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 악어의 강 (1)
“와! 랜덤 상자다!”
다들 기뻐했다.
찰칵!
찰칵!
파티원들은 지체 없이 상자를 열었다.
“아! 행운의 나침반이다!”
“에구, 나는 저주받은 화염의 검이네.”
“나, 난 휴지 열 상자야…….”
희비가 엇갈렸다.
은혁에게도 랜덤 상자가 떨어졌는데, 아쉽게도 [그림자 분신 3.0]들을 위한 랜덤 상자는 없었다.
‘쩝. 분신이 스킬 연동은 가능해도, 미션 보상까지 받을 순 없는 건가.’
은혁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랜덤 상자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염훈은 은혁과 함께 열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은혁이 망설이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안 열어?”
“음.”
예전에 은혁은 랜덤 상자에서 ‘궤도 폭격 요청 휴대폰’을 얻은 적이 있었다.
엄청난 물건을 전에 얻었던 적이 있는지라, 랜덤 상자를 두고 조금 망설여진 것이다.
“에라, 열자!”
찰칵.
그러자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은.
-배신자 색출 선글라스 :
3성급 아이템.
이 아이템을 착용한 뒤 사용 시, 주변에 있는 배신자의 모습이 붉게 보인다.
한 번 사용하면 5분간 효과가 지속된다.
1회용.
‘크으! 이렇게 좋은 게 마침 딱 손에 떨어지다니.’
은혁의 계산대로라면, 불패불굴 길드원들은 조만간 200명을 무난히 넘게 된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그중 스파이가 섞여 있을 수도 있는 일이기에 은혁은 어떤 식으로 그들을 색출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마침 이 아이템이 나와 준 덕분에 계획이 짜였다.
‘200명 이상 모은 뒤, 염훈에게 이 선글라스를 맡기고 연설을 시키면서 발동시킨다.’
그럼 염훈은 배신자를 빠르게 찾아낼 수 있다.
‘보나 마나 행복 길드의 따까리들이 스파이로 잠입하려 할 텐데, 그걸 일일이 사전에 막긴 어렵지. 하지만 이 배신자 색출 선글라스가 있다면 한 번에 확 솎아낼 수 있다.’
사실, 은혁은 회귀자였기에 누가 행복 길드 계열 인물들인지는 안다.
다만 문제는 굵직한 인물이 아닌, 전형적인 말단 따까리들을 일일이 알지는 못한다는 건데, 이 선글라스가 그 빈틈을 완전히 커버해 줄 것이다.
‘문제는 1회용이라는 거지만.’
그때, 염훈도 자기 랜덤 상자를 열었다.
찰칵!
“게이트 미션 1회 면제권……?”
“오! 좋은 거 뽑았네?”
“저기, 게이트 미션이 뭐더라?”
“…….”
플레이어가 한 층에서 다른 층으로 넘어가려면 메인 미션과 게이트 미션을 모두 클리어해야 한다.
통합층처럼 게이트 미션이 없거나 하나로 통합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둘 다 클리어가 원칙이다.
단, 다른 플레이어가 이미 개척한 층은 메인 미션만 남고, 게이트 미션은 사라진다.
보통 이런 층을 뚫린 층이라고 한다.
“59층까지는 길드연합국이 게이트 미션을 다 깬 덕분에 우리가 게이트 미션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거지만, 그 윗부분은 다 게이트 미션까지 클리어해야 하거든.”
사실은 그 윗부분도 3군주 세력이 많은 부분 게이트 미션을 클리어한 상태다.
다만 길드연합국 세력과 3군주 세력은 완전히 다른 플레이어 집단으로 관리국이 규정했기에, 길드연합국 출신인 은혁과 염훈은 새로이 게이트 미션을 뚫어야 한다.
‘사실, 더 어렵지.’
3군주 세력의 악랄한 방해 공작 때문이다.
게이트를 통째로 뜯어서 숨겨 놓거나, 주변에 지고의 위상을 소환해서 풀어 놓는 등, 후발 주자들이 3군주 세력권에 도달하는 것 자체를 매우 어렵게 해놓았다.
‘회귀 전에도 꽤 심했었는데, 이번에는 어떠려나?’
이 부분은 은혁이 직접 탐사를 해봐야 알 수 있으리라.
“하여간 네가 얻은 그 아이템은 나중에 가면 쓸모가 있을 거야.”
은혁에게는, ‘게이트 미션 1회 면제권’의 정상적인 활용법 말고도 몇 가지 변칙적인 방법이 떠올랐지만, 일단 염훈에게 맡겨두기로 했다.
“흠. 그럼 최대한 아껴야겠네.”
염훈은 납득하고 게이트 미션 1회 면제권을 인벤토리창에 넣었다.
“보상 확인은 끝났나?”
빅 자이언트 공주가 졸린 눈으로 물었다.
“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흥.”
“이 결말에 만족하셨습니까?”
“속았다는 진실을 마주했는데 만족할 리가 없지.”
빅 자이언트 공주는 한숨을 돌풍처럼 내쉬었다.
“이젠 다 지쳤어. 잠이나 실컷 자는 게 낫겠어.”
빅 자이언트 공주는 자신의 오두막으로 빠른 걸음으로 갔다.
그리고 잠시 쥐죽은 듯 조용해지더니.
-그리고 공주님은 영원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파앗!
게이트가 나타났다.
“휴, 드디어!”
“이젠 33층에서 탈출이다!”
파티원들이 환호했다.
은혁은 피식 웃었다.
“수고하셨습니다. 5층으로 귀환하실 건가요?”
“네. 당분간은 5층에서 휴양을 할 생각입니다.”
그들은 파티를 해제하며 말했다.
반나절 만에 층을 몇 개씩 클리어하려고 달려드는 은혁이 특이한 경우였고, 사실은 저렇게 휴식 계획을 세우는 쪽이 일반적이었다.
은혁은 작별인사를 하기로 했다.
“제가 무리하게 선택지 C를 골랐는데도 믿고 따라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마 안 되지만 식사라도 하시죠.”
은혁이 은화를 적당히 내밀었다.
파티원이었던 이들은 감격했다.
“와,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정말 좋은 분이시군. 처음에 몰라봐서 미안합니다.”
다사다난했던 33층 미션이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그럼 안녕히!”
그들은 게이트를 통해 5층으로 떠났다.
33층에는 은혁과 염훈만 남았다.
염훈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은혁을 봤다.
“우린 바로 34층으로 가겠지?”
“아니.”
은혁은 죽은 마녀와 백마 탄 왕자의 사체를 가리켰다.
“저 인간들이 파티를 해제하고 떠났으니, 루팅 권한은 우리에게만 남았지. 그러니 우리가 독식하는 거지.”
은혁은 메탈 워커를 소환하더니 사체를 뒤져서 아이템을 하나씩 꺼내오게 했다.
백마 탄 왕자에게서 ‘유혹의 향수’를, 마녀에게서 ‘독이 든 사과’를 꺼냈다.
“유혹의 향수는 너 가져. 독이 든 사과는 내가 가질게.”
은혁이 분배했다.
유혹의 향수는 몸에 뿌리면 타인으로부터 호감도를 15%가량 높여주는 평범한 효과의 향수.
길드장에게 딱 어울리는 물건이었다.
“근데 그 독이 든 사과는 뭐에 쓰려고?”
염훈이 미심쩍게 봤다.
히든 보스를 독살하거나, 아니면 즙을 짜서 마음에 안 드는 놈을 몰래 반쯤 죽이려는 거 아니냐…… 라는 미심쩍은 눈초리.
은혁은 피식 웃었다.
“정 의심스러우면 [정화] 스킬이나 한 번 걸어주든가.”
“그러지. [정화]!!”
파앗!
어찌나 독한 독이 묻어 있던지, 염훈은 1분 내내 [정화]를 써야 할 정도였다.
-독이 든 사과가 정화되었습니다!
-마녀의 독기가 사라지고, 황금 사과 본연의 형태로 변하였습니다!
독이 든 사과는 황금 사과로 변했다.
-황금 사과 :
6성급 아이템.
상상력과 사랑의 힘이 담긴 사과.
이 사과를 반씩 나누어 먹으면 상상력과 사랑은 물론, 동산과 부동산을 포함한 재화 일체에 대한 소유권을 공유할 수 있다고 한다.
비생명체에게는 효과 없음.
1회용.
‘일단 인벤토리 깊숙이 넣어둬야겠지.’
조만간 써먹을 곳이 있었다.
“그리고…….”
은혁은 백마 탄 왕자가 타고 다니다 죽은 백마 근처에서 자세를 잡았다.
“간만에 [재료 적출]!!”
파바박!!
[도축]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좋은 스킬이다.
-대장장이 숙련도가 2% 증가했습니다!
-대장장이 숙련도가 2% 증가했습니다!
-대장장이 숙련도가 2% 증가했습니다!
-현재 대장장이 숙련도 : 76%.
백마의 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얻어냈다.
고기들은 적당히 인벤토리에 던져 넣었다.
“준비 끝! 가자. 34층으로!”
* * *
-34층 : 악어의 강.
첨벙!
34층에 들어오자마자 강의 얕은 지류에 빠졌다.
“으악! 물이다!”
갑옷을 입은 염훈이 당황해서 허우적거렸지만.
“진정해. 얕다.”
허벅지 높이였다.
그러자 그걸 본 소녀 NPC가 깔깔 웃었다.
10대 소녀는 피부가 검었고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쪽으로 올라와요!”
밀짚모자 소녀 NPC가 있는 곳은 나무다리 위였다.
이제 보니 수상 오두막과 다리가 얼기설기 짜여 있는 수상 마을이 있었다.
첨벙첨벙.
두 사람이 나무다리 위로 올라가자 미션이 생성됐다.
<34층 메인 미션 : 급류 뗏목 타기>
-목표 : 수상 마을에서 뗏목을 타고 출발하여, 도착 지점인 하류까지 이동할 것.
제한 시간 이내에 도착하지 못하거나, 뗏목이 완전히 침몰하면 실패.
-성공 시 보너스 : 도착 시각에 따라 다름.
-실패 시 페널티 : 3일간 수상 마을에서 무료 봉사. (숙식 제공) 뗏목이 침몰한 경우 손해 배상.
-제한 시간 : 뗏목을 빌린 시점부터 1시간.
“뗏목이라…….”
염훈은 잠시 고뇌했다.
대학교 1학년 시절 바다에서 바나나 보트는 타본 적이 있지만, 유속이 빠른 강 위에서 뗏목을 몰아본 적은 당연히 없었다.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꽤 많은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어이! 작살 조심해!”
“젠장, 뭔 놈의 악어가 이렇게…… 으악!”
“어휴, 포션 값도 안 남겠네. 악어가죽이 아니라 우리 가죽이 다 뜯기겠다!”
메인 미션을 클리어하고, 이곳을 사냥터 삼은 이들이 보였다.
악어가죽과 경험치를 노리고 자리를 오래 잡은 이들 같았는데, 그들도 물 위에서 싸우는 건 여전히 벅차 보였다.
그리고 오두막 안쪽에서는…….
“자자, 어서 일하세요!”
한 NPC 소년이 외쳤다.
그 앞에는 미션에 실패한 플레이어들이 앉아 대나무 공예품을 만들고 있었다.
“어휴, 미션 실패했다고 이 고생이냐.”
“난 레벨이 40인데 이런 밀짚모자나 만들어야 하다니.”
“스킬 써서 만들면 안 되나?”
투덜거리자 NPC 소년이 엄하게 외쳤다.
“수제 공예품입니다! 당연히 손으로 만들어야죠!”
“하아, 진짜 굴욕적인 미션 실패네.”
플레이어들은 투덜거리면서도 능숙하게 공예품을 만들었다.
‘예전 생각나네.’
회귀 전에 은혁과 염훈은 일부러 뗏목 미션에서 여러 번 실패했다.
전사와 성기사 2인조로서 다른 녀석들을 상대하기가 슬슬 힘에 부쳤기 때문에, 획기적인 발상이 필요했던 탓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뗏목 미션에서 역대 1위를 해서 보상을 크게 땡겨 받아서 격차를 줄이자…… 라는 계획을 세웠었다.
결과는 그저 그랬다.
‘수영 실력이랑 수공예 실력만 겁나 늘었지.’
은혁과 염훈은 미션 실패 페널티로 공예품만 잔뜩 만들었고, NPC들은 크게 감탄했었다.
그때 고생만 실컷 했던 걸 떠올리니 쓴웃음이 나왔다.
그런 생각을 하며 미션 실패한 플레이어들의 면면을 보게 되었는데.
‘어라?’
회귀 전에 면식이 있는 자들이었다.
‘행복 길드 놈들이군.’
은혁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눈치챘다는 걸 들켜서 좋을 건 없었으므로.
“저 사람들은 딱 3일 전에 미션 실패한 분들이세요.”
밀짚모자를 쓴 소녀 NPC가 말했다.
“뗏목을 타고 가려는 대신, 순간이동 스킬이랑 공간 이동 스킬 같은 걸로 미션을 클리어하려고 했죠.”
“크흠.”
염훈은 왠지 헛기침을 잔뜩 했다.
여차하면 [신성한 날개]로 빠르게 도착점으로 날아갈 작정이었던 것이다.
밀짚모자 소녀 NPC는 짐작했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잠깐 동안 비행 관련 스킬을 쓰시는 건 자유입니다. 하지만 뗏목을 통째로 스킬로 옮기는 건 반칙이세요. 그리고 조언하자면, 섣불리 비행을 하면 악어가 틈을 노리고 뗏목을 부수려 할 테니 쓰지 않는 게 더 나아요.”
소녀 NPC는 오랫동안 봐왔기에 그런 경우를 잘 알았다.
“또한, 뗏목이 부서진다고 즉시 미션이 실패되진 않아요. 완전히 침몰한 경우에만 즉시 미션 실패입니다. 실제로 부서진 뗏목으로도 도착점에 도달하는 분들도 꽤 계시니 중도에 포기하진 마시길 권할게요.”
“유념하지.”
“그럼 바로 뗏목 타는 장소로 안내해 드릴까요?”
“그래.”
셋은 뗏목이 진열된 곳으로 갔다.
뗏목 자체는 나무와 밧줄을 엮어서 만든 전통적인 뗏목이었으나, 전시장은 묘하게 휴양 도시 해변가의 보트 진열장 같았다.
뗏목에는 방향키를 겸하는 노와 작은 돛이 달려 있었다.
“보기에는 허술해도, 통제 마법이 걸려 있어서 방향 전환은 잘 돼요.”
물론, 속도 전환이나 안전장치 같은 기능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