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 랭커들과의 대결 (2)
은혁이 구경꾼들을 가리키자 다들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나에게 불만이 있는 자는 누구나 내게 공격을 딱 1회 해도 된다.”
“누구나?”
“그래. 원 밖에서 공격해도 된다.”
“으음……!”
“어때? 그 정도면 대충 밸런스가 맞지 않나?”
“잠, 잠시만.”
주동자인 마스든은, 몰려온 다른 랭커들과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렸다.
“꽤 괜찮은 조건인데?”
“우리가 바깥에서 한 번은 마스든 님을 서포트해도 된다는 거죠?”
“잠깐 기다려. 가장 중요한 걸 아직 안 물어봤잖아.”
“어? 뭔데?”
“강은혁이 대결 장소 바깥에 있는 우리들을 공격하는지 안 하는지!”
그게 걱정이었다.
마스든이 총대를 메는 건 좋은데, 대결 장소인 동그라미 밖에 있는 나머지 인원들도 휘말릴 수 있었다.
“아, 걱정 마. 나는 원 안에 있는 마스든만 팬다.”
은혁은 그렇게 말했다.
마스든은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나머지 이들은 할 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자! 한번 해보자!”
“우리가 엄호하는데 뭐가 두렵나!”
물론, 자기네들은 안전한 곳에서 공격을 하는 거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으으…….”
마스든은 고뇌했다.
모두가 뒤에서 돕는다는 사실은 아무런 위안도 안 되었다.
결국, 자기 혼자 은혁을 상대로 책임지고 싸워야 한다는 게 두려웠다.
하지만 더는 질질 끌 수도 없었다.
끄덕.
마스든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대결은 합의가 됐는데, 그만 중요한 걸 깜빡했군.”
“중요한 것?”
“뭐, 별건 아니고, 진 쪽은 이긴 쪽의 부하가 된다, 뭐 그 정도면 돼. 별거 아니지?”
“아니, 잠깐. 그런 중요한 조건을 이제 와서……!”
“음? 쫄리면 다 취소하든가. 대신에 너희가 멋대로 우르르 몰려왔다가 쫄아서 돌아간 게 되는 건데 괜찮겠나?”
“큭……!”
마스든은 뒤의 다른 랭커들을 돌아봤다.
냉철한 상태였다면 당연히 취소를 외쳤겠지만, 그들은 얄궂게도 ‘희망’ 때문에 눈이 흐려져 있었다.
“해라!”
“우리가 원 밖에서 엄호할게요!”
“우리가 대결 시작과 동시에 너한테는 버프 걸고, 강은혁에게는 공격 스킬을 퍼부을 테니까!”
“맞아! 우리들도 랭커다! 작정하고 스킬 퍼부으면 우리가 이겨!!”
은혁이 듣건 말건 작전까지 다 외쳐댔다.
작전을 듣는다고 은혁에게 대처 수단은 없으니까.
‘라고 생각하고들 있겠지.’
물론, 은혁에게는 대처 수단이 매우 많이 있었고, 가장 완만하게 저들의 기를 꺾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 중이었다.
“조, 좋아.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마스든이 받아들였다.
구경꾼들은 흥분했다.
“와, 아침부터 이런 걸 구경하게 되다니.”
“근데 구경해도 될까요? 우리도 휘말리는 거 아냐?”
“저 원 안에서만 싸운다니까, 벽에 붙어 있으면 우린 안전해.”
스윽.
마스든과 은혁이 싸움 간격 안에 섰다.
서로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마스든은 확신했다.
‘한 방이다. 단 한 방으로 끝난다.’
테이블과 그 주변의 동그라미가 대결 장소다.
그러다 보니 현란한 거리 조절을 하기보다, 대결 시작과 동시에 최대 피해를 때려 박는 쪽이 이긴다.
‘궁술사인 내가 불리할 것 같지만, 괜찮다.’
왜냐하면 대결 장소 바깥에서 랭커들이 스킬을 써줄 테니까.
“셋을 세면 시작할까?”
은혁이 물었고, 마스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셋을 세지?”
“염훈. 네가 셋을 세라.”
“내가? 으음.”
염훈이 대결 장소 내부로 들어가지 않게 주의하며 다가왔다.
“셋, 둘, 하나, 시작!”
파앗!
대결 장소 바깥의 190위~170위권 랭커들 10명이 스킬을 난사했다.
“[재생의 축복]!!”
“[펄스 레이저]!!”
……
……
“[상급 흑곰 소환]!!”
“[가시 덤불 소환]!!”
재생과 방어력 버프 따위는 죄다 마스든에게 쏟아졌다.
레이저와 흑곰 소환수의 공격 따위는 죄다 은혁에게 쏟아졌다.
파앗!!
퍼버버벅……!!
은혁은 가만히 서서 전부 맞았다.
“아앗!!”
“어째서?!”
구경꾼들, 심지어는 스킬을 쓴 당사자들도 놀라서 흠칫했다.
“그러게 작전을 미리 말하면 안 되지. 타이밍이 다 읽히잖나.”
서걱!
화르륵!!
은혁이 흑곰과 가시덤불 따위를 청염백광태도로 자르고 태우며 말했다.
“어, 어떻게……?”
마스든이 주춤했다.
오직 염훈만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달았다.
‘녀석, 또 [그림자 결속]으로 내 [2초 무적]을 빌려갔구만.’
염훈이 셋을 세기 위해 접근한 순간, 은혁은 [그림자 지배] 스킬로 자기 그림자를 확장시킨 뒤, 염훈의 그림자와 연결시켜 [그림자 결속]을 미리 발동시켜 뒀다.
그리고 적들이 작전대로 시작과 동시에 스킬을 퍼붓는 타이밍에 딱 맞춰 [2초 무적]을 썼을 뿐.
“알 거 없고. 항복은 좀 있다가 외쳐라.”
퍼버버버버벅!!
은혁은 마스든을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패댔다.
5분 뒤.
“아, 안 뜨네.”
직업 카드 선택지가 뜰 줄 알았는데 안 떴다.
직업 카드는 완전 랜덤으로 뜨는데, 죽음의 위기 상태일 때, 강적을 꺾었을 때, 통쾌하게 이겼을 때와 같은 상황일수록 직업 선택 기회가 찾아올 확률이 약간 늘어난다.
문제는, 은혁 기준의 마스든이 워낙 약해서 아무리 두들겨 패도 선택지가 안 뜬다는 것이었다.
“그…… 그마안…….”
“재생 버프도 받았으면서 엄살은.”
은혁은 그렇게 말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사사삭.
시비를 건 랭커들이 다들 피했다.
‘아, 열 받네.’
은혁은 화가 치밀었다.
마법사 스킬과 차원의 낚싯대가 있으니 원거리 전투도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궁술사 직업을 얻어둬야 앞길이 더 편했다.
그래서 일부러 궁술사인 마스든을 상대로 진지하게 싸웠더니만 직업 선택창은 뜨지 않았다.
은혁이 입을 꾹 다문 채 살기만 풀풀 풍기자 사람들이 주춤거렸다.
“관객 여러분. 승부 결과 판정 부탁합니다.”
은혁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하자, 구경꾼들이 얼른 외쳤다.
“가, 강은혁 승!”
“님이 이겼어요!!”
환호성은 없었다.
조마조마한 표정들이다.
“염훈.”
“응?”
“구경한 사람들 다 내보내.”
“그러지 뭐.”
염훈은 가만히 선 채로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우르르르……!
우당탕……!
사람들은 테이블과 의자를 넘어뜨리며 얼른 테번 밖으로 탈출했다.
“어어…….”
“으음…….”
남은 길드장들이 은혁의 눈치를 봤다.
“우, 우리도 나갈까?”
도리도리.
은혁은 고개를 저었다.
“두들겨 맞은 다음 염훈한테 충성 맹세할래? 아니면 그냥 할래?”
“엥?!”
길드장들은 어이가 없었다.
“이해가 안 가나 보군. 내게 도전해서 시간을 뺏은 너희를 다 두들겨 패서 죽일 거거든?”
죽인다는 소리를 대놓고 하는 은혁을 보고 길드장들은 경악했다.
하지만 은혁은 실제로는 안 그럴 거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물론, 그렇게 되기 전에 염훈이 말리겠지? 그리고 염훈이 너네를 회복시킬 거거든? 그럼 너네는 염훈에게 고마움을 느낄 거거든? 그럼 나는 너네한테, 죽기 싫으면 염훈에게 충성을 맹세해서 영원히 그의 말을 들으라고 시킬 거거든? 어때, 이제 이해가 가냐? 내가 설명한 대로 할래? 그냥 바로 결말로 건너뛰어서 염훈한테 충성 맹세할래?”
“…….”
길드장들은, 미친놈에게 걸렸구나, 하는 표정으로 침묵했다.
“은혁아. 내 입장은 안 중요하냐? 난 이 인간들 부하로 삼을 생각 없는데?”
염훈이 불쾌하다는 듯 말한 순간, 은혁의 표정은 더 싸늘해졌다.
“그렇군. 미안하다, 염훈. 네 말이 맞아. 네가 싫다면 끝이지.”
은혁은 인벤토리창에서 헤비 체인 소드를 꺼냈다.
“그냥 여기서 다 죽어라.”
“자, 잠깐!”
길드장들이 부들부들 떨었다.
“우릴 죽이는 건 불법이잖아?!”
“불법은 무슨, 너희가 먼저 나한테 선제공격 가했잖냐. 기억 안 나냐?”
은혁이 마스든과 싸울 때, 이들도 대결 장소 바깥에서 마스든에게 버프 스킬을 걸어주거나 은혁에게 공격을 가했다.
“그, 그건 네가 그렇게 해도 된다며!”
“응, 내가 해도 된다고 했지. 그리고 내가 마스든과 대결하는 도중에는 너네한테 반격 안 한다고 했지?”
끄덕끄덕!
“근데 지금은 대결 끝났잖아. 대결 끝나고 반격하는 거지. 반격 텀이 좀 길긴 하지만 뭐.”
“그, 그건 이미 반격이 아니지! 대놓고 보복하는 거잖아!! 그런 식의 보복은 불법이야!!”
“글쎄? 이게 반격인가 보복인가는 재판소에서 따질 일이지. 다만 나는 살아서 재판받고 너네는 죽어서 재판 못 받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
은혁이 이렇게 나서자, 은혁에게 도전했던 랭커와 길드장들은 도망칠 길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은혁아. 됐다, 됐어.”
염훈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거, 당신들. 나한테 충성 맹세하고 싶으면 해도 돼.”
“아, 단순 충성 맹세가 아니라, 염훈을 군주로 섬기겠다는 충성 맹세여야 함.”
은혁이 얄밉게 덧붙였고, 염훈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들 염훈 앞에서 스탯창을 열고 [맹세]를 했다.
“염훈을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맹세]합니다!”
“[맹세]합니다!”
10개의 중소 규모 길드의 길드장들이 입을 모아 맹세했다.
-플레이어 염훈의 지위가 ‘군주’가 되었습니다!
-부하 인원수 : 79명.
길드장들이 염훈에게 충성을 맹세했기에, 그 길드에 속한 이들도 자동으로 염훈의 휘하에 포함되었다.
염훈으로서는 아침밥 먹다가 갑자기 수십 명을 거느린 군주로 신분이 바뀐 셈이다.
염훈은 기가 막혀 했고, 은혁은 질문했다.
“도중에 왜 마음이 바뀐 거냐, 염훈.”
“이 인간들이 다 죽는 것도 마음이 안 좋지만, 네가 재판받으면 그동안 시간을 뺏기잖냐.”
“흐흐. 그렇지.”
결국 염훈은, 시비 건 길드장들의 목숨보다 은혁의 시간이 아까워서 충성 맹세를 받아준 것이었다.
“자, 염훈. 명령 내려.”
“어?”
“네가 군주잖아. 아무 명령이나 내려봐.”
그러자 염훈은 고뇌하는 표정을 지었다.
“딱히 써먹을 데가 없는 거 같은데?”
염훈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길드장들이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현시점에서는 그렇지?”
은혁이 히죽 웃으며 나섰다.
“수련 좀 시키자.”
* * *
은혁의 다음 행보는 많은 이들의 기대를 꺾었다.
무술 대회도 이겼겠다, 거침없이 높은 곳을 향해 질주할 거라고 호사가들은 떠들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은혁과 염훈은, 그날 이후로 잠시 수련에 시간을 보냈다.
자신들의 수련보다는, 새로 생긴 부하들을 위한 수련이었다.
각자의 기량에 맞춘 맞춤식 훈련……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훈련의 테마는 ‘3일 동안 버티기’였다.
100명이 훈련받을 수 있는 공용 훈련장.
염훈, 은혁, 그리고 79명의 부하들이 섰다.
“여러분은 높은 층에 도전하다 실패하면 5층으로 복귀하고, 쉬고, 다시 도전했을 거다.”
훈련 교관을 자처한 은혁이 차갑게 말했다.
“그딴 식으로는 너희들의 군주인 염훈을 섬길 수가 없어! 안 그렇습니까, 염훈 군주!!”
“아? 아아, 뭐, 그렇지.”
“들었나! 염훈 군주가 너희들을 한심해하는 소리를 들었느냔 말이다!!!”
염훈은 가만히 서 있는데, 은혁이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다.
“그딴 식으로는 높은 층에 오를 수가 없어!”
“저어…….”
마스든이 자라목을 한 채 한 손을 들었다.
은혁에게 맞은 뒤로 목을 움츠리는 버릇이 생긴 상태였다.
“할 말 있으면 해봐!”
“저, 저희가 중소 길드인 건 맞는데요. 길드장급들은 30층까지는 어떻게든 도달했는데요…….”
그랬다.
은혁과 염훈은 25층에 도달한 상태이므로, 그들이 더 높은 셈이다.
하지만 그 말이 은혁의 심기를 더 건드렸다.
그래서 훈련 강도가 더 심해졌다.
그렇게 3일째 되는 날 아침.
“좋아! 이만하면 됐다!”
은혁은 만족했다.
“으윽.”
“죽겠다.”
“살려줘어.”
중간중간 짧은 휴식이 있긴 했지만 정말 짧았다.
그리고 염훈은 3차 각성에 무난히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