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 식인 메뚜기 떼의 습격 (1)
은혁의 말이 맞았다.
키나핀러 국왕은 왕국의 주요 업무를 담당해야 할 재상이나 대장군 같은 이들을 모조리 해임하고, 직속 근위대만 남겨뒀다.
어차피 재난에 몰락 중인 왕국이고, 권력을 지닌 측근을 뒀다가는 차질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곳도 아닌 왕국 수도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시청이 무너져도 키나핀러는 지원을 하지 않았다.
뜻 있는 공무원들, 경비대원들과 일부 플레이어들만 고생했을 뿐.
국왕은 혼자 지하 예배당에서 기도만 했다.
존 키나핀러의 무능함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었다.
반면에 은혁은 달랐다.
“나와 염훈이 등장한 이후로 1시간 만에 주요 재난 네 가지를 클리어했지. 이건 내 입으로 말하려니 자랑 같지만, 전례가 없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다수의 시민 NPC들은 은혁과 염훈을 비롯한 불패불굴 길드원들을 진정한 영웅으로 섬기고 싶어 했다.
“재난 속에서 왕 자리가 갈아치워지는 건 종종 있는 일. 좋게 말할 때 왕위 내놓으시지?”
“그, 그럴 수는 없다!”
“없다면 그냥 죽든가. 카라미타스의 단말이 끊어진 상태로 죽는 거니까, 지금 죽으면 진짜 개죽음인데.”
“으으……!”
국왕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고, 흐르는 땀 때문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그때, 은혁은 평소에 쓸 일 없던 성직자 패시브 스킬 [설득의 태도]와 도적 스킬 [그림자 결속]을 몰래 융합시켰다.
-히든 이펙트 발동!
‘퓨전 스킬 [압박 설득].’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직자 스킬과 도적 스킬이 합쳐지자, 기묘한 시너지 효과가 발생했다.
결국 존 키나핀러는 굴복하고 말았다.
“아, 알았다. 하는 수 없지.”
-키나핀러 왕국의 왕위를 획득하셨습니다!
-단, 군주가 아니기에 제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내가 속한 길드의 길드장이자 군주인 염훈에게 왕위를 즉시 넘긴다.”
-현 시간부로, 염훈은 재난의 왕국 키나핀러의 국왕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왕이시여! 장수하소서!
“훗, 뭐, 수명이 400년이니까.”
은혁은 웃으며 몸을 빙글 돌렸다.
그 순간.
콰콰쾅!!
카라미타스의 분노인지 우연인지, 천장이 무너졌다.
“흐아아악!”
국왕의 머리 위로 지하 예배당의 돌무더기가 쏟아져 내렸다.
이제 국왕의 영혼은 약속대로 카라미타스의 차원으로 갈 것이다.
하지만 왕위를 잃은 상태이고 쓸모도 없으니, 카라미타스는 국왕의 영혼을 가만두진 않을 터.
“염훈도 날 가만두지 않을 텐데.”
갑자기 왕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당황할 것이다.
“후후.”
은혁은 염훈의 정식 국왕 등극을 위해 보물전부터 털기로 했다.
‘대부분 팔아치웠겠지.’
특히 배불뚝이 마이크에게 팔아치운 물자가 상당히 많을 터.
‘왕가의 조상들을 섬기는 장소를 파괴할 정도면 보물전 안에 든 것도 싹 다 팔아먹었을 것 같은데.’
사실 카라미타스를 섬기는 이 예배당은, 왕가의 고대 영령들을 섬기는 장소였다.
왕가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장소인 셈인데, 존 키나핀러는 그것을 멋대로 파괴하고 재난의 성좌를 섬기는 예배당으로 개조한 것이다.
조상을 섬기는 장소를 부수고 예배당으로 새로 개조할 정도면, 보물전 속에 든 보물의 양도 크게 줄었을 터.
그런 생각을 하며 보물전 앞에 도달했다.
육중한 문의 손잡이를 잡은 순간.
-보물전은 간단한 보호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습니다!
-허가받지 않은 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강력하진 않지만, 무시하고 들어가긴 어려운, 딱 애매한 수준의 보호 마법이 걸려 있었다.
은혁은 기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일단 보호 마법이 걸린 걸 보면 보물전에 보물이 있긴 있다는 뜻인데……. 허참. 염훈에게 왕위를 너무 빨리 넘겼나?”
키나핀러 국왕의 권리를 갖고 있었다면 쉽게 들어올 수 있었을 터.
하지만 은혁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도굴]!!”
이전에 고대혈족의 흡혈귀의 묘실을 뚫을 때 얻은 스킬이었다.
파앗!
-보물전의 보호 마법이 약화됩니다!
“에라! 드릴 랜스!!”
콰콰쾅!!
[도굴] 스킬을 발동한 채 드릴 랜스로 조금 파줬더니, 보호 마법과 보물전의 문이 동시에 파괴됐다.
“후후. 잔뜩 털어볼까.”
말투까지 묘하게 도굴꾼처럼 변했다.
내부를 둘러보니, 금화는 제법 쌓여 있어도, 정말 귀한 고대 유물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희망적인 점은, 고대 유물이 보관되었다가 사라진 흔적이 보인다는 것이다.
‘[사이코 메트리].’
파앗!
비교적 최근에 팔려 나갔다.
‘예상대로 배불뚝이 마이크가 가지고 있군.’
나중에 되사들이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한데, [신살의 권능]은 없나?’
[신살의 권능]이란 키나핀러 왕가의 초대 국왕이 지니고 있던 엄청난 힘, 또는 아티팩트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은혁도 실제로 본 적은 없었지만, 혹시나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찾다 보면 얻어걸릴 것이다. 늘 그랬듯이.’
은혁은 우선 금화만 싹 다 챙겨서 나갔다.
* * *
염훈은 48층, 늑대인간들이 출몰하는 평원에서 시스템 메시지를 보고 혼자 부들거렸다.
길드원들도 다들 당황해했다.
“염훈 길드장님!”
“지금 이 시스템 메시지는?!”
“정말 이 나라의 왕이 된 겁니까?”
물론, 가장 당황한 이는 염훈이었다.
털썩.
염훈은 자기도 모르게 바닥에 누워 버렸다.
“내가 왕이 되었다, 그 말인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왕이라니. 내가, 내가 왕이라니……! 왕이라니이……!”
길드장 자격도 버거운데, 재난의 왕국의 왕이 되어 버렸으니, 그 정신적인 충격은 상당했다.
스르륵.
그때, 그림자 속에서 은혁이 튀어나왔다.
“염훈.”
“야! 강은혁!!”
“화내기 전에 들어라.”
은혁은 왕궁 주방에서 훔쳐 온, 이 나라의 와인을 한 병 꺼내서 냅다 염훈의 입에 들이부었다.
“읍, 으으읍, 꿀꺽꿀꺽……!”
“갑자기 왕위 얻어서 충격 먹었지? 그래서 화내려고 하는 거지?”
염훈은 꿀꺽꿀꺽 마시며 눈짓으로 그렇다고 답했다.
“위기 극복을 위해 임시로 맡는 거야. 다 클리어한 다음 NPC에게 다시 넘기면 돼. 너무 부담 가질 거 없어.”
“저, 정말?”
“당연하지. 너랑 나는 100층탑을 올라야 하는 입장인데, 평생 여기 있을 수는 없잖아?”
“휴우, 다행이다.”
더 책임감을 늘리고 싶지 않았던 염훈은 다행스러워했다.
“그보다, 늑대인간들은 몇 마리나 잡았지?”
은혁이 부하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게 거의 못 잡았는데…….”
늑대인간들의 머릿수는 상당했다.
하지만 불패불굴 길드원들과 싸우는 대신, 철저히 피해 다니고 있었다.
타탓!
누구보다 열심히 늑대인간들을 추격하던 박병철이 다가와서 설명했다.
“놈들은 그냥 야생 늑대인간이 아니다, 부길드장.”
“그럼?”
“완전히 군단처럼 움직여. 즉, 놈들에게는 엄청난 지휘관이 있는 거지.”
“너보다?”
“……도발해 봐야 소용없어. 놈들이 안 싸우기로 작정했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늑대인간들은 ‘웨이브 시간’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
“역시 그런가.”
미리 늑대인간들의 수를 좀 줄여놓고 싶었던 은혁은 아쉬워했다.
박병철의 표현대로 늑대인간들은 군단처럼 움직였기에, 전면전을 각오하면 손실이 크다.
그래서 미리미리 수를 줄여 놓는 것이 본래의 계획이었다.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면 되지, 뭐.’
그 순간.
-1단계 재난까지 남은 시간 : 5분.
-1단계 재난이 곧 시작됩니다!
“다들! 주목!”
은혁이 부하들에게 외쳤다.
“47층 도시 내부의 재난들은 각 조가 하나씩 맡아서 클리어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48층, 도시 바깥의 재난들은 다르다! 웨이브 형식으로 하나씩 밀려든다!”
불패불굴 길드원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문제는, 이번 미션의 재난의 난이도가, 다른 플레이어들이 도전했을 때보다 더 어려울 것이란 점이다!”
이 부분은 반쯤 은혁의 잘못이다.
은혁이 대놓고 카라미타스와 척을 졌으므로.
카라미타스가 난이도를 높일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기회이기도 하다! 막대한 경험치! 막대한 명성! 그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은혁은 과장하지 않았다.
실제로 재난의 성좌, 카라미타스의 의지가 담긴 재난을 정면으로 박살 낸다면?
그때 얻을 수 있을 경험치와 명성은 상당할 터.
‘게다가 운명치도.’
은혁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지만, 히든 스탯인 운명치 또한 상승할 것임을 예상할 수 있었다.
사실, 은혁이 성좌인 카라미타스와 정면으로 맞붙으려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운명치였다.
단순히 운명치를 조금 얻는 수준이 아니라…….
‘아니, 운명치 뽑아 먹기 콤보는 49층까지 간 다음의 계획이니까 너무 앞서나가지 말자. 지금의 일에 집중해야지.’
그 순간, 1단계 웨이브가 시작되었다.
<48층 재난 웨이브 1단계 : 식인 메뚜기 떼의 습격>
-목표 : 손바닥 크기의 메뚜기 떼가 농경지 방향으로 날아온다. 메뚜기 떼를 최대한 처치할 것.
-성공 시 보너스 : 농경의 부활. 단, 전체 농민과 농작물 중 50% 이상이 살아남아야 한다.
-실패 시 페널티 : 전체 농민의 50%가 고통스럽게 죽음. 남아 있는 농작물의 50%가 파괴된다. 단, 제한 시간이 다하기 전에 ‘자진 포기’ 시에는 페널티가 10분의 1로 감소한다.
-제한 시간 : 메뚜기 떼가 죽거나 떠날 때까지.
염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진 포기를 해도 된다고……?”
자진 포기 규칙에 대한 추가 설명이 눈앞에 떴다.
-재난 웨이브는 극도로 난이도가 높기에, 중도에 자진 포기가 가능합니다.
-자진 포기를 외치는 경우 발동하며, 그 경우 재난에 맞서는 데 활용한 노력의 양을 계산하여, 노력치가 25% 이상인 경우 ‘잠정 클리어’ 판정을 내려줍니다.
-단, 이러한 ‘잠정 클리어’의 경우 성공 시 보너스를 받을 수 없으며, 49층에 도전할 권리만을 얻는 것이란 점을 유의해 주십시오.
-노력의 양을 계산하여 자진 포기를 외치는 것도 한 가지 클리어 방법임을 알려드리며, 생존에 집중하시길 권합니다.
설명을 본 플레이어들이 술렁거렸다.
“뭐야, 이거.”
“포기를 해도 괜찮다고 하는 거?”
“아예 중도 포기를 좀 권유하는 거 같은데?”
“도대체 얼마나 어렵기에……!”
“클리어 노력의 25%만 해도 잠정 클리어라면, 이거 좀 계산적으로 해도 되겠는데?”
그때, 1단계 웨이브에 참가한 플레이어들의 눈에, 농경지 위치가 표시되었다.
도시 기준으로 500미터 북동쪽에 있었다.
바싹 마른 방치된 논밭 같았지만,
부우우우우웅……!
저 멀리서 갈색 구름 같은 것이 날아왔다.
“이런 망할?!”
“처음부터 어려운 거네!”
길드원들은 당황해했다.
염훈도 기막혀했다.
“식인 메뚜기한테서 도망치는 거라면 자신 있는데, 으음…….”
은혁 한 사람만이 태연했다.
“다들 걱정 마라. 놈들을 죽이는 법은 간단하다.”
은혁이 카라미타스의 성유물을 들어 올렸다.
“재난이여! 이곳으로 오라!”
파앗!
-현재 진행 중인 재난이, 재난의 성좌의 힘을 느낍니다!
-현재 진행 중인 재난이 방향을 틀어 다가옵니다!
부우우우우우웅……!!
메뚜기들은 농장으로 가다가, 불패불굴 길드원들 쪽으로 다가왔다.
“엥?!”
“으아, 놈들이 여기로 온다!”
“그 성유물로 쫓아내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자 은혁이 어리둥절해했다.
“무슨 소리야? 다 죽여야 퇴치가 끝나는 거지.”
은혁의 반응에, 부하들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구름처럼 보이던 살인 메뚜기들의 모습이 점점 더 가까워져 왔다.
그 징그러운 모습에 몇몇 불패불굴 길드원들의 얼굴은 하얗게 변했다.
“[신성한 지휘].”
염훈은 은혁의 조언 없이도 척척 스킬을 썼다.
파앗!
“다들 침착해라. 기껏해야 벌레일 뿐이다. 복잡한 작전도 없고, 뒤통수 맞을 일도 없어. 그냥 벌레 새끼들을 다 죽이면 돼.”
[신성한 지휘]의 효과가 깃든 염훈의 지시는 부하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그리고.
쩔그렁!
몇만 골드인지 감이 안 오는 묵직한 금화 주머니가 바닥에 놓였다.
은혁은 금화 주머니를 두 개 더 바닥에 떨궜다.
쩔그렁! 쩔그렁!
모두가 주목했다.
하지만 은혁은 자신이 던진 금화 주머니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