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 그린 드래곤 살라키오스 (1)
염훈이 가장 중요한 구속 장치에 대해 묻자, 기술자들은 얼른 대답했다.
“예. 구속 장치가 있는 곳에는 수호 마법이 걸려 있기에, 사실 이곳은 대피처로 써도 될 정도로 안전합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그보다 구속은 풀린 겁니까?”
“그게…….”
기술자들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딱 반쯤 풀렸달까요…….”
* * *
그린 드래곤 살라키오스의 방은 짙은 녹색의 비취로 장식된 넓은 방이었다.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도록 만들어진 곳이지만.
콰콰쾅!!!
[화신 강림] 상태의 블루종은 벽을 부수고 녹이면서 이곳까지 들어왔다.
멈칫.
블루종은 살라키오스가 잠든 모습을 보고 순간적으로 겁을 집어먹었다.
하지만 블루종의 손은 마치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처럼 거칠게 움직였다.
화르르르!!
블루종의 손에서 불꽃이 살라키오스의 주변으로 뿜어져 나갔다.
푸른 불꽃에 의해 벽과 천장에 불이 붙고, 장식된 비취는 녹아내렸다.
“흐흣! 흐하하하…….”
블루종은, 비늘에 푸른 불꽃이 붙은 거대한 그린 드래곤 살라키오스를 보며 웃었다.
정신은 붕괴하기 직전.
꿈틀.
살라키오스가 눈을 떴다.
비늘에 붙은 푸른 불꽃은 그것만으로도 꺼졌다.
하지만 살라키오스의 몸에는 쇠사슬과 말뚝이 여전히 박혀 있었고, 그것들은 천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천장 위쪽이 바로 구속구 제어 장치가 있는 비밀의 방이었다.
“아아, 손님이 오셨군.”
살라키오스는 낮잠 후에 깬 귀족처럼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히히힉, 해내, 해냈다아…….”
블루종은 이미 정신을 반쯤 상실한 채였고, 정신의 절반은 그가 섬기는 성좌, ‘아브러스 플레임’이 잠식하고 있었다.
“나의 충직한 종복이여. 웃음을 그쳐라. 네 몸을 잠시 이용해야 하니까.”
성좌, 아브러스 플레임이 블루종의 목소리로 말했다.
블루종은 그 말에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아브러스 플레임이 블루종의 몸을 빼앗은 순간.
스으으으…….
그린 드래곤 살라키오스는 뱀처럼 유연한 몸짓으로, 어느새 블루종의 몸 뒤에 와 있었다.
살라키오스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날 깨운 손님이 둘이었군. 성좌께서 여기엔 어인 일이시오?”
살라키오스는 블루종 몸속에 깃든 아브러스 플레임을 간파했다.
만약 조금만 수상쩍게 행동해도 깨물어서 죽일 작정이었다.
“거래를 하러 왔소.”
아브러스 플레임의 목소리는 넘실거리는 불꽃처럼, 적당한 거리에서는 부드럽고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재미있는 거래이길 바라오. 일부러 날 깨울 정도라면.”
“하하. 서로에게 득이 되는 거래일 거요. 여길 나가서 블릿츠 데바를 죽입시다.”
“흠……!”
화신 아브러스 플레임과 뇌신 블릿츠 데바는 모두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호전적인 성좌였다.
둘 다 자신의 신도에게 최강의 공격력을 부여해 주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는 성좌들.
“성좌께서는 갑자기 무슨 제안을 하시는 거요?”
“아, 바깥소식을 모르시겠군. 얼마 전, 블릿츠 데바의 으뜸 장기짝 하나가 엉망이 되었다고 하오.”
상승 길드 부길드장 브라이언의 이야기였다.
“블릿츠 데바의 명예와 권능 모두가 감소한 상태! 즉, 성좌로서의 힘이 약해진 상태요! 어떻소? 함께 가서 블릿츠 데바를 죽입시다.”
“화염의 성좌다우시군. 매우 과감한 제안이신데.”
살라키오스는 염산에서 피어오르는 산성 아지랑이처럼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문제가 몇 가지 있는데.”
“다 예상하고 왔소. 가령.”
아브러스 플레임이 선수 치듯 말하려는 순간.
“성좌시여.”
육신의 본래 주인인 블루종이 애가 끓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너무, 괴롭습니다. 내면의, 영혼의 통로가 타는 듯합니다……. 꼭, 죽을 것만 같은…….”
블루종은 하소연했다.
하지만.
“너는 죽진 않는다.”
아브러스 플레임이 다시 블루종 몸체의 지배권을 뺏으며 웃었다.
“적어도 내가 블릿츠 데바를 죽일 때까지는.”
그리고 블루종은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의식의 밑바닥에 갇히고 말았다.
밑바닥으로 떨어지며, 블루종은 진실을 깨달았다.
‘이게 아브러스 플레임의 목적……!’
블루종은 영혼을 바친 대신, 성좌, 아브러스 플레임의 힘을 손쉽게 빌려 쓸 수 있다고 판단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블루종은 영혼을 버리고 힘을 얻은 자신에게 만족하며, 행복 길드의 1인 특수팀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내면의 통로로 성좌의 힘을 쓰면 쓸수록, 그의 내면은 푸른 불꽃으로 물들어 점점 더 아브러스 플레임이 침투하기 쉬운 상태로 변해 갔다.
그리고 블루종이 자신보다 강한 자, 은혁에게 빈사지경에 이르자, 아브러스 플레임은 계획대로라는 듯이 블루종의 몸을 뺏은 것이다.
‘말도 안 돼. 내가 계략에 당하는 역할이라니.’
성좌의 힘을 빌려서, 네리콘을 배신하고 은혁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 블루종이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믿었던 성좌에게 당하게 됐다.
‘아…….’
블루종은 깊은 늪에 빠진 사람처럼 의식의 밑에 가라앉게 되었다.
“후후. 실례. 다시 설명을 시작하겠소.”
아브러스 플레임의 말투는 평소 블루종이 ‘실례’ 하고 말하던 말투 그대로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린 드래곤 살라키오스 님께서 우려하시는 건 구속구 문제 아닙니까?”
“뭐, 그것도 있소만.”
“구속구 따위는 통째로 녹여 없애면 그만 아니오리까?”
성좌의 말에, 살라키오스는 알 듯 말 듯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걸 본 성좌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군요. 결국, 살라키오스 님께서는 어느 정도는 스스로 구속구에 당해주고 있다……라는 건데.”
“두 가지 이유 때문이오. 첫째는, 관리국을 불필요하게 자극하고 싶지 않다는 것. 그래서 이 미션이니 뭐니 하는 장난질에 동참하고 있는 거요.”
그랬다.
살라키오스는 이지 루트니 하드 루트니 하는, 엘프와 플레이어들의 침공 루트도 대략 다 알고 있었다.
구속구에 봉인되어 잠들어 있어도, 중형급 이상의 드래곤이 지닌 ‘용의 감각’은 너무나도 예리해서, 침입자가 몇인지는 물론, 왜 왔는지조차 추측할 수 있을 정도다.
“둘째는, 가면의 용사 올마스크를 존중하기 때문이오.”
올마스크는 구원 길드의 길드장이다.
엘프 왕국에서는 올마스크를 가면의 용사라 칭한다.
살라키오스는 자신을 가볍게 꺾은 올마스크를 존중했다.
“그야말로 혈투였지. 나는 패배를 인정했고. 이제 와서 그와의 약속을 깨고 싶진 않소. 만약 그래야 한다면, 나는 물론이고, 나를 꺾은 올마스크 조차도 납득할 정도의 큰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오.”
“원소 차원의 대통합이면 어떻겠소?”
“……상당히 스케일이 큰 이야기를 하시는군.”
“가장 주류적인 4대 원소 즉, 물, 땅, 공기, 불의 원소 차원을 모두 통폐합하여 지배하는 거요!”
“하지만 블릿츠 데바를 죽이자고 하지 않았소? 블릿츠 데바는 번개의 성좌 아니오?”
“그렇소! 우선 블릿츠 데바를 죽이고, 그 힘을 흡수할 수만 있다면!”
아브러스 플레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럼 힘의 균형은 단숨에 내 쪽으로 쏠릴 터! 그럼 나머지 물, 땅, 공기의 차원을 내가 지배하는 거요!”
“……그야말로 불같은 계획으로 들리오.”
“하하! 칭찬으로 듣겠소!”
“하지만 문제가 있소. 블릿츠 데바 즉, 번개의 성좌가 죽으면 번개의 차원도 소멸할 터. 그 경우 100층탑 전체의 시스템적 균형에 손상이 올 수도 있소만.”
“단순히 죽이는 거라면 그럴 것이오. 하지만 나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성좌요. 죽여서 흡수하는 건 일도 아니지.”
“하나의 성좌가 다른 성좌의 힘을 흡수한다는 발상은…… 흐음…….”
“뭐요? 말해 보시오, 살라키오스 님.”
“지고의 위상들끼리 하던 짓 같구려?”
살라키오스가 느물거리며 비꼬았다.
오늘날 그들이 ‘지고의 위상’과 ‘몰락한 지고의 위상’으로 나뉜 이유.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지고의 위상들끼리 저질렀던 ‘폭식의 시대’가 가장 컸다.
지금 스스로 잠들어 있는 몰락한 지고의 위상 중 과반수는, 몸의 일부가 뜯어 먹히고 100층탑 곳곳에 몸을 숨기고 있는 존재였다.
“지고의 위상들이 저지른 일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신 것으로 보이오.”
“……말씀이 과하시구려, 살라키오스 님.”
아브러스 플레임의 눈이 파랗게 타올랐다.
모처럼 정중하게 말하고 있는데, 감히 스테이지 보스 수준인 살라키오스가 비아냥거리자 화가 난 것이다.
살라키오스는 드래곤의 방식으로 입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용서하시오. 그대의 강력함은 잘 알고 있으니.”
사실, 살라키오스는 아브러스 플레임에 비해 약했다.
살라키오스가 거대한 그린 드래곤이라고는 해도, 아브러스 플레임의 본체를 상대로는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그럼에도 살라키오스가 대담하게 나오는 이유는, 아브러스 플레임이 살라키오스를 꼭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화염의 차원으로 가려면 드래곤의 날개가 필요하기 때문이겠지?”
드래곤의 날개는 단순히 하늘을 나는 도구가 아니다.
드래곤 컬트 소속의 모든 드래곤의 날개에는 스테이지의 경계면을 무시하고 자유로이 날아갈 권능이 담겨 있다.
이는 엄청난 자유였다.
지고의 위상들도 아래층에 내려가고 싶으면 스스로를 몰락시켜야 하고, 성좌들은 자신과 계약한 성직자를 통하지 않으면 100층탑에 물리력을 행사하기 어렵다.
하지만 드래곤은 날개만 자유롭게 펼칠 수 있다면, 그리고 운명치의 소모만 감수할 수 있다면, 몇 층이건, 다른 층이건 상관하지 않고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하다.
“즉, 성좌께서는 나를 구속에서 풀어주는 은혜를 베풀고, 나의 날개를 빌리고 싶다 이건데…….”
살라키오스가 말끝을 흐리자, 아브러스 플레임이 황급히 덧붙였다.
“뿐만 아니오. 화염의 권능을 나누어 드리겠소.”
“허허. 나보고 그대의 신도가 되라는 거요?”
“어디까지나 형식적으로만, 그나마도 블릿츠 데바를 죽일 때까지만 그런 거요. 그리고.”
“됐소.”
살라키오스는 벌써 흥미를 잃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 그대의 제안은 흥분되지 않소.”
“흥분이라니. 드래곤답지 않은 말씀이군.”
“올마스크와의 대결은 매우 뜨거웠소. 그걸 떠올리고 복기하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지. 하지만 그대의 제안은 벌써 지루하군.”
“뭐……!”
“언젠가 올마스크가 가면을 바꿔 쓰며 해준 말이 있소. 지금 성좌께서 그 상황에 처하신 것 같으니 충고드리지.”
살라키오스가 약간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올마스크는 나와 싸우던 중 가면을 바꿔 쓰며 이렇게 말했소. ‘나뿐만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써. 근데 그거 알아? 가면은 도구인데, 사람은 때때로 자기가 쓴 가면에 휩쓸리지. 진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쓴 가면이 그야말로 진짜 얼굴이 되어 버리는 거야. 흠, 근데 내가 할 소리는 또 아닌가’라고 했었지.”
“……!!”
“성좌여. 그대는 블루종이라는 인간의 육체를 뺏어서 꼭두각시 삼고 있지만, 그대의 정신 또한 어느 정도 그 육체에 휘둘리고 있다네.”
실제로 그랬다.
아브러스 플레임은 블루종을 의식의 밑바닥에 처박았지만, 무의식중에 블루종의 사고방식과 말투를 활용하고 있었다.
“블릿츠 데바에 대한 경쟁심 때문에 자기 자신의 진짜 정체성마저 불태워 버린 모양이군. 화염의 성좌가 할 법한 일이긴 한데, 솔직히 성좌 치고는 격조가 많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오.”
살라키오스는 신랄하게 비판을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