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 테일러의 도움
“어, 어떻게……!”
“[크림슨 스파이크]를 어떻게 쓴 거냐고요?”
[크림슨 스파이크] 스킬은 [피의 지배]와 [메탈 스파이크 소환] 스킬을 융합한 것.
은혁 자신의 피 자체를 매개로 하여, 금속 가시 함정으로 만드는 스킬.
마력을 따로 발동하지 않고, 이미 흘린 혈액 자체에 포함된 마력을 이용하기에 테일러에게 들키지 않는다.
[그림자 분신 5.0]은 4.0과 달리, 실제 ‘피’를 보유하고 있으므로, 테일러에게 공격당해 터지면서 피를 흩뿌리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셋업이었다.
은혁은 친절히 설명해줬지만 테일러가 정말 궁금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네놈, 심장이 터졌을 텐데 어째서 안 죽는 거냐!”
“터진 거 맞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멀쩡한 거냐!”
“후후…….”
은혁은 웃으며 생각했다.
‘위험했다.’
퓨전 스킬 [버추얼 하트]가 아니었다면 100% 즉사했을 터.
은혁은 테일러가 [차명 활용] 스킬을 쓸 때, 몰래 [버추얼 하트]를 발동했다.
‘[염상 부여] + [만물 설계] + [피의 지배]를 융합한 퓨전 스킬. 그것이 바로 [버추얼 하트]다.’
무려, 사이오닉 듀얼 블레이더, 스팀펑크 메카닉, 혈인술사의 힘을 모두 합친 스킬.
직업이 여러 개인 은혁이 아니면 엄두도 못 낼 엄청난 퓨전 스킬이다.
평소의 테일러라면 은혁의 퓨전 스킬 발동을 반드시 알아차렸겠지만, 테일러 본인도 [차명 활용]을 연속 발동하는 과정에서 인격이 여러 번 바뀌는 혼란을 겪었기에 미리 감지할 수 없었다.
“읏차…….”
은혁은 손바닥을 몸속 어딘가에 갖다 대더니.
스르륵.
[버추얼 하트]를 몸속에서 꺼내 보였다.
푸르스름하고 반투명한 심장은 두근거리며 뛰었지만, 실제 심장처럼 혈관과 연결되어 있진 않았다.
“염력을 발생시켜 피를 순환시킵니다. 혈관과 연결된 심장이 박동을 해야 혈류에 움직임이 생기는 게 기본이지만…… 사이오닉 듀얼 블레이더이면서 동시에 에너지를 흡수하는 혈인술사이면 이런 것도 가능하죠.”
추가로, 실제 심장이 정반대로 역류하는 등의 위기 상황을 감지하면, 자동으로 정상 순환시킴과 동시에, 당한 척 피를 토하는 것도 가능하다.
“크윽……!”
테일러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은혁은 테일러가 분해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테일러가 나한테 지는 패턴이, 사실은 거의 같은 패턴이거든.’
다차원 은행 대전 당시에도 테일러는 은혁의 여러 직업에 대해 알고 있었다.
다만 새롭게 초능력자 관련 스킬을 얻었다는 것만은 알지 못했다.
이번에도, 테일러는 은혁이 혈인술사 관련 스킬을 쓸 수 있다는 사실만은 몰랐다.
혈인술사 직업은 바로 최근에 새로 얻은 직업이므로.
“만약 1차전에서 패배한 당신이 부하들을 버리고 잠적하는 대신, 나와의 협상을 시도했다면 오히려 이렇게 되진 않았겠죠.”
테일러 또한 부길드장답게 정보력은 강한 편이지만, 그건 길드원들을 활용 가능한 평소의 경우다.
지금처럼 49층 지역에 숨어 있는 경우에는 그 메리트를 이용할 수 없었으므로, 은혁이 혈인술사 직업을 추가로 얻었음을 알 수 없었다.
아무리 테일러가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해도, 그 만반의 준비는 은혁이 혈인술사 직업을 얻기 이전 기준의 만반의 준비일 테니까.
“죽여라.”
테일러가 힘없이 말했다.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네놈이 날 죽여도, 자유시장 길드장은 너의 도전을 받아들일 거다. 그러니 그냥 죽여라.”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당신의 시간 조작 능력은 엄청 귀한 거라서요.”
“네놈에게 복종할 생각은 없다. 아마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거다.”
“음…… 내가 당신에게, 당신이 원하는 것을 준다고 해도 말입니까?”
“개소리하지 마라. 운명을 극복하려는 내 시도를 방해한 주제에, 이제 와서 뭔 개소리냐.”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당신이 타임머신에 집착하는 이유가 운명 극복 때문이라는 걸 몰랐는데…… 이제는 알았으니 협상이 가능하겠지요.”
은혁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운명을 극복하고 싶다는 당신 목적은 제 여정이랑 겹칩니다.”
“뭔 소리냐.”
“실은 말이죠.”
은혁은 아카식 제로와의 계약에 대해 말했다.
테일러는 허탈해했다.
“미래에 대한 지식이 넘쳐나는 이유가 아카식 제로와의 거래 때문이었나.”
사실은 은혁의 회귀 지식 때문이고, 아카식 제로와는 심연에서 답을 찾아내겠다는 것으로 계약했을 뿐이지만, 은혁은 그렇다고 했다.
“시간을 되감는 식으로 운명 극복이 가능한지를 검증하는 실험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무리수가 많습니다. 시간을 되감는 행위 자체가 운명과 무관한,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라는 증명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런 증명이 가능하다면, 운명과 별개로 자유의지 행사가 가능하다는 답을 이미 찾은 게 되어 버리겠지요. 즉, 그 자체로 이미 운명을 극복한 게 되어 버립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자가당착의 오류입니다.”
“…….”
“그러니 우리는 운명의 성좌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심연으로 가서, 직접 답을 알아내는 게 그나마 낫습니다.”
테일러는 고개를 저었다.
“네놈의 그 주장도, 나의 것과 비슷한 문제가 있다.”
“압니다. ‘막상 심연에 갔더니 운명의 성좌가 없다면?’이라는 거죠?”
“잘 아는군.”
“그 경우라면 본래대로 가면 됩니다.”
“본래대로라니. 무슨 의미지?”
“100층탑 꼭대기를 정복한다는 뜻입니다.”
“뭐?”
“100층탑의 정상을 공략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지 않습니까?”
신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거기서 답을 찾으면 될 일이죠. 정답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왜 죽으려 하십니까?”
“기가 막히는군.”
테일러는 혀를 찼지만 내심 솔깃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왜 그 생각을 못 한 거지?’
테일러는 100층탑의 정상을 공략하는 것보다 타임머신을 제작해서 과거로 돌아가는 게 더 쉽다고 여겼다.
‘어쩌면 나는, 내심 100층탑 정복은 불가능하다고 체념한 상태였던 것은 아닐까?’
테일러는 문득, 둘 중 어느 게 더 효율적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테일러 님은 또 이렇게 말하겠죠.”
은혁은 재빨리 말했다.
“그 누구도 100층탑을 정복하지 못했는데 네가 어떻게 그걸 해내겠다는 거냐……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잘 아는군. 어쩔 셈인가?”
“길드연합국을 통합해서 내부 문제를 해결하고 3군주 세력을 상대로 싸워 이긴 다음 100층에 도전합니다.”
은혁이 말하자 테일러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말은 쉽지.”
“행동은 더 쉽습니다. 보여드릴 수 있는데, 어떻게 하실래요?”
“행동? 무슨 행동 말인가?”
“우선 엘더 포지부터 수리하러 가죠.”
“그걸 수리한다고?”
“10분이면 됩니다. 테일러 님이 도와주시면 1분도 가능하고. 어쩌시겠습니까?”
“…….”
테일러는 우선 은혁이 하는 것을 보고 협조할지 말지 결정하기로 했다.
“안내하지.”
두 사람은 엘더 포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순간, 히든 미션 클리어 판정이 떴다.
은혁은 테일러도 볼 수 있게 해줬다.
-축하드립니다! 49층 히든 미션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엘더 포지 사용권 3회를 획득하셨습니다!
“흠.”
테일러는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은혁이 받은 히든 미션 내용은 엘더 포지를 탈환하는 것.
즉, 엘더 포지를 무단으로 점거하는 적으로 간주되던 테일러의 적대적인 포지션이 해소된 것이다.
‘일단 두고 보지.’
* * *
파괴된 카라미타스의 성지.
그곳을 은혁이 소환한 메탈 워커들이 치우고 있었다.
“[그림자 터널].”
파앗!
[그림자의 주인] 패시브 스킬을 지닌 은혁은, 길드원이 된 배불뚝이 마이크를 가볍게 소환했다.
“우왓!”
“으음.”
마이크와 테일러가 불편한 재회를 했다.
경쟁자이면서 협력자인 둘은, 강은혁에게 맞은 다음 협력하는 존재가 되었다.
“험험, 잘 지냈나?”
“잘 지내는 것으로 보이나?”
두 사람이 어색한 대화를 하는 동안 파괴된 엘더 포지가 드러났다.
촤르르륵.
엘더니움으로 만들어진 ‘제련로’였는데, 산산이 조각나서 잔해를 치울 때마다 잔해가 흘러내렸다.
은혁은 메탈 워커를 해제한 뒤 설명했다.
“저의 [긴급 수리]와 테일러 님의 [시간 되감기]의 힘을 융합할 겁니다. 수리에 사용되는 금속은 마이크 님께서 갖고 오신 엘더니움을 쓸 겁니다.”
“잠깐. 엘더니움은 나도 얼마 없어.”
“제가 [거대화]로 뻥튀기하죠.”
그러자 테일러가 끼어들었다.
“너랑 내가 합체기를 쓰자고?”
“네. 합체기니까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
“여기까지 와서 또 딴지를 걸려는 건 아니겠죠?”
“젠장.”
테일러 또한, ‘여기까지 왔으니 뭐가 어떻게 되는지 일단 지켜보자.’ 하는 심정으로 협조했다.
은혁은 [거대화] 스킬로 수리용 엘더니움의 크기를 키웠다.
“[긴급 수리]!!”
“[시간 되감기]!!”
파앗!!
파앗!!
-엘더 포지가 복원되기 시작합니다!
-복원률 : 15%…….
-복원률 : 25%…….
-복원률 : 35%…….
-복원률 : 45%…….
덜그럭, 덜그럭.
후두둑.
부서진 엘더 포지의 잔해가 되감기며 조립되었다.
확실히 은혁과 테일러가 힘을 합치니 훨씬 효율이 좋았다.
“흐음, 순조롭군.”
“그렇군요.”
은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운석 충돌까지 남은 시간 : 3분 55초…….
은혁의 눈에만 운석 충돌 메시지 카운트 다운 메시지가 떴다.
48층 메인 미션 클리어 판정을 받았지만, 그건 재난 4단계를 만장일치로 클리어했기 때문일 뿐, 여전히 5단계 재난인 운석 충돌은 남아 있었다.
‘괜찮아. 거의 다 됐다.’
-복원률 : 80%…….
-복원률 : 95%…….
-복원률 : 100%…….
-엘더 포지의 복원이 완료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최초로 엘더 포지를 복원하는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엘더 포지 복원가 칭호를 획득하셨습니다!
-업적 달성 보너스로 패시브 스킬 [고고학 숙련]을 획득하셨습니다!
‘오오.’
사소하지만 좋은 스킬을 얻었다.
언젠가 고고학자를 영입하려고 생각 중이던 은혁에게는 좋은 스킬이었다.
“후우. 지치는군. 네놈이 하자는 대로 다 했다. 이제 뭐냐?”
“실은 말이죠.”
은혁은 48층 메인 미션의 4단계 보상과 5단계가 진행 중임을 설명했다.
“이제, 운석은 충돌할 것이고, 그에 대한 모든 페널티는 저에게 쏟아질 겁니다.”
“솔직히 보고 싶군.”
테일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운석은 도시에 떨어지는데, 그 재난은 모조리 은혁이 뒤집어쓴다.
말도 안 되는 현상이지만, 재난의 성좌 카라미타스와 관리국의 합의하에 이뤄진 현실이다.
물론, 만약을 대비해 염훈을 두긴 했지만…….
은혁이 빙긋 웃었다.
“재미있어하실 때가 아닌데요? 당신도 죽습니다만.”
“어?”
“도시에 운석이 떨어지면, 그 충돌의 충격파를 포함한 모든 페널티는 저한테 옵니다. 도시가 아니고요.”
은혁의 말은 사실이었다.
재난 웨이브 4단계 내내 이 사실을 확인했다.
“가까이 있는 당신도 그 범위 안에 들어올 텐데요.”
“아.”
그랬다.
아무리 모든 피해가 은혁에게 간다고 해도 운석 충돌의 충격파는 사방으로 퍼질 수밖에 없다.
가까이 있는 테일러도 당연히 그 범위 안에 든다.
만약 테일러가 지금이라도 도망치려 든다면, 은혁은 차원의 낚싯대며, [그림자 도약]이며 아낌없이 써서 따라잡을 것이다.
“젠장. 또 뭘 시키려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