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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모든 직업-290화 (290/434)

290화 : 재난의 성좌 죽이기 (3)

타탓!

숫자가 확 줄어든 은혁의 [그림자 분신 5.0]은 어느새 핵이 있는 곳의 지근거리에 있었다.

화신이 은혁과 염훈에 집중한 사이, 각종 재난의 정령들을 쓰러뜨리고 다가간 것이다.

물론, 분신들이 너무 가까이 가면 재난이 그들을 덮칠 터.

‘계획대로다!’

은혁은 [그림자 분신 5.0] 스킬에 [캔슬]을 걸어서 해제했다.

파앗!

이미 만들어 둔 [그림자 분신 5.0]에 담긴 힘이 강제로 다운그레이드되면서, 흐물거리는 그림자 형태로 바뀌었다.

“[그림자 방출]! [그림자 터널]!”

은혁은 그림자 분신들을 통째로 거대한 그림자의 터널로 만들었다.

그 그림자의 터널은 핵으로부터 겨우 10미터 떨어진 곳에 비스듬히 생성되어 있었다.

“세상에 아무리 재난이 많아도! 그림자 자체에 작용하는 재난은 없었을 테지!”

은혁의 지적이 사실이었다.

재난은 인간을 향하는 것.

그림자는 인간과 늘 붙어 다니지만, 정작 그 그림자 자체에 대한 재난이라는 개념은 적용되지 않는다.

-뭣……!

카라미타스의 화신은 은혁의 노림수를 이제야 파악했다.

“가라! 염훈!!”

“그래!!”

폭포 유니콘에 탄 염훈의 그림자는 거대했다.

“흡!”

염훈은 은혁을 믿고, 그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그림자는 은혁이 방금 만든 [그림자 터널]과 연결되어 있었다.

-안 돼!!

염훈을 상대하던 화신이 막으려 했지만 염훈이 더 빨랐다.

기이이이이잉……!!

신성력이 과충전된 프리즘 랜스가 빛을 발했다.

그 빛은 NPC들의 염원이었다.

재난에 대한 저항 의지와 염훈에 대한 희망이 한데 뒤엉킨 그 힘을, 일반 창이었다면 견딜 수 없었겠지만, 프리즘 랜스는 온전히 담아냈다.

염훈은 핵을 향해 일격을 가했다.

“[신성한 일격]!!”

번쩍!!

* * *

“어?”

염훈은 처음 보는 장소에 와 있었다.

“여긴……?”

묘하게 스산한 공간이었다.

자세히 보니 어느 실내였는데, 바닥에는 드라이아이스 연기 같은 게 깔려 있었다.

“일단 빛이 필요하겠네.”

염훈은 프리즘 랜스에 신성력을 불어넣어 빛을 내려 했지만.

“없네?”

무기만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몸 전체가 묘하게 흐릿했다.

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묘한 상태.

키나핀러 왕국 NPC들이 모아준 신성력 또한 대부분 사라져 있었다.

염훈이 양손에 신성력을 모아 빛을 내자, 한 팻말이 보였다.

‘55층. 묘하게 현실적인 천국의 관리자용 대기실.’

“뭐, 뭐야! 천국이라니!”

염훈은 덜컥 겁이 났다.

‘역시 난 죽은 건가?’

그때였다.

슈와아악…….

갓을 쓰고 까만 옷을 입은 한 청년이 땅 위를 미끄러지듯 나타났다.

‘헉! 저승사자?!’

염훈은 눈을 비볐다.

자신이 놀란 탓에 상대를 잘못 봤다고 착각한 것이다.

“눈 그만 비비십쇼. 저 저승사자 맞습니다.”

새까만 갓에 창백한 얼굴, 까만 입술까지.

90년대 TV 납량 특집에 자주 나오는 저승사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맙소사! 나 죽은 겁니까?!”

“원래는 그래야 정상이죠. 어휴.”

저승사자는 명함을 내밀었다.

-55층 관리자 : 저승사자 루핑.

“음. 루팡 님이시군요.”

“루팡 아니고 루핑입니다.”

“아,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누가 강은혁의 동료 아니랄까 봐, 적반하장으로 화부터 내는군요. 이보세요. 화를 내야 하는 건 저란 말입니다. 쉬는 날에 골치 아픈 뒤처리를 해야 하다니.”

저승사자 루핑은 투덜거리며 갓끈을 풀어서 갓을 벗고 머리를 긁었다.

“우선, 당신의 육신은 반쯤 죽은 상태고, 영혼만 튕겨 온 상태입니다.”

“그, 그러니까 왜요?!”

“왜냐니.”

루핑이 어이없어했다.

“그럼 성좌의 차원에서 성좌를 죽이고도 무사할 줄 알았습니까?”

“엥?”

염훈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럼 성좌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는 말인가?’

염훈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번쩍하는 섬광뿐이다.

루핑은 이런 염훈의 반응을 멋대로 해석하며 투덜거렸다.

“허참. 어이가 없네요. 성좌가 그냥 단순히 강한 네임드 몬스터라도 되는 줄 압니까? 거대한 무의식의 영향을 받는 신적인 존재가 성좌입니다. 본래는 그 성좌의 차원에 잠깐 들어갔다 나오는 것만으로도 반죽음 상태에 빠지는 게 정상이죠. 한데 당신들은 일부러 그 성좌를 도발하며 싸웠습니다.”

루핑은 마치 답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원래는 성좌의 핵을 파괴할 때 당신도 죽어야 했지만, 당신의 공격이 주효했습니다.”

“내 공격……?”

“키나핀러 왕국 모두의 염원이 담긴 그 공격 말입니다.”

“아……!”

프리즘 랜스에 과충전된 신성력의 근원은 확실히 재난과 맞서던 수많은 NPC들의 마음이다.

“운인지 필연인지, 당신의 공격은 카라미타스의 핵을 정확히 반으로 쪼개서 파괴했습니다. 그건 사실상 성좌의 죽음이죠.”

“오옷……!”

염훈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성공하긴 했구나!’

루핑은 그런 염훈의 반응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기뻐하긴 이릅니다. 그때 발생한 폭풍은 당신의 몸을 그곳에 남기고, 영혼만 튕겨 보냈으니까.”

“헐.”

염훈은 자기 몸을 내려다봤다.

손에 무기가 없고 몸이 흐릿한 것도 다 그런 이유였다.

“만약 제가, 프리즘 랜스에 신성력을 모으지 않은 상태였다면, 그냥 일반 공격으로 성좌의 핵을 파괴했다면 그 경우 저는…….”

“십중팔구는 깔끔하게 죽습니다.”

“켁.”

“평생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재난에 휩쓸리는 성좌의 사념체가 되었을 가능성도 20% 정도. 뭐, 그랬겠죠.”

“음, 저는 운이 좋았군요.”

“이제라도 알긴 알았으니 다행이군요.”

“근데 은혁이는 안 오고 왜 나만 온 겁니까?”

“그야 강은혁 플레이어가 핵을 파괴한 게 아니라 당신이 한 거잖습니까.”

“…….”

염훈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승사자 복장의 루핑도 같은 표정을 지어줬다.

“보아하니 우린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 같군요.”

“은혁이 녀석이 일부러 제게 막타를 넘겼다……?”

“제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흐음.”

염훈은 은혁을 뼛속 깊이 믿었기에, 은혁이 악의를 갖고 그러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루핑은 냉소적인 조언, 즉 ‘이런 상황에서도 당신 동료를 믿습니까? 그는 당신 생각보다 훨씬 냉혹한 자입니다.’ 같은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전에 염훈이 궁금한 점을 먼저 물었다.

“한데 하필 제가 왜 여기로 튕겨 온 거죠? 이…… 55층의…….”

“관리자용 대기실.”

“네, 하필 55층 관리자용 대기실로 튕겨 온 이유는?”

“보호 차원에서 당신을 이곳에 둔 겁니다.”

본래 염훈의 영혼은 어디로 튕겨 나가도 이상할 게 없었다.

성좌의 차원에서 성좌를 죽였으니, 멀쩡히 그대로 남아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

염훈의 영혼이, 관리국도 정확히 좌표를 특정할 수 없는 다차원 성계의 텅 빈 공간의 미아가 되어도, 염훈은 도움을 청할 수 없다.

“현재 당신은 꽤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곳에 온 겁니다.”

“엥?”

“100층탑에서 성좌를 죽인 자가 몇 명일 것 같습니까?”

“어어, 글쎄요.”

“당신 포함해서 겨우 13명입니다.”

“와우.”

“……반응은 그게 다입니까?”

루핑은 기가 막혔다.

지고의 위상을 짐승 다루듯 하는 3군주조차도 ‘성좌 죽이기’는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성좌의 본체는 자신의 차원 속에 머무르고 있기에, 그 성좌의 차원으로 가는 일 자체가 피곤하고, 성좌의 규칙으로 각종 제약을 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혁의 경우, 재난의 성좌의 성격과 미션 보상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유리한 판을 까는 데 성공했다.

이런 자세한 내용을 염훈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어휴, 당신에게는 설명하는 대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는 게 낫겠네요. 당신에게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A. 반쪽 남은 성좌의 힘을 흡수하여, 인간과 성좌의 중간체인 ‘반신’이 된다.

B. 이대로 영체 상태로 남겠다.

“엥?!”

“선택하십시오. 반신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이대로 남겠습니까?”

“꼭 하나를 골라야 합니까? 그냥 원래 있던 육체로 돌아가고 싶은데…….”

“지금의 당신 영혼을 강제로 육체에 쑤셔 박아봤자, 운명치 폭풍만 일어납니다.”

“운명치 폭풍이 뭡니까?”

“설명하려고 했는데, 당신이 이해를 잘 못하는 거 같아서 바로 선택지로…….”

“이보세요. 아무리 듣는 쪽이 뭘 모른다고 하더라도, 설명하는 쪽은 최선을 다해야죠. 듣는 쪽 능력이 부족하니 설명해도 소용없음~ 하는 태도는 별로 좋게 보이지 않는데요.”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듯이, 염훈 또한 은혁과 함께 지내며 관리국 측 사람을 타박하는 실력이 늘어났다.

루핑은 염훈을 한 번 흘겨본 뒤 설명했다.

“……인간을 초월한 존재, 특히 플레이어에게는 ‘운명치’라는 게 적용됩니다. 행동 하나하나가 세계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치니만큼, 그에 대한 책임을 물리는 거죠. 비유하자면, 부자한테는 세금을 더 강하게 물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음, 부자 입장에서 듣기 좋은 소린 아니군요.”

“그것이 이 세계의 법칙입니다. 불만이면 빨리 탑을 올라가시죠.”

운명치를 얻거나 운명치 소모를 낮추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관리국이 가장 권장하는 건 ‘수준에 맞는 높은 층으로 가라.’ 였다.

49층 수준에서 성좌를 죽이는 건, 스테이지에 비해 너무나 앞서나가는 엄청난 업적이다.

그러니 염훈의 영혼이 튕겨 나가는 일이나, 다시 그 영혼이 본체로 돌아갈 때 운명치 폭풍이 발생하는 건 관리국 관점에서는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하여간, 당신의 영혼은 현재 막대한 운명치 소모가 발생한 상태입니다.”

일반 플레이어가 성좌를 죽여 버렸으니, 그에 대한 책임으로 운명치를 지불해야 하는 처지다.

“즉, 영체 상태인 당신을 억지로 당신의 육체로 돌려보내도 운명치 폭풍이 발생합니다. 그 경우…….”

루핑은 그 뒤는 자기도 잘 모른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얼마나 끔찍한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요.”

“어휴, 온고지신도 모릅니까?”

“……갑자기 온고지신이 왜 나옵니까?”

“온고지신의 뜻은, 옛것을 익히고 나서, 그 옛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올바르게 유추할 수 있다는 뜻으로…….”

“아니, 온고지신 뜻 자체는 아는데, 지금 상황에서 그 말이 왜 나오냐는 겁니다.”

루핑은 염훈과의 대화가 참 힘들다고 생각했다.

“저 말고 성좌를 죽인 자가 여럿 있다면서요? 성좌를 죽였던 다른 사람들은 어땠습니까? 그들이 멀쩡했다면 그 방법을 제게도 적용하면 될 거 아닙니까?”

“……성좌를 죽인 그 플레이어들은 이미 운명치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성좌 처치에 대한 운명치를 지급하는 게 가능했죠. 그리고 그들은 운명치를 흡수하는 법을 이용해 오히려 성좌가 지닌 운명치를 흡수하기도 했지요.”

“오! 그럼 저도 그렇게 하면…….”

염훈이 기대감을 갖고 운을 띄웠지만 루핑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었습니다, 당신은. 온건하게 흡수하는 건 늦었고, 선택지에 따라야 합니다. 반쪽 남은 성좌의 모든 걸 계승하거나 포기하거나.”

“어휴, 그렇게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이죠! 관리국이 미리미리 플레이어들에게 가르쳐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후후. 당신이 할 소립니까?”

루핑은 저승사자 얼굴에 걸맞게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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