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 재난의 끝
“이상입니다.”
은혁은 다카노에게 설명을 마쳤다.
다카노는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세상에. 이제 알겠네.”
대신 염훈이 말했다.
“강은혁, 네가 재난 웨이브 5단계 보너스와 페널티를 전부 짊어지겠다고 했던 이유가 바로……!”
“맞아. 바로 이걸 위해서지.”
은혁은 시스템 메시지를 치워뒀지만, 은혁에게는 지금도 메시지가 쌓이고 있었다.
은혁은 카라미타스가 구현 가능한 모든 재난을 겪으면서 동시에 극복 중이다.
-심각한 전염병이 강은혁 플레이어의 내면에 장착된 재난의 심장 내부에서 발생했습니다!
-재난은 극도로 압축된 상태이며, 고속으로 순환하여 소멸합니다.
-강은혁 플레이어는 재난으로부터 살아남았습니다!
-운명치를 51점 획득합니다!
-심각한 대화재가 강은혁 플레이어의 내면에 장착된 재난의 심장 내부에서 발생했습니다!
-재난은 극도로 압축된 상태이며, 고속으로 순환하여 소멸합니다.
-강은혁 플레이어는 재난으로부터 살아남았습니다!
-운명치를 91점 획득합니다!
-원인불명의 지진 사태가 강은혁 플레이어의 내면에 장착된 재난의 심장 내부에서 발생했습니다!
-재난은 극도로 압축된 상태이며, 고속으로 순환하여 소멸합니다.
-강은혁 플레이어는 재난으로부터 살아남았습니다!
-운명치를 101점 획득합니다!
“후아아암.”
은혁은 하품을 했다.
카드 게임에서 파츠를 모아 무한 콤보를 발생시키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일단 무한 콤보에 시동을 걸면 그다음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간단하다.
“그, 그럼 이제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뭐가 어떻게 되긴.”
은혁은 히죽 웃었다.
“전부 계획대로 된 거지.”
은혁은 칼라미티 해머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휘둘렀고, 탈출용 포탈이 생성되었다.
“나가자.”
* * *
은혁은 막상 계획을 달성하면 그 뒤로는 심드렁해지는 타입이었다.
재난의 차원에서 무사히 귀환한 은혁과 염훈을 본 수많은 이들이 환호와 축하를 보내왔지만, 은혁은 일일이 받아주기엔 무척 피곤했다.
“뒷일은 네게 맡긴다, 염훈. 네가 왕이니까.”
그렇게 귀찮은 일은 전부 염훈에게 맡겨둔 채, 키나핀러 왕궁에 딸린 별관 1층 로비에 이불을 깔고 큰대자로 누워서 푹 쉬었다.
정확히 몇 시간을 잤는지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든 은혁은 경고 메시지를 보고 나서야 깨어났다.
-길드연합국 재판부의 경고!
-피고인 강은혁의 보석 제한 시간이 24시간 이하로 남았습니다!
-남은 시간 : 23시간 59분 59초…….
-남은 시간 : 23시간 59분 58초…….
-남은 시간 : 23시간 59분 57초…….
“후아아암.”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났다.
그리고 왕궁 알현실로 터벅터벅 걸어갔는데, 예상대로 염훈은 그곳에서 각종 과중한 업무에 치여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폐하. 국경에 산적들이 나타났습니다.”
“폐하. 연락이 십수 년간 끊어져 있던 지방 군벌들이 폐하의 정당한 권위에 대한 의문을 공개적으로 제기하고 나섰습니다. 이 발칙한 놈들을……!”
“폐하! 그보다 더 급한 것은 식량 문제입니다.”
수많은 문관, 무관들이 염훈에게 간곡한 어조로 일을 맡겼다.
다행히 염훈에게는 수많은 조언가들이 있었다.
불패불굴 길드원들 즉, 두뇌 회전이 빠른 사이오닉 블레이더 김경철이나, 뒷골목 처세에 능한 쥐 떼 두목, 케넬로스 등이 염훈을 도왔다.
또한, 왕도에 오래 머물며 사람들을 돕던 라벨리아와 로널드 그리고 그 부하들까지.
그들 모두가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염훈을 도왔다.
그리고 염훈이 배운 것은, 왕의 책무는 재난이 일어나는 도중보다, 재난 이후의 처리 때가 더 무겁다는 사실이었다.
“으으, 5분만 쉬었다 합시다.”
염훈이 자기 자신에게 [상급 치유]를 걸며 말했다.
문관, 무관, 기타 부하들이 우르르 물러났다.
“여어, 왕 노릇은 좀 어때?”
은혁이 히죽거리며 물었다.
“으으, 죽겠다.”
평소의 염훈이라면 깨어난 은혁을 보고 반가워했겠지만 피로한 탓에 왕좌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왕 언제까지 해야 하냐?”
“그냥 떠나면 되는데?”
“그래도 돼?”
“그게 왕이지.”
민주정의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면, 왕정의 권력은 왕으로부터 나온다.
염훈은 합법적인 왕이었으므로, ‘나 100층탑 깨러 간다. 알아서 잘해라.’라고 한마디 남기고 떠나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아니, 딱 한 명 있는데, 그건 책임감 넘치는 염훈 자신이다.
“너는 진짜 이상적인 왕이다, 염훈.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왕국을 보살피려 하다니. 이 세상 모든 왕이 딱 너와 같았다면 천하가 태평할 텐데.”
“칭찬해 봤자 소용없다. 진짜로, 나 어쩌면 좋냐?”
“온건하게 처리하고 싶으면 입헌군주국으로 체제 전환해.”
“그게 말처럼 쉽냐?”
“이런 말도 예전에 여러 번 한 것 같은데, 100층탑에서는 가능하지.”
염훈은 스탯창을 열고 [계약] 하는 게 가능했다.
“너무 무책임한 것 같아서 걱정이지.”
“걱정 마. 이미 이곳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 있잖아.”
라벨리아와 로널드, 그리고 루이사 시장.
그 밖에도 여러 경비대원 NPC나 시청 공무원 NPC까지.
다들 재난 속에서도 약자들을 도왔던 이들이다.
“그들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겠지. 염훈. 너는 떠나기 직전 그 정부를 승인하면 되는 거고.”
“흠. 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난다면 그게 가장 좋긴 한데.”
“그리고 네가 떠나는 게 적절한 이유 하나 더 알려줄까?”
“뭔데?”
“좋든 싫든 우린 플레이어고, 여긴 재난 테마의 스테이지였지. 그리고 미션이 제공한 재난을 모두 클리어했음은 물론, 그 재난의 원인인 성좌마저 클리어했어.”
“그래서?”
“너와 나는 플레이어로서 할 일과 그 이상의 일들을 모두 했다는 거지. 그런데도 네가 남아서 갓난애 기저귀 갈아주듯 한다면? 그건 이곳의 NPC들이 스스로 일어나는 일을 막는 일일 수도 있다는 거지.”
“으음…….”
“그러니 가장 완만한 형태로, 상징으로서의 왕권과 유사시의 통치권은 네가 오롯이 가진 다음, 실질적인 정부를 세우고 떠나는 게 최선이라는 거. 그게 내가 제안하는 바다.”
“듣고 보니 그러네.”
“라벨리아, 로널드, 루이사, 쥐 떼 두목, 마이크를 소집해서 조언을 듣도록 해. 다들 똑똑하고 현실적인 이들이니, 오히려 환영할 거다.”
“그래, 그럴게.”
염훈은 대답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퍼뜩 떠올렸다.
“아 참, 그동안 너는?”
“난 잠깐 만날 사람이 있어.”
은혁은 테일러를 찾아서 한 가지 더 설득할 일이 있었다.
그전에 염훈이 말했다.
“다카노라는 사람도 널 찾던데.”
“엥? 그 사람 아직 미궁의 차원으로 안 돌아갔대?”
“거기에 대해 할 말이 많다던데…….”
* * *
은혁은 다카노와 테일러 모두를 귀빈용 객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강은혁 플레이어!”
다카노가 벌떡 일어나 은혁에게 달려왔다.
“나를 불패불굴 길드원으로 받아주시오!”
“오오! 정말입니까? 저야 좋죠.”
“제기랄, 웃음이 나옵니까? 나는 당신 때문에 고생길이 훤히 열렸단 말입니다!”
약속대로 은혁을 도운 다카노는, 본래 있던 미궁의 성좌가 지배하는 차원으로 되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미궁의 성좌는 은혁에게 관심을 보였고, 자신의 사도인 다카노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
‘나의 사도여. 가까이서 강은혁을 관찰하고, 도우라. 그와 함께하는 것은 너와 나 모두에게 이득일 것이다.’
‘아아, 성좌시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
‘맙소사! 대답 안 했어!’
‘버린 게 아니라 잠시 대여하는 것이다. 그럼 수고하거라.’
그리하여 다카노는 은혁과 염훈의 부하가 되기로 했다.
“염훈은 바쁘므로, 충성 맹세는 제가 대신 간단히 받겠습니다.”
절차가 끝나고, 이제 테일러가 남았다.
“제가 뭘 부탁할지 아시죠?”
“모르겠는데.”
“돈 드릴 테니, 제가 부탁하는 물건의 시간 좀 한 번 되감아 주시죠.”
“거절한다면?”
“그럼 저 혼자 하면 됩니다.”
은혁은 테일러로부터 스킬을 훔쳐서, 이미 [미완성 시간 되감기]를 지니고 있었다.
미완성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하고자 하는 일을 추진할 수 있다.
‘다만 시간이 좀 애매하긴 하지.’
은혁의 보석이 끝나기까지는 24시간도 남지 않았다.
은혁이 혼자 힘으로 해내려면, 추가로 꼼수를 위한 아이템 구매로 돈과 시간을 많이 소모해야 할 터.
테일러의 도움을 받으면 그런 귀찮음이 사라진다.
“내가 널 위해 시간을 되감는다면, 너는 무엇을 주겠나?”
은혁은 이미 테일러에게 엘더 포지 사용권 1회를 제공한 바 있다.
하지만 그것은 ‘퓨전 스킬 [조건 조작 2.0]’을 발동하는 데 은혁을 돕는 대가로 제공한 것으로, 추가로 일을 시키려면 또 다른 보상을 제공해야 했다.
‘솔직히 모르겠군. 그가 뭘 요구할까?’
타임머신에 대한 야망은 분쇄되었다.
엘더 포지 사용권을 이용하더라도, 유의미한 타임머신을 완성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젠 깨달았을 터.
‘시리우스 때처럼 갑자기 염세적으로 변화하려나?’
돈과 운명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라면 좋지만, 아예 모든 의욕을 놔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테일러는 욕망을 추구할 때만 쓸모가 있는 존재였으므로.
은혁이 조마조마해하는 순간.
“경제부장관 자리를 다오.”
“……에?”
“네놈은 길드연합국을 통합한다 하지 않았나? 그럼 네놈이나 염훈이 수장이 된다고 치고, 경제를 담당할 인사가 한 명은 필요하겠지? 그 자리를 내게 다오.”
“나쁘지 않은 제안, 아니, 저희 불패불굴 길드로서는 오히려 부탁하고 싶을 정도의 좋은 제안인데…….”
은혁이 너무 좋은 조건이라 미심쩍다는 듯이 바라보자, 테일러는 허허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타임머신에 집착했던 건, 운명을 극복할 길이 과거에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이제부터는 미래에 투자를 하기로 했다.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답은 100층 꼭대기에 있을 것이라 믿고, 미래에 투자하고자 한다.”
은혁의 우려와 달리 테일러는 의욕을 완전히 놓아 버린 게 아니었다.
개인의 노력으로 타임머신을 만들어 과거로 돌아가 운명을 비틀겠다는 욕망을 버렸을 뿐.
대신 미래를 향해 투자하여 100층을 정복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그러니, 경제부장관 자리나, 그에 준하는 직위를 다오. 네놈이 만든 국가의 경제를 장악할 수 있다면, 네놈이 하려는 일에 빨대는 꽂을 수 있겠지.”
“청렴하게 하겠다고 약속한다면 가능합니다만.”
“처, 청렴……!”
뜻밖의 단어를 들은 탓인지 테일러는 휘청거렸다.
테일러는 농담으로라도 자신을 청렴하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은혁은 진심이었다.
“그럴 각오가 없다면 그냥 떠나십시오.”
“그럼 네놈에게도 손해일 텐데?”
“기억 못 하시나 본데, 저는 브라이언을 방랑자로 만들었고, 시리우스를 허무주의자로 만들었습니다.”
“으음……!”
“지금의 저는 이해득실 때문에 신념을 꺾어야 할 정도의 약자가 아니다, 라고 해두죠. 이런 제가 당신에게 청렴을 요구했고, 당신은 고민 중입니다. 제 요구가 싫다면 지금 즉시 떠나십시오.”
“……알겠다. 장기적으로 이윤을 얻으려면, 하다못해 청렴한 척이라도 해야겠지. 단! 네가 새롭게 만든 나라의 경제부장관은 나 1인이다.”
“그러시죠.”
은혁이 선선히 말하자 테일러는 흠칫했다.
“네놈, 나를 초대 경제부장관으로 삼자마자 실각시키려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