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 아카식 제로와의 거래
-강대한 플레이어여. 그대의 진지한 표정에서, 그대가 내 질문을 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 사실에 우선 감사한다.
정말로 아카식 제로는 사람의 머릿속까지는 들여다보지 못한다는 게 사실이었다.
만약 아카식 제로가 은혁의 생각을 들여다봤다면 폭언을 퍼부었으리라.
‘일단 이 성좌를 애타게 만들어 보자. 그리고 차차 이야기를 진행해보자…….’
쉽지 않은 일일 테지만, 은혁은 해보기로 했다.
“제가 보기에, 고정된 운명 같은 건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은혁은 회귀자가 지을 법한 웃음을 머금지 않으려고 잠시 애를 썼다.
그리고 곧 진지하게 답했다.
“고정된 운명이 있다면, 우리의 모든 행동이 정해진 것이겠지요. 그건 의미가 없습니다.”
-운명이 있으면 의미가 없으니 운명이 없다는 건가? 그건 현상에 원인을 끼워 맞추는 오류다.
“맞습니다. 위의 설명만으로는 부족하죠. 왜냐하면 방금의 제 설명은 우리 행동의 의미를 위해서라도 정해진 운명은 없어야 한다~ 라는 식의 당위론적 주장에 가깝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위의 설명은 개인의 견해나 느낌일 뿐 사실 명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은혁은 ‘제가 보기에’라는 단서를 붙여서 말했었다.
“다만 성좌, 아카식 제로 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저의 견해가 아니라 ‘답’이지요?”
-그러하다.
“하지만 이게 꽤 어려운 문제입니다. 운명이 과거와 미래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니까요. 귀납적으로 증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과거의 모든 사례를 분석해서 운명의 패턴을 분석하려는 시도 자체는 가능하다.
비록 그 시도로 운명의 패턴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할 테지만, 추가로 미래의 일이라는 게 있으므로, 만에 하나 과거의 패턴으로 운명의 법칙을 밝혀냈다 할지라도, 그 법칙이 미래에도 통한다는 법은 없다.
-그럼 자네 주장은 결국 운명은 입증 불가능한 것이므로 없을 거라는 건가? 그건 더더욱 논리적이지 않다. 아직 운명을 입증해내지 못했으니 없다고 가정하는 건 무지에 근거한 호소라는 논리적 오류 아닌가?
“어허, 급하시군요. 아직 제 말 안 끝났습니다. 제가 말한 건 아주 어려운 문제라는 부분까지만입니다.”
-하고자 하는 말을 빨리 말해보라!
아카식 제로는 몸이 없는 성좌였지만, 마치 몸이 달아오른 토론가처럼 흥분했다.
왜냐하면 은혁의 논리 전개는 이미 먼 과거에, 아카식 제로가 했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아카식 제로는, 100층탑 내부의 과거와 현재의 모든 기록을 갖고 있었음에도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운명의 법칙’만은 몰랐고, 그걸 알고 싶었다.
“일단 성좌이신 아카식 제로 님께서 운명의 법칙 알아내지 못하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성좌로서의 약점 때문이십니다.”
-약점?
“네. 그 약점 때문에 진정한 비밀에 도달하지 못하셨기 때문이지요.”
-흠…… 약점이라.
성좌는 위대한 존재로서, 특정 종족이나 현상, 사상을 관장하는 일종의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성좌는 1층부터 100층까지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그마저도 성좌의 격에 따라 범위를 달리했으며, 또한 운명치를 소모해야만 플레이어의 삶에 개입할 수 있었다.
이처럼 그들도 일정한 법칙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아카식 제로가 접근 불가능한 비밀의 장소가 있었으니…….
“답은, 심연에 있을 겁니다.”
-심연……!
심연은 1층보다 한없이 낮은 곳으로, 성좌들조차도 함부로 내려가지 못한다.
아카식 제로만이 아니라, 다른 성좌들도 함부로 심연에는 갈 수 없다.
“저도 소문으로만 들었지만, ‘잊힌 성좌’들은 심연에 거한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맞다.
대표적으로, 비밀의 성좌나, 세컨드 윌 같은 존재가 그렇다.
그리고 강대한 신급 존재가 죽을 때, 심연에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은혁도 회귀 전에 주워들은 게 대부분이지만…….
‘그러고 보니 우리 길드에 고고학자도 영입해야겠군.’
길드가 있으니, 인재 고용 부분에서는 참 든든했다.
-그대는 갑자기 왜 히죽거리는 건가.
“크흠. 아닙니다.”
은혁은 얼른 표정 관리를 했다.
“하여간 성좌께서는 성좌이시기에 심연에 접근하기가 극도로 어렵습니다. 그러니 심연에 믿을 만한 플레이어를 파견하여 조사시키는 것. 그것이 해결책이라 봅니다.”
-그 믿을 만한 플레이어가 바로 그대란 말인가?
“그렇죠. 저와 계약을 맺겠습니까?”
-흠. 성좌 계약이라면 바라던 바다.
“아니, 아니오. 성좌 계약은 아닙니다!”
은혁이 다급하게 외쳤다.
은혁이 성좌 계약을 원하는 성좌는 따로 있었다.
“어디까지나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계약을 원합니다. 그리고 그 계약금으로, 심연에 안전하게 내려가는 법과, 다시 귀환하는 법을 알려주십시오.”
-음? 아까는 7대 길드의 길드장들의 현재 위치를 묻지 않았나?
“물론 그것도 알려주시고요.”
즉, 은혁은 명상의 극한으로 아카식 제로와 접촉한 자로서의 정당한 권리로 질문을 하나 하고, 업무 계약을 맺는 자로서 계약금으로 심연 관련 정보를 더 갖겠다는 것이었다.
-욕심이 많은 자로군.
“하지만 감히 성좌를 대신하여 심연 탐사를 해드리겠다고 나오는 자는 저 말고는 없을 겁니다.”
은혁의 요구도 지나친 것은 아니었다.
운명에 관한 지식을 갈구하는 아카식 제로는, 스스로 심연에 내려가지 못한다.
사악한 지고의 위상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스스로를 ‘몰락한’ 지고의 위상으로 만드는 것도 이와 약간 관련이 있는 이야기다.
지고의 위상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인간 플레이어에게 관여하기 위해, 본래 자신의 격을 깎아내어 ‘몰락’할 수 있었다.
다만, 성좌는 그런 식의 모험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떻습니까? 저를 고용하시겠습니까?”
-음…….
“거절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단, 그 경우에도 7대 길드장들의 위치는 전부 알려주셔야 합니다.”
-어째서인가?
“그야, 위대한 아카식 제로 님께서 지니고 계신 의문의 답을 드리진 못했지만, 그래도 그 의문의 풀이법은 알려드렸으니까요.”
-으음……!
“제가 제공한 풀이법을 듣기 이전이시라면 깔끔하게 거절하셔도 좋지만, 제 입 밖으로 나온 저의 풀이법은 이미 아카식 랜드에 기록되었습니다.”
정보의 성좌라고 하면 만능 무적일 것 같지만, 이런 부분에는 오히려 약했다.
더 나아가, 현재 진행 중인 아카식 제로가 고뇌하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아카식 랜드에 전부 공정하게 기록되고 있을 것이다.
-알았다. 퀘스트 계약을 맺지.
<성좌, 아카식 제로의 퀘스트>
-목표 : 심연에 가서 운명과 그 운명의 법칙에 관한 정보를 가져올 것.
-성공 시 보너스 : 없음. 대신, 강은혁이 심연에 가는 방법과 탈출 방법에 관한 정보를, 아카식 제로가 아는 대로 미리 제공하여야 한다.
-실패 시 페널티 : 아카식 제로가 재생 가능한 모든 종류 죽음의 기억을 1회씩 체험.
-제한 시간 : 3년.
-어떤가?
“제한 시간이 넉넉하니 좋군요.”
은혁은 승낙했다.
-각오하라. 지금부터 내가 심연에 대해 아는 것 전부를 그대의 머릿속에 넣을 테니까.
“준비됐습니다.”
은혁은 [초월 명상] 스킬 유지에 마력 대부분을 돌렸다.
파앗……!!
아카식 제로의 심연 관련 지식이 은혁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의외로 짧았다.
“이게 답니까?”
-그게 내가 아는 전부다.
“흠.”
실망스럽게도 은혁이 기존에 알던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새로운 정보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쓸 만한 정보는…….
‘심연에 떨어진 플레이어 중에, 스스로 탈출한 플레이어는 현재까지 없다.’
의미심장한 정보였다.
“그럼 본래 제 요청인, 7대 길드장들의 현재 위치를 알려 주십시오.”
-그러지. 단, 현재 위치일 뿐임을 감안하라.
파앗!
은혁의 눈앞에 7대 길드장의 위치와 현재 하는 일이 펼쳐졌다.
-정의 길드장 ‘저스티스’의 현재 위치 : 정의 길드 본부 지하 묘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상태임.
-구원 길드장 ‘올마스크’의 현재 위치 : 69층의 히든 던전. 클리어 방법을 궁리 중임.
-평화 길드장 ‘피스메이커’의 현재 위치 : 50층 해안가의 어느 휴양 호텔에서 휴식 중.
-자유시장 길드장 ‘슬레이버’의 현재 위치 : 50층 해안 도시의 시청. 화장실에서 손 씻는 중.
-상승 길드장 ‘어센션’의 현재 위치 : 심연의 어딘가. 위치 불명.
-행복 길드장 ‘해피’의 현재 위치 : 오크의 차원, 오키니움에서 전투 후 휴식 중. 오크와 블랙 드래곤이 연합한 상태이기에, 해피는 이기고 있던 싸움에서 밀리는 중.
-연구 길드장 ‘빌’의 현재 위치 : 5층 연구 길드 본부의 집무실. 잡무 처리 중.
은혁은 7대 길드장의 현재 위치를 확인하고 빙긋 웃었다.
‘의외로 다들 활동적이군.’
회귀 전 은혁의 기억대로라면, 저스티스와 어센션뿐만 아니라, 더 많은 길드장들이 스스로를 봉인하거나 잠들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현재 위치를 관찰해 보니, 운명치의 감소를 감수하고 각자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내 기억에 오차가 있거나, 내 행동이 그들을 활동적으로 만들었다고 봐야겠지. 처리 순서를 슬슬 계산해 봐야겠군.’
-이제, 용건은 다 끝난 것 같군.
“예. 감사합니다. 성좌께서 주신 퀘스트는, 꼭 심연에서 해결하도록 하죠.”
-살아서 돌아오라…….
그리고 성좌의 기운이 떠났다.
은혁은 여태 유지 중이던 [초월 명상]과 [그림자 분신 3.0]을 해제했다.
“우윽.”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이쯤 되면 명상이 아니라 두뇌 학대였다.
‘그래도 귀한 정보를 알아냈다.’
사실, 귀한 것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정보였다.
현재 7대 길드의 부길드장들조차, 자기 길드 길드장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데 은혁은 7대 길드의 길드장들의 현 위치를 대략적으로나마 전부 알아냈다.
‘지도를 얻은 기분이구만.’
지금 얻은 지식과 기존의 회귀 지식을 조합하면, 예측불허인 길드장들에 대해 보다 정확한 예측이 가능해진다.
‘물론, 그전에 부길드장들부터 마무리 지어야겠지?’
시리우스와 테일러 정도만 힘으로 꺾으면, 부길드장급은 완전 정리라고 봐도 될 것이다.
* * *
“왜 이리 안 나와?”
은혁은 대기실에서 염훈을 기다렸다.
은혁이 나온 지 30분이 넘었는데도 염훈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녀석, 명상이 적성에 맞나?’
가끔 이런 경험담이 있다.
태어나서 처음 눈 감고 명상을 해봤더니, 어느새 2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는 이야기.
특히 전자 기기가 넘쳐나는 세상의 젊은 사람일수록, 의외로 그런 체험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는데…….
‘가서 빨리 나오라고 할 수도 없고.’
은혁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며 대기실 의자에 앉아 대기했다.
그때였다.
스윽.
한 선량한 인상의 청년 한 명이 은혁에게 다가왔다.
“무척 고민이 많으신 분 같군요?”
“음?”
이제 보니 그 청년은 구원 길드 마크를 옷에 부착하고 있었다.
“아, 저는 구원 길드 소속 전도 1팀의 마지루스라고 합니다.”
“아, 네…….”
은혁이 어색하게 자리를 피하려 하자, 마지루스는 더 달라붙었다.
“후후. 길드 가입 권유인 줄 아시나 본데, 아닙니다.”
“엥?”
이제 보니 마지루스는 은혁이 누구인지 모르고 말을 건 모양이다.
‘이놈은 보아하니 여기 상주하면서 전도(?)만 하는 녀석인가 보군.’
한 층에만 오래 머물다 보면 은혁의 얼굴까지는 모를 수도 있다.
악한 인간은 아닌 것 같아서 은혁은 마지루스가 자유롭게 말하도록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