓰러졌다.
피스메이커는 은혁의 심장이 멎고 두뇌 활동이 종료되었음을 확인했다.
* * *
25층 전체를 통틀어 봐도 가장 화려한 피스 홀의 무대.
그곳에는 사회자가 있었고, 좌우에 결승 참가자 염훈과 블롱델이 있었다.
젊은 여성 플레이어 블롱델은 랭킹 98위를 자랑하는 랭커로, 100위권 밖으로 나갈 듯 말 듯 버티는 것으로 유명했다.
“지금 관객 투표가 끝이 났습니다! 대회 우승자는, 성기사 플레이어 염훈!!”
“와아아아아아!!!”
관객들이 환호했다.
염훈이 음악 대회에서 우승한 것이다.
“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염훈이 여러 번 고개 숙여 답례했다.
“축하해요. 역시 고속 성장하는 랭커는 다르군요.”
블롱델도 아쉬움을 감추고 염훈을 축하해 줬다.
블롱델은 B-급 직업 ‘향기를 지배하는 무투가’였다.
[향기 지배] 스킬과 무투가 직업은 사실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블롱델은 전면에 나서는 대신 적절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쪽으로 능력을 키웠다.
오늘 무대에서도, 아름다운 외모와 향기로 심사위원들을 유혹할 수 있었다.
순수한 실력으로만 올라온 이들은 블롱델에 밀려 죄다 탈락했다.
하지만 염훈은 그에 맞서 성기사로서의 위엄과 ‘불패불굴’이라는 운명 수식어의 힘을 아낌없이 활용했다.
‘강은혁과 약속했다! 절대로 지지 않는다! 반드시 앙코르 무대에 선다!!’
염훈은 노래를 부르면서 무의식중에, [광역 축복], [광역 정화], [신성한 지휘], [신성한 오러]를 죄다 썼다.
무의식중에 쓴, 불패불굴의 성기사로서의 스킬이었다.
고의로 향기의 힘을 담아 부른 블롱델의 노래가 심사위원석과 무대 앞 좌석에만 영향을 끼쳤다면, 염훈의 노래는 무대 전체에 스며들었다.
결승은 심사위원 평가보다 객석 전체의 평가를 더 비중 높게 반영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염훈이 이겼다.
“와아아아아!!”
“잘한다!! 한 곡 더 불러라!!!”
“앵콜! 앵콜! 앵콜……!”
관객들은 일제히 앙코르를 외쳐댔다.
주간 예술 대회 우승자는, 특수 무대에서 앙코르를 하는 게 암묵의 규칙이었다.
“좋습니다! 안 그래도 부를 생각이었습니다!”
긴장한 염훈이 솔직하게 외치자, 다들 와아 하고 웃었다.
경쟁 상대였던 블롱델은 표정이 확 썩었지만, 물러나는 중이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사회자는 염훈을 보고 즐거워했다.
“예. 정말 엄청난 자신감이로군요! 에스컬레이터에 오르십시오!”
무대 옆에서 에스컬레이터가 나오고, 그걸 밟고 올라가면 바로 앙코르 전용 특수 무대로 이동하는 식이었다.
“자, 어떤 곡을 앙코르곡으로 하시겠습니까?”
사회자는 에스컬레이터 옆 계단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이동하면서도 마이크를 뻗어 염훈에게 질문했다.
“예. 조금 실험적인 노래입니다.”
염훈은 다자카우스의 파이크를 꺼내더니.
파앗!
[신성한 날개]를 써서 직접 앙코르용 특수 무대로 날아갔다.
“오오!!”
“와아아아아아!!!”
관객들이 열광했다.
“저는 무대에 오르기 전 친구와 약속했습니다. 반드시 앙코르 무대에 오르겠다고!”
염훈이 외쳤다.
“따라서, 앙코르 무대에는 제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음절 하나하나에 [홀리 웨이브]를 담아서 노래하겠습니다!!”
쾅!!
염훈은 다자카우스의 파이크로 특수 제작된 스테이지의 바닥을 찍었다.
[홀리 웨이브]가 사방에 방출됐다.
그것이 특수 마이크를 통해 25층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었다.
앙코르 무대가 배경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관중들은 더욱 크게 열광했다.
* * *
염훈이 앙코르 무대에 오르기 1분 전.
평화의 미궁 지하에 위치한 숨겨진 장소.
그곳에는 두 구의 시체가 있었다.
하나는 수운의 질척거리는 시체였고, 다른 하나는 바이러스성 고열로 익어가는 은혁의 시체였다.
단, 전자는 진짜 시체였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한없이 시체에 가까울지언정 진짜 시체는 아니었다.
‘으윽. 진짜 죽겠다.’
은혁은 이번에도, 심장이 멎고 뇌파가 중단된 상태에서 살아서 생각하는 기적을 선보였다.
‘마지막 남은 죽은 척하기 알약을 먹은 덕분이지.’
피를 토할 때 입가를 가리는 척하면서 마지막 남은 죽은 척하기 알약을 삼켰다.
피스메이커는 은혁의 심장과 뇌 기능 정지까지 확인했다.
은혁의 체온은 시체치곤 매우 뜨거웠지만, 피스메이커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숙주가 사망한 뒤에도 체온을 상승시키는 바이러스였으므로.
피스메이커는 은혁을 말없이 내려다본 뒤 떠났다.
그 뒤로도 은혁은 한참을 엎드려 있었는데, 죽은 척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죽어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염훈 녀석. 계획대로 되어야 하는데.’
은혁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지만 소환술사 스킬은 쓸 수 있었다.
‘[메탈 서전트 소환]. [메탈 워커 소환].’
파앗!
메탈 워커와 메탈 서전트가 소환됐다.
“아! 주인님! 어찌 이런 끔찍한 모습으로!”
메탈 서전트가 자기 일처럼 애통해하며 슬퍼했다.
“메탈 서전트여……!”
은혁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물론, 은혁의 생체 시간은 10배나 느려진 상태이므로, 메탈 서전트의 눈에는 느리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메탈 서전트는 외모만큼이나 똘망똘망하고 ‘눈치’를 탑재한 존재였기에 똑바로 알아들었다.
“네, 주인님. 어서 명령을!”
“메탈 워커를 지휘하여, 함께 스피커를 수리하라.”
은혁은 특수 스피커를 [파이어 볼] 스킬로 부술 때 태워 없애지 않았다.
폭발력으로 외장재 위주로만 부수고 전선 하나만 끊어뒀다.
그래야 수리가 편하므로.
“삐빗! 삐비빗!”
메탈 워커와 메탈 서전트가 빠르게 스피커를 수리했다.
그리고 메탈 서전트가 스피커의 볼륨을 최대로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