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 자유시장 길드장 슬레이버 (1)
슬레이버의 파란 눈썹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나저나 내 정체는 어떻게 안 건가? 테일러가 가르쳐 줬을 거 같진 않은데.”
“무아의 성좌, 아카식 제로로부터 들었습니다.”
실제로 은혁은 아카식 제로와, ‘심연에 가서 심연에 가서 운명과 그 운명의 법칙에 관한 정보를 가져올 것’이라는 퀘스트 계약을 맺은 바 있다.
그 대가로 길드장들의 현재 위치를 알아낸 바 있다.
그때 얻은 정보는 다음과 같다.
-자유시장 길드장 ‘슬레이버’의 현재 위치 : 50층 해안 도시의 시청. 화장실에서 손 씻는 중.
시청 건물에는 화장실이 하나뿐이다.
그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는 이는 시장 또는 시장의 최측근뿐.
이 사실과 은혁의 회귀 전 지식을 이용해 알아낼 수 있었다.
“흠, 내가 모르는 정보 획득 수단이 있었나 보군. 뭐, 아무래도 좋아.”
슬레이버가 손을 내밀었다.
은혁은 선박 교환권을 내밀었다.
슬레이버는 바로 서명을 한 뒤 돌려줬다.
“선박 창고로 가면 원하는 선박을 내줄 걸세.”
“혹시 잠수함도 있습니까?”
“하하하!”
슬레이버는 큰 웃음을 터뜨렸다.
은혁이 재미있는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은혁은 매우 진지한 표정이었고, 잠수함이 없다면 직접 만들기라도 할 기세였다.
“허, 잠수함이 꼭 필요한가? 왜?”
“음…….”
은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과장해서 말하는 걸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음, 길드연합국의 미래와 연관이 있을 정도로, 매우 크고 중대한 이유라서 쉽게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솔직히 궁금한데. 내가 알아야겠어.”
슬레이버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쩌저적!
은혁이 쥐고 있던 선박 교환권이, 순식간에 황금으로 변했다.
“우왓?! 어떻게?!”
염훈이 더 기겁했다.
수많은 강적을 상대해 온 염훈이지만 이런 식의 이적은 본 일이 없다.
은혁은 침착하게 생각했다.
‘SS+급 직업. 가치를 황금으로 변환시키는 권성.’
은혁은 빠르게 슬레이버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봤다.
정의 길드의 저스티스가 ‘정의를 부여하는 권성’이라면, 슬레이버는 그것을 부정하는 타입이었다.
정의 구현으로 생겨나는 온갖 부가 가치를 황금으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결과적으로 저스티스의 정의는 무척 공허하고 실현성이 낮은 게 되어 버렸고, 슬레이버는 부자가 되었다.
정의와 가치의 추상적인 개념을 두고 다투던 저스티스와 슬레이버는 길드 대전 때도 싸웠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는 서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길드 대전 속 길드장으로서는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과는 무승부.
그 과정에서 약해진 슬레이버를, 부길드장이던 테일러가 뒤통수를 치려 한 적도 있지만. 슬레이버는 테일러가 지닌 스킬 자체의 가치 일부를 황금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이후로 테일러의 스킬은 이전보다 더욱 심하게 황금 의존적으로 변했다.
슬레이버와 테일러는 그 이후 화해를 했다지만 그 뒤로는 사이가 서먹서먹해졌다.
그로부터 얼마 뒤, 길드 대전은 끝이 났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전쟁이 끝난 뒤, 저스티스는 스스로를 석관 속에 봉인했다.
다른 길드장들도 스스로를 봉인하거나 5층을 떠났다.
슬레이버는 100층탑의 중간 지점인 50층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신분을 세탁하는 일이었다.
막대한 업을 지닌 존재였기에, 더 이상 플레이어의 삶에 관여하면 운명치 폭풍을 맞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50층 휴양 도시에도 노숙자 NPC는 있었고, 슬레이버는 그중 한 명에게 접근했다.
‘자네, 이름은?’
‘그건 왜 묻소?’
‘말해보게. 손해는 보지 않을 테니까.’
‘블루요.’
‘멋진 이름이군.’
‘고아원에서 붙여 준 이름이오.’
블루하트 도시이다 보니, 고아 중 남자아이에게는 블루, 여자아이에게는 하트라는 이름이 붙여지곤 했다.
고아원을 나온 뒤로는 노숙자가 되었다.
슬레이버는 그 설명도 마음에 들었다.
‘황금을 10톤 주겠다. 네 NPC 권한을 바쳐라.’
노숙자 NPC 블루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렇게 했고, 테일러는 인벤토리창에서 황금을 쏟아낸 뒤, ‘NPC 자격의 가치’를 황금으로 변환하고, 그것을 왼손에 이식했다.
인위적으로 NPC 자격을 자신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그 부작용으로 인해, 기존에 갖고 있던 강력한 스킬 하나가 폭주한다는 단점이 생겼다.
‘[마이더스의 손].’
사물을 황금으로 바꿔 버리는 강력한 스킬.
NPC 자격을 얻은 대가로 그 스킬을 통제하기 어려워졌다.
슬레이버는 자조한 뒤, 그날 이후로 장갑을 끼고 다녔다.
그리고 막대한 금화로 표를 매수해서 시장이 되었다.
블루의 본래 정체성을 지니고 있던 노숙자는 막대한 금화를 얻었으나,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지독한 회의감에 빠져 그만 알콜 중독으로 죽고 말았다.
슬레이버는 신경 쓰지도 않고 시정에 집중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특수한 지역 화폐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는 한편으로 정보 조사에 나섰다.
“나는 내 손에 한 번이라도 닿은 것이라면, 가치와 황금을 변환시키는 게 가능하다네, 강은혁.”
따악!
슬레이버가 손가락을 한 번 더 튕겼다.
선박 교환권이 다시 종이로 변했다.
‘한 번 만진 무생물은 황금으로 언제든 변화가 가능하다. 그 반대도 언제든 가능하다.’
이것이 슬레이버가 지닌 고유 스킬, [황금 변환]이다.
“나는 정보를 금화로, 금화를 정보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네. 이 사실에서 자네가 무엇을 유추할 수 있을까?”
“지역 화폐를 직접 만들어 뿌리셨군요.”
“맞아.”
지역 화폐인 패킷을 이용하면 50층의 재화와 서비스를 매우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패킷에는 미세한 금가루가 들어 있다.
플레이어들이 그 패킷을 지닌 채 비밀 대화를 나누거나, 각종 거래를 하거나, 범죄 행각을 몰래 저지른다면, 그 모든 정보와 내역은 그 패킷 속에 저장된다.
패킷은 돌고 돌아 시청으로 돌아온다.
슬레이버는 장갑 낀 손으로 페킷을 대충 만져보며 [황금 변환] 스킬을 쓴다.
미세하게 붙은 황금이 정보로 변화되어, 슬레이버는 정보를 쏙쏙 뽑아 먹을 수 있었다.
그것도 시청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서.
가히 준신급 정보 활동이지만, 길드장으로서의 활동이 아닌 시장의 활동인 데다가, 대외적인 활동이 아니므로 운명치 소모 걱정이 없다.
그러니 3군주가 은밀히 스카우터를 보냈다는 정보 따위는 비밀도 아니었다.
그 스카우터들도 식사를 하거나 포섭을 할 때 패킷 화폐를 썼으므로.
스카우터들이 은혁을 포위했을 때, 그들이 갑자기 발광하여 서로를 죽인 것도 당연한 일이다.
패킷 화폐를 오래 만진 존재일수록 금가루가 체내에 축적되고, 신경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들은 돈으로 플레이어를 매수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오랜 시간 50층에 머무르는 존재였고, 포섭 과정에서 패킷화를 누구보다 많이 활용했을 터.
스카우터의 몸속에 쌓인 나노 단위의 황금 입자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50층에서 3군주 놈들에 대한 정보를 나보다 더 잘 아는 자는 없을 거야.”
“정보에 집착하시는군요.”
“집착까진 아니지만, 정보를 모으는 건 사실이지. 내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정보를 모으는 이유를 알겠나?”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알아도 아마 공감하기 어려울 거야.”
슬레이버는 중얼거리더니, 은혁을 똑바로 쳐다봤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자네가 잠수함을 바라는 이유가, 내가 모르는 엄청난 정보 때문이라니. 관심이 가는군. 자존심이 좀 상하려고 하는데? 그 정보, 얼마에 팔겠나?”
“협력.”
“음?”
“슬레이버께서 협력해주시겠다고 약속을 해주시면 알려드리죠.”
“탐욕스럽군. 자유시장 길드장인 나에게 바가지를 씌울 셈인가?”
슬레이버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하지만 단호한 눈빛으로 거절 의사를 표했다.
하지만 은혁은 바로 물러나지 않았다.
“설마요. 그게 정가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길드연합국과 관련이 있는 문제라.”
“협력이라면, 네가 길드연합국의 지배자가 되는 문제에도 지지하라는 거 아냐?”
“그건 아닙니다. 다만, 정의 길드의 저스티스 님께서는 이미 저를 지지하기로 하셨지요.”
“그놈이야 환멸에 가득 차 있던 놈이니까 당연하지. 아마 의외로 설득에 쉽게 넘어갔을 거다. 하지만 난 아냐.”
“아쉽군요. 그래서, 협력하시겠습니까?”
“모르는 일에 협력할 수는 없지. 하지만 솔직히 궁금하군. 자네가 어떤 존재인지도 궁금하고, 자네가 구상한 협력 제안 내용도 궁금해.”
슬레이버는 무의식중에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돈을 다루는 자유시장 길드장이지만, 그의 본성은 무투가였다.
“그러니, 우리 작은 게임을 하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 가면 어떨까?”
“게임이요?”
“[계약 대결] 말이야.”
“좋습니다.”
은혁은 바로 동의했다.
“계약 조건은 안 들어보나? 가령, ‘진 쪽은 이긴 쪽에게 무조건 협력해주기로 한다.’ 같은 거.”
“싸워 보시면 그게 의미가 없다는 걸 아실 겁니다.”
“허. 대단한 자신감이군.”
<계약 대결>
-목표 : 강은혁과 슬레이버는 시장실에서, 단둘이 3분간 계약 대결을 펼친다.
쌍방은 상대방을 죽여도 된다.
다른 조건은 없다.
-제한 시간 : 3분.
매우 단출한 계약 대결이었다.
“3분짜리 싸움이니, 가볍게 3분간 몸 풀고 시작하지.”
슬레이버가 몸을 풀기 시작했다.
은혁도 몸을 풀었다.
“염훈. 나가 있어.”
“괜찮겠냐?”
“당연하지.”
“상대는 길드장인데.”
염훈은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정의 길드장인 저스티스와 싸웠다가 이기지 못했었다.
그것도 은혁, 염훈, 테일러 3인의 연합 기습 공격이었는데도 그랬다.
슬레이버가 저스티스와 호각이라면, 쉽지 않은 싸움 정도가 아니라, 은혁이 이길 확률은 30%보다 더 낮을 터였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어휴, 너는 어째 부길드장이랑 싸울 때보다 더 여유만만이냐.”
염훈의 지적에 은혁은 피식 웃었다.
어느 정도는 염훈의 말이 맞다.
하지만 염훈이 모르는 사실이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슬레이버가 전력을 다하지 않을 거라는 점.
그는 결정적인 한때를 위해 힘을 모으고 있었고, 은혁과의 3분짜리 싸움에 모든 전력을 개방하진 않을 것이다.
둘째. 은혁의 강함은 스노우볼링되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져 왔다는 것.
아이템이나 직업을 하나 얻을 때마다 단순히 강함이 +1, +2가 되는 게 아니라, +10%, 20% 하는 식으로 마구 스노우볼링되고 있다.
‘내 승산이 50%보다 훨씬 높다.’
은혁은 나름 확신한 상태였기에 슬레이버의 계약 대결 제안에 바로 동의한 것이다.
그 사실을 슬레이버도 느꼈다.
‘흠. 계약 대결 제안을, 그것도 별 조건 없는 제안을 받아들이다니. 자신의 승산이 50%보다는 더 높다고 생각한다는 건가?’
슬레이버는 방심하지 않기로 했다.
끼익.
염훈이 시간 맞추어 방 밖으로 나갔다.
-대결 시작!
“덤벼봐.”
푸른 수염의 슬레이버가 손을 까딱하며 자세를 잡았다.
장갑은 벗지 않은 상태.
방심은 하지 않아도 전력을 다하진 않겠다는 뜻이다.
철컹!
은혁은 차원의 낚싯대를 꺼내 들었다.
“흐읍!”
부웅!
은혁은 낚싯바늘을 똑바로 슬레이버를 향해 날렸다.
쉬익!
슬레이버는 가볍게 피하며 은혁을 향해 쇄도해 들어왔다.
하지만 은혁은 이미 선즈 리볼버를 꺼내고 있었다.
투쾅! 투쾅!
연달아 2회 사격.
텅! 텅!
빛과 화염의 탄을, 슬레이버는 BB탄 튕겨내듯 가볍게 쳐내면서 은혁의 코앞까지 쇄도해왔다.
“[청풍폭쇄조].”
“[화염 방패].”
투콰콰쾅!
슬레이버의 손가락과 은혁의 방어 스킬이 충돌했다.
슬레이버는 손가락 전체를 이용한 조법을 활용했다.
찌르기, 치기, 뚫기, 할퀴기, 움켜쥐기를 자연스럽게 활용했는데, 마치 푸른 바람이 쇄도하는 것 같았다.
파카칵!!
슬레이버는 [화염 방패]를 통째로 뜯어냈다.
열기는 전혀 느끼지 않는 듯했다.
은혁은 은혁대로 2차 공격을 준비 중이었다.
“[블레이징 러시].”
“[황금 변환].”
번쩍!!
은혁이 발동한 스킬의 화염과 돌진력이 죄다 금화로 변해 버렸다.
촤르르르르륵……!!
그야말로 몸에서 금을 쏟아낸 격이라 은혁은 어이가 없었다.
‘이것이 [황금 변환]! 알면서 당하는 건데도 어이가 없네.’
은혁의 [패링]처럼 타이밍을 맞춰야 하는 스킬이지만, 그래도 위력은 엄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