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 어둠의 동굴 (1)
털썩!
털썩!
털썩!
곳곳에서 길드원들이 쓰러졌다.
“어때?”
은혁이 염훈에게 물었다.
“자랑스럽다.”
염훈은 진심을 다해 말했다.
길드원들이 자랑스럽고, 그들의 수장인 자기 자신도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고맙다, 은혁아.”
“음?”
“처음에 네가 마음대로 길드를 만들었을 때, 난 네가 일종의 총알받이를 만들어내려는 건 줄 알았어.”
“음…….”
“하지만 이제 보니 알았어. 정말로 진지하게 길드원들을 양성하려 했다는 걸.”
“훗, 당연하지. 총알받이로 삼을 거면 이렇게 무리해서 콩나무 본부를 만들 리가 없잖아.”
물론, 은혁은 길드원들을 노예나 부속품으로 부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들의 머릿수 하나하나가 귀한 자산이지.’
지금의 염훈에게는 일일이 설명할 수 없었다.
“일단 애들 회복 좀 시켜주자.”
“알았다.”
염훈은 회복 스킬을 쓰기 시작했고, 은혁은 소환수를 소환해냈다.
“[메탈 워리어 소환]. [메탈 워커 소환].”
파앗!
파앗!
은혁은 소환수들에게 포션을 나눠줬다.
소환수들은 포션을 길드원들에게 나눠줬다.
“삐빗, 삐빗!”
메탈 워커들이 포션을 내밀었고.
“흐흑. 고맙다…….”
길드원들이 누운 채 포션을 받으며 고마워했다.
은혁이 소환수를 시켜, 죽어가는 것 같은 길드원들을 돕게 하자, 이것만으로도 숙련도가 올랐다.
-소환술사 숙련도가 6% 증가했습니다!
-현재 소환술사 숙련도 : 10%+.
잠시 뒤, 훈련과 회복을 마무리하며 은혁은 한마디 했다.
“편히 앉아서 들어라. 잘 알겠지만, 100층탑 공략은 나와 염훈이 주축이 되어 진행할 거다. 하지만 여러분의 도움이 꼭 필요한 순간이 있을 거다. 여러분의 훈련은 그 순간을 위해서다.”
길드원들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 순간’이 뭔지 궁금해했다.
“도대체 그 순간이 언제냐고? 어쩌면 당장 5분 뒤일지도 모른다.”
훈련장에 널브러진 길드원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장 5분 뒤 실전이라면 왜 이렇게 힘들게 굴린 거냐고 묻고 싶은 표정이군. 그럼 답해주마. 그게 100층탑이다.”
길드원들은 어리둥절해했고, 은혁은 마저 말했다.
“100층탑은 층 단위로 딱딱 나뉘어 있지. 층마다 차원의 벽으로 막혀 있으니, 층과 층 사이의 거리가 멀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걸 무시하는 괴물들은 우리 생각보다 많다.”
애초에 7대 길드의 길드장들만 해도 5층의 구조를 바꾼 존재들이다.
3군주는 층의 경계면을 뚫고 자기들끼리 국경을 재설정하거나, 지고의 위상을 경비병으로 세우는 등, 층과 층의 경계를 엿가락처럼 다룬다.
“좀 유치한 비유지만, 층간 소음에는 밤낮이 없고, 위아래도 없지. 이해가 가나?”
한국에서 아파트에서 살아본 플레이어 다수가 공감했다.
“단순히 층 단위로 시끄럽기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천장이 부서지고 바닥이 꺼진다. 언제? 언제라도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어. 그러므로 안전할 때 훈련하고 급박할 때는 실전을 대비하며 쉰다…… 같은 식으로 너희 스케줄과 컨디션을 맞춰가며 조절해 줄 수 없다.”
그나마 은혁이 회귀자이므로 큰 전투에 앞서서는 대비할 수 있긴 하다.
하지만 길드원들은 그 사실을 모르기에 숙연해졌다.
“7대 길드 체제는 너희가 생각하는 것만큼 단단하지 않다. 정말 그 체제가 단단했다면 우리, 불패불굴 길드가 이런 미니 차원 훈련장에서 훈련할 정도로 강해질 수도 없었겠지. 그 사실에 대해 잘 생각해 보고, 스스로 늘 단련하도록. 이상!”
그렇게 비정기 지옥 훈련이 끝이 났다.
길드원들은 자기네 직업의 껍데기를 깼을 뿐만 아니라, 100층탑에서 불패불굴 길드가 차지하는 위치, 그리고 그 길드원으로서의 자기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할 터였다.
‘이제부터 길드원들은 알아서 자기 정비를 잘하겠지.’
* * *
은혁과 염훈이 길드원들을 위한 지옥 훈련을 마무리한 다음 날.
두 사람은 39층 공략에 나섰다.
-39층 : 어둠의 동굴.
파앗!
은혁과 염훈은 39층 대기실로 전송됐다.
-97번 대기실에 도착했습니다!
어둠의 동굴은 전체 면적이 서울 전체 면적의 3배 이상이며, 아직 그 전체 넓이가 어느 정도인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극도로 어둡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들은 게이트를 통해 올 때마다 각자 랜덤한 번호의 대기실로 전송되며, 파티를 맺고 함께 게이트를 통과하는 경우에만 같은 대기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97번 대기실이라.’
은혁도 정확히 어딘지 모르는 대기실이었다.
“왠지 운전면허시험장 대기실 냄새가 나네.”
염훈이 알 듯 말 듯한 비유를 중얼거렸다.
대기실은 낡은 직원 휴게실 같은 곳이었다.
먼지 쌓인 TV와 노랗게 변색된 소파, 그리고 여닫을 때마다 철컹철컹 소리가 나는 캐비닛 따위가 있었다.
“흠……?”
염훈이 대기실의 창밖을 살펴봤다.
“와, 이렇게까지 캄캄한 곳은 처음이네.”
대기실에는 형광등이 있었지만, 대기실 바깥 동굴에는 한 점의 불빛도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미션이 시작되는 모양이군.”
은혁이 벽면에 붙은 종이를 가리켰다.
‘어둠의 동굴 탐사 안전 수칙’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둠의 동굴 탐사 안전 수칙 10가지.>
셋째.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미션이 시작됩니다. 한번 시작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습니다.
첫째. 동굴은 매우 어둡습니다.
넷째. 의외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으나, 동굴의 ‘천장’은 그렇게까지 높진 않습니다. 도전해 보시길.
둘째. 대부분의 박쥐는 크게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대 박쥐는 주의하십시오. 피를 빨아 먹습니다.
다섯째.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쪽이 동쪽입니다.
여덟째. 가지 마.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
아홉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흘려들으시길 권합니다. 다시 말해, 전혀 듣지 않는 것은 오히려 추천하지 않습니다.
여섯째. 래커라고 표시된 상자 속에 든 것은 사실 자살용 알약입니다. 챙겨두세요. 어둠 깊은 곳에 집어삼켜지면 필요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일곱째.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즉, 안전 수칙에 담긴 힌트를 믿는 게 생존을 도울 겁니다.
열째. !!!(힌트 : 간단한 암호 숨겨져 있음.)
“뭐, 뭐야, 이건!”
염훈이 안전 수칙을 보고 어이없어했다.
“내용은 둘째치고, 첫째부터 열째까지 뒤죽박죽이잖아!”
그래서 많은 이들이 안전 수칙을 무시한다.
스테이지의 분위기를 잡는 장식물 취급하는 것이다.
하지만 은혁은 회귀자였기에 숨겨져 있는 힌트를 읽었다.
“그럼 슬슬 가볼까?”
미션창이 아직 뜨지 않았으니, 뭘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대기실에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은혁이 문손잡이에 손을 댄 순간.
띠리링!
대기실 구석에 있던 라디오가 갑자기 작동되었다.
“뭐, 뭐야, 갑자기 라디오라니.”
염훈이 경계했지만.
“아아, 들리나?”
이내 태평한 중년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 들리면 대답해보게. 양방향 라디오라 대화가 가능하거든.”
“네, 누구십니까.”
“음, 나는 이번 미션 도우미인데. 97번 대기실에 불이 들어온 모양이야?”
“맞습니다.”
“댁들은 새로 온 탐사대인가? 채굴업자? 아니면…….”
“메인 미션에 도전하는 플레이어입니다.”
“허! 진지한 친구들이구만. 현재 인원은?”
“두 명입니다.”
“겨우? 그래서야 살아남겠어? 쯧쯧.”
미션 도우미는 혀를 차더니 정식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어둠의 동굴 탐사대의 탐사대장이라고 하네. 탐사대장의 권능으로, 대기실 상황에 대해 멀리서도 알 수 있지.”
염훈이 궁금증을 못 이기고 끼어들어 질문했다.
“NPC입니까?”
“댁들은 다른 차원에서 온 플레이어인 모양이군. 플레이어들은 꼭 내가 플레이어인지 NPC인지 묻더만. 뭐, 일단은 NPC가 맞다네.”
탐사대장 NPC는 자존심이 확 상한다는 듯이 말했다.
“일단 내 소개부터 하지. 이 어둠의 동굴과 관련된 이야기이니 잘 듣도록.”
탐사대장이 못을 박듯이 말했다.
지금껏 플레이어들이 귀찮다고 스킵하고 넘어가려 한 경우가 많았던 탓이다.
“먼 옛날. 나는 이곳에 잠들어 있던 보물을 찾고자 탐험대를 이끌었지. 마침내 동쪽 터널 끝에서 거대한 문을 찾았지. 나와 내 동료는 그 문을 ‘동대문’이라 이름 붙이고 기뻐했다네…….”
탐사대장은 애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기쁨에 겨워 문을 두드린 순간, 그만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몰락한 지고의 위상을 깨우고 말았다네.”
탐사대장의 목소리는 회한에 찬 목소리로 변했다.
“결국, 나도 그 동대문 속에 갇히고 말았다네. 왜냐하면 이 어둠의 동굴은…….”
탐사대장 NPC는 온갖 설정을 줄줄 설명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스킵을 외치는 게 당연할 정도였다.
“……그렇게, 영원히 갇히고 만 거라네. 으으. 여기 갇혀서 먹을 거라곤 박쥐뿐이지. 빛이 전혀 없는 이곳에서, 나는 박쥐를 날고기로 잡아먹으며 견디고 있다네.”
“음, 그런 안타까운 일이 있었군요.”
은혁이 영혼 없는 공감을 표했다.
하지만 그런 공감이라도 해주는 게 기뻤는지, 탐사대장의 목소리가 확 밝아졌다.
“오오! 공감해 주는 건가! 그대는 참으로 좋은 플레이어군!”
대부분의 베테랑 플레이어들은 39층에 도달할 무렵 감성이 많이 무뎌진다.
죽고 죽이는 상황에 너무 오래 노출된 탓이다.
“내 아픔에 공감을 해줬으니 특별히 힌트를 주지.”
“힌트는 됐습니다.”
은혁은 회귀자였기에, 어지간한 비밀 루트는 다 외우고 있었다.
애초에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저 목소리가 진실만을 말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대신, 한 가지 정보를 주십시오.”
“어? 정보?”
“근처에 수상한 자들이 오가는 것을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그건 나도 모르지. 말했듯이, 나는 동대문 속에 갇혀 있는 몸이라네.”
“흐음, 이상하군요.”
“뭐가 이상한가?”
“동대문에 갇혀 있는 분이, 어떻게 라디오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건가요?”
“그야…… 탐사대장의 권능으로.”
“그런 특수한 권능이 있다면 동대문 바깥 상황도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과연.”
탐사대장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으음, 정보를 알고 싶다면 일단 나를 구해주게나.”
“거, 상황 봐서 그렇게 하죠.”
“상황 봐서라니. 내가 불쌍하지도 않나?”
“수상해서요.”
“쳇. 안 속네. 낄낄낄.”
라디오 너머 웃음소리가 기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쾅!!
은혁은 듀얼 체인 소드로 찍어서 라디오를 부쉈다.
“뭐, 뭐야, 방금 건?”
염훈이 어이없어했다.
“뭐, 별거 아냐. 우리를 유인해서 죽이려는 못된 놈이 하나 있었는데, 말빨로 털리니까 본성을 드러냈을 뿐.”
은혁이 설명하자 염훈은 오싹한 듯 소름이 돋았지만, 회귀자인 은혁은 심드렁했다.
“그럼 출발하기 전에, 염훈.”
“어?”
“빅 썬더랑 프리즘 랜스를 양손에 동시에 들 수 있어?”
“드는 건 가능한데, 양손에 들고 싸우기는 좀.”
“아, 싸울 필요는 없고. 그냥 양손으로 좌우 번갈아서 스킬 쓰는 건 가능해?”
“지금 해볼까.”
염훈은 대기실에서 시험해 봤다.
왼손에 쥔 빅 썬더로 [홀리 썬더]를 작게 쓰고, 오른손에 쥔 프리즘 랜스로 [신성한 오러]를 썼다.
“으음,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쓰는 건 가능한데, 이동하면서 쓰는 건 무리네.”
염훈이 어려워했다.
은혁은 딱히 그런 염훈을 타박하지 않았다.
“뭐, 양손에 무기 들고 동시에 쓰는 건 근성으로 되는 일이 아니긴 하지.”
“그치?”
“아, 물론 나는 되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