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 블루종과 첩자의 밀회
3차 각성한 성기사 염훈은, 숙련도에 비해 [신성력 감지] 패시브 스킬을 잘 사용하는 편은 아니었다.
자신의 신성력을 방출하는 데 특화된 성품이라, 다른 곳의 신성력을 파악하는 재능은 조금 부족한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음…….”
태양의 여왕 석상은 오랜 세월의 풍파에 많이 훼손되었지만, 그것이 고대의 여왕을 묘사한 석상임을 알 수 있었다.
“기묘하네…….”
남들이 축성을 받네, 무기 대출금(?) 신청을 받네 하면서 바쁘게 돌아다니는데, 염훈은 이 석상 앞에서 꼼짝도 안 했다.
“참 아름답지요?”
하이 엘프 세이지 한 명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염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느낌이 확 오는 석상이군요.”
“후훗. 그러시군요.”
“특히 저 창이.”
“네?”
“저 석상이 쥐고 있는 창이요.”
“……!!”
일반 플레이어 눈에는 보일 리가 없는 창을, 염훈은 똑바로 가리켰다.
“그걸 어떻게……!”
세이지는 경악했다.
이곳에 수많은 용사가 찾아왔었다.
용사 중에서도 랭커라 불리는 특출난 존재도 있었고, 용사들의 국가인 길드연합국의 사실상 정점 중 한 명인 브라이언 부길드장이라 불리던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석상이 쥐고 있는 창을 알아차리진 못했다.
왜냐하면 그 창은 기본적으로 투명했기 때문이다.
‘프리즘 랜스.’
그것은 바로 태양의 여왕이 사용한 또 하나의 무기였다.
“어떻게 찾으신 건가요?”
세이지가 재차 물었다.
“음? 잘 보이지 않나요? 약간 반짝반짝하는 게…….”
처음에는 염훈도 못 찾았다.
하지만 가까이서 관찰하다 보니 프리즘 특유의 반짝거림이 보였다.
‘말도 안 돼.’
세이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석상 근처에 따로 조명은 없었고, 입구 근처이긴 하지만 따로 바깥 광원이 직접 닿도록 세워진 것도 아니었다.
“아……!”
세이지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분은 진짜 성기사였구나.’
[신성력 감지] 스킬을 무의식중에 발동할 때, 아침 햇살 빛깔의 미세한 신성력의 광원이 주변에 방출된다.
그 약간의 신성력이 프리즘 랜스의 표면에 닿자, 프리즘 특유의 반짝거림을 발생시킨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그 반짝임이 이 사람 눈에만 보인다는 건 혹시……?’
세이지는 무례를 무릅쓰고 질문하기로 했다.
“혹시, 왕족이신가요?”
“하? 전혀요.”
“아니면, 인간족의 왕이나 군주를 처단하신 적이 있나요?”
“제가요? 딱히 그런 적은 없는데.”
“아휴, 좀 잘 생각해 보세요!”
“아니,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래요?”
“말이 안 되는 일이 일어나서 그래요! 혹시 당신, 무슨 창업 군주라도 되나요?!”
세이지는 홧김에 한 질문이었지만, 그 말에 어떤 사실이 염훈의 머릿속을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아?”
“아? 라뇨?”
“은혁이가 이렇게 말하라고 했던 게 떠올라서.”
“뭔데요?”
“제가 일단 군주 겸 길드장이긴 합니다.”
은혁은 염훈에게, 이렇게 말하면 협상이 수월해질 거라고 말했었다.
세이지는 당혹해했다.
“에……?”
“그게, 좀 부끄럽긴 한데.”
염훈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게, 여전히 저도 잘 모르지만 은혁이 녀석이 절 길드장 겸 군주로 추대한 모양이던데.”
“……!!”
“그래서인가?”
염훈은 고개를 갸우뚱했고, 세이지는 결심한 사람처럼 눈을 부릅떴다.
“가져가세요!”
“에? 보증금은요?”
“필요 없습니다. 어서요.”
“음…….”
염훈은 석상에서 프리즘 랜스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막상 쥐어 보니, 유리처럼 가볍고 약했다.
프리즘 랜스 :
7성급 아이템.
준 신화급 무구.
태양의 여왕이 사용했던 근접 무기.
폴링스트 왕국이 건국되기 이전, 하이 엘프가 주도하는 빛의 세력이 어둠의 세력과의 전쟁을 벌이던 어느 날, 태양의 9할 9푼이 가로막혔다.
어둠과 겨울이 찾아왔을 때, 태양의 여왕은 실낱같은 태양광의 힘을 흡수하여 증폭, 사방에 떨쳤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겨울을 몰아내고 따스한 세계가 되었다.
하지만 그 엄청난 위업의 대가로, 태양의 여왕 솔라리엔 폴링스트는 급격히 늙어 죽었고, 프리즘 랜스의 내구도는 일반 유리 수준으로 낮아졌다.
즉, 이 무기의 현재 내구도는 유리와 같기에, 실전 무기로서의 가치는 극히 낮다.
전설에 의하면, 진정으로 ‘빛’을 이해하고 있는 군주만이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빠르게 설명을 읽은 염훈은 당황했다.
“저기, 이거 내구도가 유리와 같다는데…….”
“그렇겠지요. 저도 역사책에서 그렇게 읽었습니다.”
“에고, 세게 쥐면 부서질까 봐 걱정이네. 그냥 다시 원래대로…….”
염훈은 다시 석상의 손에 돌려놓으려 했지만.
달크락……!
마치 석상이 의지를 지닌 것처럼 프리즘 랜스를 받지 않았다.
“그것 보세요, 용사님. 얼른 챙기세요. 다른 사람들 보기 전에!”
염훈 곁의 세이지는 낮게 소리쳤다.
다행히 다들 바빴기에 염훈을 보는 다른 플레이어는 딱 두 명밖에 없었다.
염훈도 납득했다.
“음…… 그러네요.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지. 보증금도 안 내고 특혜받는 게 들키면……!”
“그, 그런 의미로 말씀드린 건 아닌데.”
“에? 보증금 말고 다른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말씀?”
“아휴, 말 안 통하네요. 얼른 챙겨욧!”
제삼자가 보면 속 터질 옥신각신 끝에 염훈은 프리즘 랜스를 챙겼다.
그걸 지켜보던 두 명, 즉 블루종과 은혁은 상반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염훈. 자기한테 정말 좋은 건 알아서 잘 챙기는군.’
은혁은 평소처럼 히죽 웃었지만.
‘크윽. 신경 쓰이는군.’
블루종은 내심 이를 갈았다.
멀리 있었기에 [신화 감정] 스킬을 쓸 수는 없었지만, 염훈이 챙긴 것이, 자신의 선즈 크로스보우보다 조금 더 격이 높다는 것은 멀리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작전 장교 오브힐이 다시 나타났다.
“여러분 대부분이 무기를 고르신 것 같군요. 슬슬 폐관 시간입니다.”
그렇게 용사를 위한 무기 고르기는 끝이 났다.
* * *
1층의 식당에서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고, 각자 개인실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그날 밤.
“후아암…….”
일찍 식사를 한 은혁은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시간을 죽였다.
[초월 명상] 스킬을 쓴 다음 자면, 수면 시간이 절반 이하여도 온전히 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보였기에 수면 시간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은혁이 잠을 안 자고 기다리는 이유는…….
‘블루종과 첩자가 대화를 나누는 걸 들어볼 필요가 있으니까.’
은혁은 블루종이 첩자를 심어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미션 전에 블루종이 반드시 그의 첩자와 단둘이 대화를 할 것이라 판단했다.
‘주인님! 주인님!’
미리 건물 뒤편의 나무 어딘가에 잠입을 시켜 둔 메탈 서전트가, [장거리 교신] 스킬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무슨 일인가, 메탈 서전트.’
‘플레이어 블루종이 건물 뒤편으로 나왔습니다.’
‘혼자인가?’
‘그렇습니다!’
‘좋다. 감시를 계속하고, 다른 하이 엘프가 접근하면 다시 연락하라.’
‘앗, 지금입니다! 건물 뒤편 나무의 그림자에서 한 엘프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가.’
보아하니 블루종이 심어 둔 첩자는 미리 건물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의 모습과 목소리를 내게 전달할 수 있나?’
‘목소리는 어렴풋이 들립니다. 엘프 쪽의 모습은…… 현재 이 각도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더 접근하긴 어렵겠지? 현 위치에서 그들의 대화 내용만 전달하라.’
‘알겠습니다, 주인님!’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왜 그딴 선택지를 제시한 거지?”
블루종이 누군가를 추궁했다.
누군가는 고개를 갸웃했다.
“선택지? 갑자기 무슨 소린가? 무기 고르기는 너희가 자유롭게…….”
“그 이전에 말이야. 선택지 A와 B 말이다.”
A. 다음 주까지 휴식하고 대기한다.
B. 예정대로 내일 출발한다.
분명히 그 선택지를 제공했었다.
“내 결정이 아니야. 나는 읽은 것뿐이다.”
누군가가 마지못해 변명했다.
“읽은 것뿐이라고?”
“그래. 평소보다 통과자 숫자가 적어서인지, 시스템이 플레이어들에게 선택지를 줄 것을 제안하더군. 그래서 그렇게 했다.”
하지만 블루종은 그 변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네가 결정한 거 아닌가? 일주일이나 시간을 주면, 놈은 5층으로 내려가서 업그레이드 완료된 무기를 받아 왔을 거다.”
역시 블루종은 은혁이 무기 업그레이드를 맡겨서 빈손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불패불굴 길드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 건 이제 기정사실이다.
물론, 은혁이 파악 가능한 수준의 첩자들뿐이지만.
“천만다행으로 놈들이 B를 선택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A를 고르고 5일이나 놈들에게 시간을 줬다면? 상상만 해도 오싹한 일이었어.”
“그런가……?”
“뭘 처음 듣는 척이야? 놈이 무기 개조를 위해 허점을 드러낸 지금이 유일한 약점이라고 미리 말해뒀을 텐데.”
“…….”
“대답은?”
“언제까지 날 부려 먹을 셈이지?”
“허, 그렇게 느껴지나? 우린 서로 거래하는 사이잖나?”
“웃기지 마. 일방적으로 협박하는 주제에.”
“호오……?”
블루종은 흥미를 보였다.
“평소와 다르군.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뀐 거지?”
“태도를 바꾼 적은 없다. 본래 품고 있던 생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뿐.”
“하하하! 인간처럼 말장난을 해대는군. 이런 걸 보면 행복 길드가 널 잘 길들여 둔 모양이야.”
“비웃을 때인가? 우리도 너희 세계의 정보는 수집하고 있다. 행복 길드의 사실상 지배자인 시리우스가 일종의 실각 상태가 되었고, 일종의 자발적인 가택 연금 상태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그림자 속 하이 엘프의 말에 블루종이 뜨거운 살기를 내뿜었다.
“입조심해라, 반편이 놈.”
“뭐……!”
“네가 그분의 혼혈아라고 해서 높이 평가해 줄 것 같나? 넌 사생아요, 반쪽짜리 하프 엘프야.”
“이놈이……!!”
그림자 속의 엘프 또한 살기를 드러냈다.
휘오오오……!
블루종과 엘프 사이의 살기가 충돌하고, 마력이 푸른 불꽃을 튀겼다.
그때, 로브를 쓴 엘프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
하이 엘프 장군, 네리콘이었다.
은혁이 의외의 사실에 작은 충격을 받는 동안, 메탈 서전트는 두 존재의 강렬한 살기에 부르르 떨었다.
메탈 서전트를 통해 중계 받고 있는 은혁은 갑자기 팝콘이 먹고 싶어졌다.
‘이거 꿀잼이네.’
회귀자인 은혁도 정확히 모르고 있던 비밀들이 술술 나왔다.
‘네리콘이 사실은 하이 엘프가 아니라 하프 엘프였다니. 되게 신기하네.’
겉모습으로 보나 행동으로 보나, 가장 하이 엘프 장군스럽게 행동하는 그가 하프 엘프였다니.
‘게다가 그분의 아들이라……? 여기서 말하는 그분이 누굴까?’
이건 좀 더 이야기를 들어봐야 했다.
하지만 블루종과 네리콘은 곧 살기를 거뒀다.
“후, 관두지, 관둬. 서로 도발은 그만두고, 본래 계약으로 들어가면 어떨까?”
“……일단은 참겠다. 하지만 확답을 다오.”
“무슨 확답?”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 그리고…… 나를 플레이어로 만들어주겠다는 것.”
‘뭐라고?!’
몰래 듣던 은혁이, 이번에는 좀 더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빠르게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렇군. 네리콘이 블루종을 돕는 이유는, NPC의 삶이 아닌 플레이어의 삶을 원해서였구나!’
NPC를 플레이어로 만드는 일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건 아니다.
은혁은 이번 생에서만 해도, 그 사례를 2개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