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 다차원 은행에서의 결전 (1)
불안감 속에서 손톱을 씹으며, 테일러는 자신의 전략을 되돌아봤다.
그러나 테일러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냐. 통계를 믿자.’
일단, 다차원 은행은 그 누구도 털지 못했다.
또한 통계적으로, 은혁과의 접촉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 부길드장은 더 큰 위기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테일러는 자신의 방침이 옳다고 확신했다.
‘괜찮아. 1시간만 더 버티면 돼.’
그동안 다차원 은행의 방어는 보다 완벽해졌다.
은행 바깥에는 테일러가 심어 둔 첩자들과 안드로이드 용병대가 대기 중이다.
은행 내부에는 자유시장 길드의, 유사시 방어 훈련을 받은 주력 전투원들이 대기 중이다.
각종 방위 포대와 함정도 모두 가동 준비된 상태.
그밖에도 테일러는 내부가 뚫렸을 때를 대비한 작전도 세워뒀다.
‘여기서 병력을 더 모으긴 어렵기도 하고, 현시점에서 작전을 바꾸면 더 위태로워질 수 있어.’
테일러는 경거망동하지 않기로 했다.
‘쳐들어올 테면 와봐라. 애초에 들어올 수도 없겠지만.’
시리우스와 김경철이라는 변수가 생기긴 했지만, 테일러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다.
* * *
은혁의 팻말 미션 제한 시간까지 15분가량 남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을수록 테일러는 초조해졌다.
‘왜 안 오지?’
테일러는 강은혁이 어떤 수를 쓸지 상상이 가지 않았기에, 의심이 점점 커졌다.
그는 직속 부하들을 불러 모았다.
“마셔라.”
마법사에서 승급한 연금술사답게, 테일러는 부하들에게 진실의 약을 먹였다.
“또 마셔야 합니까?”
부하 중 누군가가 투덜거렸다.
지난 한 시간 동안 벌써 두 잔을 마셨고, 이번이 세 번째다.
“마시지 않으면 첩자로 간주하겠다.”
테일러가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자, 부하들은 한숨을 쉬며 마셨다.
꿀꺽꿀꺽……!
무척 맛이 썼지만, 테일러의 부하들은 남김없이 모두 마셨다.
테일러는 다시 한번 질문했다.
“너희 중에 강은혁의 스파이가 있나?”
물론 없었다.
애초에 은혁은 팻말 미션을 만들 때 세뇌 등의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했으므로.
그럼에도 테일러는 이 조용함이 의심스러웠다.
집무실로 돌아와서 통신 장치를 켰다.
“강은혁은 지금 뭘 하고 있지?”
테일러가 41층과 42층에 심어 둔 부하들이 은혁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질문을 하는 테일러에게 신물이 났지만, 그래도 보고했다.
“여전히 대화 중입니다.”
은혁은 김경철을 부하로 삼은 직후부터, 끊임없이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내용의 대화인지는 알 수 없었다.
대화 내용을 들으려면 더 가까이 가야 하는데, 시리우스가 그런 김경철과 은혁의 주위를 서성이며 경계를 섰기 때문이다.
“미션 종료 시간까지 15분이다. 그런데도 가만히 있다고?”
“예, 그렇습니다.”
“혹시 분신 아닌가?”
“그 가능성도 확인해 보았습니다만,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럼 염훈이라는 놈은 뭘 하고 있나?”
염훈은 41층, 다차원 광장에 있었다.
“그도 비슷합니다. 자신의 미션 참가자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연설 중입니다.”
“그중에 불패불굴 길드원들이 있나?”
“없습니다. 현재 염훈의 휘하에 있는 자들은 불패불굴 길드원들이 아니라, 40층, 41층 구간에서 모집한 자들입니다.”
테일러는 다른 부하에게 질문했다.
“불패불굴 길드의 본부, 콩나무 쪽의 동향은?”
일전에 설치한 ‘자판기’ 속에는 테일러가 직접 연금술 스킬로 설계한, [호문클루스 버그]라는 이름의 도청기가 숨겨져 있었다.
유통기한이 있는 도청 장치인 대신, 어지간한 탐지 스킬로도 감지되지 않았다.
물론, 은혁은 그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그 도청기가 휴게실 하나에 한정된 것이기에 일부러 방치해 두었다.
“대다수의 불패불굴 길드원들은 평소대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즉, 훈련, 업무, 휴식을 각자 루틴에 맞춰 행하고 있을 뿐.
긴급 대기 중이라는 동향은 없었다.
정보를 모두 수집한 테일러는 더욱 초조해졌다.
‘그럼 도대체 뭘 하려는 건데! 설마 제한 시간을 추가로 연장하려는 걸까?’
그때였다.
“강은혁이 옵니다.”
안드로이드 부관이 말했다.
“영상을 비춰봐라.”
위잉…….
방벽 안쪽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 화면이, 부길드장의 집무실 스크린에 떠올랐다.
그곳에는 은혁, 시리우스, 김경철이 있었다.
쥐 떼 두목은 은혁이 [그림자 감옥]으로 가둔 채 안주머니에 넣어 둔 상태.
감시 카메라에 비친 은혁은 물론이고, 다들 무척 지쳐 보였다.
“여어, 테일러 부길드장님! 보고 있습니까?”
은혁이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물론, 테일러는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은혁은 히죽 웃었다.
“잠시 뒤, 귀하의 은행 금고의 보안을 테스트하는 미션을 진행하겠습니다. 미션 규칙에 대해서는 관리국에 의해 중재된 바 있으나, 구체적인 금고의 보안 테스트 방식에 대해서는 협의된 바 없음을 밝힙니다. 또한 당신의 금고 속의 돈을 훔치려는 목적이 없음을 거듭 강조드립니다.”
물론, 테일러는 전혀 믿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저의 미션에 참가한 이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은혁이 자신의 뒤편을 가리켜 보였다.
그곳에는 염훈과, 염훈이 이끄는 300명의 미션 참가자들이 있었다.
염훈이 내건 팻말 미션의 조건에 합치되는 인물들로, 약해 보이는 이들은 없었으며, 정신 무장 또한 상당해 보였다.
“저들로서, 약 300명입니다. 단, 염훈 본인은 저의 팻말 미션 참가자가 아니며, 다만 미션 참가자들과 저를 도와주는 역할일 뿐임을 밝힙니다.”
즉, 염훈이 금고 속에 들어간다 해도, 관리국의 중재를 어기는 것은 아니지만, 미션 클리어 판정은 뜨지 않는다.
반드시 팻말 미션에 참가한 저 300명 중 한 명이라도 금고 내부에 들어가야 클리어다.
“이의 사항이 있으시다면, 지금 말씀해 주십시오. 아시다시피 저의 팻말 미션 제한 시간은 15분도 안 남았으니까요.”
은혁이 선택을 강요했다.
테일러는 침묵으로 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은혁이 손을 높이 들었다.
그 순간, 뒤편에서 미션 참가자들이 빠른 걸음으로 몰려왔다.
저벅저벅저벅…….
염훈이 이끄는 수백 명의 미션 참가자들.
염훈이 만든, 강은혁의 금고 침입 테스트 미션에 통과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염훈의 인솔을 받되, 동시에 은혁의 팻말 미션에 참가한 상태.
염훈의 테스트를 통과할 정도의 근성과 실력, 거기에 은혁이 만든, ‘은행 금고 보안 테스트라는 명목의 금고 털이’라는 욕망을 갖춘 자들의 눈빛은 형형했다.
테일러는 CCTV 모니터를 보며 의아해했다.
“그냥 저렇게 정면으로 오는 거라고? 어차피 못 들어오는데?”
지금의 다차원 은행은, 게이트를 작동시켰기 때문에 다른 차원으로 취급된다.
다차원 은행 안으로 들어오려면 게이트 미션을 클리어해야 하지만, 클리어에 걸리는 시간을 [시간 왜곡]으로 늘려 놨다.
‘무슨 수작이지? 머릿수로 금고를 부수겠다는 발상이라면 불가능하진 않지만, 그건 우리 측이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 때의 이야기지. 방어 시설과 작전은 충분하고, 애초에 게이트 때문에 들어올 수가 없는데……?’
테일러가 의아해한 순간.
“요격 범위 내에 들어왔습니다. 병력을 출격시킬까요?”
안드로이드 부관이 말했다.
여성형 안드로이드인 아비프였다.
평소에는 일반 신규 계좌 상담 직원이지만, 비상사태에는 테일러의 부관으로 일했다.
“아비프. 네 생각에…….”
아비프에게 의견을 물을까 하던 테일러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투자 자문이 아니다. 안드로이드에게 의견을 물을 순 없어.’
부길드장으로서는 물론, 은행장으로서의 결단이 필요했다.
테일러는 각오를 담아 외쳤다.
“그래! 출격이다! 안드로이드 용병 부대를 전원 출격시켜라!!”
테일러가 명령을 내렸다.
자유시장 길드의 주력 길드원들은 은행의 담장 안쪽, 안뜰에서 대기 시킨 상태였고, 안드로이드 용병 부대는 바깥에 배치해 둔 상태였다.
‘돈값 해라.’
테일러는 마음속으로 안드로이드 용병 부대에게 지시했다.
“다차원 은행에 무단침입하려는 다수의 폭도들에게 명한다.”
안드로이드 용병대장인 에르고가 외쳤다.
“본인은 이 용병대를 이끄는 에르고 장군이라고 한다.”
에르고의 손가락이 변형하는가 싶더니.
키이잉!
레이저를 발사하여 바닥에 선을 그었다.
파츠즈즈즈……!
“이 선을 넘으면, 다차원 은행에 대한 침입 의사가 있다고 간주하겠다.”
에르고의 목소리를 들은 테일러는 속으로 화를 냈다.
‘무슨 잘난 척을 하는 건가! 바로 쏴야지!!’
테일러는 에르고가 불필요한 잘난 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에르고는 딱 돈 받은 만큼만 일하는 용병답게 처신 중이었다.
에르고의 목적은 은혁과 염훈 휘하의 적들을 모조리 죽이는 게 아니다.
돈을 받은 용병이므로 다차원 은행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시간제한이 있지.’
앞으로 13분도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그럼 성공 보수까지 두둑하게 받는다.
용병으로서는 이처럼 편한 장사가 없다.
그때, 염훈이 프리즘 랜스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안드로이드라고 했지? 신성한 미션 사이에 왜 끼어드는 거냐? 이건 플레이어와 플레이어 사이의 일이야. 비켜라.”
“플레이어 간의 미션을 신성하다고 한다면, 고용주와 용병 사이의 계약 또한 신성하다고 말하겠다.”
“싸울 수밖에 없나.”
“싸움이라고 했나, 플레이어여?”
에르고가 손을 들어 올린 순간.
기이잉!
안드로이드 용병들이 각종 투사 병기를 준비 상태로 가동시켰다.
플라즈마 라이플이 가장 평범한 무기였고, 마취용 젤을 발사하는 젤 슈터부터 행동 고착 필드를 쏘는 슬로우 필드 프로젝터까지.
살상용, 비살상용 무기가 골고루 준비되어 있었다.
“즉각 떠나라. 지금 물러나면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은혁이 대신 말을 받았다.
“그 소리는 내가 할 소리다.”
“엇?!”
은혁은 어느새 [그림자 도약]으로 안드로이드 용병대 한복판에 와 있었다.
“어리석은 놈! 슬로우 필드 마인을 터뜨려라!”
안드로이드에게는 안 통하고, 유기 생명체에게만 통하는 슬로우 필드 마인.
안드로이드 병사들이 그걸 연속으로 작동시켰다.
콰쾅!
콰콰쾅!
은혁 한 명을 위해 쓰는 건 낭비 같았지만, 침략군의 수뇌인 은혁을 생포할 수 있다면 임무 완수나 다름없기에 다량 터뜨렸다.
하지만.
스스슥.
그건 [그림자 분신 3.0]으로 만든 가짜였다.
“하하하! 이봐, 용병대. 정보 공유가 잘 안 됐나 봐? 내가 그림자 분신 쓰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이런 기초 사항도 전달받지 못했나?”
은혁의 본체는 어느새 [은신]으로 숨었고, [그림자 분신 3.0] 다수만이 안드로이드 용병대 곳곳에 들어와 있었다.
“큭……!”
에르고는 분했지만, 은혁의 지적이 사실이었다.
테일러는 그들을 용병대로 부려 먹기만 할 뿐, 은혁의 진짜 능력들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용병 고용주인 테일러 입장에서는 용병과 적병이 양패구상하는 결과가 최선이므로.
용병들도 다 죽어야, 추가 수고비를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돈을 아끼려는 테일러의 무의식적인 평소 습관이, 지금의 사태를 낳았다.
어딘가에서 은혁의 본체가 외쳤다.
“자아, 분신들이여! 주먹으로 쳐라!”
“응사하라!”
투쾅! 투쾅!
안드로이드 용병들이 각종 무기를 발사하며 공격을 가했다.
그림자 분신들은 빠르게 사라졌지만.
“와아아아아!!”
“돌격! 돌겨억!!”
어느새 염훈이 이끄는, 은혁의 팻말 미션 참가자들은 안드로이드 용병대의 코앞에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