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 거미의 숲 (1)
“그걸 해내려고 오늘 중에 34층까지 싹 다 클리어한다고 한 거잖아? 그럼 다시 32층으로 가자!”
은혁이 앞장섰고, 염훈은 따라가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28층의 안전을 확보하는 거랑 34층까지 클리어하는 거랑 뭔 관련이 있다는 거람?’
이 시점의 염훈은, 은혁이 그리고 있는 구상이 뭔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사실, 7대 길드의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 * *
-32층 : 거미의 숲.
크고 뾰족한 침엽수가 빼곡하게 자란 숲.
짙은 청록색의 나뭇가지가 워낙 높고 촘촘하게 자란 탓에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고,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분위기는 음침할 것 같았지만, 의외로 활기찼다.
“해독 포션 미리 배분합시다!”
“저번처럼 성직자들 어이없이 쓰러지는 일 없도록 하고!”
“숲에는 불이 잘 안 붙으니까 화염 스킬은 팍팍 씁시다!”
곳곳에 몬스터 사냥 중인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실력을 갖춘 중견 플레이어들이 파티를 맺거나, 다양한 플레이어들로 구성된 길드도 있었다.
그런 중견 길드들 사이에 눈에 띄는 길드가 있었다.
상승 길드였다.
브라이언의 실종으로 얼마간 세력이 확 죽은 상승 길드는 이곳에서 사냥을 이어가며 수익을 크게 올리고 있었다.
“흠, 전형적인 사냥터 스테이지인가.”
100층탑에 꽤 익숙해진 염훈이 분석했다.
“근데 묘하게 횃불이 많네?”
아직 환한 낮인데도, 횃불이 곳곳에 꽂혀 있었다.
그게 좀 특이하다고 생각한 순간.
<32층 메인 미션 : 거미 사냥.>
-목표 : 거미를 사냥할 것.
-성공 시 보너스 : 사냥한 거미의 숫자와 종류에 따라 다름.
-실패 시 페널티 : 거미의 준신에게 잡아먹힘.
-제한 시간 : 1시간.
“잘됐군. 난 평소에도 거미 싫어했는데.”
염훈이 빅 썬더를 움켜쥐었다.
당장 사냥하러 뛰어들 기세였지만.
“잠시만. 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
은혁이 말렸다.
아닌 게 아니라 게이트 근처에는 자유시장 길드 소속 상인들이 앉아 있었다.
“해독 포션용 재료 팔아요~.”
“치료 필요하신 분은 텐트로 들어오세요!”
장사는 꽤 잘 되는 것 같아 보였다.
평범한 장사꾼들 같지만, 그래도 32층까지 메인 미션을 뚫고 올라온 자들이다.
“…….”
그들은 장사를 하면서도 이따금 날카로운 눈빛으로 은혁을 봤는데, 대놓고 따라붙어 감시하진 않아도, 상부에 보고할 터였다.
은혁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만 한 번 끄덕여 줬다.
“게이트 근처는 사람이 많으니, 인적 드문 구석으로 가서 사냥하자.”
* * *
끝없이 펼쳐진 숲을 걸어갔다.
한참을 가니 다른 이들의 사냥 소음이 줄어든 공간이 나왔다.
그때였다.
“어이! 그쪽은 미개척지야. 가지 마.”
상승 길드 마크를 지닌 자였다.
그는 은혁을 한 박자 늦게 알아보고 흠칫했다.
은혁은 적의가 없다는 듯이 손을 들어 보였다.
“그냥 인적 드문 곳에서 사냥하려는 건데.”
“거참, 32층은 처음인가?”
“그런데?”
사실은 회귀 전에도 실컷 사냥했었지만 그걸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그러자 상승 길드 마크를 지닌 자가 혀를 찼다.
“사냥 구역이 중요한 층이다. 함부로 사냥하다간 다 같이 망한다고.”
그가 잘난 척하며 말하자 염훈은 불쾌해했다.
“그쪽은 뭔데 우리를 가르치려 드는 건데?”
“흥. 내 이름은 콰르텔. 길드원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이 사냥터의 터줏대감쯤 되는 자다.”
“와, 자기가 자기 입으로 터줏대감이라고 소개하는 사람 처음 봤어.”
“……닥치고 이거나 먼저 읽어봐라.”
콰르텔은 사냥 길드 특유의 공략집을 하나 던져줬다.
“원래는 돈 받고 파는 거지만, 그쪽들 네임 밸류를 생각해서 공짜로 드리지.”
‘이 새끼. 회귀 전하고 다를 게 없네.’
은혁은 콰르텔을 알고 있었다.
회귀 전, 이 무렵의 상승 길드는 여전히 강했고 승승장구했다.
물론 32층 지역도 꽉 잡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콰르텔은 한정판 공략집을 현지에서 파는 일종의 에이전트였다.
그때도 은혁과 염훈은 한정판 공략집을 콰르텔에게서 금화를 주고 샀고, 콰르텔은 공략집을 휙 던져서 줬었다.
“왜? 던져 주니까 꼬워?”
지금의 콰르텔은 회귀 전과 똑같이 말하고 코웃음 쳤다.
“꼬우면 그거나 당장 읽고 왔던 곳으로 되돌아…….”
그가 말하는 순간.
“부오오오오!!”
거대 거미가 울부짖으며 돌진했다.
“큭!”
콰르텔은 나무에서 뛰어내려 피했다.
콰쾅!!
거대 거미의 돌진에 충돌한 나무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큭! 내 이럴 줄 알았어!”
콰르텔이 화를 내며 은혁과 염훈 탓으로 돌리려는 순간.
콰직!!
빅 썬더를 쥔 염훈이 냅다 달려들어 공격을 먹였다.
“부우웃……!”
거대 거미의 기세가 꺾인 순간.
서걱!!
화르르륵!!!
청염백광태도를 쥔 은혁이 결정타를 먹여 죽였다.
“흠. 덩치에 비해 할 만한데?”
염훈이 말했다.
이전 통합층에서 거대 피에로를 학살한 경험 덕분에, 거대 몬스터를 상대로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
“……실력이 대단하긴 하군.”
콰르텔은 인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진짜는 이제부터요.”
콰직!
죽은 거대 거미의 몸속에서 사람 손바닥 크기의 작은 거미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0마리 이상.
“[화염 방사].”
화르르르륵!!
은혁은 냅다 화염을 뿜어서 깡그리 태워 죽였다.
“끼긱!”
“끼이익!”
단 한 마리도 은혁의 공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음.”
트집을 잡으려던 콰르텔은 머쓱해졌다.
하지만.
“잘하셨군.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오. 왜냐하면.”
“음? 유령거미다.”
성기사 염훈이 유령의 존재를 민감하게 느꼈다.
죽은 거대 거미와 그 새끼들이 육체가 사라지자마자 유령거미로 변화한 것이다.
“[홀리 썬더]!!”
꽈르릉!!
신성한 충격파가 유령거미들을 모조리 제압했다.
“하앗!”
빅 썬더를 재차 휘두르자, 신성력의 충격파에 제압된 유령거미들은 모조리 터져 나가 죽었다.
“음…….”
트집 잡을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콰르텔은 인정해 주기로 했다.
“두 분은 예습을 하고 오신 모양이군.”
“딱히? 미션창에 사냥하라고 적혀 있으니 사냥하면 그만이지, 뭐.”
“…….”
콰르텔은 더 있어 봐야 자존심만 상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떠나려 했는데.
“거, 그냥 가지 말고 길잡이 노릇이나 하지?”
은혁이 금화를 한 움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조금 헤프게 쓰는 것 같아도, 이미 벌어 둔 돈이 많은 데다가 며칠 안에 길드 사업이 궤도에 오를 것이므로 상관없었다.
게다가 회귀 전, 한정판 공략집을 사느라, 힘들게 돈을 모으고 저자세로 갖다 바쳤던 기억이 떠올라, 은혁은 약간의 돈 자랑을 해보고 싶었다.
“큭. 자존심은 건들지 마라!”
콰르텔이 소리쳤다.
브라이언과 은혁의 대결이 공정했다고 쳐도, 그래도 상승 길드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힌 은혁이다.
콰르텔로서는 은혁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맞아, 은혁아. 왜 대뜸 돈을 들이밀고 그러냐. 상승 길드원들의 자존심을 존중해 줘야지.”
염훈이 점잖은 어조로 말했다.
콰르텔은 염훈이 나서자 조금 누그러진 태도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어차피 길잡이 역할을 해줄 것도 없다. 이 경계 너머로는 아무도 가보지 못했으니까.”
“아무도?”
“그래. 호기심 강한 몇 명은 내 눈을 피해 경계 너머로 갔었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지.”
“흠.”
은혁은 특유의 흠, 하는 소리를 내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과장이 좀 심하군.’
은혁이 알기로, 경계 너머가 특히 위험한 건 맞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이 시기는 거미 신도 놈들의 숫자가 꽤 많을 때였던가? 그래서 콰르텔이 과장해서 경고를 해주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군.’
은혁이 고민하는 동안, 염훈은 은혁의 손에서 금화를 몇 개 빼냈다.
“어이, 콰르텔. 받아라.”
염훈이 금화를 몇 개 던져 주자 콰르텔은 받으면서도 의아해했다.
“왜 주는 건데?”
“정보료.”
“그것치곤 너무 많은데…….”
“그럼 거스름돈 대신 정보를 좀 더 주든가. 그래도 괜찮지, 은혁아?”
“응, 마음대로 해. 난 생각 중.”
은혁은 그답지 않게, ‘경계면’을 두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보통 경계면이건 출입금지구역이건, 눈에 띄면 냅다 부수고 넘어가는 게 평소 은혁의 성격이건만, 지금은 팔짱까지 끼고 깊이 생각에 잠긴 상태다.
그래서 염훈과 콰르텔이 대화를 나눴다.
어쩌다 보니 길드 운영의 어려움에 관한 화제로 넘어갔다.
“……그렇게 나는 어쩌다 보니 불패불굴 길드장이 된 거지.”
“힘들겠군.”
“뭐, 부길드장이 갑자기 사라진 너희도 많이 어렵지 않아?”
“그게, 다행히 7대 길드 중 하나로 대우를 해주긴 하더군. 가장 우려했던 결과는 면했달까.”
“가장 우려했던 결과?”
“거, 왜 있잖소. 7대 길드 체제 관두고 6대 길드로 축소할 거임~ 하면서, 상승 길드를 완전히 잡아먹으려 드는 경우.”
“에이, 나머지 6대 길드가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할까?”
“뭐, 그나마 정의 길드나 연구 길드, 자유시장 길드가 현상 유지를 바라고 있으니 다행이긴 한데. 문제는 우리 상승 길드가 그리 착하게만 살아온 집단은 아니라서.”
“헐. 알긴 아는군?”
“그걸 모를 리가. 하지만 우린 탑을 오른다는 목적을 위해 거칠게 살아왔을 뿐, 남을 깔보고 짓밟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소. 그것만은 기억해 주시길 바라오, 염훈 길드장.”
“음…….”
“그보다 댁들, 불패불굴 길드의 정체성이 어떻게 되시오?”
“어? 우리 길드 정체성? 그게, 음.”
말하려던 염훈은, 정작 길드장인 자신이 그걸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저기, 은혁아? 우리 길드에도 정체성이나 이상 같은 거 있냐?”
고개를 돌린 순간.
은혁이 보이지 않았다.
“엥?!”
“이, 이런 바보 같은!”
어느새 앉아서 대화하던 두 사람은 벌떡 일어났다.
“멋대로 혼자 들어가다니!!”
은혁은 쪽지 하나만 남겨두고 저편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 * *
‘이 너머는 혼자가 낫다.’
왜냐하면 거미를 죽여도 반드시 부활하기 때문이다.
거미의 사체를 태우면 부활하지 않지만, 그러면 거미 유령으로 재차 부활한다.
그래서 다량의 횃불과 성직자들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다.
바꿔 말하자면, 총 3회를 반복해 죽이므로 경험치는 많이 주는 편이다.
그래서 사냥터 삼아 사냥하는 이들이 많다.
‘문제는, 너무 열심히 사냥하는 일이 히든 미션을 유발한다는 거지.’
적극적으로 히든 미션을 클리어하던 은혁이지만, 32층에서는 달랐다.
히든 미션 조건은 다양하며 비밀스러운데, 32층의 히든 미션 발동 조건과 그 결과는 다소 위험했다.
‘히든 미션 제목이 아마, 거미의 신이 분노하였습니다……였던가?’
32층의 플레이어가 거미를 죽일 때마다, 스테이지 전체에 분노 점수가 1점씩 상승한다.
그게 1만 점이 쌓이면 거미의 신이 깨어나면서 히든 미션이 시작되는 셈이다.
천만다행인 점은 매일 밤 자정이 지나면 점수가 초기화된다는 것.
‘평소 내 성격대로 막 죽이면서 진행하면 거미의 신이랑 싸워야 한다.’
거미의 신이 깨어나는 순간 여기 있는 플레이어의 절반은 반드시 죽는다.
‘사실, 뾰족한 나무처럼 보이는 것 하나하나가 털이지.’
불이 잘 안 붙는 뾰족한 나무들……처럼 보이는 것 하나가 사실은 거미의 신의 등에 나 있는 ‘털’이다.
거미의 신은 그 정도로 거대하다.
몸을 일으키면서 털구멍에서 독을 뿜어내기만 해도, 어지간한 플레이어는 어디서 공격을 당하는지도 모르고 죽는다.
‘해독 포션이나 [중독 치유] 스킬로 쉽게 치료가 가능한 거미 독이라곤 해도, 워낙 독 데미지가 강하게 들어와서…….’
은혁이 정말 다른 사람 사정 신경 안 쓰는 타입이라면 남들이 죽건 말건 거미를 학살해서 히든 미션을 유발하겠지만, 그 정도로 사악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러니 일반 거미 몬스터는 가급적 죽이지 말고, 거미 신도들만 노려서 죽인다.’
은혁은 달리기를 멈추고 한쪽을 힐끔 노려봤다.
‘보인다.’
은혁은 놀이 공원 통합층에서 야간 투시 기능이 있는 렌즈를 눈에 이식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거미 신도들의 모습이 보였다.
거미 신도들은 예외 없이 ‘거미 인간’들이었다.
거미와 인간의 중간쯤 되는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다리가 여덟 개일 뿐만 아니라, 얼굴에는 여러 개의 눈이 달려 있었다.
여러 개의 다리는 숲속의 이동과 기습에 도움이 되고, 네 쌍의 눈은 각 쌍마다 서로 다른 기능을 하며 표적을 노릴 수 있게 돕는다.
어두운 숲속에 특화된 괴인들.
그런 거미 신도들이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은혁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