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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모든 직업-238화 (238/434)

238화 : 아벨의 기억 (2)

관리국장도 가면 속에서 웃으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 순간.

번쩍!

행복한 남자의 종이는 제대로 하나로 합쳐졌고.

푸확!

여자 연구원은 갈기갈기 찢겼다.

“으악!”

“맙소사…….”

이미 자살 폭탄 테러를 경험한 플레이어들이었지만, 이번에야말로 크게 놀랐다.

“역시, 저렇게 죽는 건가.”

빌은 중얼거리며, 시체 곁으로 가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애도를 표하는가 싶더니, 표본 채집 장치에 살점과 피를 넣어서 보관했다.

훗날, 죽은 여자 연구원의 DNA는 레나라고 하는 인공 플레이어 제작에 활용된다.

“하하하! 그럼 슬슬 게이트 미션을 소개해야겠군요.”

<1층 게이트 미션 (베타 버전) : 스킬 게임>

-목표 : 자신이 보유한 스킬만을 이용하여 포인트를 얻을 것.

포인트를 얻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A. 상대 플레이어와 동맹을 맺는 경우 : 3점.

B. 상대 플레이어를 죽이는 경우 : 6점.

C. 제한 시간 동안 살아남는 경우 : 6점.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7포인트 이상을 모으면 클리어.

-성공 시 보너스 : 2층으로 이동 가능. 20 포인트 이상 모으는 경우 추가 보상.

-실패 시 페널티 : 죽음.

-제한 시간 : 30분.

“자아, 그럼 즐겨주시길!”

파앗!

관리국장은 사라졌다.

그리고 극심한 혼란이 찾아왔다.

아벨은 자신을 일격에 죽이려 하는 형과 맞서 싸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외쳤다.

“형! 미안해! 내가 다 망쳤어! 하지만 죽기는 싫어!!”

이것이 아벨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 * *

“은혁아, 괜찮냐?”

은혁이 정신을 차리니, 염훈이 있었다.

“으으, 내가 얼마나……?”

“한 5분? [상급 치유] 걸고 흔들어 깨워도 안 일어나서 식겁했다, 야.”

“으윽, 머리야.”

은혁이 일어나자, 조금 떨어진 곳에 아벨이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벼, 별로?”

“……그거 다행이군요.”

“어?”

“내 기억을 훔쳐 갔으면서 괜찮다면 그게 더 열 받는 일이겠지요.”

“훗. 눈치챘나.”

“변태처럼 내 오른손을 오래 붙잡고 있었을 때부터 좀 수상했습니다.”

아벨은, 은혁이 사용한 스킬, [메모리 스틸]에 대해서 정확히 간파하진 못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기억을 훔쳐 갔다는 사실 자체는 파악했다.

아벨은 물끄러미 은혁을 바라보더니.

“고맙군요.”

불쑥 말했다.

“뭘?”

“내 기억을 가져가 줘서 고맙다는 겁니다.”

아벨은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형과 사이가 안 좋다는 느낌은 여전하지만, 그 이유에 관한 부분을 싹 다 훔쳐 간 것 같군요.”

아벨은 허허 웃었다.

“나 자신을 자책할 수도, 형을 미워할 수도 없군요.”

괴로운 기억이 괴로운 이유는, 한번 떠올리면 꼬리를 물면서 이어지고, 한번 잊어도 자꾸 반복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은혁의 [메모리 스틸] 스킬은 아벨의 괴로운 기억의 원인을 통째로 훔쳐 간 것이기에 아벨은 더 정신적으로 괴로워하기도 어려웠다.

‘어? 이거 엄청 운 좋은 상황이네?’

은혁은 아벨이 오히려 고마워하자 얼른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그럼 감옥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는 거 아닌가? 자책할 이유도 모르면서 자신을 감옥에 가두는 것도 비정상인데.”

“날 비정상으로 만든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웃기지만, 그것도 맞는 말이군요.”

그렇게, 아벨은 불패불굴 길드에 정착하기로 했다.

염훈에 대한 충성 맹세는 없었지만, 일종의 객원 멤버로 머물게 된 것이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아벨.”

“저야말로.”

두 사람은 다시 악수를 나눴다.

은혁도 이번에는 스킬을 쓰지 않았다.

‘됐어! 해냈다.’

아벨은 여전히 관리국 인턴 자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 아벨을 길드 내에 객원 멤버로 둘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은혁의 꼼수 활용에 용이해진다.

그런 은혁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벨은 은혁은 물론, 염훈에게도 잘 부탁한다며 연신 인사를 했다.

* * *

며칠 뒤.

은혁과 염훈은 즉시 44층에 도전하기로 했다.

“혹시 서두르는 이유가 있음?”

염훈이 물었고, 은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음? 이 정도면 우리치곤 꽤 느긋하게 공략하는 건데?”

“그래? 기분 탓인가?”

염훈은 그렇게 중얼거렸고, 은혁은 속으로 염훈을 향해 ‘가끔 보면 엄청 예리한 녀석이라니깐’ 하고 생각했다.

‘아벨은 큰 카드 패이긴 한데, 당장은 쓸 일이 없는 카드 패지. 바꿔 말하자면, 내가 아직 모자라다는 뜻이 된다.’

쉴 새 없이 달려온 은혁으로서는 그 느낌이 영 불편했다.

자기 역량이 부족해서 손에 든 카드를 쓰지 못하는 건 영 불편한 느낌이었다.

“가자! 44층으로!”

* * *

-44층 : 흡혈귀 남작의 영지

염훈과 은혁은 커다란 동굴의 입구에 전송됐다.

보름달이 뜬 하늘은 캄캄했고, 안개가 자욱했다.

스오오오……!

기분 탓인지 거대한 괴수의 숨결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으으, 진짜 공포 영화에 나올 법한 저택이네.”

염훈이 감탄하자 은혁도 동의했다.

“음. 그러네. 단, 싸구려 공포 영화지만.”

동굴은 은혁의 말대로 싸구려 공포 영화 속 괴수의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동굴의 높은 천장에는 종유석들이 커다란 이빨처럼 조각되어 있었다.

“좀 더 관찰하고 들어가 볼까?”

은혁은 가볍게 [플레어] 스킬을 썼다.

파앗!

섬광이 동굴의 초입으로 날아갔고, 거대한 저택이 보였다.

입구가 크고 높은 동굴의 그림자에 완벽하게 가려진 저택이었다.

이런 동굴 속에 지어진 저택이니 채광이나 통풍이 좋을 리가 없다.

하지만 흡혈귀에게는 오히려 그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은혁과 염훈은 조심스럽게 흡혈귀의 저택 쪽으로 향했고, 팻말을 발견했다.

북쪽 : 흡혈귀 남작의 저택

남동쪽 : 공동묘지

“흠, 둘 다 최악이네. 이 스테이지는 어떤 이상한 녀석이 만든 거야?”

염훈이 투덜거린 순간, 메인 미션창이 떴다.

<44층 메인 미션 : 흡혈귀 남작의 저택>

-목표 : 흡혈귀 남작의 심장에 나무 말뚝을 박거나,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버틸 것.

-성공 시 보너스 : 랜덤 상자 1개.

-실패 시 페널티 : 영원히 흡혈귀가 된다.

-제한 시간 : 6시간. 단, 저택 안에 들어간 순간부터 줄어든다.

“흡혈귀 심장에 말뚝이라. 진짜 고전 흡혈귀 영화에 나올 법한 미션이네.”

염훈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우리는 고전 흡혈귀 영화에 나오는 희생자들과는 거리가 멀지.”

당장 은혁이 손에 쥔 것만 해도 듀얼 체인 소드다.

거기에 인벤토리창에 묵직하게 잠들어 있는 사이오닉 런처도 있다.

‘사이오닉 런처…… 시험 삼아 냅다 쏴볼까?’

극단적인 발상이지만, 미션의 핵심 장소인, 동굴 속 저택을 향해 사이오닉 런처를 최대 출력으로 쏴서 스테이지를 박살 내는 것도 꽤 흥미로운 일일 터였다.

하지만.

‘엄청 유혹적이지만 그러진 말자. 저택 안에는 흡혈귀들에게 생포 당한 희생자들도 갇혀 있고, 미션을 클리어하기도 전에 스테이지를 미리 부쉈다간 회귀 지식과 너무 동떨어진 쪽으로 역사가 뒤바뀔지도 모르니까.’

은혁은 44층에서 쏙쏙 빼먹고 싶은 것, 확인하고 싶은 것들이 몇 개 있었다.

“준비됐냐, 염훈?”

“그래. 빨리 들어가자. 어차피 미션 깨려면 들어가야지.”

“음. 들어가자마자 기습 공격이 날아올 수 있으니 [2초 무적] 준비해.”

“알았어.”

은혁이 조심스레 현관문을 노크했다.

대답이 없어서 문을 연 순간.

파앗!

두 사람은 저택 1층 홀 한복판에 전송됐다.

두 사람은 전투 자세를 취했지만, 기습해 오는 적은 없었다.

“깜짝이야. 왜 갑자기 전송되고 난리람?”

염훈은 평소보다 좀 많이 투덜거렸다.

“쉿. 시간차로 기습 올 수도 있어.”

은혁은 염훈을 조용히 시킨 뒤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메탈 레인저부터, 섀도 코볼트까지, 각종 소환수를 소환했다.

파앗! 파앗!

하지만 조용했다.

“……정말로 기습 같은 건 없는 모양인데?”

염훈이 중얼거렸다.

적어도 흡혈귀들이 마구 달려드는 사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홀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현관 옆에 위치한 커다란 회중시계나, 천장 높은 곳에 달린 샹들리에를 제외하면 별다른 장식은 없었다.

다만 회중시계는 고장나 있었고, 샹들리에는 오랜 세월 방치되어 먼지가 쌓여 있었다.

“은혁아?”

“음…….”

은혁은 아직도 바싹 긴장한 자세 그대로였다.

도적 패시브 스킬 [기습 감지]에 온 정신을 집중한 채, 여전히 소환수들 사이에서 꼼짝도 안 하고 전투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의외네.’

염훈은 생각했다.

어지간한 적지에서도 거침없이 행동하던 은혁이었기에, 지금처럼 바싹 긴장한 태도는 염훈이 보기에 좀 생소했다.

염훈은 그런 은혁을 둔 채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당겨 봤다.

덜크럭.

문은 열리지 않았다.

-흡혈귀 남작의 열쇠가 없으면 열리지 않습니다!

아예 시스템 메시지까지 흘러나왔다.

아마 오토 락픽이나 [자물쇠 따기] 스킬을 써도 시스템에 의해 열리지 않을 터.

“와씨, 다시 보니 이거 좀…….”

커다란 현관문 곳곳에 묻은 피투성이 손자국과 긁힌 자국을 발견했다.

탈출하려고 현관문에 매달리다 죽은 플레이어들이 꽤 많은 것 같았다.

“음. 일단 현관문은 건들지 말자.”

[함정 탐지] 스킬을 써도 별 수상한 점은 없었지만, 너무 눈에 띄는 현관문이라서 수상쩍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창문도 없네. 이제 어쩔까?”

본관 안쪽으로 향하는 복도가 있고, 한켠에 붉은 융단 깔린 계단이 있었다.

휘오오오……!

복도 쪽에서 시취와 함께 바람이 불어왔다.

파앗……!

염훈의 [신성한 오러]가 자동으로 발동됐다.

“복도 쪽은 가지 않는 게 좋겠다.”

염훈이 말했고, 은혁이 동의했다.

“염훈. 몬스터 같은 게 오진 않지?”

“응. 불길한 기운만 몰려올 뿐이야.”

그제야 은혁은 안심하고 소환수들을 해제했다.

“그럼 잘됐군. 내 방식대로 할 수 있겠어.”

“응? 설마 네 방식대로라면…….”

“뭐, 이런 거지.”

은혁은 세븐 칼리버를 드릴 랜스로 변형시키더니.

키이이잉!

“하앗!”

콰두두두!!

냅다 벽을 향해 드릴을 꽂았다.

하지만.

촤아아악!!

벽이 핏물로 변하면서 드릴이 헛돌았다.

그리고 핏물이 드릴 랜스와 은혁을 집어삼키려 했다.

“으음!”

은혁이 뒤로 물러나자, 핏물은 더 접근하지 않고, 약간 뚫린 구멍으로 되돌아왔다.

촤르르르르륵……!!

일부 뚫린 구멍이 순식간에 수복되었다.

“헐, 쩐다.”

염훈은 솔직히 감탄했다.

하지만 은혁은 오기가 생겼다.

“염훈. 네 빅 썬더로 [신성한 일격] 한 방……!”

그때였다.

“오효효효! 다들 급한 분들이시군요!”

구부정한 자세를 한 집사가, 계단 위에서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스칼란 드 폴라스트롱 남작님의 비천한 노예, 라비라고 합니다.”

라비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저의 주인님께서 두 분을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식당으로 안내해 드리지요.”

“싫은데?”

은혁이 말하자, 라비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다른 플레이어분들도 다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죠. 하지만 길은 두 개뿐입니다. 계단으로 올라오시든가, 아니면…….”

척!

라비가 복도를 가리켰다.

“본관 뒤편, 가문의 공동묘지로 향하는 통로로 가시든가.”

“허. 힌트 고맙네. 공동묘지 쪽에 출구가 있다는 뜻이네?”

“…….”

라비는 말실수를 하지 않으려 주의하며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할까.”

은혁이 고민하자, 염훈이 나섰다.

“은혁아. 일단 출구 확보부터 하자. 갇혀 있으려니 영 신경 쓰이네.”

그러자 라비가 열쇠를 꺼냈다.

짤그랑.

“현관 밖으로 나가셔도 됩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열쇠도 드리죠.”

“헐, 진짜?”

“하지만…….”

라비는 또 쿡쿡쿡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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