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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모든 직업-120화 (120/434)

120화 : 피에로의 농장 (2)

“응.”

“기억나.”

“그때 놈들이 갖고 있던 행복 포션의 원료가 저거야.”

“저 보라색 액체가……?”

염훈은 더 경계 자세를 취했다.

“허허, 누가 대장이시오?”

농장주 피에로가 물었고, 염훈이 나섰다.

“일단은 내가 길드장인데.”

“메인 미션은 보셨겠지? 우리끼린 싸울 필요가 없어요. 행복한 환각을 맛보면 클리어니까.”

농장주 피에로가 보라색 액체가 든 유리잔을 하나 들어 보였다.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 액체인데.”

“무슨 말씀. 이보다 더 행복한 건 없소. 한 모금만 마셔도 순수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소. 그게 뭐 나쁘다는 거요?”

“행복감에 취하고 중독된 다음 현실을 망각하면 끝장이니까.”

“이런 멍청이. 현실이냐 아니냐가 무슨 소용이오?”

“뭐?”

“그럼 묻겠소. 우리가 있는 100층탑은 현실이오?”

“무슨……!”

“이 100층탑도 따지고 보면 여러분이 살던 현실과는 다른 영역인데? 인간이 손에서 불을 뿜고 주먹으로 괴물을 때려죽이는 이곳은 현실이오?”

“흠.”

확실히 100층탑의 내부는 현실과 게임의 중간쯤 되는 공간이다.

염훈은 미심쩍어했지만, 마음이 크게 흔들린 길드원들이 일부 있었다.

“듣고 보니 그러네.”

“인간처럼 생기고 인간처럼 말하지만 정확히 인간은 아닌 NPC도 존재하고…….”

“나는 주먹으로 바위를 부수는 무투가인데, 따지고 보면 나도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

불패불굴 길드원들은, 그동안 모호하게 넘겨왔던 부분에서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염훈은 플레이어들의 동요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겨우 이것 가지고 동요한다고?’

염훈과 부하 플레이어들은 몰랐지만, 보라색 하늘이 주는 최면 효과가 이미 어느 정도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염훈은 불패불굴의 성기사라 태연했던 것뿐이다.

농장주 피에로는 혀로 자기 입술을 날름 핥은 뒤 말을 이어갔다.

“어떻소? 우리가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실제냐 아니냐가 모호한 상태에서 행복에 취하는 게 뭐 어쨌다는 거요? 설마 윤리적인 이유에서 이걸 마시기 싫다는 거요? 이미 이 세상의 윤리는 여러분이 알던 세계의 윤리와 다른데?”

농장주 피에로의 권유는 점차 열기를 띠었다.

염훈은 농장주 피에로의 권유에 비논리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딜 어떻게 지적해야 좋을지 알기 어려웠다.

‘어? 그러고 보니 은혁이는 어디 갔지?’

염훈은 은혁을 찾아 두리번거리려 했지만, 농장주 피에로는 염훈이 시선을 돌리려 할 때마다 막아섰다.

“자아, 자아, 정 그러면 한 모금만 마셔보시오. 일단 마셔보고 결정하면 될 거 아니오?”

농장주 피에로의 부하인 소년, 소녀 피에로들도 염훈의 부하들에게 잔을 권했다.

“드셔 보세여!”

“공짜예여!”

“맛없으시면 뱉으셔도 되여!”

권유는 집요했다.

“어, 어쩌지?”

“한 모금 정도라면…?”

염훈은 부하들에게 안 된다고 외치려 했지만 입이 잘 안 움직였다.

“큭.”

염훈은 급한 김에 [홀리 웨이브] 스킬을 썼다.

화악……!

신성한 기운이 부하들을 감싸고 삿된 생각이 머리에서 빠져나갔다.

“헉.”

“우리가 지금 뭘…….”

“다들 정신 차려요!”

염훈의 부하들이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그동안 염훈 자신의 방어가 약해졌다.

“크크크.”

농장주 피에로의 눈동자에는 최면의 힘이 담겨 있었다.

인간인지 몬스터인지 애매한, 특유의 눈동자가 염훈의 정신을 조작하려 했다.

하지만.

“큭.”

염훈은 [정화] 스킬을 자기 자신에게 써서 곧장 떨쳐냈다.

농장주 피에로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이렇게 말했다.

“뭐, 상관없소. 행복을 주는 이 액체를 영원히 거절한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으니까.”

농장주 피에로의 권유는 이게 끝이 아니라, 앞으로 더욱 뜨거워질 터였다.

그때였다.

“어?”

“이게 무슨 냄새지?”

플레이어와 피에로들이 모두 타는 냄새를 맡았다.

화르르륵……!

해피 라이스 경작지가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

“불이야!!”

소년 소녀 피에로들이 당황해서 잔과 쟁반을 내팽개치고 불을 끄러 뛰어갔다.

“크하하하!!”

화광을 등진 은혁이 크게 웃었다.

은혁은 자기가 방화범이라는 걸 숨기지도 않고 웃으며 농장주 피에로 앞으로 걸어 나왔다.

“무, 무슨 짓을……!”

“뭐긴 방화지. 불태우지 말라는 규칙은 없으니까.”

염훈이 앞으로 나서서 농장주 피에로와 대화하는 동안, 은혁은 [그림자 도약]으로 경작지 한복판으로 이동했다.

“경작지에는 함정과 경계용 허수아비가 있었는데……!”

“싹 다 처리했지.”

은혁은 [파동의 그림자]와 [연쇄 암습] 스킬을 융합시킨 [연쇄 그림자 암습] 스킬을 썼다.

일반적인 [연쇄 암습]은 가까운 적들만 암살할 수 있다.

하지만 [파동의 그림자]를 연계하면, 은혁의 그림자를 사방에 팽창시켜 허수아비의 그림자와 연동시킬 수 있었다.

퓨전 스킬 발동 조건을 맞춘 상태에서 싹 다 조용히 암살한 것이다.

“그다음 소환수와 함께 싹 다 불을 놓았지.”

은혁은 명쾌한 설명을 마치고 혼자 상쾌해했다.

“거, 농장주 피에로라고 했나?”

“그렇소. 이제부터 당신은 당신이 저지른 짓에 대한 대가를……!”

“아, 잠시만.”

은혁은 부하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이놈을 상대하는 동안, 불패불굴 길드원 여러분은 즉시 놀이 기구 클리어하러 이동할 것. A조는 롤러코스터. B조는 허수아비 술래잡기. C조는 보트 체험. D조는 건초더미 미로 탈출.”

전투력과 스킬에 맞춘 배치였다.

은혁은 지시를 내리고 손뼉을 딱 쳤다.

“이동!”

각 조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여기 더 남아 있다간 또 현혹당하거나 싸움에 휘말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농장주 피에로는 자기 이로울 대로 일 처리를 하는 은혁을 보고 화를 내려 했지만 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본론으로 들어오지. 아까 슬쩍 듣자 하니, 이게 현실이냐 아니냐가 뭐 중요하냐~ 라고 하던데.”

“그렇소만? 틀렸다고 말하려는 거요?”

“틀렸다고 말할 생각은 없어. 오히려 그 반대야. 나도 이 세상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가끔 생각하니까.”

“호오? 그렇다면 인위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도 동의하겠군.”

“전혀. 인위적인 행복에 취하면, 그 인위적인 행복에 취하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을 할 수 없게 되니까.”

마약에 취하면, 당장은 행복해져도 마약에 취한 상태에 빠지는 것 말고 다른 일은 할 수도 없게 된다.

“예를 들자면, 커피와 마약은 둘 다 중독성이 있지만, 커피는 마시면서 일을 할 수 있지만 마약은 먹으면서 일을 할 수 없지. 즉, 인위적으로 행복감을 조작하는 약물은 그것만으로도 인생 행복의 총량을 감소시킨다. 오직 그것만을 위해 살아가게 되니까.”

“으음……!”

“더 나아가, 네 논리 전개가 틀렸어. 이 세상이 가짜건 진짜건 열심히 살면 되는 거지, 가짜니까 인위적인 행복에 취하세~ 라는 게 뭔 개논리냐.”

염훈이 지적하고 싶었던 부분을 은혁이 속 시원히 긁어줬다.

은혁은 엄지로 자기 심장 근처를 툭툭 쳤다.

“지금 이 세상이 현실이건 비현실이건 상관없어. 현실이면? 당연히 승리를 위해 살아간다. 비현실이면? 그 비현실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겨나간다. 그 비현실의 끝에 찾아오는 게 허무라 할지라도. 그뿐이다.”

이것은 100층탑을 오르는 은혁의 각오이기도 했다.

막상 100층에 도달했더니 아무런 보상이 없더라도, 은혁은 흔들리거나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타인의 인정이나 외부의 보상 따위가 없어도, 은혁에게는 승리하며 탑을 오르는 삶 그 자체가 보상이므로.

은혁의 흔들림 없는 각오를 본 농장주 피에로가 주춤했다.

“아니, 그런……! 실존에 대한 고뇌와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뇌가 전혀 없단 말이오?! 그냥 이기는 삶 자체가 목적이라고?!”

“그게 이상하냐? 실존이니 행복이니 그딴 고뇌는 행복 길드원들이나 하라고 해. 아, 그러고 보니 여기 행복 길드가 관리하는 농장이지?”

은혁이 지적하자 농장주 피에로는 흠칫했다.

“아,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행복 길드 1군 부감독이지? 너네 부길드장이 시켜서 행복 포션 제작용 원료 농장을 운영하게 된 거지? 그러기 위해 너는 여길 지배하는 지고의 위상인 피에로 마스터와 계약하고, 행복 포션을 무료 제공하는 대신 여기에 행복 포션의 원료가 되는 해피 라이스를 재배하기 시작한 거지?”

“그……!”

“그 이유? 뻔하지. 5층 길드연합국에서 마약 재배는 불법이니까. 그렇다고 다른 층에 대규모 마약 농장을 재배할 수는 없지? 그래서 너네는 머리를 쓴 거지. ‘플레이어를 지고의 위상과 계약시켜서, 몬스터로 만든다’라고 말이야.”

즉, 농장주 피에로는 현재 몬스터화된 상태이므로, 인간 플레이어가 아니다.

따라서, 마약 원료 제작 및 유통을 저질러도 범죄에 해당하지 않는다.

길드연합국의 법률은 주로 5층에만 적용되고, 특히나 플레이어에게만 적용되므로.

농장주 피에로는 모든 게 들통나자, 이젠 찔끔하는 대신 도리어 화가 났다.

“제기랄. 그걸 다 어떻게 알았지?”

“알려줘야 할 의무는 없지.”

물론, 은혁은 회귀자이기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곳은 제2차 길드 대전의 격전지중 하나가 되므로.

전쟁이 길어지자 행복 길드는 행복 포션 무료 제공을 빌미로 머릿수를 확충한다.

그걸 두고 볼 수 없었던 정의 길드와 구원 길드는 연합하여 행복 길드 제작 공장을 파괴하고, 그 과정에서 원료 제공 장소인 이곳을 알아낸다.

“그보다, 다 타고 있는데 이렇게 대화해도 되나?”

은혁과 소환수가 놓은 불은 농장을 거의 다 태워 가고 있었다.

“상관없소.”

농장주 피에로가 심술궂은 표정으로 은혁을 노려봤다.

“상반기 농사는 망했지만, 종자는 충분하지. 당신들을 죽여서 비료로 삼고, 하반기 농사를 시작하면 그만이야.”

“흠. 종자는 따로 숨겨뒀나? 어쩐지 찾아도 안 보이더라니.”

은혁은 소환수에게 불을 지르게 하는 동안 해피 라이스의 종자를 찾아 농가를 뒤졌지만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야 내 인벤토리창에 숨겼으니까.”

“어라? 너 지금 몬스터 상태잖아? 근데 무슨 인벤토리창……?”

말하던 은혁은 스스로 깨달았다.

“그렇구나! 네 몬스터화는 영구적인 게 아니지. 네 피에로 분장만 지우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지?”

즉, 농장주 피에로는 인간일 때, 행복 포션용 재료와 해피 라이스 종자를 인벤토리에 넣는다.

그리고 피에로 분장을 받아 몬스터로 변한다.

나중에 종자가 필요하면?

그때 행복 길드의 고위직이 와서 농장주 피에로의 피에로 분장을 지워준다.

그럼 농장주 피에로는 다시 인간이 되어 인벤토리창을 안전하게 열 수 있다.

“인정. 제법 좋은 발상이다.”

“흥, 잘 아시는군.”

농장주 피에로는 손을 들었다.

쿠쿠쿵……!

농장 전체가 흔들리더니.

콰콰쾅!!

밭 아래에 있던 더트 웜 수십 마리가, 불붙은 밭을 통째로 갈아엎듯 하며 몸을 일으켰다.

“꽤 많네.”

부드러운 흙 밑에서 사는 잡식성 몬스터였다.

평균 크기가 1미터인데, 지금 농장주 피에로가 소환한 걸 보니, 한 마리당 10미터 정도 되어 보였다.

“그동안 사람 시체를 잔뜩 먹여서 키웠나 보군.”

만약 불패불굴 길드원들이 농장주 피에로가 주는 행복 포션 원액을 마셨다면, 그들도 더트 웜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농장주 피에로가 히죽 웃었다.

“당신들은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렸어. 나의 더트 웜들아! 저놈들을 죽……!”

투쾅!

퍼버버버벅!!

은혁은 [쾌속보]로 달라붙은 뒤 [무아연환격]을 냅다 먹였다.

일대일 상황에서 가장 빠르고 강한 무투가의 연타 공격.

뻐버버버버버벅……!

가까이 달라붙어서 때리다 보니 은혁 자신도 몇 대 때렸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때리는 자신이 좀 지칠 것 같다 싶을 무렵.

부글부글……!

피에로의 터진 얼굴에서 피가 끓었다.

은혁의 주먹에 묻은 피는 수분이 증발해서 굳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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