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 용사의 귀환
“오오! 눈을 뜨셨구려! 용사여!”
“아, 폴링스트 국왕 폐하.”
무릎을 꿇진 않았지만 정중히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일어나시오! 우리의 용사들이여! 두 분이 마지막까지 살라키오스를 상대로 남아 있었다는 걸 전해 들었소!”
안경녀 이미란 덕분이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을 피신시킨 뒤, 혼자 돌아와서 상황을 지켜보려 했고, 은혁과 염훈이 힘겹게 산을 탈출하려는 것을 발견하고 알린 것이다.
“특히 강은혁 플레이어! 당신은 진정한, 가면의 용사를 뛰어넘는 위대한 업적을 이뤄냈소!”
“전부 신물의 힘 덕분이지요.”
은혁이 선즈 크로스보우를 내밀어 보였다.
이미 소유권은 은혁에게 넘어온 상태다.
“그러한 신물을 자유자재로 쓰는 자야말로 위대한 용사 아니겠소? 용사의 증표를 내밀어 보시오!”
은혁이 용사의 증표를 내밀자, 폴링스트 국왕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기도했다.
그 순간.
-용사의 증표가 강화되었습니다!
-용사의 증표 → 전설의 용사의 증표
“과인이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가 전부이오만, 앞으로의 여정에 쓸모가 있을 것이오.”
“아……!”
은혁은 ‘전설의 용사의 증표’를 받아들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걸 여기서 이런 식으로 얻는다고?!’
은혁이 충격을 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전설의 용사의 증표가 훗날 왕국 단위의 스테이지에서 귀찮은 과정을 확 단축시켜 주는 유용한 물건이기에.
둘째는, 내심 깔봤던 폴링스트 왕국의 국왕이 이런 걸 줄 수 있는 NPC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내가 회귀를 했어도 이렇게 모르는 게 많았구나.’
7대 길드 장악에만 신경 쓰느라 은근히 NPC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덜 썼는데, 승리로 가는 길에는 반드시 NPC가 필요하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과분한 증표 감사합니다.”
“허허. 이미 잘 알겠지만, 그 물건에 대해 설명을 해드릴까 하오만.”
“꼭 부탁드립니다, 폐하.”
“여러분과 같은 플레이어들은 다른 차원을 누비는 존재라는 건 알고 있소. 그 차원들을 ‘층’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리고 우리 왕국과 같은, 다른 왕국들이 존재하는 층이 있다고 하더군. 그 증표는 다른 차원의 왕국에서도 통할 거요.”
“실로 그러합니다. 용사의 이름에 걸맞게 쓰겠습니다.”
“하하! 그래 주면 더 바랄 게 없소. 그보다 죄수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소만.”
“네리콘과 블루종 말이군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어찌 하는 게 좋겠소?”
‘흠. 어쩐다?’
솔직히 말하자면 둘 다 당장 쓸모가 없었다.
‘둘 다 너무 기대 이하로 약했달까.’
필요한 건 대부분 빼먹었다.
그나마 블루종은 훗날 시리우스의 재판에서, 시리우스의 범죄를 증언할 증인으로 쓸모가 있겠지만…….
‘결정했다.’
“네리콘은 배신자입니다. 그렇죠?”
“그렇소만.”
“제가 거둬가도 되겠습니까? 쓸모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흠.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추방령을 내리겠소. 놈을 거둬가건 말건 신경조차 쓰지 않는 걸로 하겠소.”
“호탕하시군요. 좋습니다, 폐하.”
“그럼 블루종은?”
“아, 그놈은 필요가 없군요. 폴링스트 왕국 측에서 당분간 가둬주시겠습니까?”
예상보다 차가운 말에, 폴링스트 국왕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어어, 블루종은 플레이어 아니오?”
“정확히는 성좌에게 단물 다 빼 먹힌 플레이어죠.”
블루종은 방치해도 죽는다.
이미 영혼을 아브러스 플레임에게 바친 상태인데, 둘 사이가 틀어졌으므로.
“하지만 하이 엘프의 숲에서 요양을 시키면 안 죽고 천수는 누릴 수도 있겠죠. 성좌에게 휘둘려서 드래곤을 깨울 뻔한 얼빠진 놈이지만, 그래도 쓸모가 없진 않았습니다.”
놈에게 아브러스 플레임이 강림한 덕분에 청염백광단검을 강화시켰고, 그 강화된 한 방으로 그린 드래곤에게 치명상을 입힌 것이므로.
“흠. 그러겠소. 껄끄러운 존재이고, 폴링스트 왕국에 끼친 피해도 크지만…… 그대 말대로 요양을 겸한 가택 연금을 시키는 게 나을지도.”
폴링스트 국왕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은혁과 염훈, 폴링스트 국왕은 두런두런 잡담을 나눈 뒤 작별 인사까지 했다.
“음? 좀 더 편히 쉬다 가지 않고 떠나는 거요?”
“벌써 3일이나 쉬었습니다, 폐하. 저희들의 본거지 차원이 걱정됩니다.”
28층이나 5층에는 블루종이 패배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28층에 잠입해 있는 적들, 혹은 행복 길드 부길드장 시리우스에게 어떤 자극으로 가해졌을지 알아봐야 했다.
“아아, 수많은 우리 국민들이 사흘째 그대만 기다리며 환호하고 있는데,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려는 거요?”
“네.”
은혁은 이런 부분에서는 칼 같았다.
기대와 다른 답변에 폴링스트 국왕은 조금 아쉬워했다.
폴링스트 국왕을 수행하는 기사들도 조금 무안해질 지경.
하지만.
“폐하. 저는 폐하께서 인정해주신 전설의 용사입니다. 저는 다른 되바라진 것들을 작살 내기 위해 떠나야 합니다.”
“으음……!”
“그러니 국민들에게는, ‘전설의 용사는 다른 일을 하러 떠났다.’ 이렇게만 전해주십쇼. 이상입니다.”
은혁의 말을 들은 국왕과 기사들은 모두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군.”
“인간식 표현이지만, 쿨내가 아주 진동을 하네요.”
“그러게요. 약간 재수 없는데 좀 멋있는 듯.”
은혁은 엘프들의 감탄사를 무시하고 염훈에게 말했다.
“염훈. 게이트에서 기다릴 테니까 네리콘 끌고 와.”
네리콘은 NPC였지만, 이미 불패불굴 길드에 충성을 맹세한 상태였고 염훈과 은혁이 그 자리에 함께했기에, 게이트를 수월하게 이용 가능했다.
“정말 바로 떠나시려는군. 좀 천천히 선물할까 했지만.”
폴링스트 국왕은 따로 준비해 둔 작은 보석 상자를 내밀었다.
“내 고조부 대의 금화요. 드래곤 토벌에 성공한 용사에게, 모두의 앞에서 감사를 표하려고 준비한 건데, 급하게 떠나신다니, 아무 말 말고 받아주시오.”
털썩!
갑자기 은혁이 두 무릎을 꿇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감사합니다!”
그리고 두 손으로 받았다.
그걸 본 하이 엘프 기사들이 또다시 중얼거렸다.
“와, 좀 깬다.”
“용사의 증표 받을 때는 서서 받더니만 금화 준다니까 무릎 꿇고…….”
“저것이 인간 용사의 진정한 모습……!”
하이 엘프들의 감탄사는 끊이지 않았다.
잠시 뒤.
은혁은 왕족들의 이어지려는 감사를 극구 사양하며 게이트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네리콘과 염훈이 와 있었다.
“네리콘. 미리 말해 두지만 염훈과 불패불굴 길드에 절대 충성해라.”
“알았다.”
그리고 그들은 게이트를 통해 쿨하게 떠났다.
* * *
28층을 통해 28.5층, 콩나무 본부로 돌아간 은혁과 염훈은 의외로 별일이 없어서 놀랐다.
“이상하네. 내가 세븐 칼리버도 두고, 부상당해서 3일이나 자다가 왔으니, 뭔가 우리 길드 내부에 잠입한 행복 길드 놈들이 뭔 짓을 벌여야 정상인데.”
은혁이 중얼거리자 한 길드원이 다가왔다.
“빨리 오십시오! 정의 길드 부길드장이 와 있습니다.”
“어? 무슨 일인데?”
“지금 5층에 큰일 났습니다.”
“무슨 큰일?”
“행복 길드의 부길드장 시리우스 아시죠?”
“알지. 모를 리가 없…….”
“그가 죽었답니다!”
사건은, 은혁이 의식을 되찾기 수 시간 전에 일어났다.
* * *
새벽 3시경.
행복 길드의 부길드장 시리우스는 자택 연금 상태였다.
경비대원 NPC 12명, 정의 길드 소속 길드원 12명이 시리우스의 2층짜리 저택 주위를 포위했다.
조만간 있을 재판에 앞서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쿠르르르……!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지진인가!”
5층 길드연합국 스테이지에서는 자연재해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진이 일어난다는 건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이건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콰콰쾅!!!
굉음과 함께 시리우스의 저택과 그 주변 땅이 푹 꺼지기 시작했다.
“무너지는 건가!”
“아냐! 가라앉는 거다!”
사태를 금방 파악했지만, 경비대원 NPC건, 정의 길드원이건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콰르르르르르……!
건물은 15미터 이상 깊이 가라앉았다.
“일단 내려가 보겠습니다!”
한 용감한 정의 길드원이 외쳤다.
그러자 현장 주임이 외쳤다.
“이봐! 위험해! 부길드장님 오실 때까지 기다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 눈으로 봐야겠습니다!”
타앗!
정의 길드원은 뛰어내렸다.
“이 바보야! 위험하다고!”
주임이 구덩이 근처에서 외쳤지만 대답은 없었다.
“야! 괜찮냐?! 야!!”
보통 이런 식으로 조심성 없이 뛰어들면 죽지만, 의외로 이 정의 길드원은 무사했다.
그럼에도 대답이 없었던 건, 너무 어이가 없어서였다.
“주임님. 내려와서 좀 보십쇼.”
정의 길드원들이 구덩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들이 발견한 것은…….
“터널……!”
말 그대로 집채만 한 크기의 터널이었다.
주임은 그제야 깨달았다.
“알았다! 왜 행복 길드 부길드장이 집안에 얌전히 있었는지!”
그는 처음부터 집을 통째로 땅으로 가라앉혀서 탈출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바닥 좀 보세요. 완전 맨질맨질합니다. 미리 바닥을 미끄럼틀처럼 다져놓은 것 같아요.”
“과연! 그런데 언제 이런 걸?”
“이런 경우에 대비해서 미리 만들어 뒀는지도 모르죠…….”
젊은 정의 길드원은 말끝을 흐렸다.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터널 같았기 때문이다.
찍찍찍……!
여기저기서 쥐 떼가 몰려다녔다.
“이상하네요.”
“뭐가?”
“이 터널은 인위적으로 최근에 만들어진 건데요.”
“그래서?”
“하수도랑 연결된 것도 아닌데 쥐가 너무 많이 돌아다니지 않나요?”
“음? 그렇군…….”
두 사람은 내리막길을 따라, 쥐 떼를 쫓으며 내려갔다.
갈림길이 없는 외길이었기에, 두 사람은 손전등으로 주위를 살피며 계속 내려갔다.
그때, 젊은 정의 길드원이 말했다.
“그리고 이상한 게 또 있는데요.”
“또?”
“부길드장 시리우스는 왜 이런 식으로 탈출을 시도한 걸까요?”
“재판에 넘겨지기 싫으니까 무리수를 둔 거 아니겠어? 부길드장은 대부분 면책 특권이 있다지만, 우리 워잭 부길드장님이랑 테일러 부길드장이 단단히 벼르고 있고…….”
“그런 뜻이 아니라요. 도망가 봤자 어디로 갑니까?”
“어?”
“길드연합국은 의외로 작잖아요? 현실 세계처럼 외국으로 밀입국을 하거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5층 길드연합국은 100층탑의 국가이므로, 길드연합국 외의 다른 곳으로 도망치려면 반드시 게이트를 통해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5층 광장의 게이트는 엄중히 관리되고 있지 않습니까?”
게이트 관리자 NPC들은 게이트 이용 내역을 확실히 기록하고 있으며, 만일을 대비해 야간에는 경비대원 NPC와 정의 길드원들이 감시하고 있었다.
즉, 시리우스가 터널을 통해 멀리 도망치더라도, 5층 광장의 게이트를 통해 탈출이 불가능하므로 이 탈출극은 의미가 없다……라는 게 젊은 정의 길드원의 의견이었다.
“터널로 집을 통째로 가라앉혀서 탈출하는 게 인상적이긴 하지만, 딱 그뿐 아닐까요? 다시 잡힐 텐데 말입니다.”
“듣고 보니 그…….”
말하던 주임은 말문이 멎었다.
“피 냄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