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 다차원 은행에서의 결전 (4)
콰악!!
테일러의 어깻죽지에 낚싯바늘이 꽂혔다.
“크악?!”
복잡한 난전 도중에, 차원의 벽을 뚫고 낚싯바늘만 날아와서 박힌 것이라, 테일러도 미리 대처하지 못했다.
“흐읍!”
은혁은 테일러를 자신의 코앞으로 끌어당겼다.
화악!
난전 도중에 일대일 상황을 만드는 것.
그것이 은혁의 의도 중 하나였다.
“하하.”
은혁은 코앞까지 날아온 테일러를 보며 웃었다.
“……!!”
은혁과 눈이 마주친 테일러는 즉각 반격을 하는 대신 얼어붙었다.
동물원 밖으로 풀려난 맹수를 길가에서 마주한 것과 비슷한 오싹함.
아이리스의 밑에서 중재를 받을 때의 은혁과 지금의 은혁은 눈빛 자체가 달랐다.
“일단 주무시죠, 은행장님.”
은혁이 웃으며 [섬영권]을 냅다 날렸다.
퍼억!!
주먹이 테일러의 턱 끝을 갈겼다.
테일러의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위험하다!’
테일러는 사실상 필살기나 다름없는 가장 강력한 스킬을 바로 썼다.
“[타임 스톱]!!!”
-시간이 8초간 정지합니다!
쿠궁…….
모든 게 정지했다.
수백 명이 격돌하는 가운데, 스테이지 전체의 모든 것을 정지시키는 것.
그것이 그 유명한 [타임 스톱]이다.
스르륵…….
테일러가 인벤토리창 속에 잔득 쟁여 둔 금화는 물론, 마력과 체력도 서서히 말라갔다.
‘8초.’
테일러의 [타임 스톱]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실외의 [타임 스톱]과 실내의 [타임 스톱].
실내의 [타임 스톱]은, 마력만 충분하면 하루에 몇 번이라도 쓸 수 있는 대신 딱 2초 동안만 가능하다.
반면에 실외의 [타임 스톱]은 하루에 1회만 쓸 수 있는 대신 8초간 가능하며, 체력과 마력이 잔뜩 소모된다.
‘침착하자. 이 싸움은 내가 이겼으니까.’
테일러는 그 상태에서 자기 자신에게 [스킬 지속 시간 연장] 스킬을 썼다.
기이이잉……!
금화가 미친 듯이 소모되었지만, 그만큼 의미가 있었다.
‘아직이다. [황금의 시간]!’
파앗!
정지된 시간 자체를 연장시킨 상태에서, 추가로 자기 자신을 가속.
그 시간 동안 테일러는 은혁을 열 번이라도 죽일 수 있을 터.
‘[신체 급가속 폭탄]으로 죽이는 게 낫겠군.’
[신체 급가속 폭탄] 또한 매우 범용성이 높은 스킬이다.
상대의 몸통과 팔 사이의 시간에 괴리를 유발시켜서 끊어 놓거나, 심장을 미친 듯이 빠르게 뛰게 만들어 터뜨려 죽이거나 하는 스킬.
단점은, [신체 급가속 폭탄]을 상대 몸에 심으려면 반드시 접촉해야 한다는 점.
그래서 테일러는 [신체 급가속 폭탄]을 주로 배신한 부하를 잡아서 처단할 때 쓰거나, 지금처럼 [타임 스톱]이 발동한 뒤에만 썼다.
‘심장을 가속시키고, 두뇌를 감속시키고, 신체 주요 동맥의 시간을 어긋나게 해서 죽여주마.’
테일러가 양손, 열 손가락 모두에 [신체 급가속 폭탄]의 힘을 모았다.
우우우웅……!!
테일러는 흉흉한 위력을 담은 손가락을 활짝 펼친 채, 은혁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테일러가 은혁의 그림자를 밟은 순간.
뚜둑!
은혁의 손발이 움직였다.
‘뭣?!’
타앗!
테일러가 뒷걸음질 쳤다.
다시 보니 은혁은 그대로였다.
‘설마? 내 착각인가?’
테일러는 착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말이 안 돼.’
[타임 스톱]은 절대적이다.
관리국 소속의 요원에게도 통하는 기술은 극히 드문데, 테일러의 시간 관련 스킬은 대부분 통한다.
실제로 [시간 되감기]로 아이리스를 당황케 하기도 했으므로.
[타임 스톱]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은혁이 [타임 스톱] 속에서 움직인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젠장. 벌써 시간이 이만큼 됐나.’
하다못해 원거리 공격이라도 가해야 했다.
그림자와 멀리 떨어진 상태로.
그때, 정지된 시간 속에서, 물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중한 판단만은 제법…….”
은혁이 소곤거리듯 말했다.
테일러는 튕기듯이 뒤로 물러났다.
“뭐, 뭐뭐뭐?!”
경악해서 되물었지만, 은혁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가만히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고명하고 신비로운 스킬들 중에서도 최정상급인 [타임 스톱]을 쓰고 있는 이는 테일러 자신인데, 정작 수수께끼에 휘말려서 당황하고 있는 이 또한 테일러 자신이었다.
‘제길! 벌써 시간이 다 됐잖아!’
모처럼 연장시킨 시간이었음에도 어이없게 날려 버렸다.
-정지된 시간이 다시 흐릅니다!
타앗!
테일러는 뒤로 크게 뛰었다.
손에 걸어 둔 [신체 급가속 폭탄] 스킬을 해제하고, 즉시 주머니에서 연금술 포션을 꺼내서 깨트렸다.
쨍그랑!
내부의 기체가 테일러의 몸을 휘감았다.
“[극한 방어의 포션].”
물리 방어력을 13초간 100배로, 그밖에 다른 저항력을 13초간 50배로 증가시키는 포션.
무척 비싸지만 전투 중에 13초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엄청난 물건이었다.
특히나 테일러에게 13초는 충분히 긴 시간.
“신중하시군요.”
은혁이 피식 웃었고, 테일러는 이를 갈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속임수냐!”
“속임수라뇨?”
길드원들이 싸우는 소리가 시끄러운 와중에, 두 사람은 대화를 하며 추격과 반격을 교환했다.
“시간이 정지된 상태에서 뭘 어떻게 움직였던 거냐고 물었다!”
테일러는 자존심이 부서진 사람 특유의 말투로 따졌다.
은혁은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좀 더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까지, 그 트릭의 답을 숨겨 둘 생각이었다.
“뭔 소린지 모르겠군요. 그보다 물리 방어력을 강화시키셨는데, 그것만 믿고 너무 여유 부리시네.”
은혁은 단숨에 [그림자 질주]를 발동했다.
파바바박!
[그림자 질주]는, 예전에 방심한 브라이언의 뒤통수를 깰 때 썼던 그 스킬이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은혁은 가장 자신 있는 스킬을 테일러의 코앞에 대고 썼다.
“[염열파]!!”
화르르륵!!!
손 뻗으면 닿는 거리에서 발동한 [염열파]의 위력은 방어력과 저항력을 뚫고, 테일러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크아악!!”
테일러는 고통보다는 이 공격의 악랄함 때문에 질려서 비명을 질렀다.
상대의 코앞에 라이터를 갖다 대는 것도 엄청난 폭력인데, 은혁은 가장 자신 있고, 빠르고 강력한 퓨전 스킬 [염열파]를 코앞에 대고 썼다.
대놓고 죽이겠다는 의도가 역력했다.
화르르르르……!!
강해질 대로 강해진 은혁의 [염열파]는 공기를 태우고 테일러의 주변 땅 자체를 녹일 정도의 위력.
쩌저저적……!!
테일러가 착용한 경갑이 비정상적인 고열 때문에 표면이 유리화되어 깨지기 직전이었다.
[극한 방어의 포션]을 사용 중임에도 피해가 너무 빠르게 누적되었다.
테일러가 스스로의 체력 감소 속도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순간, 그의 품속의 탈리스만이 자동으로 빛을 발했다.
탈리스만은 직업이 연금술사인 자들만이 만들 수 있는 1회용 부적의 일종으로, 비상 물품이다.
-치명적인 위험 확인! 탈리스만, [셀프 리와인드]가 발동합니다!
자기 자신의 시간만을 되감는 탈리스만이 작동된 순간.
스르륵.
테일러의 몸이 반투명해지더니, 낚싯바늘에 박히기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갔다.
물론, [염열파]에 맞은 피해도 전부 사라졌다.
그 직후, 테일러의 눈에만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탈리스만, [셀프 리와인드]가 발동하여 20초 전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뭣?!’
테일러는 깜짝 놀랐다.
‘그럼 내가 당했단 말인가?’
“부길드장님! 안으로 피하십쇼!”
직속 부하 몇이 달려와 테일러에게 외쳤다.
“이미 강은혁 놈의 낚싯대에 당하셨습니다!”
“[극한 방어의 포션]도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놈과 일대일로 붙지 마십시오!”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테일러가 모르던 정보를 알려줬다.
‘그랬군. 과거의 나는 여유 부리다가 놈의 낚싯대에 끌려가서 반죽음을 당했나 보군.’
테일러는 빠르게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역으로 도박이다.’
테일러는 자신이 이미 1회 당했다면 오히려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강은혁! 건물 안쪽으로 와라! 거기서라면 일대일로 상대해주마!”
테일러는 그 말을 남기고 다차원 은행 내부 1층으로 들어갔다.
* * *
다차원 은행 안뜰 공방전은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시간이 흘러서 어느새…….
“4분만 더 버티면 내가 이긴다.”
은행 건물 내부로 피신한 테일러가 말했다.
강은혁의 팻말 미션의 핵심은, 강은혁이 금고에 들어가면 끝인 게 아니다.
강은혁의 팻말 미션에 참가한 자들이 금고에 들어가야 끝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다차원 은행 바깥에 있지.’
테일러는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강은혁에게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리고 시간은 테일러의 편이었다.
‘[감속의 포션]을 잔뜩 분사한다.’
화재용 스프링클러가 1층 천장에 잔뜩 있었다.
그 스프링클러가 분사하는 물에는 소방용 액체뿐만 아니라, 테일러가 직접 만든 [감속의 포션]이 다량 섞여 있다.
피부에 닿기만 해도 속도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감속의 포션]
물론, 테일러에게는 별 영향이 없다.
‘놈이 똑바로 현관으로 들어오는 순간, 일대일 간격으로 가는 척하면서 스프링클러를 작동시키는 거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은혁을 이길 수 없겠지만, 제한 시간 4분간 버티는 데는 큰 도움이 될 터.
“……왜 안 들어오지?”
테일러는 은혁을 방심시키기 위해 은행 정문을 일부러 잠그지 않았다.
그 순간.
콰콰콰쾅!!!
드릴 랜스를 든 은혁이 은행 바닥을 뚫고 올라왔다.
길드원들 간의 싸움이 길어지자 은혁이 [택티컬 디깅]으로 파고들어 온 것이다.
그리고 은혁이 뚫고 온 곳에는…….
파직, 파지직.
주르륵…….
망가진 파이프들이 수상한 액체를 흘리고 있었다.
뚫고 온 자리가 하필 주요 파이프 배관이 지나오는 자리라, 파이프를 모조리 끊어 놓고 올라온 것이다.
“…….”
[감속의 포션] 스프링클러 전략도 이렇게 파탄이 났다.
이쯤 되자 테일러는 별로 화도 나지 않았고, ‘어떻게 파이프 배관의 위치까지 다 알고 온 거지?!’ 하는 식으로 놀라지도 않았다.
“혼자 왔나?”
“보시다시피 그렇습니다.”
은혁은 몸에 묻은 흙을 털었다.
“뭐, 안 물어보셨지만 그래도 대답해 드리자면, 파이프는 다 깨졌습니다.”
“철저하군.”
“아, 흙이 잘 안 털어지네.”
은혁은 연신 흙을 털었다.
제한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걸 감안하면 엄청난 여유다.
스륵스륵.
흙이 잘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자기 수복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은혁이 파괴한 파이프는 그대로 파괴된 상태이지만, 부서진 바닥은 알아서 서서히 복구되고 있었다.
‘외부와 차단을 시키려나 보군.’
시험해 보진 않았지만, 은행 건물의 벽, 바닥, 천장은 [그림자 도약]이나 [그림자 터널] 같은 스킬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을 터였다.
‘아니, 분명히 그런 효과가 있겠지.’
테일러가 은혁의 기습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에 똑바로 서 있는 게 그 증거인 셈이다.
“그나저나 저에게 일대일 대결을 청하다니, 그 용기에 우선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음?”
“일대일 대결 신청은 당연히 거짓말이지. 자넨 압도적인 머릿수에 밀려 죽을 것이다.”
테일러가 품속에서 스크롤을 하나 꺼냈다.
스크롤의 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강은혁 대항용 귀신 특무대.’
“망할, 소문대로였군요.”
“후후. 자네도 들었나 보군. 그래. 나는 돈의 힘으로 귀신들을 보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