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 백신을 만들다
페넬레시아는 고통을 느끼진 않았는데, 평화 길드의 부길드장답게 고통과 바이러스를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은혁에게 깨물렸다는 정신적인 고통은 받고 있었다.
염훈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다가 은혁을 향해 물었다.
“은혁아. 그 바이러스 호흡기로 퍼지는 거냐?”
“호흡기로도 감염이 되긴 하지만, 혈액이나 타액을 통한 감염이 더 심각하지. 하지만 난 항체가 생성되어서 사실상 이미 치유됐어.”
페넬레시아가 감염된 이유는, 피를 토한 은혁이 페넬레시아의 손등을 찢어질 정도로 세게 깨물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너는 2차 각성한 불패불굴의 성기사라, 사실상 안전해.”
은혁의 태평한 소리를 듣던 페넬레시아는 살기 가득한 눈으로 은혁을 바라봤다.
“난 당장이라도 당신을 죽일 수 있습니다, 강은혁 플레이어.”
“음? 왜요?”
“왜냐니! 고의로 날 깨물어서 감염시켜 놓고선!!”
“워우, 진정하세요. 제가 당신을 깨문 건, 평상시 당신 태도가 얄미워서가 아니라, 더 큰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은혁의 거짓말이 늘었다.
“페넬레시아 님. 저를 평화의 미궁에 보낼 때, 애초에 피스메이커가 거기 있다는 걸 왜 비밀로 한 겁니까?”
“그건…….”
“바이러스 재해나 다름없는 피스메이커가 있는 곳으로 저를 보낸 주제에 혼자 멀쩡하려고 했습니까?”
“윽.”
사실, 피스메이커가 있는 비밀 공간을 기어코 뚫고 들어간 은혁에게도 책임이 있었지만, 비밀 공간에 뭐가 있는지 모르고 한 행동이란 게 은혁의 주장이었다.
‘사실은 알았지만 공식적으로는 몰랐지.’
그래서 은혁이 감염됐고, 예상치 못하게(?) 바이러스에 감염된 은혁이 한 일은.
“당신을 깨문 것, 그리하여 감염시킨 것. 그리하여 책임 의식을 공유하기 위해서…… 당신을 깨문 겁니다. 결코 당신이 얄미워서 그런 게 아니니 믿어주시길.”
“으그극……!”
페넬레시아는 은혁과 자기 자신, 그리고 피스메이커에게도 화가 나서 혈압이 올랐다.
주르륵.
혈압과 바이러스 때문에 코피가 줄줄 흘렀다.
페넬레시아는 즉시 자기 몸에 치유 스킬을 걸었지만 위험했다.
“괜찮습니까?”
염훈이 걱정하며 [홀리 웨이브] 스킬까지 동원해서 치료를 도왔다.
페넬레시아는 진정했고, 고마움을 표했다.
“자, 염훈도 왔으니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죠.”
“본론?”
“염훈. 네가 보기에 이 바이러스는 어때?”
“무섭네. 치료제나 백신 없어?”
“음. 그게 문제야. 피스메이커가 만든 바이러스는 백신과 치료제가 현재까진 없어.”
“엥? 그럼 큰일 아니냐?”
“후후후.”
“아니, 왜 웃냐.”
“현재까지는 없다는 소릴 듣고 아무렇지도 않냐?”
“뭐,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뿐이야? 돈 냄새 안 나냐?”
“돈 냄새……?”
“연구 길드조차도 피스메이커의 바이러스에 대한 치료제는 만들지 못했어. 그런데 우리가 그걸 이제부터 만든다면?”
“아……!”
은혁은 자신의 피가 담긴 유리병을 꺼내 보였다.
“항체가 형성된 내 피와 아주 신선한 감염자 샘플의 피가 여기 있지. 연구 자료는 완벽해.”
공교롭게도 남녀 샘플을 다 갖춘 셈이었다.
게다가 은혁은 치유의 성좌, 나이팅게일에게서 백신 제조법까지 얻어냈다.
“나와 페넬레시아의 피로 치료제와 백신을 만든다! 그것도 엄청 빠르게!”
* * *
5층 길드연합국.
연구 길드의 바이러스 예방 연구소.
간판은 바이러스 예방 연구소지만 그것만 하는 곳은 아니다.
사실, 생화학 무기 연구소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선임 연구원 그레이스는 성공에 대한 열망이 무척 컸다.
7층보다 높은 곳에 도전해 본 적이 없는 그녀는 사실상 NPC처럼 연구에만 몰두했다.
취미는 가끔 행복 길드 구역의 카지노에 가는 것이었지만, 카지노 잭팟을 강은혁이라는 신규 플레이어에게 뺏긴 것을 신문으로 보고 난 뒤 쓰러질 뻔했다.
그 뒤로 워커홀릭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오늘.
“저 아십니까?”
은혁이 출근하려는 그레이스 앞에 나타났다.
“당신은……!”
“길게 말 안 하죠. 백신 제작에 관심 있습니까?”
“백신?”
“자세한 건 여기 적혀 있습니다.”
은혁은 쪽지 하나를 건넨 뒤 바로 떠났다.
쪽지에는 은혁의 계획과 혈청을 숨겨 둔 곳의 위치, 백신 및 치료제 제작을 위한 핵심 조합법이 적혀 있었다.
“맙소사……!”
그레이스는 혼자 판단할 일이 아니라 생각했기에, 즉시 연구 길드장과 단독 면담을 신청했다.
연구 길드장 빌은 그레이스가 건넨 쪽지를 읽었다.
“치유의 성좌 나이팅게일이 직접 이런 걸 써서 강은혁에게 줬다는 거로군. 즉, 모종의 미친 방식으로 바이러스를 극복해서 나이팅게일의 관심을 샀다는 건데…….”
빌로서는 그게 어떤 방식이었는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빌은 그레이스와 함께, 그 자리에서 시험 삼아 백신을 제작했고, 효력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좋은 성과를 올렸군. 이제부턴 네가 바이러스 예방 연구소 소장이다.”
빌은 그레이스를 소장직에 즉각 임명했고, 지체 없이 백신 대량 생산을 준비했다.
“그나저나 강은혁 이놈 대단하군.”
그레이스에게 보고를 들은 빌은 내심 감탄했다.
제조법을 알고 있다는 것, 혈청을 확보했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가려워하는 부분을 정확히 긁어주다니. 정말 대단해. 내가 백신 대량 생산을 절대 거절하지 못하리란 걸 어떻게 알았지?”
늘 졸린 얼굴의 빌이지만, 그런 빌도 사람이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미운 놈’이 하나쯤은 있는 법이다.
빌이 길드연합국에서 진심으로 미워하는 놈은 단 하나, 바로 평화 길드의 피스메이커였다.
레나를 부길드장으로 삼고, 냉기 능력을 강화시켜 준 것도 바이러스 대항책 중 하나였다.
바이러스를 이겨내려면 화염으로 태우거나, 체내에 들어가기 전에 소독하거나, 아니면 저온으로 활동을 늦추는 수밖에 없으므로.
‘모든 걸 말살시켜서 평화를 가져온다는 사상을 가진 놈은 내 적이다.’
모든 게 죽어 버리면 100층탑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이어질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빌과 피스메이커는 사이가 나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현재, 은혁은 피스메이커의 바이러스 대량 살포 전략을 원천봉쇄하는 백신 제작법을 그레이스를 통해 알려줬다.
‘이놈은 진짜 예언자인가 보네.’
빌은 그 판단하에 생각을 더 전개했다.
‘강은혁이 생각 없는 놈은 절대 아니지. 굳이 피스메이커를 건드려서 자기 자신을 감염시키고, 그 피를 이용해 백신을 만들어 유통시키도록 유도한다? 거기에 무슨 목적이 있을까?’
빌은 은혁의 행동을 관찰하고 역산하여 추론했다.
그리고 빌의 졸린 눈이 크게 떠질 정도의 결론이 나왔다.
‘머지않은 미래에 제2차 길드 대전이 발생하나?’
빌의 추론은 매우 정확했다.
‘훗날 피스메이커가 날뛸 가능성에 대비해서 미리 백신을 널리 퍼뜨리는 거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생각을 정리한 빌은 이것이 기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봉인시켰던 피스메이커가 100층탑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바꿔 말하자면, 기회만 잘 잡으면 내가 먼저 피스메이커를 처치할 수도 있다는 건가.’
“저, 길드장님?”
그레이스가 결재받을 서류를 들고 빌 앞에 서 있었다.
“백신 대량 생산을 바로 시작해. 다양한 원료를 미리 저장해 두길 잘했군.”
만약 백신 제작 관련 소식이 퍼진 이후에 백신용 원료를 구하려 했다면, 자유시장 길드에게 발목이 잡혔을 것이다.
실험을 위해 다양한 원료를 다량 구비해 둬서 천만다행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부길드장님.”
“난 잠시 평화 길드의 부길드장부터 좀 만나고 와야겠다.”
* * *
얼마 뒤, 평화 길드와 연구 길드가 합작하여 만든 피스메이커의 백신이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기 시작했다.
“백신?”
“피스메이커라면……!”
“저번 길드 대전 때 바이러스로 대량 학살한 인간이잖아?”
“그런데 백신이 나왔다고?”
5층의 플레이어들이 수군거렸다.
마침 피스메이커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문이 막 퍼지던 참이다.
“25층 콘서트장 한가운데에 나타났더래.”
“59층의 드래곤도 혼자서 죽이고 위로 올라갔다던데?”
“뭐야, 그럼. 진짜 피스메이커가 다시 활동하기 시작한 거야?”
피스메이커나 길드 대전에 대해 잘 모르는 신규 플레이어들일수록 더욱 두려워했다.
평화 길드의 부길드장 페넬레시아와 연구 길드의 길드장 빌이 공동 기자 회견을 열었다.
최근 떠도는 소문은 대부분 사실이며, 평화 길드에서 제공한 혈청과 연구 길드의 연구력으로 빠른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는 내용이었다.
백신은 미친 듯이 팔렸다.
행복 길드의 행복 포션 중독자들도, 자유시장 길드가 운영하는 무한 백화점의 쇼핑 중독자들도, 죄다 백신을 구매하려 돈을 썼다.
이 과정에서 은혁과 염훈의 이름은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판매 수익의 10%는 우리 몫이지.”
은혁이 씨익 웃었다.
10%면 은혁의 평소 욕심에 비해 놀랄 정도로 적은 액수다.
하지만 제작 및 유통 단가를 낮추기 위해 은혁이 크게 양보했다.
은혁이 원하는 건 피스메이커의 바이러스에 대한 대량 살상률 자체를 낮추는 것이므로.
대신, 은혁은 추가 프리미엄 권한을 얻었다.
‘바이러스 예방 연구소의 소장 그레이스는 나, 강은혁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며, 강은혁은 신규 바이러스 등장 시 최우선으로 백신과 치료제의 개발 및 접종 권한을 얻는다.’
연구 길드장 빌의 암묵적인 용인하에, 은혁과 그레이스가 단둘이 맺은 계약이었다.
그레이스로서는 꿈에 그리던 연구소장 직함을 얻었으니 그녀로서도 손해는 없었다.
“자아, 그럼 상쾌하게 가볼까.”
오늘은 구원 길드 수련장에서 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 * *
구원 길드 공용 체육관.
흔히 수련장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1년에 단 한 번, 구원 길드가 주최하는 무술 시합이 열린다.
명성을 원하는 자.
대련을 통해 성장하고 싶은 자.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은 자.
그밖에 다양한 이들이 시합에 참가한다.
더 나아가, 구원 길드 무술 시합의 우승자는 구원 길드의 부길드장과 최종 승부를 벌일 자격을 얻는다.
그렇기에 이날 하루는 구원 길드 수련장이 폭발할 정도로 끓어오른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은혁아. 왜 이리 사람이 적냐?”
“왜일 것 같아?”
“백신 때문에?”
“정답.”
참가자가 많지 않았다…… 정도가 아니라 딱 봐도 거의 없었다.
개인 방송인과 길드연합국 방송국에서 나온 사람들의 총합과 시합 참가자와 관객의 숫자의 총합이 비슷할 정도였다.
“으으.”
“너무 무리해서 참가 신청했나.”
“나, 난 기권하겠소. 미안합니다.”
참가자 대다수는 바로 어제 백신을 맞은 자들이었다.
백신에는 부작용이 있었다.
건강한 남자도 이틀 정도, 일반인은 사흘 이상 고열과 오한을 동반하는 몸살 증세를 겪는다는 점.
워낙 독한 백신이었기 때문이다.
백신 부작용을 줄이려고 힐링 포션이나 성직자의 치유 스킬을 받아도 딱 그때만 일시적으로 나을 뿐.
무술 시합에 참가할 정도로 증세가 호전되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참가자 자체가 많지 않았다.
게다가 백신의 판매량 증가는, 그만큼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바.
길드연합국 특유의 뜬소문이 겹쳐서, 관객들 숫자조차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첫 시합이 8강전으로 압축됐다.
‘별로 강자는 없군.’
대기실에 있는 참가자들을 보니 은혁이 가장 강했다.
‘아, 저 사람이 있었지.’
워잭이 있었다.
워잭은 구석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은혁이 가서 인사했다.
“잘 부탁합니다.”
“으음.”
“서로 전력을 다하죠. 결승에서 봤으면 합니다.”
대진표를 보아하니, 두 사람이 계속 이기면 결승에서 만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으음.”
워잭은 구체적으로 답하는 대신, 조금 불편한 듯한 으음 소리만 냈다.
은혁은 그 이유를, 워잭의 심리 상태를 알았기에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