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 거미의 숲 (2)
거미 인간들은 숲의 그림자 속에서 속삭였다.
“저 인간이 우리 위치를 눈치챈 걸까……?”
“그건 불가능해.”
“거미의 신께서 우릴 숨겨주고 계셔.”
거미 인간 신도들이 나무 그림자에 숨는 경우, 자동으로 [은신] 스킬이 걸린다.
거미 인간 신도들은, 반쯤 잠이 든 거미의 신이 내려주는 가호 속에서 은혁을 관찰하고 있었다.
물론, 은혁도 거미 인간 신도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덤벼.”
은혁은 긴말하는 대신 손을 까딱였다.
“……!!”
거미 인간들은 진작 간파당했다는 사실에 경악하면서도 즉각 행동했다.
슈슈슉!
독침이 은혁을 향해 일점으로 날아들었지만.
“[화염 방패].”
화르륵!
불길에 닿자 모두 녹아 없어졌다.
독침은 치명적이지만 작은 바늘 크기였기에 고열의 방벽에 금방 녹아 버린다.
은혁은 간단히 막아낸 뒤, [화염 방패]에 그대로 [화염 방사]를 걸었다.
“퓨전 스킬 [염열파].”
화르르르륵!!
막대한 화력이 뿜어져 나가자 거미 인간들도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광범위 공격 스킬 앞에서 흩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은혁을 상대로는 안이한 대응이었다.
“차원의 낚싯대 + [회전 베기] 융합.”
-히든 이펙트 발동!
“[차원 왜곡 팽이]!!”
키유우우웅!!
차원의 낚싯대의 차원을 왜곡하는 힘과 3차 각성한 전사의 [회전 베기]가 융합된 순간, 차원의 일부가 가열된 엿처럼 휘기 시작했다.
“어엇?!”
“키익?!”
거미 인간들은 도망치는 속도가 재빨랐기에 도리어 [차원 왜곡 팽이]의 범위 안에 걸리고 말았다.
[차원 왜곡 팽이]는 스킬 자체의 공격력은 전혀 없지만, 한 번 걸리면 다차원 간섭 능력이 없는 한, 자력으로 탈출하기가 극히 어려웠다.
빙글빙글…….
허공에 생긴 차원 왜곡장에 갇혀 빠르게 회전하는 거미 인간들에게, 은혁은 [염열파]를 한 번 더 쐈다.
화르르르륵!!
막대한 화염이, 차원의 왜곡을 따라 빙글거리며 빨려 들어갔다.
“……!!”
거미 인간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타죽었다.
“흠, 이 불길은 다른 놈들 눈에도 보이겠지.”
은혁은 말 그대로 낚시로 거미 인간들을 처치할 계획이었다.
* * *
10분 뒤.
“크에에엑……!”
거미 인간 족장도 은혁 손에 잡혔다.
“분하다……!”
인간의 언어로 원망을 토해 내려 했지만.
“원망 마라. 그동안 너희도 혼자 다니는 만만한 인간을 납치해서 제물로 바쳤잖아.”
32층의 ‘실종자’들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고, 대부분 거미 인간 신도들에게 잡혀 고통스럽게 죽었다.
“…….”
“잘 가라.”
서걱!
화륵!
청염백광태도로 단숨에 목을 쳐서 죽였다.
“근방에 있는 것들은 다 죽였군.”
휘오오오…….
차갑고 끈끈한 바람이 은혁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엑토플라즘 섞인 바람이군.’
엑토플라즘은, 사령술사나 혼돈술사, 또는 재능을 갖춘 극소수의 플레이어만이 다룰 수 있었다.
그것이 바람 형태로 불 정도라는 것은…….
-거미 인간들의 원한이 불어 닥칩니다!
그 정도로 농도 짙은 원한이 은혁을 향해 있다는 의미였다.
거미를 섬기는 거미 인간들이, 신앙을 이어가지 못한 채 단기간에 학살당했으므로, 원한이 갑자기 응축된다.
그 원한이 엑토플라즘으로 승화하여 한곳에 뭉치다 보니 바람 형태로 불어닥친 것이다.
휘오오오!
휘오오오오……!
엑토플라즘의 바람이 불더니.
데굴데굴……!
데구르르……!!
죽은 거미 인간들의 머리통이 바닥을 굴렀다.
방긋방긋 웃는 머리통부터, 악의 가득한 찡그린 표정의 머리통까지.
대부분 청염백광태도로 썰리고 불에 탄 사체이므로 까맣게 타 있어야 했지만, 원혼의 힘으로 머리통만 부활해서 굴러다니는 것이다.
“히힛.”
“히시시시시……!”
툭툭.
머리통들이 은혁의 발뒤꿈치를 툭툭 치며 한곳에 모였다.
정상인이라면 공포에 미쳐야 하고, 은혁도 평소였다면 머리카락이 쭈뼛 서야 정상이다.
“흐아암.”
하지만 놀이 공원 통합층에서 ‘최상급 공포 저항의 룬’을 갑옷에 장착한 상태이므로 하품만 나왔다.
“거, 빨리 좀 와라.”
은혁이 투덜거린 순간.
휘오오오오오……!!
엑토플라즘의 바람과 머리통이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거대한 원령 거미가 나타났습니다!
“챠르르르르……!”
거미 인간의 머리통 100개가 달라붙은 반투명한 유령거미.
“여기까진 계획대로군.”
은혁은 그렇게 전투 자세를 잡는가 싶더니.
휙.
180도 돌아섰다.
“[질주]!!”
파바바밧!!
흙을 튀기며 냅다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챠아아아아아……!!”
거대한 원령 거미가 은혁의 뒤를 쫓았다.
‘태워 죽이는 게 확실하긴 한데, 태워 죽일 수는 없지.’
[염열파]와 [그림자 도약], 치고 빠지기로 태우면 확실히 죽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챙겨 가야 할 엑토플라즘도 홀라당 타버려서 곤란해.’
은혁의 목표는 단순한 미션 클리어가 아니라, 커다랗게 뭉친 엑토플라즘 그 자체였다.
‘비료 겸 연료로 써야 하니까.’
은혁에게는 계획이 다 있었다.
타앗!
은혁의 앞에 나무가 모조리 타버린 공터가 나왔다.
분명 은혁이 떠나기 전에는 콰르텔이 숨어 있을 정도로 나무가 많은 곳이었다.
‘염훈 녀석. 준비를 열심히 한 모양이네.’
은혁이 두고 온 쪽지대로 한 모양이다.
“염훈! 준비됐냐!!”
은혁이 버럭 소리쳤다.
“됐다!!”
염훈이 외쳤다.
우우우우우웅……!
신성력의 잔여 에너지가 웅웅거리고 있었다.
염훈은 은혁이 떠난 뒤, 빅 썬더로 [홀리 라이트닝]을 작은 규모로 여러 번 쳤다.
그때마다 주변의 나무가 천둥 벼락을 맞은 것처럼 부서져 나갔고, 잔여 신성력이 요동쳤다.
염훈은 그 순간 [신성한 속박] 스킬을 썼다.
[신성한 속박]은 언데드 따위의 부정한 존재나, 반대로 성스러운 존재를 엮어서 못 움직이게 하는 데 주로 쓰는 스킬이지만, 염훈은 자기 스킬로 방출한 신성력을 모으는 용도로 썼다.
“모여라! 신성력이여!!”
기이이이잉……!
속박된 신성력이 연속 융합되며 더 강하게 뭉쳐졌다.
“[연쇄와류식 홀리 썬더]!!!”
[홀리 썬더]가 소용돌이처럼 뿜어져 나갔다.
유난히 큰 [홀리 썬더]는 서로 튕겨내며 불규칙하게 뿜어져 나갔고, 작은 [홀리 썬더]는 서로 흡수하며 덩치를 키웠다.
“이크!”
은혁조차도 피하기 힘든 [홀리 썬더]의 격류.
섣불리 [그림자 도약]을 했다간, 신성력의 광채가 그림자까지 뒤틀어서 갈가리 찢길 위험이 있었다.
은혁은 하는 수 없이 [도약] 스킬로 높이 뛴 다음 [광풍돌진권]을 비스듬히 높이 재차 써서 회피해야 했다.
“캬아악……!!”
은혁이 피하자, 뒤따라 온 거대한 원령 거미가 모조리 격류를 뒤집어썼다.
뿌드득!!
카가가가가각……!!
거대한 원령 거미의 팔과 갑각이 모조리 뜯기고 갈려 나가더니.
우득, 우드득.
빠직, 빠지직.
[홀리 썬더]의 격류에 휘말려 하나로 압착되기 시작했다.
“좋아, 잘한다!”
멀리 피한 은혁이 격려했다.
“말 시키지 마! 으그극……!”
염훈이 신성력을 짜냈다.
“오, 맙소사.”
조금 떨어진 곳에 피신해 있던 콰르텔은 경악했다.
그는 눈앞의 광경을 직접 보면서도 믿지 못했다.
콰르텔로서는 거대한 원령 거미의 존재를 똑바로 보는 것만으로도 멘탈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반면에 염훈과 은혁은 마치 이런 일을 많이 해본 사람들처럼 능숙하게 딱딱 호흡 맞춰 대응했다.
“흐아아아압!!”
콰드드득……!!
거대한 원령 거미는 압착되어 볼링공 크기로 줄어들었다.
“좋아! 차원의 낚싯대!”
휙!
은혁은 차원의 낚싯대를 능숙하게 날려서 압착된 엑토플라즘만 꺼냈다.
“[그림자 감옥]!”
그리고 [그림자 감옥]으로 가둔 뒤 한쪽 구멍만 살짝 열었다.
“염훈. [정화] 스킬 써라. 최대한 약하게 살살 써줘.”
“으으. 힘들어 죽겠네.”
[연쇄와류식 홀리 썬더]는 한 방 기술처럼 보이지만 미리 셋업을 해야 하는 기술이었기에 체력이 훅 빠진다.
염훈은 그래도 은혁의 부탁대로 마무리까지 해냈다.
슈오오오오……!
-정화율 50%…….
-정화율 71%…….
-정화율 88%…….
-정화율 100%!
-거대한 엑토플라즘을 획득하셨습니다!
“됐다!”
은혁은 편법을 써서 원혼을 품은 거대한 영체를 만들고 유인한 뒤, 순도 높은 엑토플라즘으로 만들어 획득했다.
-축하드립니다! 32층 메인 미션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보상을 위해 처치한 거미의 숫자를 계산 중입니다!
은혁이 실제로 죽인 거미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지만, 거미 인간을 다수 죽였다.
게다가 거미 인간의 직업은 거미의 신을 섬기는 사도였기에, 죽은 거미의 영혼이 머무는 존재였다.
즉, 거미 인간 하나를 죽이면, 거미 인간의 몸에 깃들어 있는 무수히 많은 거미의 영혼까지 추가로 죽이는 게 된다는 의미다.
-시간 대비 거미 처치율 역대 1위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남들이 위험해서 가지 않는 곳에 가서 집요하게 사냥을 해댔으니 당연한 결과다.
-거미 학살자 칭호를 획득하셨습니다!
-[거미 학살] 패시브 스킬을 획득하셨습니다!
패시브 스킬은 모든 거미 관련 적들에 대해 20% 추가 피해를 입히는 것이었다.
‘이런 자잘한 보너스도 쌓여서 나쁠 거 없지.’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본 콰르텔은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콰르텔은 자신이 눈으로 본 걸 상승 길드원들에게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거기, 콰르텔이라고 했던가?”
은혁이 말을 걸었다.
콰르텔은 가급적 눈을 안 마주치려 땅을 보며 주춤주춤 다가갔다.
“오늘 여기서 본 건 비밀로 해주면 좋겠는데.”
은혁이 한 일이 소문 나면, 다른 이들이 흉내를 내려 할 터였다.
특히나 상승 길드원들은 더욱 오기를 부리며 시도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랬다가 괜히 거미의 신이 깨어나기라도 하면 32층 플레이어의 절반이 즉사할지도 모른다.
“아, 알겠소. 비밀로 하지.”
“그리고…… 혹시 브라이언 소식 아나?”
은혁은 별 기대 없이 물었지만.
“실은…….”
콰르텔은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린 뒤 소곤소곤 말했다.
“얼마 전에 이곳에 들렀소.”
“호오?”
“‘수고가 많다.’ 이 한마디만 하고는 59층으로 가셨소. 혼자 힘으로 59층을 처음부터 다시 뚫겠다고 하셨지.”
“흠.”
59층 메인 미션은 이미 브라이언, 레나, 워잭, 테일러가 힘을 합쳐 클리어했었다.
파티 단위로 클리어한 것을 굳이 개인 자격으로 재도전한다는 건 기초부터 착실히 쌓고 그 이후를 개척하겠다는 뜻일 터.
‘알아서 샌드백이 되어 주는구만. 고맙다.’
60층부터는 사실상 3군주 세력권이다.
3군주 세력 셋이, 7대 길드 세력 일곱과 얼추 비슷하다.
즉, 브라이언 혼자서 위로 올라가 봐야 샌드백 역할밖에 안 된다.
‘물론, 3군주도 대놓고 브라이언을 잡아 죽이려 들진 않겠지만.’
브라이언이 알아서 그들에게 덤벼들 가능성이 높았다.
언젠가는 은혁을 꺾는다는 목표가 있으니까.
“기대가 크겠군.”
은혁은 콰르텔에게 말했고, 콰르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분이 돌아오실 때까지 우린 곳곳에서 사냥을 하며 경험치를 쌓고 힘을 비축할 거요.”
“흠. 말 나온 김에, 혹시 상승 길드장 소식도 알고 있나?”
“그건 브라이언 님 말고는 아무도 모르지.”
‘난 알지.’
심연에 있다는 사실.
브라이언은 블릿츠 데바에게 자기 수명을 바치며, 상승 길드장을 제거해달라 했다.
브라이언은 상승 길드장이 그대로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심연 깊은 곳에 떨어졌을 뿐, 죽진 않았지.’
그를 만나는 건 먼 훗날의 일일 터였다.
“그렇군. 좋은 대화였다.”
“으음.”
콰르텔은 서둘러 자기 동료 곁으로 떠나갔다.
콰르텔이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털썩.
염훈이 은혁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에구구, 힘들다.”
“야, 길드장이 체통도 없이 주저앉기냐?”
“콰르텔도 갔는데, 뭘.”
염훈은 숨을 몰아쉬었다.
“힘이 쭉 빠져서 그런데, 좀 쉬면 안 되냐?”
“안 됨.”
“왜 안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