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만 모든 직업-167화 (167/434)

167화 : 이지 루트를 향한 진군

‘블루종 놈의 하반신만 잠깐 마비시켜서 미션 실패시키고, 내 손으로 안 죽이고 행복 길드 손에 죽도록 만들 생각이었는데.’

은혁은 주먹을 쥐었다.

‘내 손으로 죽여주지. 아주 지저분하게 죽여주마.’

그러고는 블루종이 나간 문의 방향을 보며, 누가 악당인지 모를 법한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은혁의 화난 웃음을 본 염훈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아, 은혁이 녀석 엄청 화났나 보네. 하긴, 나 같아도 정성껏 만든 요리가 짓밟히면 화가 나지.’

염훈은 은혁의 상처 입은 요리혼(?)을 걱정하며, 기회가 생기면 블루종을 자기가 먼저 두들겨 패줘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출정식은 비장했다.

현 국왕은 관문 위에.

용사들과 병사들은 관문 아래에 3개 군단으로 섰다.

각 군단의 인원수는 100명에서 1만 명까지 다양했고, 각 깃발에는 용사들의 전통에 따라,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EASY.

NORMAL.

HARD.

“진짜 깃발이 이지 노멀 하드냐.”

“도대체 왜……?”

스테이지를 총괄하는 관리국의 미션 설정과 최초의 용사로 알려진 ‘가면의 용사’가 내린 결정이 그대로 이어진 탓이다.

플레이어들이 웅성거리는 동안에도 국왕의 축복은 이어졌다.

“용맹한 장군들의 인도와 도움으로, 용사 여러분이 성공적으로 미션을 마칠 것임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이지, 노멀, 하드의 군단장들은 하이 엘프 장군들이었다.

그중, 이지 군단의 장군은 네리콘이었다.

출정식 전, 네리콘은 군단병들을 지켜보는 틈틈이 은혁을 관찰했었다.

은혁은 그 시선을 모른 척했다.

“용사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마침내 국왕의 축복이 끝났다.

마지막 의식으로, 국왕과 그의 아이들은 꽃을 뿌리며 축복했다.

-폴링스트 왕가의 축복이 발동했습니다!

-행운이 10% 증가했습니다!

히든 스탯 중 하나인 행운이 조금 향상됐다.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었지만.

-왕토끼의 발 목걸이가 지닌 행운 감지!

-축하드립니다! 행운이 영구적으로 5% 추가로 증가했습니다!

‘좋았어.’

은혁과 염훈은 왕토끼의 발 목걸이를 걸고 있었기에, 약간이나마 행운이 중첩되어서 남들보다 꽤 높아졌다.

“출발!”

네리콘이 외쳤다.

각 군단은 북쪽, 남서쪽, 남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저벅저벅…….

이지 군단 100명은 북쪽으로 멀리 돌아가는 행군을 계속했다.

용사 선발 시험 때의 숲을 관통하여 한참을 걸었다.

그렇게 36층과 37층의 경계면에 도달한 순간.

<37층 메인 미션 : 그린 드래곤 봉인>

-목표 : 폴링스트 왕국의 3개 군단 중 하나에 편입되어, 드래곤 봉인 임무를 완수할 것.

-성공 시 보너스 : 레벨 2 증가.

-실패 시 페널티 : 실패의 수준에 따라 다름.

-제한 시간 : 3시간.

“여기서부터는 신중하게 접근한다.”

네리콘이 말했다.

그리고 하이 엘프 마법사들이 마력을 합쳐 스킬을 썼다.

“[매스 인비저빌리티].”

“[사일런스 필드].”

파앗!

모두의 모습이 투명해지고, 소리가 차단됐다.

“군단으로 묶인 상태이므로 서로의 모습은 잘 보일 것이다. 단, 섣불리 개인행동을 하면, 적들에게 관측될 수 있다.”

가령, 한 명이 넘어져서 흙무더기가 부자연스럽게 쏟아지거나 하면, 경계를 선 몬스터에게 들킬 수 있다.

“또한 소리가 차단된 상태이므로 작은 소리로 대화하는 건 괜찮다. 그러나 꼭 필요한 이야기만 하도록. 알았나?”

“옛.”

그러자 네리콘은 입을 다물고 손짓으로 명령을 내렸다.

‘이동.’

네리콘이 앞장섰다.

몇 걸음 뒤, 숲의 끝이 보였고.

“웃.”

“으윽…….”

몇몇 인간 플레이어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그도 그럴 것이, 녹아 버린 숲의 잔해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살라키오스가 파괴한 흔적이군.’

브레스 공격 3회면 36층이 전멸한다는 주장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숲과 그 안에 살던 동물들은 엿가락처럼 통째로 빠르게 녹았다.

그 상태로 딱딱하게 굳은 모습을 보고, 플레이어들이 신음한 것이다.

스윽.

네리콘이 플레이어들을 돌아봤다.

“이런 걸로 일일이 소리 내지 마라. 이런 것까지 가르쳐야 하나?”

플레이어들은 입을 틀어막고 사과의 눈짓을 해 보였다.

“…….”

네리콘이 다시 지휘했다.

용사니 뭐니 해도, 결국 이 지역에서 가장 노련한 이는 네리콘이었다.

‘물론, 지휘력과 전투력이 꼭 비례한다는 법은 없지만.’

은혁이 바로 뒤를 따르며 생각했다.

‘그나저나, 이놈이 날 어떤 방식으로 죽이려 들까?’

은혁은 그게 궁금했고, 사실 좀 두근거리기도 했다.

공포 영화를 볼 때, 깜놀 장면이 반드시 튀어나올 것임을 예상하고 있어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마찬가지인 것처럼.

은혁은 얼마간 대비한 채로 스릴을 즐기고 있었다.

네리콘이 잠시 멈춰서 손짓으로 주의를 줬다.

‘이 뒤부터는 발 디딤을 주의하라.’

염산으로 녹은 토사가 뭉치고 쌓여서 만들어진 언덕이 나타났다.

퍼석퍼석…….

밟을 때마다 산성 토양이 허물어졌다.

실제로 공기도 무척 부옇게 변해 있었다.

플레이어 몇이 손짓으로 다급하게 주변에 물었다.

“우웁……!”

“이거 산성 아님? 그냥 가도 되나?”

그러자 다른 엘프 군단병들이 괜찮다고 했다.

“산성 공기처럼 보이지만 그냥 먼지입니다.”

“깊이 들이마시지만 않으면 됩니다. 소리 내지 말고 얕게 숨을 쉬면 됩니다.”

오히려 엘프 군단병들이 더 노련한 용사들 같았다.

네리콘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일부러 경멸하듯 플레이어를 한 번씩 쳐다보고 앞장섰다.

‘후후. 어제 엿듣기를 잘했어.’

네리콘이 왜 플레이어들에게 일일이 경멸조의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가 갔다.

자신은 유능한 장군임에도 NPC와 플레이어의 중간적 존재라서 정신적으로 괴로운데, 순수한 플레이어들이 어중이떠중이처럼 구니 경멸조로 보지 않을 수 없던 것이었다.

물론, 하루 만에 군사 작전에 동원되는 처지임을 감안하면 플레이어들도 양호한 편이지만, 그간 플레이어들의 크고 작은 삽질을 봐 왔기에 경멸감이 더 큰 것이다.

‘그게 네 약점이 될 거다, 네리콘.’

뒷배경과 속사정을 모두 알게 된 은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네리콘이 수신호를 내렸다.

‘정지.’

예상보다 이동이 빨라서, 여기서 잠시 대기해야 했다.

“노멀 군단과 하드 군단이 전투를 시작할 때까지 대기한다.”

네리콘이 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사사삭…….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보였으나, 모래 색깔의 위장복을 입은 스톤 오우거들이 있었다.

덩치 큰 오우거들이 위장복을 입고 경계를 서는 걸 보니 묘했다.

“한때는 저들도 대화가 통하는 이들이었지.”

자기 구역에 대한 경계심이 강하긴 했지만, 이따금 엘프들과 교역을 하곤 했다.

하지만 살라키오스의 강림 이후, 그들은 가장 먼저 종족의 운명을 바쳤다.

“지금은 살라키오스의 하수인들일 뿐이다. 한 놈만 살려 둬도 위협적이니, 가차 없이 처치하고 들어간다.”

그때, 은혁이 질문했다.

“저들이 만든 통로로 들어가는 건가?”

“그렇다.”

“미리 지리 공부 좀 시켜 주지 그래? 길이 복잡할 거 같은데.”

“가르쳐 줄 시간도 없고, 가르쳐주면 용사란 것들은 멋대로 돌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더군.”

그때, 멀리서 폭발음이 났다.

쿠르릉……!

먼지구름이 일어나고, 교전음이 들려왔다.

“시작됐군.”

네리콘은 등에 멘 활을 꺼냄과 동시에, 굵은 화살을 메기고 활시위를 당겼다.

뚜드드드……!

스톤 오우거를 향해 조준하더니.

“[확산의 사격].”

투쾅!!

활시위를 놓았다.

그러자 화살 하나가 쏘아져 나가더니.

촤차자작!

굵은 화살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푸확!! 푸확!! 푸확!!

그렇게 나뉜 화살들은 각 스톤 오우거들의 머리통에 꽂혔다.

“와……!”

“엄청나군요. 저런 스킬이 다 있나?”

“나도 궁술사인데 저렇게는 못 한다.”

다들 감탄했다.

은혁은 네리콘을 관찰하며 답을 내렸다.

‘화살을 제작하는 궁술사.’

은혁은 네리콘의 직업을 유추했다.

NPC 중에서도 특출난 존재는 고유 수식어를 갖고 살아간다.

무기 제작자인 제인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네리콘은 플레이어와 NPC의 중간적인 존재였으니, 더욱 그러하겠지.’

스톤 오우거들이 죽자, 봉인 기술자들이 능숙하게 숨겨진 통로를 발견했다.

그리고 통로 입구에 대고 [스캔] 스킬을 비롯해 안전을 검사했다.

“특이 사항 없습니다, 장군님.”

“좋아. 이동하라.”

통로에 들어갈 때는 네리콘이 후방에 서고, 봉인 기술자들과 다른 엘프 군단병들이 앞장섰다.

“용사들도 따라가도록.”

플레이어들도 뒤따라 들어갔다.

그때였다.

쿠르릉……!

갑자기 산이 떨렸다.

후두둑……!

안전한 통로의 천장이 갑자기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런?!”

“무너지는 건가!”

플레이어들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괜찮습니다!”

“노멀 루트와 하드 루트 쪽에서 전투가 격렬해지면 가끔 이렇습니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안정되니 따라오십쇼!”

엘프 기술자들과 군단병들이 외친 순간.

콰콰쾅!!

와르르르!!

탄광 매몰 사고를 연상시키듯, 큰 파열음과 흙무더기 쏟아지는 소리가 통로를 가득 채웠다.

“으악! 안전하다며!”

플레이어들이 외쳤다.

몬스터랑 정면으로 싸우는 거라면 자신 있지만, 땅굴 매몰 사태는 이들도 처음 겪는 일이기에 크게 당황했다.

“괜찮습니다, [땅굴 두더지 소환]!”

“[스톤 엄브렐러]!”

“[하급 대지의 정령 소환]!”

하이 엘프들답게 정령과 자연에 친화적인 스킬을 많이 알고 있었다.

쿠르릉……!

떨림이 진정됐다.

“머, 멈췄다.”

“휴, 죽는 줄 알았네.”

플레이어들이 호들갑을 떨자 하이 엘프 기술자들과 군단병들이 쓴웃음을 지었다.

“여긴 이지 루트입니다. 이지 루트로 책정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하이 엘프들은 이 상황에서도 친절하게 말했고, 플레이어들은 얼굴을 붉혔다.

그때였다.

“어? 은혁이는?”

염훈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네리콘 장군님도…….”

두 사람만 실종됐다.

* * *

하드 루트의 전투는 격렬했다.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

엘프 병사들이 방진을 짰지만.

“비켜.”

블루종이 나서더니, 최전선에서 스킬을 난사했다.

“하앗! [버닝 윙즈]!!”

화르르륵!!

뼈마저 태워서 부스러지게 하는 초고열의 날개가 블루종의 등에 생성됐다.

“으악!”

“얼른 다 피해!!”

플레이어들이 외쳤다.

블루종은 팀킬이 발생하건 말건 화염을 난사했고, 혼자 힘으로 적의 방어선을 뚫었다.

“하하하! 모조리 다 타버려라!!”

블루종은 빠르게 길을 뚫는 데 집중했고, 일부러 폭발을 많이 일으켰다.

블루종이 이렇게 싸우는 이유는…….

‘폭발을 많이 일으켜야 이지 루트의 통로에서 지진이 발생하기 때문이지.’

토양이 산성으로 변하고, 이미 여러 차례 전투를 치렀기에 이지 루트의 통로는 제법 잘 무너졌다.

‘그 틈에 네리콘은 강은혁을 비밀 통로로 던져 넣는다. 그리고 암살한다.’

그것이 본래 계획이었다.

하지만 블루종에게는 그만의 계획이 하나 더 있었다.

‘두 놈 다 죽여 버린다.’

블루종의 판단에 따르면, 아무리 함정을 미리 파 둔 네리콘이라 해도, 강은혁보다는 약했다.

‘아마 7대3으로 강은혁이 유리하겠지.’

그럼에도 네리콘 또한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이 원하는 정체성 즉, 플레이어의 자격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네리콘과 강은혁 모두 지친 순간.

‘그때 내가 나타나서 두 놈에게 공평하게 막타를 친다. 그리고 죽인다.’

블루종은 히죽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