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 병기 박물관 (1)
“갑자기 이런 미션이라니……!”
“난이도 상승이 너무 크잖아?”
“하, 하지만 봉인구만 살금살금 교체할 수 있다면 승산이 있나?”
“역시 드래곤은 장난이 아니구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플레이어들은 현실 인식 능력이 뛰어났기에 얼른 태세를 전환했다.
용사입네 들떠 있던 자들은 원래부터 별로 없었지만, 이제는 그런 이들이 한 명도 남지 않았다.
플레이어들의 태도 변화를 본 오브힐은 오히려 기뻐했다.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용사 여러분. 이제 다시 브리핑을 이어가죠.”
그전에 염훈이 손을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예, 용사님.”
“그런 위험한 드래곤을 애초에 어떻게 봉인한 겁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오브힐이 설명했다.
* * *
10년 전.
본래 37층의 미션은 드래곤과는 상관이 없었다.
원래의 미션은 산속의 악한 몬스터를 토벌하는 평범한 미션이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차원의 문이 열리고 그린 드래곤 살라키오스가 강림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벌어진 그 현상에 엘프들은 당혹해했다.
그린 드래곤 살라키오스는 폴링스트 왕국의 가장 커다란 산인, ‘폴링스트 산’ 내부에 동굴을 파고 휴식을 취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기존의 몬스터들이 흉포해지고, 조직적으로 변했다.
그야말로 몬스터의 군세가 된 것이다.
하이 엘프 마법사들은, 강력한 드래곤의 영향력으로 인해 이런 일이 일어난 것으로 추측했다.
본래 드래곤은 그 존재만으로도 하급 몬스터들을 지배하고 군대로 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말에 용사들 즉, 플레이어들이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미션이 갑자기 어려워졌는데?”
몬스터를 토벌하는 미션에서, 몬스터의 군세에 버티라는 미션으로 바뀐 것이다.
그 직후 드래곤의 수하들이 대공세를 가했다.
37층 전체를 통째로 몬스터의 군세에 빼앗기고, 36층마저 위험해졌다.
그러자 플레이어들은 36층~37층 통합층에 도전하는 것을 꺼리기 시작했다.
용사들의 세계인 5층에서, 위험하니 36층~37층에는 가지 말라는 소문이 퍼진 게 분명했다.
그때, 구원자가 등장했다.
가면을 쓴 구원자였다.
“녹룡파 새끼들. 세력 확장을 이렇게 지저분하게 하냐?”
그렇게 투덜거린 가면의 구원자는 혈혈단신으로 37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2시간가량 살라키오스와 전투를 벌였다.
하늘이 녹색으로 변하고, 땅이 울부짖을 정도의 대혈투.
이 전투에 휘말려서 죽은 이들만 2천 명에 달했다.
그리고 마침내 전투가 끝나고, 가면의 구원자가 왕궁에 직접 나타났다.
“휴, 힘들다. 죽이지 않고 봉인만 하려니 힘드네.”
가면의 구원자는 운명치 소모 한계가 있어서 살라키오스를 죽이지 않고 봉인만 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폴링스트 국왕에게 직접 봉인구의 제작법과 설명서를 전해줬다.
“봉인구를 아무리 튼튼하게 만들어도 살라키오스 놈이 워낙 독한 놈이라 금방 고장 날 거야. 그래서 낡은 봉인구를 주기적으로 교환하는 시스템으로 설계했다. 이마저도 쉽지 않을 거야.”
그 순간, 애매했던 폴링스트 왕국과 살라키오스의 구역이 각각 36층, 37층으로 확정되었다.
가면의 용사는 떠나기 전에 한마디 덧붙였다.
“사실 운명치고 뭐고 죽일 수도 있었는데, 죽이려니까 갑자기 몸을 부풀리면서 자폭을 하려고 하더라고. 자폭하게 냅두면 죄다 염소 가스 천지가 될 거 같아서, 봉인으로 쇼부쳤다. 그런 줄 알고, 수고들 하라고?”
가면의 구원자는 그렇게만 말하고 떠났다.
그러자 37층에 도전하려다가 숨어서 관망하던 다른 용사들의 미션창에 변화가 생겼다.
메인 미션이 그린 드래곤을 봉인하라는 미션으로 바뀐 것이다.
하이 엘프들은 즉시 봉인구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면의 구원자가 남기고 간 설명서에 적힌 봉인구조차 하이 엘프들이 제작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이래서야 봉인 시간을 최대로 잡아야 겨우 1개월…….”
즉, 1개월마다 폴링스트 산으로 가서 봉인구를 교체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37층에는 여전히 살라키오스를 섬기는 몬스터들이 있었다.
북쪽, 남서쪽, 남동쪽의 봉인구를 몬스터들은 훼손해댔다.
그걸 방해하기 위해 엘프 유격대가 나서야 했다.
이런저런 상황을 감안할 때, 봉인구는 2주에 한 번씩 교체하는 게 그나마 안전했다.
그리고 그때에 맞춰 5층의 플레이어들, 용사들이 오는 것이다.
* * *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오브힐이 설명을 마쳤다.
“이거 보기보다…….”
“꽤 처절한 통합층이었구만.”
플레이어들은 책임감을 느끼고, 서로 격려의 말을 나눴다.
“도망치지 말자.”
“맞아. 36층, 37층 전부가 그린 드래곤 살라키오스한테 망하면, 난이도가 더 개같이 변할 거야.”
“어쩌면 더 낮은 층까지 도미노처럼 막장이 될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힘내자.”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이들이었지만 브리핑을 듣고 나니 의욕에 불탔다.
그걸 본 오브힐은 조금 감동받은 표정이었다.
“감사합니다. 역시, 여러분은 용사이십니다.”
그리고 곧 엄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실무적인 설명으로 들어가죠. 여러분은 3개의 루트로 진입합니다.”
북쪽, 남서쪽, 남동쪽 루트였다.
“내일 여러분이 실제로 37층에 진입하시고 미션창이 열리면, 아마 각 루트가 이렇게 표시될 것입니다.”
북쪽이 이지 루트, 남서쪽과 남동쪽이 각각 노멀과 하드 루트다.
“어떤 루트로 가게 될 것인지는, 여러분의 성적에 따라 저희 쪽에서 임의로 정했습니다.”
블루종을 포함한 상위권 플레이어들은 하드 루트인 남동쪽을, 은혁과 염훈과 안경녀 같은 플레이어들은 이지 루트인 북쪽을, 나머지는 모두 남서쪽이었다.
“질문이 있소만.”
노멀 루트로 가게 된 한 전사 플레이어가 손을 들었다.
“네, 무엇입니까?”
“그냥 다 함께 이지 루트로 가면 되지 않소?”
“그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작전 장교가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은밀 기동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3개의 루트는 저희, 엘프 세이지들이 신탁과 고심을 거듭하여 알아낸 길입니다.”
세이지는 주술사, 예언가를 겸하는 하이 엘프들이다.
“만약 세 군데 길이 아닌, 한 곳으로만 가거나, 네 군데 이상으로 나뉘어 가는 경우, 신탁과 주술이 깨지고 적들이 눈치챌 확률이 높아집니다.”
“흠…….”
“또한, 세 갈래 길로 분산하여 가는 것은, 셋 중 하나만이라도 성공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무서운 소릴 하시는군.”
“숨기진 않겠습니다. 하드 루트의 플레이어 분들이 적들의 시선을 끌어 희생하더라도, 나머지 루트의 분들이 성공하신다면, 저희 엘프 왕국은 살아남습니다. 그나마도 한동안이긴 하지만.”
좀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솔직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플레이어들이 뒤로 발을 빼진 않았다.
“지금까지의 성공률이 궁금하군요? 이지, 노멀, 하드 루트 각각의 성공률이요.”
안경녀 이미란이 질문했다.
오브힐은 숨기지 않고 답했다.
“이지 루트 90%. 노멀 루트 76%. 하드 루트 53%입니다.”
“성공률이 곧 생존율인가요?”
“거의 같습니다.”
그 말에 내일 하드 루트가 예정된 이들의 표정이 굳었다.
내일 47% 확률로 죽는다는 뜻이므로.
“하지만 이 생존율은 초창기의 것부터 누적된 것이고, 최근 생존율로 보면 또 다릅니다.”
오브힐이 최근 1년간의 생존율을 표시했다.
“그 경우, 이지 루트 93%. 노멀 루트 90%. 하드 루트 76%입니다.”
확실히 최근 성공률 및 생존율은 확 높아졌다.
“저희들 또한 이 일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희 작전대로만 따라 주시면, 모두가 살아남을 확률은 비약적으로 높아집니다.”
이제는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자세한 작전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우선 하드 루트부터.”
하드 루트는 대낮에, 대놓고 남동쪽 루트로 돌격한다.
왜냐하면 남동쪽이 가장 넓고 평탄한 평야이기 때문.
“즉, 남동쪽 루트는 대놓고 미끼 역할을 맡으라는 거군. 이러니 생존율이 낮지.”
블루종이 짜증스럽게 한마디 했다.
오브힐은 무시하고 마저 설명했다.
“노멀 루트의 작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노멀 루트는 정면 돌격이었다.
36층과 37층 경계면 중 가장 가까운 접경지대가 바로 남서쪽 루트였다.
“노멀 루트에 가용 병력의 대부분이 투입될 것입니다. 적들도 그만큼 대비를 하고 있지만, 엘프 세이지의 신탁에 의하면 내일은 성공률이 높을 거라고 합니다. 보호의 주술 또한 평소보다 강하게 걸릴 테고요.”
노멀 루트 쪽 플레이어들은 추가 질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이지 루트는 북쪽의 비밀 통로로 갑니다.”
그린 드래곤이 잠들어 있는 폴링스트 산에는 비밀 통로가 있었다.
북쪽의 좁은 길로 가서, 그 비밀 통로로 잠입하는 것이 이지 루트의 작전이었다.
“가장 비밀스럽게 이동하므로 성공률은 가장 높습니다. 내일 또한 마찬가지겠지요.”
이지 루트 쪽 플레이어인 은혁과 염훈, 안경녀 이미란 등은 서로를 돌아봤다.
서로 더는 질문할 게 없자, 넘어갔다.
“좋습니다. 그럼 ‘병기 박물관’으로 이동하죠.”
“병기 박물관……?”
플레이어들은 호기심 속에서 오브힐을 따라갔다.
* * *
병기 박물관.
왕가의 병기고이다.
하이 엘프 대장장이들이 자랑스럽게 갖춰 둔 무기 및 방어구는 물론, 역사적 유물들도 놓여 있었다.
바로 어제 만들어진 최상급 엘프제 금속 단검도 있었고, 500년 전에 만들어진 엘프제 흑요석 도끼도 있었다.
아무런 마력도 없는 사슬 갑옷도 있고, 마력으로 요동치는 수상한 목걸이도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엘프 세이지들이, 마치 박물관 안내원처럼 줄 맞춰 서 있었다.
오브힐이 웃으며 말했다.
“원하시는 무기 또는 방어구가 있으시다면, 1인당 하나씩 고르실 수 있습니다. 만약 원하는 무기나 방어구가 없으시다면, 그때는 여러분이 소지하고 있는 무기나 방어구 하나에 한해 축성 보너스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오오!”
플레이어들은 감탄했고, 엘프들에게 품었던 불만이 눈 녹듯 녹았다.
대뜸 내일 사지로 보내는가 싶었는데, 이렇게 무기 선택 또는 강화 보너스를 주다니.
“와! 진짜 아무거나 골라도 돼요?”
이미란이 안경을 반짝이며 묻자 오브힐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물론입니다. 1인당 하나씩 자유롭게 고르십시오.”
“와아아!!”
“단!!!”
오브힐이 손가락을 척 세웠다.
“저는 용사 여러분을 믿지만, 여러분의 세계에는 ‘먹튀’라는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
“실제로, 몇몇 분들이 귀한 무기를 챙긴 다음, 내일 공략 직전에 미션 포기 선언을 하고 5층으로 돌아가 버리시는, 아주 돌아 버릴 것 같은 경우가 몇 번 있었습니다.”
오브힐이 처음으로 표정에 살기를 띄웠다.
NPC인 오브힐로서는 자유롭게 게이트를 이용할 수도 없으니 쫓아가서 그 플레이어들을 잡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보증금을 미리 걸어 주셔야 합니다.”
“…….”
“보증금을 걸고 자유롭게 사용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내일 미션을 클리어하시면, 무기를 반납하고, 보증금을 돌려받으시면 됩니다.”
묘하게 현실적인 요구였다.
“에이, 그럼 사실상 빌려주기만 하는 거잖아요? 그나마도 보증금을 걸고.”
“흠흠, 그래도 여러분 앞에 있는 건 싸구려 병기가 아니라, 무려 왕국 박물관급 병기들입니다. 수천 년 전 무기부터, 불과 수개월 전 국왕 전하께서 직접 들고 지휘하시던 검까지 놓여 있지요. 보증금만 받고 대여해 드리는 것도, 엄청난 서비스라고 생각합니다.”
하이 엘프 관점에서 보면 그 말도 맞았다.
박물관에 진열된 무기를 보증금만 받고 빌려주고, 또 무기를 반납하면 보증금을 전액 되돌려주는 경우는 지구 어디에도 없는 서비스이므로.
“자, 시간은 넉넉히 드릴 테니 무기를 골라주십시오. 무기를 고른 뒤에는 곳곳에 서 계신 세이지 분들께 말씀하시면 됩니다.”
오브힐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뒤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