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 일몰을 지배하는 식탐의 거신
‘예상대로군.’
3군주 세력의 플레이어는 59층 이하의 층에 존재하는 길드연합국 플레이어를, 직접 죽이진 않는다.
이는 은혁의 회귀 전, 제2차 길드대전 당시에도 지켜진 상당히 강한 불문율이다.
바로 그래서 3군주 세력이 길드연합국 측을 괴롭히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몇 가지 꼼수를 쓰는데…….
“그러니, 배고픈 아이에게 맡겨야겠네.”
쥬빌레는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흐어어어……!
방금 죽은 스칼란의 영혼이 몸을 일으켰다.
‘SS급 직업, 영혼을 지배하는 데스 로드.’
쥬빌레 또한 사령술사로 시작하여 데스 로드로 승급한 존재.
그녀의 고유 스킬 [영혼 지배]는, 자신이 죽인 플레이어의 영혼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스킬이다.
지금의 쥬빌레는 S급 이상의 영혼들로만 구성된 [108 영혼 군단]을 이미 완성한 상태.
“그리고 이 영혼을, 얍!”
쥬빌레는 스칼란의 영혼을 동굴을 향해 휙 던졌다.
그러자 동굴, 즉, 몰락한 지고의 위상인 식탐의 거신의 머리와 융합되었다.
드드드드드……!
-몰락한 지고의 위상, 식탐의 거신과 흡혈귀 남작 스칼란의 영혼이 일체화됩니다!
“으음……!”
이 경우는 은혁이 예상치 못했다.
“후훗. 재미있게 놀아. 난 갈게.”
부글부글부글……!
쥬빌레는 등장했을 때처럼, 피거품처럼 변해서 사라졌다.
“쿠오오오오오!!!”
콰지직!!!
식탐의 거신이 바닥을 부수며 몸을 일으켰다.
땅을 짚은 손가락 하나의 굵기가 은혁의 허리 굵기보다 굵었다.
입의 크기는 저택이 있던 동굴, 즉 저택 전체 크기보다 훨씬 컸다.
쿠르르르르르……!!
몸을 일으키기만 하는 건데도 지진이 일어났다.
‘이 전개는 딱 절반만 예상대론데.’
은혁은 스칼란이 죽기 직전이 되면 반드시 식탐의 거신을 깨울 것이라고 예측했다.
식탐의 거신이 44층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회귀 전, 3군주 세력의 영역을 지날 때 들은 바 있으므로.
우우우우웅……!
하지만 식탐의 거신과 스칼란이 합체되는 경우는 예상하지 못했다.
-융합 완료!
-일몰을 지배하는 식탐의 거신이 탄생하였습니다!
“너어……! 주우긴다……!”
일몰을 지배하는 식탐의 거신이 손가락으로 은혁을 가리켰다.
스칼란일 때의 기억과 굶주린 거신의 기억이 뒤섞인 채, 은혁을 죽여서 먹고자 했다.
기이이잉……!
손가락 끝에는 태양광이 맺히기 시작했다.
파즈즈즈즈……!
물론, 은혁도 순순히 맞아 줄 마음이 없었으므로 회피하려 했지만.
“쿠어어어어!!!”
일몰을 지배하는 식탐의 거신은 왼손을 은혁이 있는 곳으로 내리찍었다.
콰콰쾅!!!
은혁은 분명 [그림자 도약]으로 멀리 피했는데, 그곳까지도 충격파와 부서진 땅의 파편이 튀었다.
그리고.
“와구와구……!!”
식탐의 거신은 자신이 부순 바닥의 흙과 돌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쿠르르르……!
식탐의 거신의 오른손이 커졌다.
번쩍!!
손가락 다섯 개에서 빛이 마구잡이로 뿜어져 나왔다.
은혁조차도 흠칫 놀랄 정도로 빠르고 강력한 빛의 포격이었다.
은혁은 선즈 리볼버를 거칠게 꺼내며 스킬을 썼다.
“[태양의 사격] + [패링] 융합!”
-히든 이펙트 발동!
“퓨전 스킬 [섬광 패링]!!”
번쩍!! 번쩍!! 번쩍!!
은혁은 선즈 리볼버의 힘으로 빛의 포격을 모두 튕겨냈다.
엄청난 연속 요격을 성공한 은혁이었지만, 뒤늦게 식은땀이 쫘악 끼쳤다.
‘휴. 퓨전 스킬 조합이 익숙해서 망정이지, 정말 위험했다!’
문제는, 방금 식탐의 거신이 한 섬광 공격은 엄밀히 말해 공격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기이이이잉……!
태양 빛의 힘을 한 손에 집중하다 보니 일부가 반발하듯 튕겨 나갔을 뿐.
“쿠오오오오……!!”
이내 일몰을 지배하는 식탐의 거신만이 쓸 수 있는 궁극 스킬이 발동됐다.
-이 땅의 빛에 종말이 올지어다.
불길한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졌다.
스오오오오……!
존재 자체를 소멸시키는 태양의 광선이, 일몰을 지배하는 식탐의 거신의 오른손에 모이기 시작했다.
‘스테이지 자체를 파괴하려고 하는군.’
은혁은 예상했다.
‘보험 삼아 염훈을 여기 두길 잘했어.’
은혁은 신호를 보냈다.
‘지금이다! 염훈!!’
‘알았다! 으아아아!!’
투콰앙……!!
하늘의 경계면 즈음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일몰을 지배하는 식탐의 거신이 고개를 들어서 살필 정도였다.
슈우우우우욱……!!
염훈이 낙하하고 있었다.
은혁은 태양광을 조작하는 적으로부터 염훈을 숨기기 위해,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을 응용했다.
까마득히 높은 하늘에 염훈을 숨겨 둔 것이다.
“간다아아아아……!!!”
염훈은 하늘에서 식탐의 거신 정수리를 향해 수직 낙하하고 있었다.
그것도 [신성한 날개]의 위력을 최대로 방출한 상태로.
“크우우우.”
일몰을 지배하는 식탐의 거신은 귀찮다는 듯이, 왼손을 들었다.
“[유도의 섬광]……!!”
번쩍!!
하지만 염훈은 빅 썬더를 쥔 손을 뒤쪽으로 옮기더니, 홀리 썬더를 등 뒤로 뿜었다.
“[홀리 썬더]!!!”
콰콰쾅!!!
신성한 충격파를 [신성한 날개]의 바로 뒤에 터뜨림으로써 염훈의 낙하 속도는 순간 급가속됐다.
그리고 그 직후, 프리즘 랜스를 꺼내 들었다.
“태양의 여왕이여!!”
염훈은 프리즘 랜스의 무기 설명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둠의 세력에 의해 태양이 가로막히고 어둠의 겨울이 도래했을 때, 태양의 여왕 솔라리엔 폴링스트는 자신의 수명 전체와 프리즘 랜스의 힘을 이용해, 다시 따스한 세계를 불러왔다.
그 대가로, 태양의 여왕은 늙어 죽었고, 프리즘 랜스의 내구도는 유리 수준으로 떨어졌었다.
“프리즘 랜스!! 네게 얽힌 전설이 사실이라면! 저 사악한 태양 빛을 모두 흡수해라!!!”
염훈은 프리즘 랜스에 [신성한 오러]를 불어 넣으며 외쳤다.
기이이이잉……!!
염훈의 외침에 감응하듯, 프리즘 랜스가 빛을 발했다.
투콰아아아아……!!
고속 낙하 또는 고속 추락.
“으아아아아!!!”
처절한 비명 또는 뜨거운 기합.
이 모호함 속에서 4차 각성한 염훈의 숙련도는 미친 듯이 가속했다.
-성기사 숙련도가 1% 증가했습니다!
-성기사 숙련도가 2% 증가했습니다!
-성기사 숙련도가 3% 증가했습니다!
-성기사 숙련도가 6% 증가했습니다!
-성기사 숙련도가 13% 증가했습니다!
-현재 성기사 숙련도 : 25%+++.
그 상황에서 염훈은 손끝만 겨우 써서 무게 조절 벨트의 다이얼을 건드렸다.
띠리릭.
-무게가 30% 증가합니다!
속도가 더 가속됐다.
말 그대로 모든 걸 내리 쏟아붓는 낙하.
그 순간, 신규 스킬을 각성했다.
-성기사 스킬 미완성 [홀리 차징]을 획득하셨습니다!
염훈의 [2초 무적]과 [신성한 날개]와 프리즘 랜스의 모든 역량을 최대치로 이끌어낸 상태에서,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초고속으로 돌진하는 스킬.
그것이 [홀리 차징].
단, 지금 염훈이 쓴 것은 4차 각성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완성’인 [홀리 차징]이었다.
“쿠오오오!!”
일몰을 지배하는 식탐의 거신은 절규했고.
번쩍!!!
충돌했다.
그러나 충격음은 없이 섬광만이 명멸했다.
파스스스스……!!
일몰을 지배하는 식탐의 거신은 통째로 잿더미로 변했다.
-몰락한 지고의 위상, 일몰을 지배하는 식탐의 거신을 소멸시켰습니다!
처치가 아니라 아예 소멸 판정이 떴다.
흡혈귀 스칼란의 영혼과 결합된 존재여서인지 통째로 소멸시키는 특이한 결과가 나왔다.
-축하드립니다! ‘지고의 위상을 소멸시킨 자’ 칭호를 획득하셨습니다!
-업적 달성 보너스로 50,000 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업적 달성 보너스로 체력과 마력이 완전 회복됩니다!
-축하드립니다! 레벨이 2만큼 상승하셨습니다!
-현재 레벨 : 76.
“허억, 허억……!”
여전히 흩날리는 잿더미 속에서, 염훈은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냐?”
은혁이 다가가서 물었지만, 염훈은 더 말할 여력도 없는 것 같았다.
업적 달성 보너스로 완전 회복 되었는데도 이 정도라면, 방금의 일격을 위해 크게 무리한 게 분명했다.
“듣기만 해.”
은혁이 말했다.
“잘했다. 솔직히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은혁은 회귀 전 기억을 떠올리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미완성이지만 [홀리 차징]을 쓰다니.’
회귀 전 염훈은 지금의 염훈보다 강했지만, [홀리 차징]만큼은 쓰질 못했다.
[홀리 차징]의 조건 중 핵심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건다는 마음가짐과 반드시 이기고 살아남겠다는 마음가짐.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즉, 지금의 염훈은 회귀 전의 염훈과 달리, 살아남겠다는 의지가 충분하다는 뜻.’
은혁은 그걸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어서 흐뭇했다.
‘다만 녀석 덕분에 내 계획이 조금 어긋났군.’
원래는 염훈을 28.5층으로 보내고, 은혁이 혼자 몰락한 지고의 위상을 상대할 계획이었다.
‘태양광선을 피하면서 일부러 잡아먹힌 다음, 놈의 배 속에서 사이오닉 런처 최대 출력 실험해 보려 했는데.’
그냥 덩치 큰 몬스터가 아니라, 끊임없이 먹어치우는 몰락한 지고의 위상이었다.
배 속에는 미니 차원 형태의 소화기관이 있었을 터.
‘그걸 표적으로 사이오닉 런처를 쏴보고 싶었는데.’
그러면 다른 차원에 손상을 끼치지 않아서 좋고, 확실히 끝낼 수 있어서 좋았다.
‘염훈이 더 성장한 거 같으니 됐지, 뭐.’
은혁은 간단한 염동력으로 염훈이 뒤집어쓴 잿더미를 털어줬다.
“고맙, 콜록, 콜록!”
“됐고, 얼른 가자.”
남아 있다가 관리국 요원이랑 마주치면, ‘또 스테이지를 다 박살 냈습니까?’ 같은 잔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 혈운파 소속 다른 흡혈귀들이 와서 기습할 수도 있었고.
“으으, 못 걷겠다, 은혁아.”
“엄살 피우지 마라.”
“으으, 진짜야. 이런 적은 처음인데.”
미완성 [홀리 차징]을 쓰느라 기력이 다 빨린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지.”
은혁은 메탈 워커를 소환해서 염훈을 짐짝처럼 얹었다.
그리고 다른 메탈 워커들에게 명령했다.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재를 최대한 채집할 것. 그리고 게이트로 가자.”
그리고 은혁은 별 기대하지 않은 상태로 바닥의 재를 치웠는데, 뭔가를 발견했다.
“오!”
두꺼운 국어사전 크기의 마정석이었다.
-몰락한 지고의 위상, 식탐의 거신의 마정석을 획득하셨습니다!
“와! 소멸 판정이 떠서 통째로 잿더미가 되었을 줄 알았는데.”
실제로 스칼란의 경우 성기사인 염훈의 힘으로 소멸했기에 마정석이고 아이템이고 하나도 남기지 않고 잿가루만 남겼다.
하지만 식탐의 거신은 본디 몰락한 지고의 위상인 탓인지, 그 마정석이 남아 있었다.
“염훈.”
“으으…….”
염훈은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네 운반비로 이건 내가 가진다?”
“으으응…….”
그렇게 은혁은 마정석을 챙겼다.
그리고 염훈과 함께 게이트를 통해 떠났다.
* * *
5층 길드연합국에 두 가지 소문이 퍼졌다.
작은 소문과 큰 소문이다.
작은 소문은 여느 때처럼, 은혁과 염훈이 44층 스테이지를 박살 내고, 갇혀 있던 플레이어들 다수를 구출했다는 것.
문제는 큰 소문이다.
강은혁의 흡혈증 치료 관련 소문이었다.
사람들과 기자들은 떠들어댔다.
“이번에 염훈이 스테이지에 갇혀 있던 하급 흡혈귀들을 구해냈다지?”
“헐, 정말? 믿기 힘든 소문인데.”
“그치? 흡혈증은 절대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절대 불가능은 아니래요.”
“또 뭔 소리야?”
“그, 사령술사가 혈인술사로 승급하면, 어떻게 흡혈증 치유가 가능한 경우도 있다던데요.”
“이봐. 그것도 고대 혈족의 흡혈귀의 경우만 치료가 된다는 거지. 혈운파 계열 흡혈귀로 감염된 경우는 불가능해.”
“엥? 흡혈귀가 종류가 다른 거였어요?”
“어휴, 뭘 모르네. 흡혈귀 감염 방식이 미묘하게 다르다고.”
“이상하다. 제가 들은 소문으로는…….”
그렇게 소문들은 무성해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