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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모든 직업-252화 (252/434)

252화 : 총체적 난국의 재판 (1)

빌의 추궁에 은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선을 넘은 건 관리국 차장 쪽이었습니다.”

관리국 요원이라 해도 길드 본부에 무단침입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그 예로, 길드연합국에는 관리국 대사관이 존재한다.

대사관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길드연합국과 관리국이 종속 관계나 상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며, 길드연합국을 하나의 국가로서 존중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관리국의 역할이 플레이어의 100층탑 공략에 관한 각종 관리라고는 해도, 함부로 길드 본부에, 그것도 부길드장실에 들어오는 건 부당합니다. 이는 길드연합국과 관리국 대사관 사이에 이뤄진 상호 불침 협정을 위반하는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하지만 아주 엄밀히 말하자면 두 가지 문제가 있어. 첫째로, 자네의 불패불굴 길드 본부는 5층이 아니라 28.5층에 있지 않나? 둘째로, 관리국 요원이 함부로 길드 본부에 침입해서는 안 된다는 협정은 있지만, 그 협정을 어겼을 때 터뜨려 죽여도 된다는 규칙은 없어.”

“둘 다 반박 가능합니다. 첫째로, 28.5층은 28층에 존재하는 본부이면서 동시에 농작물 수확을 위한 나무입니다. 그 존재의 허가는 황금 궁전의 회의를 통해 받았습니다.”

“시리우스를 실각시킨 그 회의 말이지? 그건 나도 참석했었지.”

은혁은, 그 회의에서 시리우스에게 불리한 증거를 잔뜩 늘어놓고, 시리우스를 실각시키고 가택 연금 상태로 만들었었다.

빌은, 시리우스를 쫓아낸 뒤, 은혁이 멋대로 떠들던 걸 회상했다.

‘다행이군요. 심사자 4인 중 1인 기권, 2인 찬성이니, 저희 불패불굴 길드의 사업과 28층 일부 지역 지배는 인정된 거지요?’

은혁은 그렇게 말하고는 흰 종이를 내밀었다.

흰 종이에는 큰 글씨로 ‘7대 길드가 공식적으로 주관한 회의에서, 7대 길드의 길드장 또는 부길드장으로부터 인허가 받음’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이 밑에 서명 좀…….’

“그리고 우리 모두 그 빌어먹을 종이에 서명했었지. 망할. 기억난다.”

중얼거리던 빌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은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28.5층은 28층과는 다른 지역이지만 동시에 일부 지역이며, 황금 궁전의 회의를 통해 인준된 장소입니다. 길드연합국의 허락을 받지 않은 지역 장악이 아니라, 길드연합국의 허락과 함께 장악이 이뤄진 곳이지요.”

“알았다, 알았어. 그러므로 관리국 차장의 불법 침입은 길드연합국에 대한 도전이며 협정 위반이기도 하다, 이거지? 그때도 말했지만 자넨 정말 물귀신 같군.”

“칭찬 감사합니다. 그럼 둘째에 대해서도 반박해 볼까요?”

“해봐. 궁금하네.”

“관리국 차장 노리는, 불법 침입은 그렇다 쳐도 불필요하게 우리 길드원을 공격했습니다. 그에 대한 정당방위였습니다.”

“뭐, 공격이라고 해봤자, 네 설명대로라면 몇 대 때린 정도 아닌가? 거기에 대해 냅다 차원 병기를 쏴 갈기다니. 그건 정당방위의 범위를 넘은 건데?”

“거기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는데, 그 정도가 아니면 관리국 차장급을 멈출 방법이 없었습니다.”

은혁은 노리에게 제인을 괴롭히지 말라고 1회 경고했으나, 듣지 않았다.

“과연 그런 설명을 관리국 애들이 들을까?”

빌이 말하는 순간.

삐빅!

연구 길드 본부 전체에 경고음이 울렸다.

-경고! 관리국의 무단침입이…….

“[추방].”

빌이 길드장의 권능을 담아 말했다.

연구 길드 본부와 지부의 내부에서라면 언제든 [추방] 스킬을 쓸 수 있었다.

파앗!

-관리국이 생성한 포탈이 전부 추방되었습니다!

“놈들이 너 있는 줄 알고 막 들어오려고 하네.”

“그런 모양이군요.”

“앞으로 한두 번은 막아줄 수 있어도, 그 이상은 못 막는다.”

“그럼 그사이에 부활시키죠.”

은혁은 노리의 시체를 빌에게 내밀었다.

“이봐. 머리 없는 시체를 내밀면서 부활시켜달라고 하다니. 나도 무리다.”

“다 알면서 그러시긴요.”

“응?”

“고위급 관리국 요원의 몸속에는 제2의 뇌가 있는 거 아시잖습니까.”

은혁이 노리의 시체를 갖고 온 것도 그런 이유였다.

만약 은혁이 그냥 두고 왔다면 즉시 회수되어 바로 부활했을 것이고, 지금쯤 은혁에게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보복 중일 터.

“제2의 뇌라.”

빌의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관리국 요원의 뇌를 복사 뜰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암호가 걸려서 복사 불가입니다.”

“잠깐, 넌 그런 걸 다 어떻게 아냐?”

빌은 기회가 왔다는 듯이 물었다.

은혁의 처지가 난처한 입장이므로, 빌은 은혁을 돕는 대신, 그동안 민감했지만 대놓고 하진 못했던 질문을 하나 해서 답을 얻겠다는 모양새였다.

물론, 은혁에게는 준비된 답이 있었다.

“솔직히요?”

“응.”

“두 가지 요인 덕분입니다. 첫째는 운이 좋아서. 둘째는 정보력이 매우 뛰어나서입니다. 실은…….”

은혁은 아카식 제로와 관련된 썰을 풀었다.

사실 은혁과 아카식 제로가 맺은 거래는, 은혁이 심연에 떨어지는 경우를 대비한 정보를 주겠다는 것, 그 대신 은혁은 운명이란 정해진 것인지에 관한 답을 알아보겠다는 것…… 이 정도다.

거기에 추가로 하나 더.

‘현재 길드장들의 위치를 알려달라 했었지.’

물론, 그때로부터 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은혁은 길드장들의 현재 위치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네 정보력이 우수한 것은 네가 예언자라서가 아니라…….”

“아카식 제로가 준 정보를 통해 유추한 것뿐이다, 라는 겁니다.”

“네가 아카식 제로와 접촉한 시기는?”

“물론 1층에서부터죠.”

“성좌가 1층에서 튜토리얼 진행 중인 플레이어에게 다이렉트 메시지를 보냈다고?”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정보를 지배하는 아카식 제로의 뜻은 늘 신비로운 법이죠.”

“그럴듯한 설명이군. 확실히 그거라면 운도 좋고, 정보 제공처도 확실히 갖춘 셈이군.”

“그럴듯한 설명이죠?”

“그래. 너무 그럴듯해서 수상쩍지만, 일단은 그러려니 해야겠군.”

빌은 노리의 시체를 보며 다시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 시체는 쓸모가 없고, 자네도 내게는 별 쓸모가 없군. 그냥 자네를 추방하면 나는 이 귀찮은 일에서 해방될 거 같은데.”

“안 도와주시려는 겁니까?”

“내가 왜 자넬 도와야 하는데?”

“그야 피스메이커의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백신 제작…….”

“그거야 이미 다 끝난 일 아닌가. 그리고 자네가 죽어도 백신 판매 수익은 불패불굴 길드에 납입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랬다.

빌은 은혁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지니고 있고, 굳이 따지자면 지지하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골치 아픈 일을 무조건 커버해 줄 정도로 좋아하거나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거래를 하죠.”

“무슨 거래?”

“피스메이커의 현재 위치와 피스메이커가 지닌 정신적인 약점. 그리고 ‘피스메이커를 죽이지 않고 굴복시키는 일에 무력을 이용하는 일에 관한 동맹’을 제의하겠습니다.”

“셋 다 관심이 동하긴 하는군.”

만약 은혁이 빌에게, ‘함께 힘을 합쳐 피스메이커를 죽입시다~’ 같은 소리를 했다면 빌은, ‘당장 꺼져.’라는 반응을 보였으리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수작이고, 길드장을 너무 깔보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혁은 빌이 원하는 것과 길드장에 대한 존중을, 아슬아슬하게 선을 지켜가며 제시했다.

‘어떻게 할까.’

빌이 고민하는 순간.

쿵쿵쿵!

누군가 길드장실의 문을 두들겼다.

“길드장님? 관리국 대사관에서 왔습니다.”

“허락도 없이 무슨 일인가?”

“그 안의 강은혁에 대한 체포권을 행사하러 왔습니다.”

“돌아가게.”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길드장님.”

“강은혁에 대한 체포권 행사야말로 부당한 거 아닌가? 언제부터 관리국이 플레이어를 체포했지?”

빌의 지적도 일리가 있었다.

본래 관리국은 플레이어 간의 일은 플레이어에게 맡긴다는, 극한의 자유방임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경우는 플레이어가 관리국의 차장급 요원을 공격한 일입니다.”

“하지만 강은혁의 주장에 따르면, 그 차장급 요원이 먼저 침입해서 공격해 왔다는데.”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인 노리의 의견을 들어봐야 하는데, 플레이어 강은혁은 그 노리의 시체를 가지고 도망쳤더군요.”

문 너머의 관리국 대사관 직원은 기가 막힌다는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혀를 찼다.

“관리국 차장에 대한 살해 및 시체 운반 및 유기……. 이런 경우는 솔직히 관리국 역사를 봐도 매우 드문 일입니다.”

길드연합국 기준에서는 최초이기도 하다.

그러나 3군주 세력권에서는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빌은 손을 권총 모양으로 쥐더니, 은혁의 머리를 겨눴다.

“강은혁. 길드장의 권한으로 너를 체포한다.”

그리고 재판에 넘겨졌다.

* * *

황금 궁전의 회의실.

주로 길드장과 부길드장 간의 회의가 이뤄지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재판을 치르는 장소는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강은혁의 범죄 사실에 대한 재판이 치러지게 됐다.

아무래도 은혁에게 걸린 범죄 혐의가 중대했기에, 그리고 관리국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외부인이 함부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황금 궁전에서 재판을 치르게 된 것이다.

그에 더해서, 은혁에게는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는데, ‘최대한 빠른 처리’를 재판장이 원했기 때문이다.

재판장은 체포자였는데, 연구 길드장 빌이었다.

더 웃긴 건, 은혁은 위의 사실들에 대해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빠른 진행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했다.

이렇듯, 재판은 시작부터 총체적 난국이었지만, 너무나도 빠르게 진행되어 그것을 지적할 틈도 없었다.

“먼저, 강은혁은 나에게 체포되었다는 사실부터 밝힌다.”

관리국에 잡힌 게 아니라, 길드연합국의 길드장 중 하나인 빌에게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공표했다.

“이 자리에 있는 유일한 길드장이 나이고, 워잭과 페넬레시아와 시리우스가 동의했기에, 재판장은 나, 연구 길드장 빌이 맡는다.”

빌이 자신이 재판장임을 선언한 뒤, 관리국에 의한 고소 사실을 알렸다.

“관리국 대사관은 강은혁을 관리국 차장 노리에 대한 살인 혐의로 고소하였으나, 길드연합국 내에는 기소권을 가진 공식적인 수사 기관이 없기에, 길드장이 지닌 거대한 권한으로 강은혁을 재판한다. 판결은 재판장인 나를 포함한 4인의 재판관이…….”

“저기, 잠시만.”

이의를 제기한 이는 시리우스였다.

“감옥에 갇혀 있던 날 끌고 오는가 싶더니…… 나보고 재판관이라고?”

은혁에게 당하고 난 뒤 음울하게 변한 시리우스는 어이없어했다.

“그렇다네, 행복 길드의 부길드장 시리우스. 원래는 구원 길드의 부길드장을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그것이 트윈스 원인지 투인지에 관한 주체 및 정체성 문제가 조금 미묘한 탓에, 자네를 데리고 왔다네.”

“아무리 그래도 죄수보고 재판관을 맡으라니. 새삼스럽게 막장스럽군.”

“동의하네. 그럼 바로 피의자의 자기변호부터 듣지. 강은혁? 일어나게.”

은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당방위였으며, 피해자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무죄입니다. 이상입니다.”

“이의 있습니다!”

관리국 대사관 측 직원이 손을 들었다.

이름은 없고 ‘대리’라고 불리는 말단급 직원이었으나, 길드연합국 주재 관리국 대사관의 권위와 책임을 가지고 왔다.

“현재, 노리 차장님이 부활한 건 사실이지만, 죽지 않은 건 아닙니다.”

말장난 같지만 논리적으로 옳다.

부활하려면 그전에 한 번 죽어야 한다.

이 경우, 노리를 부활시켰다는 것 자체가 곧 강은혁의 살인 혐의를 뒷받침했다.

“즉, 살인을 한 적 없다는 강은혁 측의 주장은 거짓입니다.”

“틀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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