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 제자 김경철
은혁은 웃음을 참으며, 김경철에게 세 가지 부탁을 말하기 시작했다.
“일단 나를 평생의, 네 부모보다 한 단계 높은 위치의 존재로 여기고, 당신 목숨보다 훨씬 소중한, 절대적인 스승님으로 모실 것.”
“뭣?!”
“왜요?”
“기다려! 그건 부탁의 범주를 넘어선다!”
“아닌데요.”
“부모보다 높은 스승이라니! 그건 사실상 나를 제자라는 이름의 노예로 부리겠다는 생각 아닌가!”
“제 생각이 뭔지는 당신이 우려할 부분이 아닙니다. [계약 대결]의 규칙에 따라, 당신은 내 첫 번째 부탁을 들어줘야 합니다.”
그랬다.
아무리 비정상적인 내용의 부탁이라도 들어줘야 한다.
그것이 [계약 대결]의 무서움이다.
김경철은 기가 막혔지만 달리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아, 아무리 그래도 기한이 너무 길잖아!”
“허허허. 시간이란 상대적인 것이지요. 우주의 장구함에 비하면 사제간의 인연이라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입니다.”
은혁은, 회귀해서 2회차를 살아가는 자신이 이런 말을 하려니 무척 달콤쌉싸름한 기분이 든다고 생각했다.
“큭……!”
“게다가 제가 싸워서 이겼으니, 제 전투력은 일단 당신보다 위 아닙니까? 그러니 당신에게 저를 스승으로 섬기라고 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아, 알았다.”
“좋아. 이제부터 존댓말 써라, 충성스러운 제자야.”
뿌드득……!
김경철은 후회했다.
제한 시간을 1분으로 하지만 않았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 새끼가 너무 짜증 나서 어쩔 수 없었다!!!’
은혁이 자신보다 강한 자를 상대로 싸울 때의 전투 스타일은, 상대에게서 극한의 짜증을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정신력이 강한 김경철조차 그 전략에 먹히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어허, 눈에 힘 빼라.”
“내 눈알에는 신경 끄십쇼. 그리고 나머지 두 가지 부탁이나 말해보십쇼.”
“두 번째 부탁은, 내 첫 번째 부탁을, 훗날 그 어떤 논리와 상황의 변화가 닥쳐오더라도, 네 존재의 모든 걸 걸어서라도, 반드시, 절대로 지켜내겠다고 맹세하라는 것이다.”
“……!!”
그랬다.
100층탑에는 [계약 대결]이나 [맹세]를 무효화시키는 아이템이나 성좌가 전혀 없지는 않다.
극히 드물지만, 은혁은 그 경우를 대비하여 못을 박는 부탁을 했다.
“크윽.”
“왜 그러느냐, 나의 제자야?”
“……알. 겠. 습. 니. 다.”
“세 번째 부탁은, 네 두 가지 무기 중 하나를 달라는 것이다.”
“뭣?! 그것만은 안 됩니다!”
김경철이 펄쩍 뛰었다.
“삼라참검과 만상참도는 제 목숨 다음으로 소중한 겁니다!!”
“호오, 그래?”
“그, 그렇습니다!”
“그래도 줘.”
“!!”
“내 말이 어렵냐? 내 첫 번째 부탁을 기억해라. 나는 네 부모보다 위다. 네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다. 그 존재가 네 무기 좀 요구하는데 그게 그리 불만이냐?”
“아아……!”
김경철은 그제야 소름이 쫙 끼쳤다.
‘이, 이 새끼……! 처음부터 이럴 의도였구나……!’
김경철은 은혁을 보고, ‘자기 실력만 믿고 까부는 멍청한 녀석이 인연의 길에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는구나~’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김경철의 성격을 분석하고, 도발하여 싸움을 이길 계획은 물론, 뭘 어떻게 뺏어 먹을지까지도 다 계산이 끝난 상태.
‘나에 대해 뒷조사를 엄청나게 한 모양이군! 근데 그건 말이 안 돼!’
플레이어가 자신보다 높은 층에 있는 존재에 대한 뒷조사를, 그것도 그 당사자에게 안 들키고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은혁은 그걸 해냈고, 자신의 요구 사항을 재촉했다.
“빨랑 내놔라?”
“스, 스승이 제자의 무기를 뺏는 경우가 어딨단 말입니까!!”
김경철이 버럭 소리쳤지만, 은혁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부탁했잖아.”
“에?”
“사실, ‘부탁’을 쓰지 않고도 스승으로서 무기를 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 하지만 네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부탁’을 소모해서 요구한 거다.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지 않나?”
“혀, 협박이나 다름없군!”
“뭐, 그렇지.”
은혁이 이번에는 또 순순히 인정했다.
“즉, 이런 거다. 당장 삼라참검과 만상참도를 전부 내놔. 안 그러면 더 가혹한 ‘부탁’을 할 테니까.”
“자, 잠깐만요! 아까는 삼라참검과 만상참도 중 하나만 달라면서요!”
“네가 뺀질거리니까 열 받아서 그래. 둘 다 내놔. 부탁이다.”
버티려다 두 배로 뺏기게 생겼다.
“어차피 두 자루가 한 세트잖아. 당장 두 자루 전부 내놔.”
그렇게 김경철은 자신의 무기를 모두 뺏겼다.
김경철은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소리쳤다.
“뺏었다고 다가 아닙니다!! 어차피 쓸 수도 없는 것을!!!”
“초능력자 전용 무기라서 장착할 수도 없다고? 억지로 쓰려고 하면 나만 죽는다고? 다 알아.”
“다 알면서 왜 뺏는 겁니까!! 그냥 괴롭히려고 뺏는 겁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은혁은 다 계획이 있었다.
‘시간이 촉박하지만 할 수 있다.’
“넌 잠깐 여기서 대기해라. 그리고 시리우스 님? 잠깐 이쪽으로.”
은혁이 자신을 부르자 시리우스는 의아해했다.
“뭐냐, 내 역할은 끝났을 텐데.”
“아, 수고 정말 많으셨습니다.”
“그럼 이제는 약속대로 날 놔줘.”
“네, 물론. 그런데 그와는 별개로 한 가지 부탁을 추가로 요청드리고 싶군요.”
“거절하겠다. 너랑 오래 얽히면 좋을 게 없으니까.”
시리우스는 김경철을 보며, 자신도 저 꼴 나기 전에 빨리 튀어야겠다고 강하게 마음먹었다.
“인연도 청산되었으니 가도 되겠지?”
시리우스의 말대로 인연이 해소되었다.
-쌍방의 약속이 성실히 이행되었습니다!
-쌍방의 인연이 해소되었습니다!
즉, 두 사람은 이제 시스템적으로 묶여 있는 상태에서는 벗어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은혁이 아니다.
“하하하!”
“왜, 왜 웃는 거냐.”
“진정한 인연은 시스템으로 강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연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이겁니다.”
“뭔 개소리야!”
시리우스는 당장이라도 도망칠 준비를 했다.
이 인연의 길 또한, 42층 다차원 교차로의 일부이므로, 재빨리 도망치면 다른 다차원 통로에 숨어들어 피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은혁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시리우스의 머리를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차원의 낚싯대를 들어 보였다.
“[쥐벼룩]으로 당신 위치는 추적되고 있으며, 차원의 낚싯대로 언제든 낚을 수 있습니다. 도망쳐도 소용없습니다.”
“처, 처음부터 날 부려 먹으려고 속인 거였나!”
“음? 속인 적은 없는데요?”
“뭔 개소리야! 아까는, 네 부탁을 들어준 다음에는 날 놓아주기로 했잖나!”
“네. 근데 정확히 언제 보내준다고는 안 했었죠.”
“……!”
“한 가지 부탁을 더 들어주셔야겠습니다.”
“싫다! 절대로 거절한다!”
“일단 들어 보신 다음 결정하시죠?”
“닥쳐! 너 같은 사기꾼 놈을 어떻게 믿냐!”
“허허, 그렇게 이기적으로 나오시겠다?”
“내가 할 소리잖아!!”
“김경철.”
은혁은 제자를 불렀다.
“만약 시리우스가 도망치면 반드시 잡아 죽여라. 스승의 명령이다.”
“……존명.”
김경철은 화풀이할 거리가 생겨서 싫지는 않은 듯했다.
시리우스는 은혁을 향해 삿대질하며 외쳤다.
“이런 나쁜 놈!!”
악행을 일삼던 행복 길드 부길드장은 은혁을 도덕적으로 규탄하기 시작했다.
은혁은 피식 웃었다.
“이보세요. 그쪽이야말로 상대 약점 잡고 협박하던 행복 길드의 부길드장 아닙니까. 대놓고 노예 NPC를 부리던 집단은 솔직히 당신네들 말고 없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날 노예처럼 부린다는 건가!”
“네. 이 부분이 핵심인데, 실제로 노예로 부리는 건 아니고 노예처럼 부리는 겁니다.”
“그럼 그게 뭔 차이냐!!”
“차이가 크죠. 진짜 노예는 인권이 없어서 이렇게 주장도 못 하고 항변조차 못 합니다. 하지만 난 당신의 외침에 따박따박 답변을 해주고 있으니, 이 얼마나 자비롭습니까?”
“……!!”
시리우스는 기가 막혔다.
더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힘으로 날 능멸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압니다. 그래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전투 수단은 다원화해두고 있습니다. 칼로만 흥하지 않고, 주먹, 마법, 소환술은 물론 사격술까지 미리미리 다원화해두었지요.”
은혁은 사실만 말할 수 있어서 속이 무척 편했다.
은혁은 어떤 적이 나타나건, 어떤 공격 수단이 막히건, 늘 싸울 수 있도록 다양한 전투 수단을 확충해왔다.
은혁이 [확률 지배]를 쓰는 시리우스를 눈앞에 두고도 꿀리는 것 없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네네, 뭔 의도로 하신 말인지는 아는데, 제 답변은 그겁니다.”
스윽.
은혁은 듀얼 체인 소드를 들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대응 수단뿐만 아니라 설득 수단도 다원화해두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실래요?”
“크흑……!”
시리우스는 설움을 느꼈지만 주도권은 은혁에게 완전히 넘어간 상태다.
“제 부탁은, [확률 지배] 스킬을 한 번만 더 써 달라는 것뿐입니다. 그리 어려운 건 아니니 들어 주시죠.”
“그 부탁만 들어주면, 정말 놔줄 건가?”
“물론입니다.”
“즉시 놔줄 건가?!”
“네.”
“맹세할 텐가!!”
“그러죠. 단, [맹세]까지 하는 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뭐지?”
“3군주 쪽으로 투신하는 건 안 됩니다. 다시 5층 길드연합국으로 돌아가십시오.”
“뭣?!”
“뭘 그리 놀랍니까?”
“이제 와서 돌아가라니! 그건 나보고 평화의 감옥에 들어가라는 소리 아니냐!”
“네, 맞아요.”
은혁은 자신에게 패배한 시리우스를 평화의 감옥에 넣을 생각이었다.
‘트윈스 원이 언제 날뛸지 모르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트윈스 원은 구원을 미끼로 평화의 감옥 죄수들을 포섭하고 있을 터.
박병철을 심어 두긴 했지만 한 명으로는 모자라다.
“더 나아가, 이제부터는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심영처럼, 저를 열렬히 지지해 주십시오.”
“…….”
시리우스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희망 고문이 이런 거구만.”
“듣고 보니 그러네요.”
은혁도 인정했다.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놓아줄 것처럼 처음에 말해 놓고는,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각종 요구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다.
아예 처음부터 ‘평생 내 부하가 되어주셈.’ 하고 요구하지 않고 ‘부탁 하나만 더’ 하는 식으로 요구하니, 아무리 시리우스라고 해도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훗. 이게 바로 노예로 부리는 게 아닌, 노예처럼 부린다는 것! 당신과 내 차이가 이제 느껴집니까?”
스르륵.
시리우스는 앉은 자세에서 옆으로 쓰러졌다.
완전히 희망이 꺾인 상태.
“김경철. [정신 묶기] 쓸 줄 아나?”
“…….”
“대답 자꾸 안 할래?”
“가능하긴 합니다만…….”
“그걸 시리우스에게 써.”
“…….”
“꼭 두 번 말해야 하나?”
“아닙니다.”
김경철은 정신을 아주 놓아 버리기 직전의 시리우스를 향해, [정신 묶기] 스킬을 쓰려고 했다.
그 순간.
타앗!
시리우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도망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