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 뜨거운 토론 (1)
토론의 열기가 거세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중립파가 끼어들었다.
머릿수는 가장 적었는데, NPC보다는 플레이어의 비중이 높았다.
“자자, 양쪽 파벌 분들 모두 진정하세요.”
“일단, 우리는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관리국의 진정한 목적을 우리는 전혀 모릅니다. 따라서…….”
더 말하려는 순간, 관리국의 혁신파와 보호파가 동시에 화를 냈다.
“저 어중간한 놈들 또 끼어드네!”
“야! 너네는 좀 끼어들지 좀 마!”
그리고 대혼란의 난장판이 벌어졌다.
하지만 주변의 다른 토론 중인 플레이어나 NPC들은 그러려니 하고 다른 토론에 열중했다.
“뭔가 엄청 뜨거운 곳이네.”
염훈이 중얼거리자, 토론 주선자 NPC가 찾아왔다.
“실례합니다, 두 분. 여긴 처음이시죠?”
그 순간 미션창이 떴다.
<45층 메인 미션 : 토론 참가>
-목표 : 아무 토론에나 참가할 것.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성공 시 보너스 : 없음.
-실패 시 페널티 : 없음.
-제한 시간 : 1시간.
“토론을 시키는 층이구나. 역시 5의 배수층이라 그런가 쉬운 편이네.”
염훈은 주위를 둘러본 뒤 NPC에게 질문했다.
“그냥 아무하고나 토론하면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저랑 하죠.”
“에?”
그 순간.
-토론 신청이 확인되었습니다!
-승낙/거부
“거부입니다.”
NPC가 칼같이 거부했다.
“엥? 아무하고나 토론해도 된다면서요?”
“상대가 동의한 경우에만 말이죠. 그리고 저는 어디까지나 주선자입니다만.”
“쩝.”
“염훈. 잠시만.”
은혁이 염훈을 한쪽으로 끌었다.
“여기선 조심해야 한다.”
“왜? 안전한 층 아니야?”
“대화만으로도 상대방의 정신을 지배하는 미친놈들이 가끔 있거든.”
“허, 그래?”
“그래. 그러니 여기서는 우리 둘이 하는 토론이 가장 안전한데.”
“그것도 재밌겠네. 그럼 무슨 토론을 할까?”
“가장 재미있는 토론 주제는 무엇일까에 관해 토론해보자.”
은혁이 말한 순간.
-토론 신청이 확인되었습니다!
-승낙/거부
“승낙!”
그리고 두 사람은 1시간에 걸쳐 토론을 진행했다.
* * *
59분이 지났다.
토론 제한 시간이 1분 남았다는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은혁은 자신에게 손부채질을 하며, 염훈에게 말했다.
“그러므로, 재미라는 용어에 대한 견해 통일이 이뤄지지 않은 이상, 우리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는 게 지금까지의 내 주장이지. 반면에 네 주장은…….”
“재미의 세부적인 공감 영역은 달라도, 너랑 나, 그리고 대다수 사람들이 인정하는 보편적인 재미라는 건 있으므로 의견 합치가 가능하다는 게 내 주장.”
“하지만 너는 그 보편적인 재미가 뭔지 말해보라는 내 주장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지.”
“그야…….”
“네가 뭐라고 말하건, 나는 거기에 대해 ‘재미없는데? 그러므로 네 주장 틀렸음~.’이라는 식으로 말할 가능성이 있으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는 거지? 그럼 결국…….”
“어허! 결국 네 말이 옳았다는 식으로 은근슬쩍 말 옮기려고 하지 마라.”
그 순간.
-토론 제한 시간이 끝이 났습니다!
-두 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아쉬워했다.
“아, 사실상 내가 이긴 건데.”
“웃기지 마라, 은혁아.”
“헐? 실제로 우린 합의에 도달 못 했잖아. 그럼 내가 이긴 거 아님?”
“야! 넌 자꾸 겐세이만 놨잖아! ‘용어에 대한 보다 엄밀한 정의 또는 합의가 필요할 듯.’이라는 소리만 한 30번은 했을걸?!”
“겐세이라니. 난 당구 안 쳐서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다 알면서 모른척하네. 그게 당구 용어인 줄은 어찌 알았음?”
“됐고, 그보다 인정해라.”
“뭘?”
“내가 방금 토론은 이긴 걸로.”
“웃기지 마!”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데 한 남자가 다가왔다.
“하하하! 젊은이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구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토론이란 의견이 차이를 좁히는 것이 목적이오. 대립된 의견을 논리로 꺾으려 드는 것은 논쟁일 뿐. 그러니 젊은 친구들, 싸우지들 마시게나.”
“쳇. 어르신께서 말리시니 제가 참겠습니다.”
염훈은 못 이기는 척 말했지만, 은혁의 눈빛은 날카로워졌다.
‘S+급 만물을 설계하는 사이오니스트 디미트리.’
초능력자로 시작해서, 초능력을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사이오니스트로 승급한 자.
그의 [만물 설계] 스킬은 복잡한 기계는 물론이고, NPC조차도 간단하게 만들어내며, [역설계] 스킬은 사람의 정신을 분석하여 마인드맵을 만드는 데도 쓰인다.
즉, 만드는 일만 잘하는 게 아니라, 분석하는 일 또한 일류.
가장 어려운 퍼즐을 만드는 것도, 그 퍼즐을 풀어내는 것도 가능한 존재.
‘지금은 몇 위인지 모르겠는데, 전성기 때가 길드연합국 랭킹 11위였지, 아마?’
어지간한 부길드장보단 강하고 길드장보단 약한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토론이 혹시 더 하고 싶다면, 나와 하면 어떨까?”
디미트리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염훈은 은혁에게 속삭였다.
“은혁아. 저 사람이 혹시……?”
“응. 엄청 고수 맞아.”
염훈과 은혁이 속삭이자, 다른 이들이 웅성거렸다.
“우왓, 디미트리 할아범……!”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플레이어를 표적으로 삼았군.”
디미트리가 유명한 탓인지, 주변인들이 다 수군거렸다.
“어르신께는 죄송하지만 토론은 어렵겠군요.”
“응? 어째서인가? 둘 다 토론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던데.”
“하하! 그거야 친구끼리의 토론이니까요. 하지만 모르는 분과 토론을 했다가, 너무 과열될까 걱정스럽군요. 아시다시피, 토론이 너무 과열되면 서로 마음만 불편해지지 않습니까?”
“그렇구려. 참으로 아쉽군. 대화를 통해 서로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으리라 예상했는데.”
“저도 아쉽습니다.”
은혁이 작별인사를 하려는 순간.
“그렇다면 재미 삼아 하는 논쟁이라면 어떻겠나?”
“논쟁이라…….”
“사실, 토론과 논쟁은 매우 모호하지. 결과적으로 의견이 좁혀지고 의미 있는 논의였다는 합의가 이뤄지면 토론. 그렇지 않으면 논쟁 아니겠나?”
“하하! 그건 저와 생각이 비슷하군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친선 논쟁이라면 재미있겠군요.”
은혁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규칙을 정했는데, 계약 대결 형식으로 규칙을 만들었다.
<계약 대결>
-목표 : 강은혁과 디미트리는, 사회자 NPC가 제공하는 주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인다.
-승패 확인 방식 : 플레이어와 NPC로 구성된 ‘100인 판정단’이 다수결 거수 방식으로 판정을 내린다.
-강은혁이 이기는 경우 : 디미트리는 강은혁을 위해 자신이 지닌 고유 스킬을 전수한다.
-디미트리가 이기는 경우 : 강은혁은 자신의 뇌를 디미트리에게 바친다.
-제한 시간 : 40분.
“자아, 동의하시는가?”
“다 좋은데, 제 뇌는 왜 원하는 겁니까?”
“허허. 그야 연구를 위해서지. 하지만 걱정 말게. 분석만 끝나면 다시 돌려줄 테니까.”
물론 분석이 끝난 이후의 뇌가, 기존의 뇌와 동일하진 않을 터였다.
엉망진창이 되어 있을 것이므로.
“그보다 내 고유 스킬을 전수해달라는 부탁이 이례적이군. 자네 직업이 초능력자인가?”
“뭐, 그런 편이죠.”
“흐음.”
디미트리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좋네. 나도 계약 대결에 동의하네.”
그러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토론 주선자 NPC들이 플레이어 50명, NPC 50명으로 구성된 판정단을 꾸렸다.
“우리가 판정 내리는 거?”
“헤헤. 기대되네.”
“과연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을지…….”
“판정단에 대한 공격 금지 규칙도 추가해 주십쇼!”
토론 주선자 NPC와 은혁, 디미트리는 마지막 요구를 받아들였다.
-추가 조건 :
이번 계약 대결이 시작된 순간부터, 제삼자에 의한, 제삼자에 대한 공격은 절대 금지한다.
계약 대결에 참가한 참가자들 또한 서로에 대한 공격을 모두 금지한다.
“준비는 다 끝난 것 같군요.”
토론 주선자 NPC 중 한 명이 말했다.
현 시간부로 그는 ‘사회자 NPC’로 직함이 바뀌었다.
“이번 토론, 아니, 논쟁의 주제는 정하셨습니까?”
은혁과 디미트리는 서로를 돌아보고,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13대 난투 주제’ 중 하나를 고르도록 하죠.”
웅성웅성……!
청중들이 술렁였다.
“13대 난투 주제라.”
“아주 그냥 말싸움을 붙이는구만.”
술렁거림 속에서 염훈이 질문했다.
“13대 난투 주제가 뭔데요?”
13대 난투 주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45층에서 여러 번 논쟁이 벌어졌으나, 어떤 식으로도 결론이 나지 않은 논쟁 주제를 말했다.
실제로 13대 난투 주제 때문에, 폭력이 금지된 45층에서 여러 번 난투극이 벌어진 적이 있다.
그래서 그 13대 난투 주제는 일종의 금기가 되었다.
덜그럭덜그럭.
사회자 NPC가 13대 난투 주제가 적힌 나무 상자를 들고 왔다.
상자는 45층의 세련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투박했고, 피도 곳곳에 묻어 있었다.
“그럼, 뽑습니다.”
“잠시만요.”
은혁이 손을 들고 막아섰다.
“부정행위가 있는지 없는지, 저와 디미트리 님이 한번 확인해 봐도 될까요?”
“아아, 나는 괜찮네.”
디미트리는 사양했고, 은혁은 상자에 손을 대지 않고 눈으로만 대충 확인했다.
“뭐, 괜찮겠죠.”
그리고 한 걸음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염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은혁아. 네가 신경 쓸 정도면 상자 안에 든 토론 주제들이 엄청난 내용인가 봐?”
“상당히.”
은혁은 긴장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가령, ‘로마의 진정한 후계국은 어디인가?’ 같은 게 그나마 쉬운 토론 주제니까.”
“어? 로마 제국의 후계국이라면…….”
염훈은 기억을 더듬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랑 비잔티움 제국인가 하는 나라가 로마의 후계국 아님? 서로마 동로마로 갈라진 다음 각자 그렇게 변한 거 아닌가?”
염훈이 몇몇 역사 판타지 게임에서 얻은 얄팍한 지식을 입에 올리자, 여기저기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웃기는 소리!”
“진정한 로마의 후계국은 미합중국이오! 이질적인 답변처럼 들릴 수 있으나, 로마의 철학을 가장 뿌리 깊게 받아들인 국가는 미국이란 말이오!”
“미친! 갑자기 미국이 왜 나와! 지리적 관점에서 해답을 찾아야지! 답은 이탈리아요!”
“구라 치네! 답은 독일이다! 제3 제국이라고 못 들어봤음?!”
“어휴, 더러운 나치 스컴! 위대한 러시아 제국이 로마의 후계국이라는 건 지나가는 애들도 알아!”
“다 틀렸습니다, 님들. 유일하게 정통성을 지닌 제3의 로마는 바로 조선을 계승한 대한민국이란 말입니다!”
급속도로 분위기가 과열되더니 순식간에 토론장이 난장판이 되어 갔다.
삐익!
삐이익!
토론 주선자 NPC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제재하고 나서야 겨우 분위기가 진정됐다.
“다들 진정하십시오!”
“염훈 플레이어. 경고합니다. 함부로 ‘13대 난투 주제’를 꺼내지 마십시오.”
NPC들이 염훈을 도끼눈을 뜨고 노려봤다.
“미안합니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나서야 사회자 NPC가 혀를 차며 상자 속에 손을 뻗었다.
뒤적뒤적…….
“뭐가 나올까?”
“저러다 진짜 로마 후계국 관련 주제 나오는 거 아님?”
“쉿! 조용!”
부스럭.
마침내 사회자 NPC가 종이를 뽑았다.
그리고 뽑힌 주제는…….
“에에, 7번 주제가 뽑혔습니다. ‘플레이어는 100층탑의 정상을 향해 오른다. 그러나 100층탑을 중간에 탈출할 권리를 얻은 경우, 그 권리를 이용하여 중도에 탈출하는 것이 옳은가 또는 그른가’입니다.”
“……!!”
13대 난투 주제 중에서, 가장 난해하고 인기 없는 주제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