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 강은혁이 주는 미션
은혁이 테일러의 목적을 이렇게 자세히 알 수 있는 건, 테일러의 실험이 실패했다는 회귀 전 사실 덕분이다.
제2차 길드 대전의 혼란기 때, 필요한 재료를 모은 테일러는, 제2차 길드 대전이 발생하기 하루 전날의 과거로 돌아가려 한다.
그리고 타임머신을 가동시켜 과거로 돌아가지만, 문제가 생긴다.
테일러의 ‘기억’ 또한 과거로 퇴행했다는 점이다.
물론, 테일러 본인은 과거로 왔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다.
모르기에 다시 똑같은 과정을 거쳐 또다시 시간을 되돌린다.
하지만 또다시 기억 또한 되돌려져 아무것도 기억 못 한다.
그리고 반복…….
즉, 루프가 발생한다.
결국, 루프의 반복은 ‘시공의 성좌’를 자극하고, 시공의 성좌가 직접 사도를 통해 테일러를 죽인다.
시공의 사도는 괴팍하게도, 자신이 누군지, 테일러의 목적이 뭔지,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테일러의 피로 일일이 적어두고 떠났고, 그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
그것이, 테일러의 허무한 최후다.
‘즉, 테일러의 시도는 어차피 실패한다는 거지.’
만약 은혁이 섭취한 ‘뮤비즈의 마정석’ 같은 것이 있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제 말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있을 리가 없죠. 테일러의 계획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 만약 증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금고 속을 직접 들여다보거나 해야겠죠.”
“흠. 자네는 그런 사실들을 어떻게 알아낸 건가? 단순히 추론만으로는 알아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닌데?”
“후후.”
‘그야 회귀자니까!’라고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 적당히 지어내기로 했다.
“35층에서 알아냈습니다.”
은혁은 무아의 성좌, 아카식 제로와 만났던 일을 각색해서 들려줬다.
아카식 제로는 거의 모든 정보가 기록되는 아카식 랜드의 주인으로, 사실상 정보의 성좌로 취급되기도 한다.
사실, 은혁은 그 아카식 제로와는 훗날 심연에 가서 운명에 관한 답을 알아내겠다고 계약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은혁은, 쥐 떼 두목에게는 부풀려 말했다.
무아의 성좌, 아카식 제로와 대화와 거래를 하던 중, 테일러의 계획을 전해 듣게 되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아카식 제로는 모든 과거의 기록을 다 갖고 있는 존재이므로.
“그렇게 해서 알게 됐습니다.”
“으음.”
쥐 떼 두목은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지만, 은혁의 말에 계속 의심만 해봤자 더 나아가지 못함을 인정하기로 했다.
“좋아.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지?”
“미션을 만들어서 테일러를 도울까 합니다.”
“엥? 테일러를 도와?”
은혁은 플레이어용 미션 게시판에 슥슥 뭐라고 적기 시작했다.
<플레이어 강은혁이 주는 메인 미션 : 다차원 은행 금고 보안 테스트>
-목표 : 다차원 은행 금고의 보안을 테스트하기 위해, 다차원 은행과 사전 협의나 협조를 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은행 금고 내부에 들어갈 것.
-세부 3조건 :
참가자의 수는 300명 이하로 한다.
만약 제한 시간 이내에 단 한 명이라도 성공한다면, 모두가 미션을 성공한 것으로 판정하고, 한 명조차 성공하지 못한 경우에만 미션에 실패한 것으로 판정한다.
-성공 시 보너스 : 다차원 은행 금고에 예치되어 있는 불패불굴 길드의 종합 자본금 전부.
-실패 시 페널티 : 다차원 은행 측이 가하는 불이익. (예상 불가.)
-제한 시간 : 3일.
은혁이 미션을 적고 바닥에 꽂으려는 순간.
-경고! 경고! 경고!
황급히 경고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비상식적인 미션 목표 감지!
-비정상적인 성공 시 보너스 감지!
-불확실한 실패 시 페널티 감지!
-플레이어께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모처럼 친절한 시스템 메시지였다.
하지만.
“필요 없어.”
콱!!
미션 팻말을 꽂았다.
그 순간.
-미션이 활성화되었….
메시지가 끝나기도 전에.
푸슝!
은혁이 어디론가 전송되었다.
* * *
42층의 다차원 교차로의 중심부.
그곳에도 관리국 사무실, 정확히는 관리국 요원 아이리스의 개인 사무실이 있었다.
-자유시장 길드의 부길드장 테일러에 의한 관리국 중재 요청이 발동!
-중재 요청자 플레이어 테일러와 대상 플레이어 강은혁이 전송됩니다!
푸슝!
푸슝!
그곳에 은혁과 테일러가 전송되었다.
“어라?”
갑자기 관리국 요원 사무실로 전송된 은혁이 의아한 듯 주위를 둘러봤다.
테일러는 화를 억누르며 씨근거렸다.
“두 분. 일단 침착하세요.”
여성용 정장 차림의 아이리스가 벌써부터 두통이 난다는 표정으로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이 새끼가 무슨 미션을 걸었는지 압니까!!!”
테일러가 화를 냈다.
평소답지 않게 눈이 커지고 목청도 커졌다.
“네네, 그러니 중재 요청을 하신 거겠지요.”
아이리스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테일러에게는 ‘관리국 중재 요청 티켓’이 하나 있었다.
길드장을 대신하여 활동하는 부길드장들에게, 관리국이 제공한 귀한 물건이었다.
여태껏 한 번도 ‘관리국 중재 요청 티켓’을 쓰지 않던 테일러가 그걸 썼으니, 그만큼 긴급 상황이란 뜻.
은혁은 상황과 배경을 다 알면서도 히죽거리며 서 있을 뿐.
아이리스는 결국 미간을 찡그리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강은혁 플레이어. 여기에 왜 온 건지 아는 모양이군요.”
“테일러 부길드장님이 우릴 관찰하고 있었다는 뜻이죠.”
그랬다.
은혁의 미션 팻말 내용을 몰래, 감시 관련 스킬을 지닌 부하들의 눈을 통해 관찰했다.
그래서 은혁이 미션을 발동시키려는 순간, 다급한 마음에 관리국에 중재를 요청한 것이다.
“저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겠다고 하시지 않았던가요? 그러면서 제가 무슨 미션을 만드는지 일일이 감시하다니. 언행 불일치 아닙니까?”
은혁이 테일러를 놀리자, 테일러는 갑자기 치밀어오르는 혈압 때문에 바로 반박하질 못했다.
“두 분. 부디 의자에 좀 앉아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중재를 시작하지 않겠습니다.”
드륵.
은혁은 냉큼 앉았고.
덜컹! 쾅! 쾅!!
테일러는 의자를 일부러 부수려는 듯이 앉았다.
아이리스는 일부러 천천히 차가운 주스 두 잔을 준비해서 두 사람 앞에 내밀었다.
은혁은 맛있게 받아 마셨고, 테일러는 손도 대지 않았다.
“……후우, 본래 관리국은 플레이어 간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아요. 그럼에도 제가 중재 요청을 받아들인 이유는, 중재 요청자가 테일러 플레이어이기에, 그리고 강은혁 플레이어가 하려는 일이 40층 스테이지를 붕괴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럴 리가요? 저는 41층 미션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인데?”
은혁이 얄밉게 되묻자, 테일러는 주스 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와장창! 하는 소리가 났다면 테일러의 속이 좀 시원했겠지만.
“[그림자 도약].”
휙.
은혁은 바닥에 던져진 주스 잔을 [그림자 도약] 스킬로 어느 때보다 부드럽게 받아냈다.
주스 잔의 내용물 또한 빈틈없이 받아냈다.
스윽.
[그림자 도약]된 주스가 은혁의 손에 나타났고, 은혁은 주스 잔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도적 숙련도가 1% 증가했습니다!
-현재 도적 숙련도 : 27%++.
숙련도 또한 상승했다.
뿌드득.
테일러는 이를 갈며 [시간 가속] 스킬을 썼다.
쩌적.
순식간에 주스가 증발하여 젤리처럼 굳는가 싶더니.
와장창!
유리의 수명이 다하여 깨졌다.
“그만!”
아이리스가 소리쳤다.
“두 분 다 유치한 짓은 그만두세요! 그러지 않으면 두 분 모두에게 불이익을 드리겠습니다!”
정확히 불이익이 뭔지 밝히지 않는 게 더 위협적이었기에, 두 사람은 얌전히 앉았다.
“우선 테일러 플레이어부터. 강은혁 플레이어의 미션이 왜 문제인지 말씀해 보세요.”
“이는 다차원 은행 금고에 대한 도전이며, 공개적인 은행 강도 선언입니다!”
테일러는 그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집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집에 들어가기만 해도, 그건 주거지 무단 침입이며 범죄입니다. 하물며 은행 금고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죠! 다차원 금고에는 길드연합국 소속 플레이어들의 자금뿐만 아니라, 다른 차원의 NPC들이 맡긴 돈도 다수 있습니다!”
NPC들에게는 인벤토리창 관련 능력이 없기에, 은행에 특히 돈을 많이 맡겼다.
이는 오직 자유시장 길드가 직접 관리하는 다차원 은행의 명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그 명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려는 미친놈이 있었으니……!”
“어휘를 주의해 주십시오, 테일러 님.”
“미안합니다, 아이리스 관리국 요원님. 강은혁의 팻말 미션은, 그 미션의 시행 이전에 그 존재 자체가 우리 다차원 은행에 대한 불명예스러운 공작이며, 위협입니다!!”
실제로 지구의 여러 국가에서도 테일러의 주장은 설득력이 강했다.
특수강도 행위를 실행하진 않더라도, 공개적으로 연습하거나 공모자를 모으는 경우에는 범죄 미수 행위로 인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강은혁의 미션 팻말을 즉각 취소, 소멸시켜 주십시오! 이상!!”
테일러는 할 말을 마친 뒤 앉아서 씩씩거렸다.
“강은혁 플레이어? 반론하세요.”
아이리스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크흠, 흠흠, 에흠, 콜록, 크큼.”
은혁은 일부러 헛기침을 해서 자신을 제외한 모두의 신경을 긁은 뒤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41층 메인 미션은 원래 그러라고 있는 거 아닙니까? 플레이어에게 미션 설정 권한을 준다는 건 그런 거죠. 관리국의 아이리스 님. 모든 플레이어가 안전하고 얌전한 미션 팻말만 제작할 거라 믿는 건 아니겠지요?”
“하지만 스테이지 자체에 큰 위협이 되는 경우에는 차단하거나 수정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강은혁 플레이어가 생성하려는 미션은 40층 스테이지의 핵심인 다차원 은행과 정면으로 맞부딪치는바, 테일러 플레이어의 중재 요청도 합당하지요.”
아이리스가 답하자, 테일러는 앉은 채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반면에 은혁은 피식 웃으며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