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 흡혈귀의 저택 (1)
“이미 많은 분들이 현관 밖으로 나가셨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셨답니다.”
염훈이 ‘불길한 소리는 이제 질렸다! 이 사악한 흡혈귀 놈!’이라고 외치기 직전.
“뭐, 좋아. 식사 초대에 응하겠다.”
은혁이 얼른 말했다.
그리고 라비가 감사의 몸짓을 하려는 순간.
“단, 무슨 식사 시간이지?”
“네?”
“아침, 점심, 저녁 중 무슨 식사 시간이냐고 물었다.”
“……으음.”
라비는 처음으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
“그야 물론 저녁 식사 시간이지요.”
라비는 그렇게 얼버무리며 은혁과 염훈을 빨리 계단 위로 안내하려 했다.
하지만 은혁은 걸음을 멈춘 채 재차 물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라. 창문이 없어서 잘 몰랐네. 지금이 정확히 몇 시인가?”
대답하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라비는 체념한 듯이, 고장 난 회중시계를 향해 손짓했다.
휘오오……!
바람이 불더니, 회중시계의 시곗바늘이 빠르게 돌아, 정확한 시간을 보여줬다.
-현재 시각은 오전 1시 5분입니다!
-태양이 뜨는 시각은 오전 5시 19분입니다!
-일출까지 남은 시간 : 4시간 14분.
“고맙네.”
“보아하니 저의 주인님에 대해 잘 아시는 듯하군요.”
“전혀.”
은혁은 이렇게 말했지만, 물론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회귀 전에도 염훈과 함께 이곳에 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때와는 다르다는 거지.’
회귀 전에는 은혁과 염훈, 두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플레이어들 열두 명과 함께 왔었다.
‘그때는 분명 습격당했었는데.’
1층 홀에 도착하자마자 하급 뱀파이어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일종의 몬스터 웨이브에 휩쓸렸었다.
게다가 시간 확인도 불가능해서, 마치 영원히 흡혈 괴물들 속에서 싸우다 죽는 건가 싶었다.
실제로, 일출은 늦게 왔었다.
이곳을 지배하는 흡혈귀 남작의 스킬의 능력이 [일몰 지배]였기 때문이다.
일출을 강제로 막는 [일몰 지배]는 너무나 강력한 스킬이므로 제약이 있었는데, 상대가 정확한 시간을 밝히며 지적하면 [일몰 지배]가 풀리는 것이었다.
스테이지마다 시간이 달랐기에, 은혁은 라비를 통해 확실한 시간을 알아냈다.
‘회귀 전에는 그나마 염훈이 있어서 살았었지.’
중간에 성기사인 염훈이 있어서 버텼지, 아니었으면 전멸했으리라.
은혁이 이번에 잔뜩 긴장한 것도, 회귀 전의 기억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흡혈귀 쪽에서 정중하게 식사에 초대라.’
솔직히 기대됐다.
그런데 라비는 바로 식당으로 안내하는 대신, 일부러 구불구불한 복도를 지나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은혁은 회귀자라서 식당 위치를 알고 있었지만, 바로 지적하지 않고 조금 기다렸다.
“이봐.”
“네?”
“왜 바로 식당으로 가지 않는 거지?”
라비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어떻게 아셨는지요?”
“그야 일부러 멀리 돌아가는 것 같아서 한 말이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알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네가 우리를 식당으로 안내하지 않는 게 문제 아닌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다만 남작께서는 두 분을 모시고, 꼭 연회장에 잠시 들렀다가 오시라고 엄명하셨습니다.”
“연회장?”
은혁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왜냐하면…….
“염훈.”
“응?”
“화가 나더라도 일단은 한 번 참아라.”
“어? 무슨 일인…….”
말하는 순간.
키이이잉……!
염훈의 몸에서 자동으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이는 근방에 매우 사악한 기운이 가득하다는 뜻.
그때, 연회장의 방음벽을 뚫고 괴로워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악……!
살려주세요……!
“이 소리는 뭐지?”
염훈이 날카롭게 묻자 라비는 쿡쿡 웃었다.
“직접 보시지요.”
벌컥!
연회장의 문을 열었다.
연회장은 핏물 가득한 지옥이었다.
“꺄하하하!”
알몸의 흡혈귀들이 플레이어들을 고문하고 있었다.
팔다리가 잘린 플레이어들을 나무로 된 틀에 끼운 채, 나사못을 빙글거리며 천천히 박아넣고 있었다.
“아악! 아아악!”
“끄라하하라아아아악……!!”
이미 오랫동안 고문당했기에 더 흘릴 피도 없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피를 흘렸다.
주르륵.
주르륵.
흘러간 피는 바닥의 홈을 타고 중심에 모였는데, 그 중심부에 야트막한 피의 분수가 있었다.
“끄아아아!”
고문당하던 한 명은 혀를 깨물고 자살하려 했지만.
“꺄흐흐흐!”
“죽으려면 멀었단다!”
흡혈귀들은 플레이어들이 갖고 있던 힐링 포션을 아낌없이 부어가며 회복시켰다.
“얘! 한 번에 많이 쓰면 어떡해!”
“그치만 애가 자살을 시도했는걸?”
“바보야! 흡혈귀인 우리가 힐링 포션을 어떻게 구하려고!”
“바보는 너야. 어차피 또 멍청한 플레이어들이 올 텐데, 뭘.”
“어머, 그것도 그러네.”
“호호호!”
흡혈귀들은 그렇게 떠들다가, 은혁과 염훈을 봤다.
“새로 온 바보들이네?”
“그러게. 오호호!”
그러자 염훈이 빅 썬더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참아라, 염훈.”
“이걸 보고 참으라고?”
“응.”
“야!! 도대체 무슨 계획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걸 보고 어떻게 참으라는 거야!!!”
“네가 참아야 내가 다 처바르지.”
“어?”
은혁은, ‘성기사인 네가 저 흡혈귀 새끼들을 공격하면 놈들은 다 죽어 버린다. 일단 죽이지는 않는 선에서 처바르려면 내가 나서야 한다’라고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
부웅!
듀얼 체인 소드를 들고 직접 행동으로 나섰다.
키유웅!
콰콰콰콱!!
두 개의 톱날이 발가벗은 흡혈귀들을 썰어댔다.
“끄아악!”
“이 미친놈이 갑자기?!”
흡혈귀들은 놀라서 소리쳤다.
라비도 외쳤다.
“오! 맙소사! 남작님께서 화를 내실 겁니다!”
“남작이 화를 내냐 마냐가 중요한 게 아닐 텐데?”
콰직!!
은혁은 라비의 팔다리도 썰어 버렸다.
“아악!!”
“닥쳐.”
빠악!
턱을 걷어차서 아예 기절시켜 버렸다.
사사삭!
어느새 흡혈귀들은 은혁을 포위했다.
“감히 다른 곳도 아니고 이곳에서!”
흡혈귀들은 크게 놀라고 화가 난 상태였다.
“남작이 무서워서 꼼짝 못 하고 참을 줄 알았냐, 모기 새끼들아?”
은혁은 피 묻은 듀얼 체인 소드를 중단으로 잡은 뒤 도발했다.
“뭐, 그래도 남작 체면을 봐서 당장 죽이진 않겠다. 팔다리만 썰어 줄 테니까, 다 덤벼.”
“캬아악!!”
B급 호러 액션 영화 속 주인공처럼, 은혁은 톱날로 흡혈귀들을 사냥해댔다.
콰지직!
콰두두두!
퍼버벅!
피와 살점이 마구 튀었다.
“캬아악! 이 멍청한 놈!”
“어차피 우린 피만 있으면 재생한다!”
첨벙!
첨벙!
흡혈귀들은 피의 분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컥?!”
“끄아아! 뜨거워엇!!”
흡혈귀들이 고통에 미쳐 날뛰었다.
은혁은 이미 피의 분수 속에 [딜레이드 익스플로전] 스킬을 설치해 두고, [화염 지배] 스킬을 연계했다.
그리하여 소리도 거의 나지 않는 극소 폭발을 연속으로 일으켰고, 그때 발생하는 열과 폭발력을 분수 밖으로 튀어 오르지 않게 억누르며, 그 힘을 이용해 다시 스킬을 썼다.
하여, 피의 분수는 전혀 끓어오르지 않는 상태이면서도 이미 200도를 훌쩍 넘겼다.
“끄아아……!”
피를 이용해 회복하려 했던 흡혈귀들은 서서히 익어서 죽으려 했고.
“이런, 죽으면 안 되지.”
휙!
촤악!
은혁은 차원의 낚싯대로 대충 건져서 살려뒀다.
“죽여 버리면 남작이랑 대화가 안 되니까.”
그랬다.
은혁이 염훈 대신 나선 가장 큰 이유는, 흡혈귀들을 아직은 죽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성기사라서 늘 좋은 것만은 아니지.’
만약 염훈이 나서서 흡혈귀들을 패기 시작했다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으리라.
흡혈귀를 잿더미로 만드는 것은 흡혈귀가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최후의 죽음.
그러면 이곳의 지배자인 흡혈귀 남작과 대화할 여지마저 사라진다.
“허참. 이러려고 참으라고 한 거냐.”
염훈은 기막혀했다.
그리고 고문당하던 이들을 회복시켜줬다.
그동안에도, 일부 흡혈귀가 분을 못 이기고 달려들었다.
“키이익!”
딴에는 방심한 은혁을 노리는 행위였지만.
퍼버버벅!
뻐억! 뻐억!
은혁은 가차 없이 두들겨 팼다.
“그냥 패는 걸로는 안 되겠다.”
은혁은 선즈 리볼버를 꺼냈다.
투쾅! 투쾅! 투쾅!
흡혈귀들의 팔다리에 한 방씩 쐈다.
콰직!
화르륵!!
“아악!”
“아아아악!”
선즈 리볼버가 쏘는 화염탄에는 태양의 빛이 담겨 있었다.
팔다리 끝부분에다 쐈는데도 팔다리가 통째로 잿더미로 변했다.
“이제 너희는 평생 팔다리 병신으로 살게 됐지만, 그래도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은혁이 염훈을 가리켰다.
“염훈 손에 걸렸으면 특별히 고통스럽게 죽었을 테니까.”
“아니, 아무리 봐도 네가 더 잔인한데.”
염훈이 한마디 했지만, 은혁은 못 들은 척하고, 연회실 옆의 빈 방을 열었다.
“들어가 있어라.”
은혁은 축구공 차듯이, 팓다리가 날아간 흡혈귀 포로들을 안쪽으로 걷어찼다.
그리고 오토 락픽으로 잠가 버렸다.
그렇게 제압을 완료한 은혁은 라비를 일으켜 세웠다.
“히익!”
“미리 말해두는데, 우리는 너의 주인이 한 초대를 거절한 거 아니다?”
“무, 무슨…….”
“집사인 네 안내를 따라가는데, 흡혈귀들이 우리를 공격해서 정당방위를 했을 뿐이다? 복창.”
“정당방위라니! 아무리 봐도 당신들이 먼저……!”
“거, 안 되겠네.”
퍼버버벅!
은혁은 귀찮다는 듯이 두들겨 팼다.
라비는 퉁퉁 부은 얼굴로 조용히 했다.
“세상에.”
“재생력을 지닌 흡혈귀의 얼굴을 퉁퉁 붓게 만들다니…….”
염훈에게 구조받고 회복된 플레이어들이 감탄했다.
“염훈. 이 사람들 상태는 좀 어떠냐?”
“많이 심각한데.”
오랜 시간 고문당하고 강제로 치유 받고를 반복한 탓인지, [상급 치유]로도 쉽게 회복이 안 됐다.
“오랜 시간 요양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그렇군.”
은혁은 자신의 판단에 50점을 주는 수밖에 없었다.
‘예비 병력은커녕, 짐이 생겨 버렸군.’
본래 은혁의 계획은 일단 미션을 다 클리어하고 떠나기 전에 다 박살 내고 구출하는 것이었다.
연회장에서 고문당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건 회귀 전 지식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다만 은혁의 본래 계획은 맨 마지막에 이들을 구출하는 것이었는데, 라비가 먼저 이곳으로 안내했기에, 깽판을 먼저 치고 말았다.
하지만.
“염훈.”
“응?”
“기왕 깽판 쳤으니 계속 치자~ 라는 건 계획 주의자인 내 본능이 허락을 안 해.”
“뭔 소리야?”
“일단 부상자들은 적당히 침실 같은 곳으로 옮기자. 그리고.”
은혁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흡혈귀 남작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대화를 한다!”
“헐.”
염훈은 은혁의 정신에 감탄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친선과 깽판을 왔다 갔다 하지 못한다.
친선을 유지하다가 깨는 것도, 깽판을 치다가 다시 친선을 도모하는 것도 다 불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혁은 태연하게 그렇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참 대단하네. 덕분에 한 가지 배웠다.”
염훈이 묘한 부분에서 감탄하자, 은혁은 훗, 하고 웃었다.
“뭐, 대인 관계의 유연성이라는 거지. 관계를 깨트릴까 봐 전전긍긍하는 대신, 깨지건 말건 밀어붙이는 것.”
“과연!”
핏물 가득한 곳에서 떠드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본 라비와 플레이어들은 으으, 소리를 냈다.
* * *
넓고 어두운 식당.
한쪽 벽면은 통유리로 대체되어 있었는데, 붉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구석에 위치한 창가 쪽 테이블 위에 단 하나의 촛불이 켜져 있었다.
은혁과 염훈은 라비의 안내를 받아 그곳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핏물 같은 홍차, 또는 그 반대의 액체를 마시고 있던 스칼란 남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