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 아이리스의 중재와 테일러와의 협상 (2)
첫째. 벽을 부수고 도망치는 경우.
[시간 되감기]의 범위가 ‘방’ 하나이니만큼, 벽을 부숴서 방을 없애는 식이다.
하지만 하필 이 방은 관리국 요원의 사무실이다.
관리국 소유 건물의 벽을 부수는 경우, 중재 자리를 마련한 아이리스와 관리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된다.
둘째. 벽을 부수지 않고 도망치는 경우.
[그림자 도약]이나 [그림자 터널]을 써서 도망치는 것도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테일러가 시간을 되감아서 그 시도를 무효화시킬 것이다.
위의 두 가지 방법 모두 효과가 별로 없으니 큰 의미가 없으리라.
‘내 도발이 좀 과했나?’
은혁은 생각했다.
시간이 되감겨지기 이전의 자신이 뭐라고 말했을지 상상해 보고 히죽 웃었다.
테일러는 자유시장 길드의 부길드장답게, 감성보다 돈을 우선시한다.
그래서 도발 좀 당해도 ‘하하하, 다음을 기약하겠네’ 하고 넘어간다.
물론, 테일러도 신경질을 부릴 때가 있기는 하다.
‘자기 돈이나 시간과 직접 관련된 경우.’
은혁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금 상황이 딱 그 상황이었다.
‘시간이 되감겨지기 이전의 내가 참 아슬아슬하게 말로 갖고 놀았던 모양이군. 다행히 도발 수준은 딱 좋아.’
즉, 테일러는 은혁을 상대로 싸울 때 돈을 아끼지 않겠다는 태세인데, 바꿔 말하자면 은혁을 적수로 상대하겠다는 방침을 확정한 상태.
‘상대를 도박판에 앉히기까지가 가장 힘들다지? 일단 그 목적은 달성했으니, 여기서 한 발자국 물러나자.’
은혁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테일러 님. 시간이 되감기기 이전의 제가 어떻게 테일러 님을 도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과드리죠.”
“…….”
“이제, 그 역제안이 뭔지 속 시원히 알려주시겠습니까?”
“그러지. 내가 하려는 역제안은 자네가 만들려는 미션에, 참가 인원과 시간을 비롯한 여러 제한을 두는 것!”
“흐음, 시간이 되감기기 전의 제가 뭐라고 말했는지 짐작이 가는군요.”
은혁이 중얼거렸다.
테일러는 그런 은혁의 말투가 또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노려봤고, 아이리스는 또 싸움이 시작될까 두렵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시간제한은 어느 정도로 원하시나요?”
“5분.”
그 말에 은혁은 잠시 고민에 빠졌고, 대신 아이리스가 터무니없다는 듯이 나섰다.
“잠깐만요, 테일러 님! 그건 너무 짧지 않나요?!”
“5분도 깁니다. 강은혁이라면 무슨 수를 쓸지 모르니까.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거절하죠.”
“받아들이겠습니다.”
은혁이 말했다.
테일러는 기다렸다는 듯이 덧붙였다.
“하나 더. 자네는 미션 팻말을 꽂는 순간 이곳에 중재를 위해 전송된 거지?”
“그런데요?”
“즉, 우리들의 합의가 완료되는 순간부터 제한 시간은 5분으로 줄어드는 거라네.”
“네? 재정비 시간을 안 주고요?”
“절대 안 되지. 그럼 5분 제한을 준 이유가 없잖나. 무조건 합의 완료된 직후부터 5분이야.”
“거절하고 떠난다면?”
“그럼 난 또 [시간 되감기] 쓰는 거지. 단, 3회차 때는 제한 시간을 4분으로 줄여서 협상을 할 걸세.”
“으음…….”
은혁이 고뇌하는 표정을 지었다.
테일러는 고소하다는 듯이 히죽 웃었다.
“저기, 재정비 시간이 없는 조건이라면 15분은 어때요?”
“5분. 무조건, 절대로 5분이다. 싫으면 말해. 바로 [시간 되감기] 쓸 테니까.”
“……하는 수 없지. 받아들입니다.”
“하나 더. 자네는 절대 금고에 들어가면 안 된다네.”
“그럼 금고 밖에서 다른 이들을 돕는 건 괜찮습니까?”
은혁이 되묻자 테일러는 씨익 웃었다.
“물론일세. 자네 부하들을 총동원해도 상관없어.”
테일러는 마치 자비를 베푸는 듯 말했지만, 물론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제한 시간이 겨우 5분이니만큼, 28.5층의 불패불굴 길드원들을 불러들이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므로.
“단, 자네 자신만은 절대로 다차원 은행 금고 속에 들어가면 안 된다네.”
“저어,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어차피 이번 팻말 미션은 제가 미션을 만드는 거라서요. 미션을 만든 당사자는 은행 금고 속에 들어가 봤자 클리어 판정이 안 뜹니다.”
그랬다.
이번 팻말 미션은 은혁이 만들어서 남들에게 ‘주는’ 미션이다.
자기가 만든 미션을 자기가 클리어할 수는 없다.
“그래도 자네가 안에 들어간 다음 남들을 그림자 관련 스킬 등으로 불러들일 수 있잖나. 그걸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자네 존재 자체가 금고 속에 들어가면 안 된다네.”
“철저하시군요. 받아들이겠습니다.”
“한 가지 더. 다크 마켓은 절대 자네 미션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네.”
“으음.”
은혁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테일러는 씨익 웃었다.
“그들이 5층에서 시리우스의 자택을 통째로 지하로 옮겼던 건 나도 알아. 자네가 비슷한 수작을 부려서 금고를 통째로 지하에 끌어내리려는 거라면, 절대 안 통한다고 해두지.”
“뭐, 어차피 그럴 생각 없었으니까요. 좋습니다.”
“한 가지 더.”
“아직도 있습니까?”
“내 부하를 상대로 하는 살인, 고문, 협박, 세뇌, 변장 행위를 절대로 금하네. 다시 말해, 우리 측 은행 경비대를 죽이거나 은행원을 세뇌시켜서 금고 속에 들어가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걸세.”
“원래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 물론 안드로이드에 대한 협박이나 해킹도 절대 금지일세.”
“알겠습니다.”
“하나 더. 성좌나 지고의 위상을 강림시켜서 물리 법칙이나 규칙을 조작하는 시도 또한 금지일세.”
“거, 알았다니까요.”
은혁은 물론 아이리스마저도 이젠 좀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테일러는 한마디 더 하려고 했지만.
“그 이상으로 하다간 아예 미션이 성립되지 않을 것 같군요, 테일러 플레이어.”
“흠…… 좋습니다.”
테일러는 그제야 추가 조건을 더 붙이지 않았다…….
……처럼 보였지만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그럼 딱 한 가지만 더.”
테일러가 실실 웃으며 손가락을 세웠다.
은혁의 표정은 굳었고, 아이리스는 뭐 이런 진상이 다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만든 이번 팻말 미션에 실패하면, 자네가 죽는 걸로.”
“그건.”
“부탁하네!”
쾅!
테일러가 갑자기 이마를 테이블에 찧었다.
“덕지덕지 조건을 붙여 놓고 막판에 이런 중대한 조건을 붙이는 게 마음에 안 들겠지. 이해하네.”
“아니, 이해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자네가 직접 참가하지 않는 미션인데, 실패하면 자네 목숨을 잃는 게 불합리하다는 거겠지?”
“바로 그겁니다.”
은혁은 팻말 미션을 만들 뿐, 그 미션에 참가하지 못한다.
그나마 제한 시간도 5분뿐이라서, 간접적으로 개입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미션 실패의 대가가 은혁 자신의 목숨이라고 하니…….
“부탁하네, 부탁하네.”
쾅, 쾅.
여태 오만하게 굴던 테일러는 연신 테이블에 이마를 찧어 대며 비굴하게 부탁해댔다.
협상의 유리함을 위해서라면 체면이고 뭐고 다 내던지는 본성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은혁과 아이리스는 내심 감탄했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하다니.’
테일러가 협상 내내 여태 오만하게 굴던 것도, 지금 고개를 숙이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함이리라.
“부탁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난 한낱 부길드장이야. 즉, 길드장님 아래란 말일세. 다차원 은행 금고를 걸고 자네와 승부를 벌였다가 내가 지면, 난 그냥 죽는 걸로 끝나지 않아. 길드장님이 날 어떻게 처분할 것 같나?”
은혁은 또 기가 막혔다.
평소에는 자유시장 길드의 부길드장을 압도적인 권력의 상징인 양 과시하더니, 막상 지금은 자신이 길드장보다 아래에 있다는 걸 강조하며 비굴함을 드러내고 있다.
“부탁이야, 부탁. 이렇게 고개를 숙이겠네. 내가 이렇게까지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본 적 있나? 나는 길드장님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이렇게 고개를 숙여 본 적이 없다네.”
쾅, 쾅.
다시 이마를 테이블에 찧어 댔다.
“강은혁 플레이어. 당신이 결정하세요.”
아이리스가 은혁에게 결단을 넘겼다.
물론, 은혁이 거부하면, 테일러는 냅다 시간을 되감을 뿐이다.
그리고 3번째 협상은 또 다른 방식으로 이어갈 터.
‘솔직히 부러운 능력이긴 하네.’
시간 관련 스킬은 사기 스킬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마력과 금화가 모두 소모되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는 갑과 을을 결정짓는 능력이다.
“알겠습니다.”
“오오, 알아주는 건가!”
테일러가 고개를 얼른 들었다.
“뭐, 7대 길드 정복에 나설 때부터 각오는 했습니다. 목숨을 걸어야겠죠.”
은혁이 솔직한 태도로 말했다.
‘레나와 싸울 때도, 브라이언과 싸울 때도 그랬지. 큰 승리를 위해서는 목숨을 건다. 그뿐이야.’
“좋아, 좋아! 고맙네!”
테일러가 손뼉을 짝짝 치며 기뻐했다.
아이리스는 그 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여태 고개를 숙여, 상대방의 목숨을 걸게 만들어 놓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이라니.
사악한 자본가의 소시오패스적인 면모를 적나라하게 본 것 같아서 아이리스는 말문을 잃었고, 은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아, 자아. 그럼 바로 실무로 넘어가지.”
테일러는 아이리스에게 종이와 볼펜을 청했다.
“그럼 수정된 미션 조건들에 대한 초안을 다시 쓰게나. 그리고 그걸 보고, 나와 자네, 그리고 아이리스 님이 모두 합의하는 걸로 중재를 마무리하세나.”
“그렇군요.”
은혁은 테일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아이리스를 바라봤다.
“그전에 저도 한 가지 조건을 걸죠.”
그러자 테일러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잠깐! 무슨 조건을 걸겠다는 거지? 수상한 조건을 걸려 하는 경우 즉각 시간을 되감겠다.”
“걱정 마시죠, 테일러 님. 테일러 님에게 불이익을 주는 조건은 아니니까.”
은혁은 아이리스에게 조건을 걸고 있었다.
“이번 미션의 판정은 대부분의 미션이 그렇듯 시스템이 판정하죠?”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의 기본 설정 및 관리는 관리국의 역할이고요.”
“그런데요? 아, 물론 이번 미션의 판정은 제가 직접 주의 깊게 판정할 겁니다.”
아이리스가 모처럼 중재에 나선 건인 만큼, 마지막까지 자신이 결론을 내릴 생각이었다.
은혁은 그래 줘서 고맙다는 뜻을 담아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뒤, 조건을 걸었다.
“제가 부탁하는 건, 딱 하나! ‘금고 내부의 시간을 되감지 않는 것’입니다.”
“아하……. 이해했어요.”
“네. 미션을 클리어했는데도 테일러 님이 고의로 시간을 되감아서 없었던 일로 되돌리려 할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합리적인 조건이군요. 이건 관리국 요원인 제 직권으로 합의…….”
“못하겠소.”
테일러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조건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그건 내 스킬 사용을 과도하게 제약하기 때문이오.”
“잠깐만요, 테일러 플레이어. 하지만 당신은 강은혁 플레이어에게 다양한 조건을 걸었으며, 그중에는 강은혁 플레이어의 스킬과 능력 발휘에 제약을 가하는 내용이 있지 않나요?”
“불만입니까? 그럼 협상 실패로 간주하고 시간 한 번 더 되감지, 뭐.”
“……!”
아이리스도 기막혀서 말이 안 나왔다.
그리고 테일러가 어떻게 자유시장 길드의 부길드장까지 올라왔는지도 알았다.
‘[시간 되감기] 스킬은 갖고만 있어도 협상에서 유리해지는구나.’
실제로 [시간 되감기] 스킬을 쓰지 않아도, 발동한 척만 하거나, 판을 리셋하겠다고 협박할 때도 쓸 수 있었다.
테일러가 협상 도중 [시간 되감기]를 1회 사용한 이유는, ‘한 번 썼으니 두 번 쓰지 못할 이유는 없지’라는 걸 아이리스에게도 과시하고 압박하기 위함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