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 잠든 공주와 일곱 난쟁이 (1)
“저번에 말했잖아. 오늘 중으로 28층을 강화시켜야 하니까.”
은혁은 단호하게 말했다.
사실, 28층 업그레이드를 며칠 미룬다고 당장 공격당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습격자라면, 오늘 공격한다.’
불패불굴 길드의 대응력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오늘 공격할 것이다.
은혁은 가상의 적들 수준을 자신과 같은 수준으로 인정하기에, 방어 태세를 완전히 갖추지 않은 현재의 28층 체제가 영 불안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추진하고 싶은 꼼수가 하나 있었다.
“크크크.”
그 꼼수가 성공한 경우를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 났다.
어쩌면 은혁이 오늘 해가 떨어지기 전에 34층까지 클리어하려는 이유는, 그 꼼수를 시도해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인지도 몰랐다.
“빨리 33층으로 가자.”
* * *
-33층 : 잠든 공주와 일곱 난쟁이.
33층 대기실로 전송됐다.
대부분의 대기실과 달리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한 도배지가 붙은 방이었고, 큼직한 창문만 하나 붙어 있었다.
“오, 2명 추가요!”
“이제 겨우 5명인가.”
“2명만 더 기다리면 되네.”
먼저 온 플레이어들이 중얼거렸다.
33층은 도중에 포기하고, 게이트 타고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한 층인지, 다들 기다리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제길, 미리 인벤토리에 먹을 걸 챙겨와서 망정이지.”
“그것도 얼마 안 남았어.”
“어이, 너희들. 먹을 거 있어?”
플레이어들이 슬쩍 노려봤다.
먹을 건 못 나눠준다고 못 박아두려는 심산이었지만.
“먹을 건 많은데.”
은혁이 인벤토리에서 먹을 걸 적당히 꺼냈다.
편의점에서 구매한 식량이었다.
“우왓!”
“통조림까지 있네?”
“준비성이 철저한 녀석인가 본데.”
다들 은혁이 꺼낸 편의점 음식들에 관심을 보였다.
“같이 드시죠.”
“저, 정말요?”
어느새 플레이어들의 말투가 존댓말로 바뀌었다.
은혁이 삼각 김밥, 감자 칩을 적당히 뜯어서 늘어놓자 다들 활짝 웃었다.
“컵라면도 있는데, 냉기 법사나 물 드루이드 있으신가요?”
아쉽게도 없어서, 은혁은 수통의 물을 꺼냈다.
“흡!”
금속 수통을 쥔 은혁은 [화염 지배]를 컨트롤해서, 속의 물만 가열시켰다.
“허!”
“대단하시네.”
“몇 차 각성이세요?”
먹을 것과 은혁의 마력 통제 능력 덕분에 다들 마음을 열었다.
쪼르륵.
컵라면에 뜨거운 물도 부은 은혁이 입을 열었다.
“오래 같이 있어야 할 거 같은데, 같이 먹으면서 통성명이나 하죠. 저는 강은혁. 이쪽 성기사 친구는 염훈.”
그제야 플레이어들은 놀랐다.
“헉!”
“강은혁이랑 염훈……!”
이들은 여기 며칠째 갇혀 있는 탓에, 은혁과 염훈이 길드를 세웠다는 소식까지는 전해 듣지 못했다.
그래도 두 사람의 명성은 5층 길드연합국 소속 플레이어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시, 실례했습니다.”
“얼마 전에 백신은 잘 맞았습니다.”
그들은 식량을 와구와구 집어 먹는 대신, 눈치 보며 과자 쪼가리만 몇 개 집어먹었다.
은혁이 웃으며 여러 차례 권하자 그제야 삼각 김밥이며 컵라면에 손을 댔다.
“그나저나 인원수가 7명 모여야 하나 봅니다?”
은혁이 다 알면서 묻자 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미션창은 아직 뜨지도 않았어요.”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면, 그때 인원 제한 수가 뜹니다.”
그들이 말하자, 입맛이 없었던 염훈이 문가로 갔다.
-일곱 난쟁이가 모이기 전에는 열리지 않습니다!
“난쟁이……?”
염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우리들의 키가 갑자기 줄어들게 되는 미션인가……?”
그러자 컵라면을 후룹거리던 한 명이 부연했다.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잠든 공주가 나오는 옛날 동화 관련 스테이지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가 편의점 나무젓가락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어, 그러네. 저기 공주가 살 법한 그림 같은 집이 있구만.”
대기실의 창문을 보니, 그림 같은 초원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아름다운 저택이 놓여 있었다.
“과연. 이제야 감이 오네.”
염훈은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일곱 난쟁이가 되어, 잠이 든 공주를 지키는 역할이군.”
“아마 그럴 겁니다.”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다른 플레이어가 참가하기를 기다렸다.
* * *
은혁과 염훈이 올라온 지 1시간이 더 흘렀다.
하지만 아무도 33층에 올라오지 않았다.
“아, 되게 안 오네.”
“오늘도 말짱 꽝인가.”
다들 실망했지만 큰 소리를 내진 못했다.
“…….”
은혁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왜 안 와.”
가끔 혼잣말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때마다 대기실 공기가 1도씩 내려가는 것 같았다.
“저어, 소문에 의하면 말이죠…….”
플레이어 한 명이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33층은 플레이어를 일부러 지루하게 만들기 위해, 대기실과 스테이지를 분산해서 배치한다고 하네요.”
일반적으로 한 층에 한 스테이지로, 층이 하나 있으면, 플레이어들은 하나의 스테이지에 모여서 같이 협력하거나 경쟁하는 식으로 플레이가 이뤄진다.
하지만 드물게, 설정 인원마다 각자 대기실과 스테이지를 배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미로 관련 층이었던 19층이나, 추리 드라마 관련 층인 31층도 사실 그런 층이었고, 이곳 33층도 그러했다.
특히 33층의 대기실은 시스템에 의해, 꼭 7명이 모이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7명의 플레이어들이 모이기까지의 시간이 가급적 오래 걸리는 방식으로 배정되게 설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오래 걸린다고 하네요…….”
누군가가 설명을 마쳤다.
“그걸 누가 모릅니까?”
은혁이 얼음장 같은 소리로 답했다.
말을 꺼낸 플레이어는 얼른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음, 은혁아. 혹시 오늘 중에 34층까지 다 클리어하려는 욕심 때문에 조바심이 나는 거라면…….”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은혁이 입을 삐죽 내밀며 말하자, 염훈은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인마’ 하고 생각했다.
“인원수가 충족되지 않으면 하는 수 없는 거니까 일단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잖아?”
“흠. 인원수…… 그래, 그게 있었지!”
은혁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림자 분신 2.0].”
스르륵…….
은혁을 닮은 분신이 둘 생겨났다.
도적 스킬 [그림자 분신]과 드루이드 스킬 [원기 부여]를 융합한 퓨전 스킬.
“와.”
“비슷하긴 한데…….”
하지만 이 그림자들은 플레이어가 아니므로 인원수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 [그림자 결속]을 쓴다!”
파앗!
-히든 이펙트 발동!
“퓨전 스킬 [그림자 분신 3.0]!!”
은혁은 [그림자 결속] 스킬을 쓰되, 평소와 달리 자신의 그림자를 역으로 [그림자 분신 2.0]에 귀속시켰다.
일종의 역귀속 기법으로, 자신의 플레이어 권한을 [그림자 분신 2.0]에 부여해줬다.
그 결과 플레이어의 권한을 일부 빌린 [그림자 분신 3.0]이 생겨났다.
-7인의 난장이가 모두 모였습니다!
-대기실의 문이 개방됩니다!
덜컹!
문이 열렸다.
“와씨, 저게 돼?”
“근데 혼자서 스킬을 몇 개 쓰는 거임?”
“직업이 여러 개라는 소문이 진짜인가…….”
“말도 안 돼. 직업이 여러 개겠냐? 우리가 모르는 히든 아이템을 여러 개 모은 거겠지.”
“그건 그것대로 대단하네.”
플레이어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그리고 습관처럼 은혁에게 다가와서 아부를 하려 했다.
굉장하십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단하시네요, 같은 소리를 하려 했지만.
척.
염훈이 팔로 막아섰다.
“에?”
“물러나.”
은혁의 성격을 아는 염훈이 말린 순간.
뻐억!!
은혁이 주먹으로 자기 머리통을 후려쳤다.
뻐억 뻐억 뻐억!!
은혁은 이를 악물고 자기 머리통을 갈겨댔다.
“히익?!”
“뭐, 뭐야!”
“왜 갑자기 무섭게 자해를……!”
플레이어들이 놀라는 순간.
“끄아아!! 이 간단한 걸 이제 깨닫다니! 이 멍청한 놈아!!!”
뻐억! 뻐억! 뻐억!!
이마가 깨지고 옆머리에 피가 튀어서 벽지에 묻었다.
은혁은, 정답을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주제에 1시간이나 걸린 뒤에야 깨달았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이다.
“허억, 허억.”
“이제 좀 진정했냐?”
염훈이 [상급 치유] 스킬로 은혁을 치료해주자 성기사 숙련도가 꽤 올랐다.
“음. 피를 좀 흘리니 낫군!”
은혁은 그렇게 말하며 나머지 플레이어들을 돌아봤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시겠지만 이번 미션은 협력이 중요할 겁니다. 지휘는 저나 염훈이 맡아도 되겠습니까.”
“네, 넵!”
그들은 은혁과 염훈을 대장으로 하는 7인 파티를 맺었다.
그리고 대기실 밖으로 한 걸음 나갔다.
그 순간.
<33층 메인 미션 : 잠든 공주와 일곱 난쟁이>
-목표 :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하여, 성공할 것.
-성공 시 보너스 : 선택지에 따라 다름.
-실패 시 페널티 : 6개월간 재도전 금지.
-제한 시간 : 1시간.
“선택지……?”
-A : 제한 시간 이내에 잠든 공주를 깨운 뒤, 마녀를 죽인다.
클리어 보상은 백마 탄 왕자가 준다.
-B : 백마 탄 왕자가 공주를 깨우러 오지 못하게, 제한 시간 동안 막는다.
클리어 보상은 마녀가 준다.
-5분 이내에 선택해 주십시오!
“뭔 선택지가 이래?”
“다 어려워 보이는데.”
“A 선택지가 그나마 나아 보이는데.”
“파티장 두 분이 결정하시죠.”
플레이어들이 은혁과 염훈에게 선택지를 맡겼다.
“어떻게 할까?”
염훈이 묻자, 은혁은 결정을 내렸다.
“아무것도.”
“어?”
“아무것도 안 골라.”
“야, 그러다 5분이 다 지나면.”
“5분 안에 선택 안 하면 죽는다는 소린 없으니까.”
그렇게 은혁은 아무것도 고르지 않은 채 5분을 보냈다.
-선택지 A와 B를 모두 거부하셨습니다!
-자동으로 선택지 C를 고르게 됩니다!
-선택지 C : 마녀와 백마 탄 왕자를 모두 죽인다.
클리어 보상은 ???를 1인당 하나씩.
“엥?”
“둘 다 죽인다고?”
“백마 탄 왕자는 착한 편 아닌가?”
파티원들이 어리둥절해했다.
“좋아, 가볼까.”
은혁은 우선 잠자는 공주가 있는 오두막으로 달려갔다.
“자, 달립시다!”
은혁이 [질주] 스킬까지 써가며 달려가자 다른 이들도 어리둥절해하며 따랐다.
“헉, 헉.”
“너무 빨리 달리는 거 아냐?”
“근데…… 왜 이리 멀지?”
그림 같은 오두막은 아무리 달려도 가까워지지 않는 것 같았다.
“무슨 환상 마법일까?”
“아니, 그거랑은 좀 다른데.”
한참 달리던 이들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냥 겁나게 멀리 있는 거였어!”
오두막은 원근감이 이상해질 정도로 멀리 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플레이어 눈에 잘 보인 이유는…….
“엄청 크네.”
오두막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극단적으로 멀고, 또 극단적으로 큰 오두막이었다.
“우리 몸 크기가 작아지거나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나머지가 엄청 큰 거였던 모양이네.”
염훈이 중얼거렸다.
잠시 뒤, 그들은 거대한 오두막 앞에 섰다.
“후우.”
은혁은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레 문에 손을 댔다.
문 또한 어지간한 성채의 문보다 컸다.
“혼자서는 못 엽니다. 다 같이…….”
일곱 명이 다 함께 문에 붙었다.
“하나, 둘……!”
“셋!!”
끼이익……!
거대한 오두막 문이 열린 순간.
드르렁……!
드르렁……!
고막을 울리는 코 고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읏……!”
“마치 거인이 코를 고는 듯한 소리군요.”
‘거인 맞는데.’
잠자는 공주는 거대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15미터 크기의 빅 자이언트였다.
빅 자이언트는 자이언트 계열 몬스터 중에서도 특히 거대한 특이종이며, 주로 33층에서만 리스폰된다.
“일단 깨워야 하는데, 너무 거칠게 깨우면 폭주해서 우린 다 죽습니다.”
은혁이나 염훈 정도면 살아남을 자신이 있지만, 나머지는 반드시 죽을 터였다.
플레이어들은 얼른 목소리를 낮췄다.
“그럼 어떻게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