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 마이크와의 대면 (1)
확실히 왕국 수도의 성벽을 끼고 적들과 수성전을 벌인다면 유리해지는 것은 맞다.
하지만 수성전은 뒤가 없고, 성벽 안에 있는 내부의 NPC들이 죽거나 다칠 확률이 높았다.
경비대장으로서는 고뇌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보고 있던 염훈이 화를 냈다.
“이봐요, 경비대장.”
“헉, 구, 국왕 폐하.”
경비대장 NPC는 엉거주춤 허리를 숙였다.
날먹으로 오간 왕위였기에, 당장 성심을 다해 섬기기에는 무척 어색했다.
“당신, 얼마나 재난에 찌들어 버린 건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도 할 말은 있습니다.”
“비난하려고 꺼낸 소리가 아니야. 얼마나 오랜 시간 고통받은 건지 궁금해서 물어보려는 거야.”
“에……?”
염훈의 화법은 기묘했다.
플레이어가 NPC에게 재난에 얼마나 찌들었냐고 묻는 것은 100층탑이 만들어진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으므로.
“뭐, 그야…… 많이 찌들었습니다만.”
“그렇군. [상급 치유].”
파앗!
염훈은 경비대장을 냅다 치료했다.
“어때, 좀 낫나?”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야. 이 정도로 치유될 리가 없지.”
염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염훈이 말하는 건 정신적인 부분이었다.
“경비대원들, 그리고 우리 길드원들. 다들 앉아서 들어라.”
다들 편히 앉아서 들었다.
“재난으로 몸과 마음이 찌들어 버린 사람이 가장 듣기 괴로운 말이 뭔지 아냐? 이번만, 한 번만 더 견디자는 소리다.”
다들 공감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의 재난은 인간의 악의와 무관하게 찾아온다. 딱히 내가 뭘 잘못했기 때문에 오는 게 아니라 그냥 몰려오는 거야. 문제는, 살면서 딱 한 번 겪는 게 아니라는 거다.”
작년에 홍수가 나서 제방을 쌓았더니 올해는 가뭄이 왔다는 농부의 하소연과 같이, 재난은 예측하기 힘든 데다가 여러 번 온다.
“정말, 재난은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물러났다, 다시 또 몰려오지. 재수가 정말 없으면 이 차원처럼, 아예 재난의 신이 작정하고 재난을 보낼 수도 있고…….”
모두에게 말하던 염훈은 두 손을 허리에 짚고, 발로 괜히 바닥을 쓸었다.
꺼내기 힘든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은혁아.”
“왜?”
“왕국을 해체하면 어떨까?”
염훈의 말에 은혁은 히죽 웃었고, 다른 이들은 수군거렸다.
특히 경비대장 NPC가 물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새로운 왕이시여.”
“말 그대로야. 너희는 미션창이 안 보이겠지만…….”
미션창의 목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매우 강력한 늑대인간 군단이 왕국 수도를 향해 몰려온다.’
“다시 말해 키나핀러 왕국을 해체하고, 내가 왕위를 버린다면, 늑대인간 군단의 미션은 미션 목표 무효화로 인해 없어지지 않을까……라는 게 내 생각인데, 이게 가능할까, 은혁아?”
염훈도 은혁과 함께하면서 이런저런 꼼수에 대한 눈이 트여 있었다.
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가능해. 하지만 그 경우 늑대인간 미션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48층 메인 미션 전체가 꼬여서 무효화가 된다. 즉, 새로운 재난이 다시 올 거야.”
“후우, 미봉책이라는 건가.”
“왜 그렇게까지 이 NPC들을 걱정하냐, 염훈. 아니, 왕.”
“왕이니까 걱정하지, 젠장.”
미션 깨러 왔다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왕국의 왕위를 넘겨받은 염훈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가장 큰 이유는 은혁 때문이다.
‘은혁이 녀석. 멋대로 말하다니.’
은혁은 왕위 따위야 미션을 클리어 한 다음, 아무 NPC한테 넘기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염훈을 설득했다.
만약 46층~49층의 세계가 단순히 게임 속 세상이라면 그런 간단한 양위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염훈으로서는 쉽지 않았다.
사실, 은혁도 그런 염훈의 속마음을 이미 예측했다.
‘염훈 녀석. 약자들에게 공감하고 있구만.’
어느 정도는 은혁이 유도한 바이기도 했다.
염훈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만, 왕으로서 진심으로 신민의 아픔에 공감하면 공감할수록, NPC들의 왕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다.
이 보이지 않는 신뢰도는 나중에 쓸모가 있을 터.
은혁은 염훈이 더 정신적으로 괴로워하기 전에 나섰다.
“현시점에서 좋은 방법은 있다.”
“뭔데?”
“근데 좀 힘듦.”
“얼마나 힘듦?”
“꽤 많이 힘듦.”
그 말에 염훈은 고뇌했다.
은혁이 힘들다고 할 정도면 무척 힘든 것일 터.
하지만 염훈은 각오했다.
“NPC들을 재난에 갈아 넣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할게.”
* * *
염훈은 왕궁의 연단 위에 섰다.
웅성웅성…….
와글와글…….
수도와 그 인근에 모여 사는 NPC들이 광장에 모여 있었다.
광장에 그득하던 쓰레기들은 은혁이 소환해 두고 간 메탈 워커들의 부지런함 덕분에 다 치워져 있었다.
왕이 연설을 하기에는 여전히 어수선하고 지저분했지만, 염훈은 개의치 않았다.
일단 NPC들의 마음을 한곳에 모아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키나핀러 왕국의 여러분. 저는 새로 국왕이 된 염훈이라고 합니다.”
47층 메인 미션 클리어 보상 덕분에 상태가 조금 나아진 시민 NPC들은 기대 반 불안 반의 표정으로 염훈을 올려다봤다.
“제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일단 전설의 용사입니다.”
거짓은 아니다.
폴링스트 왕국에서 전설의 용사의 증표를 얻어 왔으므로.
“여러분. 그동안, 무척 힘드셨지요?”
정적.
웅성거리고 수군거리던 이들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가, 왕이 자신들을 걱정해준다는 것을 처음으로 체험했기에, 그들은 모두 놀라 버렸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왕이 되자마자 해야 하는 일이 여러분의 도움을 청하는 일이라는 게 말입니다.”
저벅저벅.
연단 아래로 내려오더니.
털썩.
염훈은 무릎을 꿇었다.
“헉…….”
“왕이 무릎을 꿇었어……!”
모두가 경악했다.
은혁을 제외하고.
사실, 염훈이 무릎을 꿇지 않고도 도움을 끌어낼 방법은 많이 있었다.
하지만 염훈은 재난 속에서 지도자가 가장 보여주기 힘든 미덕을 보였다.
그 미덕의 이름은 ‘염치’다.
재난 속에서 용기와 의지를 보여주는 지도자들은 많다.
하지만 재난이 지도자의 악몽인 이유는, 지도자가 아무리 재난에 대비해도, 피해가 ‘반드시’ 발생하기 때문이다.
염훈은 왕이 된 지 불과 한두 시간 흘렀을 뿐이기에, 기존에 이 키나핀러 왕국이 입은 피해에 대한 책임은 없다.
하지만.
“왕의 권리를 전해 받았다면, 그에 걸맞은 책임 또한 같이 전해 받아야 할 겁니다. 저는 그 책임을 온전히 다하기도 전에, 여러분께 같이 일어나 싸우자고 청합니다. 염치없는 소리이나, 부탁드립니다.”
염훈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다 함께 일어나, 이곳을 침략하려는 늑대인간 군단에 맞서 싸웁시다.”
가장 먼저 반응한 이는 동네 꼬마들이었다.
염훈에게 돌을 던지며 꺼지라 했던 꼬마들.
“옳소!!”
“염훈 왕! 만세!”
“만세! 만세!”
뒤이어 공무원들.
우르르…….
노파처럼 변해 버린 시장부터, 고장 난 확성기 때문에 울상을 짓던 공무원들이 달려가서 염훈을 일으켜 세웠다.
“어서 일어나세요!”
“우리의 왕이여!”
그 뒤는 쉬웠다.
“와아아아!!”
“염훈! 염훈!!”
“새로운 키나핀러 왕국의 왕이여!!”
“와아아아아!!!”
재난에 억눌려 있던 시민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크게 함성을 지를 수 있는지 몰랐다.
‘잘했다, 염훈. 염치를 보임으로써 이들의 마음을 얻었구나.’
염치란, 사실 은혁에게는 부족한 덕목 중 하나다.
이것이 은혁이 염훈을 인정하는 이유 중 하나다.
‘좋아, 모두의 마음은 얻어뒀으니 아껴둬야지.’
사실 은혁 또한 일반 NPC들의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NPC들의 각오를 끌어내고 염훈에 대한 충성을 끌어내는 일이 필요했을 뿐.
이는 차후의 더 큰 일을 해결하는데 쓸모가 있을 터.
‘늑대인간들 따위는 더 쉽게 해결하는 방법이 있지.’
은혁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어딘가로 걸어갔다.
* * *
왕국 수도에는 ‘벙커 사장님’이라는 별명을 지닌 플레이어가 있었다.
‘배불뚝이 마이크.’
재난으로 부서진 각종 고물을 수거하여, 다차원 교차로를 이용해 다른 곳에 판매하며 돈을 벌었다.
가령, ‘금이 간 키나핀러 왕국 찻주전자’나, ‘버려진 왕국 수도 경비대 갑옷’, 혹은 ‘폐업한 신문 인쇄소의 인쇄 시스템 일체’ 같은 것들이다.
끝없는 재난에 무너져 가면서도 기어코 완전히 멸망하진 않는 국가의 물건이라면 수요는 늘 존재하는 것이다.
“근데 저쪽은 왜 이리 시끄러운 거야?”
마이크가 중얼거렸다.
‘마이크의 고물상’이라는 간판이 붙은 벙커 속 사무실은 외부와 차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안쪽에서도 들릴 정도로 커다란 함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뭐, 나랑은 상관없지.”
“라고 생각하시겠지만.”
“뭐, 뭣?!”
마이크는 펄쩍 뛰다가 배를 책상에 부딪쳤다.
배를 문지르며 뒤를 보니, 사무실 한구석 그림자에서 은혁이 걸어 나왔다.
“뭐, 뭐냐, 네놈은!”
배불뚝이 마이크는 자신의 황금 지팡이를 허공에 휘두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례합니다. 저는 불패불굴 길드의 부길드장, 강은혁이라고 합니다.”
“아……!”
강은혁의 명성은 마이크도 익히 들었다.
‘테일러를 이쪽 통합층으로 도망치게 만든 그놈이군.’
마이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은혁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제 소환수인 메탈 서전트를 이미 만나보셨으리라 믿습니다.”
“아아, 그렇지. 왕궁 앞의 폐기물들을 모두 가져가도 좋다고 했었지.”
그리고 은혁은 메탈 워커를 소환해서 쓰레기들을 치우고, 그중 폐금속들을 마이크가 운영하는 고물상으로 옮겼다.
“그건 그렇지만 갑자기 들어오다니. 무척 무례한 청년이로군.”
“실례합니다. 하지만 매우 급박한 용건이 있어서 직접 오게 되었습니다.”
“급박이라. 무슨 용건이오?”
마이크는 짐작할 수 있었다.
‘보나 마나 재난 웨이브 관련이겠지.’
하지만 은혁이 내놓은 대답은 마이크의 상식을 부쉈다.
“여태 세금을 안 내셨더라고요.”
“에?”
“키나핀러 왕국에 대한 세금 미납은 중대하고도 급박한 문제입니다.”
“자, 잠깐. 나보고 세금 내놓으라고 온 건가? 그게 급박한 용건이라고?”
“네.”
“…….”
마이크는 말문이 막혔다.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따지고 들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서 생각을 정리하는데, 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이크 님. 피가 천천히 돌면 어떻게 됩니까?”
“어? 피? 사람 몸속의 피 말인가?”
“그렇습니다.”
“피라는 게, 정상 속도보다 느리게 돌면 치명적이겠지. 너무 빨리 돌아도 문제지만.”
“정확합니다. 그리고 왕국의 피를 모으고, 그것이 적절한 속도로 돌도록 돕는 유일한 기관이 국세청입니다.”
“아니, 그게…….”
키나핀러 왕국의 행정은 사실상 파괴된 상태였다.
시청 건물 자체가 이미 여러 번 파괴되었고, 그곳에서 운용하는 피난 방송용 확성기를 수리할 여력조차 없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세금을 수금하는 기관도 없었고, 만약 그런 게 있었다 해도, 국왕은 카라미타스에게 바쳤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고물상 겸 판매업자 일을 하고 있는 마이크도 세금을 낸 적이 없다.
가끔 국왕과 근위대에 뇌물을 바친 적이 있긴 하지만…….
“여긴 별별 희한한 기계 장치들도 많이 있군요. 고철 같은 것만 취급하시는 줄 알았는데.”
은혁은 사무실 한쪽에 놓인 거대한 인쇄 장치를 구경하며 말했다.
고물이 아니라, 당장 작동이 가능한 신문용 인쇄 장치였다.
“아, 그건 정식으로 인수한 거요. 폐업한 신문사 사장에게 물어보시오.”
마이크가 긴장된 말투로 말했다.
훔친 거 아니냐는 식으로 물고 늘어질까 걱정되었다.
“아, 물론 믿습니다. 하하하.”
은혁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짓다가, 갑자기 급정색하며 물었다.
“여기서 얼마나 일하셨습니까?”
“10년 좀 넘었는데.”
“세상에! 그런데도 세금 한 푼 안 내셨다고요?”
은혁은 어찌 사람으로서 그런 끔찍한 일을 할 수 있느냐는 표정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돈 욕심이 많은 마이크의 얼굴 표정이 굳었다.
“이거 봐, 무슨 개수작이야?”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네가 뭔 권리로 세금이니 뭐니 떠드냔 말이야.”
“아하, 아직 모르셨군요. 새로운 왕이 등극했습니다.”
“새로운 왕?”
“네. 새로운 키나핀러 왕국의 국왕은 그 이름도 찬란한 염훈입니다.”
“염훈이고 나발이고! 그 새끼랑 나랑 뭔 상관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