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 재난의 산 (1)
“네가 그 힘을 전부, 제대로 이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해. 일단 너는 공식적으로 왕위를 이양받은 국왕 신분이니까.”
“음?! 너 설마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나한테 왕위를……!”
“물론, 운석의 위력은 장난이 아닐 거야. 그러니까 온 국민의 힘을 모아야 한다.”
염훈의 [신성한 지휘]의 힘으로 모두의 의지를 모으고, 그 힘을 염훈의 [홀리 채널링] 스킬과 함께 국왕이 지닌 수호의 권능에 돌려야 한다.
그리고 그 힘을 연계해서 프리즘 랜스에 집중시키고, 염훈이 자신에게 [2초 무적]을 쓴 다음 운석을 파괴하려 든다면…….
‘그래도 쉽지 않겠지. 운석이 장난도 아니고.’
사실, 지금의 염훈 실력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시도해야 한다. 그것도 진심을 다해서!’
그렇게 노력하는 모습을 겉으로 보여야 한다.
‘그래야 내가 꼼수를 써도 들키지 않겠지.’
사실, 은혁에게는 염훈을 이용하는 전략이 플랜 B고, 더 확실한 플랜 A가 존재했다.
‘테일러 부길드장님. 지금 만나러 갑니다.’
은혁이 행복 길드의 시리우스를 탈탈 털어먹었듯이, 이제는 자유시장 길드의 테일러를 털어먹을 차례였다.
* * *
-49층 : 카라미타스의 성지.
왕국 수도 너머의 평야.
그 평야의 너머에는 키나핀러 왕국의 선산이었던 곳이 있다.
지금은 카라미타스의 권능이 가장 강하게 집약된 산.
은혁은 혼자서 왔다.
산 입구에 도착하자, 뼈만 앙상하게 남을 정도로 굶주린 등산가 NPC들이 있었다.
“으으, 멈추시오. 이곳은…….”
“일단 회복부터.”
힐링 포션을 여러 병 따서, 그들에게 먹여줬다.
꿀꺽꿀꺽…….
등산가 NPC들 기력을 회복했다.
“허억, 허억. 고맙소.”
“이 산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엉망이오. 이토록 엉망일 줄은….”
등산가 NPC는 자신이 누구이고 왜 산에 오르려 했는지에 대한 설정을 줄줄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왕국 충성파고, 국왕의 정신을 정상으로 돌려놓기 위해 산을 올라가서 카라미타스의 성유물을 파괴하려 했으나, 각종 시련을 넘지 못하고 포기했다는 거군요?”
“……요약을 참 잘하시는군. 그렇소.”
산에 존재하는 미션은 어차피 일반 NPC 수준으로 될 일이 아니다.
은혁이 그렇게 생각하며 산을 올려다본 순간, 49층 메인 미션이 떴다.
48층의 재난 5단계를 마무리 짓지 않았으나, 재난 4단계의 토론에서 만장일치로 48층을 클리어한 것으로 판정받았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49층 메인 미션 : 재난의 산>
-목표 : 재난의 산에 존재하는 ‘시련 코스’를, 제1코스부터 제3코스를 거쳐 정상에 오를 것. 반드시 각 코스를 거쳐야만 한다.
-성공 시 보너스 : 1회용 순간이동 장치.
-실패 시 페널티 : 죽음.
-제한 시간 : 12시간.
“좋아! 미션이 그대로라 다행이야.”
은혁은 인치가 49층 메인 미션에도 장난을 쳐놓고 갔으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아니었다.
은혁이 좋다고 외치는 걸 본 등산가 NPC들은 어이없어했다.
“시련은 장난이 아니오!”
기력을 회복한 NPC들은 앞다투어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은혁은 시간이 아깝다는 듯이 손을 내젓더니.
“[그림자 지배] + [질주] 융합.”
-히든 이펙트 발동!
“퓨전 스킬 [그림자 질주].”
파사사사삿……!!
산에 드리워진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를 누비듯이 맹렬한 속도로 산을 올랐다.
그리고 커다란 관문 앞에 도달했다.
-제1코스 : 절벽 오르기.
깎아지른 듯한 절벽.
절벽 아래에는 곳곳에 돌에 맞아 죽은 NPC들이 있었다.
고개를 들어 절벽 위를 보면 안개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크르륵!”
“쿠오오오!”
안개 너머의 절벽 꼭대기에서 마운틴 트롤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절벽 위에서 돌을 던지는 마운틴 트롤들을 피해서 올라가면 코스 통과 판정.
‘허참. 회귀 전에는 어떻게 올라갔었지?’
지금 봐도 일순 막막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땐 머릿수로 밀어붙였었던가?’
은혁은 그 당시를 떠올리자, 피와 땀에 푹 절어 있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재생력을 가진 데다가 피부가 돌처럼 딱딱한 마운틴 트롤들을 상대로 코스를 헤쳐 나가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던가.
‘10초 안에 끝낸다.’
은혁은 회귀 전에 함께했던 여러 플레이어들의 피와 땀을 생각하며 스킬을 썼다.
“[섀도 코볼트 소환].”
파앗!
은혁이 지배하기 전에 이미 어둠의 동굴 속에서 벽에 구멍을 파고 살던 코볼트들.
평지보다, 수직에 가까운 산을 타고 오르는 것에 오히려 다 능숙했다.
은혁은 100마리가 넘는 섀도 코볼트를 향해 명령했다.
“고지를 점령하라.”
“캬악!!”
사사사사삭!
불규칙한 움직임으로 산을 오르자, 마운틴 트롤들이 우르르 절벽으로 몰려들었다.
섀도 코볼트의 정체가 뭐건 간에 올라오도록 하면 안 된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쿠오오오오!!”
마운틴 트롤들은 전력을 다해 마구잡이로 돌을 던져댔다.
쾅!!
콰콰쾅!!
던지는 돌 하나하나가 사람 몸통만 했다.
가히 산사태를 연상시키는 재난이었지만, 코볼트들은 요리조리 잘만 피했다.
“캬캬캭!”
“캬캭, 너무 느리다!”
깨진 절벽의 틈새로 몸을 숨기거나, 그림자 속으로 슬쩍 회피하는 등, 교묘하게 피했다.
너무 거대한 돌이어서, 오히려 작은 섀도 코볼트들을 처리하긴 어려운 것이다.
“쿠와아아아악!!”
한 마운틴 트롤이 화가 나서는, 절벽에서 조금 낮은 곳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보다 작은 돌을 정조준해서 던졌다.
파칵!!
콰쾅!!
돌 하나로 섀도 코볼트 몇 마리를 동시에 처리했다.
“쿠오오오!!”
그걸 본 나머지 마운틴 트롤들도 조금씩 조금씩 더 내려왔다.
안개 너머에 있어서 보이지 않던 모습이, 이제는 아래에 있는 은혁의 눈에도 확연히 보일 정도.
‘지금이다!’
“[피구름 생성] + [인페르노 볼텍스] 융합……!”
[인페르노 볼텍스]는 이미 [광풍흡성기류장] + [화염 방사] 스킬을 융합한 퓨전 스킬인데, 그것을 새로 얻은 피구름과 강제로 합쳤다.
쿠구구구구구……!
은혁을 중심으로 마력이 회오리치고 땅이 흔들렸지만, 정작 마운틴 트롤들은 자신들이 던지는 돌 때문에 일어나는 지진이라고 생각하며 섀도 코볼트들에게만 집중했다.
은혁은 재빨리 섀도 코볼트를 역소환하며 스킬 발동을 끝맺었다.
-히든 이펙트 발동!
“퓨전 스킬 [초열혈운]!!”
화아아아악……!!
뜨겁게 팽창한 피구름이 산을 역류하여 솟구쳐 올랐다.
본래 존재하던 안개는 순식간에 증발했고.
“커억……!!”
신나게 돌을 던지던 마운틴 트롤들은 숨을 들이켠 순간 몸속이 익어 버렸다.
트롤이 자랑하는 엄청난 재생력도, 비정상적으로 가열된 피구름이 몸속에서부터 흡착되는 순간 제대로 발동하지 못했다.
스르륵.
마운틴 트롤들은 선 채로 바싹 말라 죽더니.
쿠당탕!
콰당!!
산 아래로 모조리 떨어졌다.
-마법사 숙련도가 3% 증가했습니다!
-현재 마법사 숙련도 : 59%++.
-무투가 숙련도가 3% 증가했습니다!
-현재 무투가 숙련도 : 12%++.
-혈인술사 숙련도가 2% 증가했습니다!
-현재 혈인술사 숙련도 : 37%+++.
숙련도 메시지를 지우며, 절벽을 오를 준비를 하는 순간.
-축하합니다! 역대 최초로 모든 마운틴 트롤을 처치하는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트롤 학살자 칭호를 획득하셨습니다!
-업적 달성 보너스로, 굶주림의 성좌, 엥글러와의 대화 기회가 제공됩니다!
‘좋아! 계획대로……! 어? 잠깐.’
굶주림의 성좌 엥글러는, 아귀와 트롤의 차원인 헝거 플레인의 지배자이다.
아귀의 성좌와 트롤의 성좌를 모조리 잡아먹고, 세상 자체를 잡아먹으려다 헝거 플레인이라는 차원에 처박힌 존재.
헝거 플레인은 보통의 방식으로는 플레이어가 갈 수 없는, 온갖 트롤과 아귀들이 끊임없이 서로를 잡아먹는 세계이다.
심연과 100층탑 사이의 경계면이라는 설도 있는 곳.
그런 성좌가 대화를 신청해왔다.
‘성좌가 시련을 걸어올 줄 알았는데, 정말 단순 대화를 신청한다고?’
은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혁의 본래 계획은 마운틴 트롤을 학살하고, 성좌가 화를 내면 그 시련을 돌파하는 것이었다.
‘대화라…….’
오히려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굶주림의 성좌, 엥글러의 다이렉트 메시지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YES/NO
“YES.”
-크루나주우어냐아카라가가갸악!!
대화 신청을 하자마자 마구잡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나 인간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만능 사전의 권능 최대 사용.”
인벤토리 안에 있으면 꺼내지 않아도 쉽게 발동되는 만능 사전에 마력을 부여해서 최대로 발동시켰지만.
-주겨라! 주겨어! 다주겨! 주기고 머거라! 머거어!!
“…….”
기껏 번역이 되었음에도 대화가 이뤄지질 않았다.
은혁이 당황한 순간.
펑!
메시지는 멋대로 끊어지고, 아이템 상자 하나만 나타났다.
“…….”
은혁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상자를 열었다.
찰칵!
-포식의 망치 :
4성급 아이템.
트롤 대왕 미코보부아가 쓰던 망치.
굶주림의 성좌 엥글러가 멋대로 뺏었다.
파괴와 독식에 능한 자에게 주기로 되어 있다.
착용자보다 덩치가 작은 표적에 대한 공격력 25% 증가.
착용자의 재생력 25% 증가.
파괴한 적의 최대 체력의 25% 흡수.
“와……!”
은혁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엥글러의 시련을 클리어한 뒤 얻을 생각을 했는데, 운이 좋게도 바로 얻었다.
‘내가, 굶주림의 성좌 엥글러의 마음에 들었다는 건가?’
단순히 생각하면 그렇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굶주림의 성좌 엥글러는 내가 앞으로 뭘 하려는 건지 알고 있는 걸까?’
그래서 호기심으로, 은혁이 원하는 걸 딱딱 맞춰 던져 준 건지도 모른다.
‘머리가 나쁜 성좌는 아니군.’
트롤과 각종 아귀를 지배하는 존재이기에,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성좌 또한 머리가 나쁠 거라 예상하기 쉽다.
사실 은혁도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었는데, 조금 더 긴장하기로 했다.
‘좋아. 다시 살펴보자.’
은혁은 포식의 망치를 들여다봤다.
이 자체로도 꽤 괜찮은 무기다.
물론, 이걸 주력으로 삼기에는 은혁의 눈이 매우 높아진 상태다.
무기를 점검하는 은혁의 머리를, 좋은 꼼수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재난 흡수…… 운명치 생산…….’
은혁은 세븐 칼리버의 제5형태를 머릿속으로 가늠해 보았다.
‘할 수 있어.’
의욕이 불타올랐다.
포식의 망치를 인벤토리창 속에 던져 넣고, 차원의 낚싯대로 세븐 칼리버를 변화시켰다.
저격 모드로 변환시키지 않고서야 절벽 위로 단숨에 올라갈 수 없지만.
“하앗!!”
부웅!
철그럭!
은혁은 피구름의 잔해에 낚싯바늘을 걸었다.
은혁의 지배하에 있는 피구름은, 은혁의 의지에 따라 고체, 기체, 액체 속성을 자유자재로 오갔다.
“[도약]!!”
타앗!!
피구름에 낚싯바늘을 걸고 단숨에 절벽 꼭대기에 도달했다.
“읏차.”
-제1코스를 클리어하셨습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체력이 완전 회복됩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초대형 힐링 포션 항아리를 1개 획득하셨습니다!
은혁은 적당히 보상을 챙기고 앞으로 향했다.
성큼성큼…….
커다란 동굴이 나타났다.
은혁이 마음만 먹으면 동굴을 통하지 않고 단숨에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코스를 순차적으로 클리어해야 했기에 안으로 들어갔다.
-제2코스 : 양자택일의 노파
“흘흘흘. 어서 오시구려.”
안쪽에는 양자택일의 노파라는 NPC가 있었다.
“지금부터 당신은 선택을 해야 하오.”
스윽.
노파는 지팡이로 팻말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