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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모든 직업-305화 (305/434)

305화 : 자유시장 길드장 슬레이버 (3)

은혁은, 슬레이버가 100층탑을 나가는 출입구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을 숨기지 않았다.

그 상태로 슬레이버를 보며 생각했다.

‘여기에서의 판단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으니까.’

지금은 50층에 어울리는 엄청난 분기점이었다.

모든 걸 대비하는 회귀자 기준에서도, ‘탈출구’ 관련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다.

“더 듣겠나?”

슬레이버도 긴장한 은혁의 태도를 느끼며 물었다.

“네.”

“출입구는 말 그대로 100층탑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해주는 문일세.”

“소문은 저도 들은 바 있습니다.”

“단순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라네. 나도 그 출입구를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출입구 관련 히든 미션은 이미 뚫어 놓은 상태지.”

50층에서 오랜 세월 지내다 보면, 뱃사람 NPC들로부터 크고 작은 전설을 전해 들을 수 있다.

대부분 배경 설정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그중에는 진짜가 있었다.

‘노쇠한 뱃사람’이라는 NPC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히든 미션이다.

그 히든 미션은 100층탑의 출입구의 존재가 사실임을 입증해주었다.

히든 미션창 자체가 거짓말일 가능성은 낮다.

“어떤 히든 미션인지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으음….”

슬레이버는 잠시 고민하다가, 히든 미션창을 실제로 보여주는 게 은혁을 설득하기 더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좋아. 한번 보게.”

<54층 히든 미션 : 해저 동굴의 비밀>

-목표 : 해저 동굴에는 비밀 출입구가 존재한다. 100층탑 바깥으로 도중에 나갈 수 있는 비밀 출입구를 찾아낼 것.

-성공 시 보너스 : 없음.

-실패 시 페널티 : 없음.

-제한 시간 : 없음.

-주의사항 : 출입구의 위치를 알아도, 그 출입구를 열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들이 필요함.

친절하게 주의사항까지 가르쳐 주는 히든 미션이었다.

그래서인지 신뢰도가 더욱 높아졌다.

“이 히든 미션을 얻은 이후로, 나는 더더욱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지.”

“출입구를 통해 100층탑 밖으로 나가고 싶으십니까?”

“자넨 안 그런가?”

“적어도 현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은혁이 고개를 들어 올려, 부서진 천장 너머 하늘을 노려봤다.

아직은 중간 탈출구가 아니라 100층탑의 정상을 노려볼 때였다.

“소문대로 한결같군. 내가 나가고 싶은 이유는 지배하고 싶기 때문이지.”

“지배……?”

“스킬의 힘으로 지구인들을 다 죽이고 협박하겠다는 뜻은 아니야. 경제의 힘으로 지배하겠다는 거지. 예를 들어볼까? 100층탑에서는 힐링 포션이 싸지?”

“네.”

시세에 따라 다르지만, 은혁이 쓰는 일반 힐링 포션은 비싸도 몇 골드면 산다.

한국 돈으로 환산했을 때 20만 원 내외면, 잘린 팔을 순식간에 붙이는 치료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지구에서는 힐링 포션 한 병의 가격이 얼마나 할까?”

“아무리 싸게 잡아도, 한국 돈으로 수천만 원 정도겠죠. 1억이나 10억에 팔아도 살 사람은 살 겁니다.”

검증 가능한 힐링 포션을 지구에 딱 한 병 판다고 가정했을 때, 10억에 팔아도 살 사람은 살 것이다.

“달러로 따지면 100만 달러 정도인가? 나도 그쯤 될 거라 생각하네.”

힐링 포션이 워낙 흔하다 보니 플레이어들은 그 가치를 모른다.

사지 절단, 심각한 장 출혈, 신경 쇠약, 무기력증, 어지럼증, 혈액 부족 등등.

심지어는 위의 증상 전부가 동시에 일어나도, 힐링 포션 두세 병만 마시면 대부분 회복된다.

“힐링 포션 장사만 해도 지구 경제를 장악하는 건 간단한 일이지.”

절대 과장이 아니다.

힐링 포션이 지구에 유통되기 시작하면, 제약 회사의 절반은 망할 거다.

류머티즘성 관절염 환자를 진료하는 내과에서도, 교통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진 환자를 관리하는 중증외상센터에서도, 일단 힐링 포션을 먹이거나 희석해서 혈관 주사를 놓을 테니까.

“힐링 포션은 시작일 뿐이지. 간단한 마법 아이템들을 봐. 동력 없이 비행이 가능한 망토, 충격파를 만드는 망치, 건전지 없이 작동하는 야간 투시경, 방탄복보다 우수하고 수리가 가능한 가죽 갑옷, 연료 없이 화염을 만드는 나이프 등등.”

마법 아이템들은 위력이 약한 것만 해도 사실은 엄청난 것들이다.

지구에도 라이터, 비행기, 야간 투시경 등이 있다지만, 대부분 연료나 동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마법 아이템은 외부 동력이나 연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더 대단한 점은, 굳이 직업이 마법사가 아니라도 누구나 자연스럽게 활용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플레이어들은 마법 아이템을 자연스럽게 쓰고 있지만, 작동 원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물리학의 꿈이라 불리는 준영구 기관들이 넘쳐난다.

“내 본래 목적은 100층탑 내부의 경제를 지배하는 것이었지. 길드연합국을 만든 것도, 안정적인 경제 플랫폼을 만들기 위함이었고. 하지만 길드 대전을 통해 나도 나름의 깨달음이랄까, 반성 비슷한 걸 했다네. 그리고 목적을 바꾸었지.”

슬레이버가 바깥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100층탑 내부의 좋은 물건들을, 100층탑 바깥 즉, 지구에 싼값에 넘기는 것. 어때? 자유시장 길드의 길드장다운 원대한 목표 아닌가?”

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가능하다면 모두에게 매우 이로울 것이다.

동시에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가령, 힐링 포션을 싼값에 지구에 넘겨서 환자를 치료하는 건 좋은 일이지. 하지만 그래서 제약 회사가 줄줄이 망한다면?’

얄궂게도, 자유시장 길드장인 슬레이버는 지구와의 경제 교류가 가져다줄 충격에 대해서는 크게 고려하고 있지 않은 듯했다.

‘아니면 공리주의적으로, 불이익보다 이익의 총량이 더 크다고 생각하고 넘어간 거거나.’

그래서 은혁은 그런 부분은 지적하지 않고, 다른 부분을 지적하기로 했다.

“출입구가 열리면, 100층탑 내부의 플레이어 중 대다수는 나가고 싶어 할 텐데요.”

“뭐, 그렇지. 그러니 해외 출국용 비자를 만들 듯이, 심사를 거쳐야겠지. 강력한 스킬을 지닌 위험인물이 함부로 100층탑 밖으로 나가려고 하면 큰일이니까.”

은혁은 피식 웃었다.

냉소적인 의미가 담긴 웃음을 본 슬레이버도 피식 웃었다.

“알아. 길드 대전의 대량 살인자인 내가 할 소리가 아니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길드 대전 당시, 슬레이버가 직접적으로 죽인 자는 많지 않다.

길드장 중에서는 저스티스 다음으로 적은 수의 플레이어를 죽였다.

하지만 수백 명 이상 죽였고, 많은 이들을 돈으로 조종해서 병사로 썼기에 직간접적으로 그가 죽인 이를 다 합하면 수천 이상일 것이다.

전쟁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야 있겠지만, 그것은 누워서 침 뱉기나 다름없다.

길드연합국의 최우선 주권은 7대 길드의 길드장에게 있으므로.

그 전쟁을 일으킨 것도, 가장 많이 날뛴 것도 전부 길드장의 책임이니까.

“그나마 정의 길드의 길드장 저스티스는 책임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를 관짝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반면에 당신은? 책임을 전혀 지지 않았을 텐데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출입구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왜요?”

“왜냐니. 100층탑에는 제대로 된 법도 없고 재판 서비스도 막장이지. 왜겠나? 법치 사회와 단절된, 게임과 현실이 모호한 공간이기 때문이야.”

“하지만 바깥과 연결이 되면 법치 시스템이 되살아날 거다?”

“그렇다네. 내 희망 사항이긴 하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죠. 오히려 바깥의 법치 시스템이 박살 날 수도.”

“비관적이군.”

“현실적이죠.”

은혁은 어릴 적에 부모님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은혁의 부모님은, ‘공부 잘하는 애와 어울려 놀아라.’라고 했었다.

공부보다 게임을 좋아하느라 바빴던 은혁이, 공부 잘하는 모범생과 놀면 본받아서 공부를 잘하게 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은혁은 그렇게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였다.

은혁은 중학교 2학년 때 공부 잘하는 친구와 함께 프라모델 클럽 활동에 열중했고, 중간고사 하루 전날에도 한정판 프라모델을 구하러 명동까지 전철을 타고 갔었다.

당연히, 은혁이 그 모범생 수준으로 똑똑해지긴커녕, 그 친구의 학업 성적이 은혁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결국, 그 모범생 친구는 중3 때 강남으로 급하게 전학을 가서 작별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은혁이 그 이야기를 해주자, 슬레이버는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렇다면 출입구를 여는 일에 반대하는 쪽인가?”

“……하하하!”

“왜 웃지?”

“그냥 제 처지가 재미있어서 말입니다.”

은혁은 얼마 전 토론 미션을 겪었다.

그때, 토론 주제는 다음과 같았다.

‘플레이어는 100층탑의 정상을 향해 오른다. 100층탑을 중간에 탈출할 권리를 얻은 경우, 그 권리를 이용하여 중도에 탈출하는 것이 옳은가 또는 그른가.’

그때, 은혁은 나가는 게 낫다고 했었다.

하지만 슬레이버와 대화하고 있는 지금은 정반대의 논리를 펼치고 있었다.

슬레이버 또한 아래층에서 일어나는 굵직한 사건들은 다 전해 들었기에 은혁의 이 태도가 의아했다.

“자네의 입장이 바뀐 건가?”

“아니요.”

“그럼 왜 반대하는 거지?”

“반대라기보다는 보류라고 해두죠.”

“왜?”

“그야 제가 길드연합국을 일통하지 못했으니까.”

안정되지 않은 길드연합국에는 별별 플레이어가 다 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해피나 피스메이커 같은 자들도 있지요. 막상 출입구를 열었는데 그런 이들이 가장 먼저 지구에 나가서 깽판을 치면 어쩝니까?”

“흠.”

“즉, 100층탑 출입구를 통해 중간에 나가는 것 자체에는 동의합니다. 단, 그것은 저와 염훈이 길드연합국을 통합하고 장악한 이후에, 질서에 맞추어 할 일이겠지요.”

“……그 질서는 자네만의 질서겠지.”

“물론입니다. 그럴 권리가 있죠. 길드연합국 통합길드장의 권한은, 지금의 길드장들 일곱 명이 나누어 갖고 있는 것을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할 테니까요.”

“하아……!”

슬레이버는 파란 수염을 손으로 쓸며 장탄식을 했다.

그는 은혁에게 제안하고 싶었던 말들을 모조리 차단당해 버렸다.

“사실, 나는 자네가 절대 열쇠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전해 들었다네.”

은혁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정보력도 정보력이지만, 계약 대결을 하면서 ‘나한테 지면 절대 열쇠를 내놔.’라는 조건을 걸지 않은 것이 대단했다.

슬레이버는 참을성이 상당한 존재였다.

“나는 자네에게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네. ‘내 정보와 자네의 절대 열쇠를 이용해, 힘을 합쳐 100층탑의 출입구를 열어 버리세나.’라고 말이야.”

슬레이버의 말에 은혁은 피식 웃었다.

은혁은 자기가 통합길드장이 되기 전까지는 안 된다고 못을 박았으니까.

“한데 그게 거절당한 거군.”

“보류입니다.”

“당장은 거절이란 거 아닌가.”

“당장은 그렇죠. 하지만 거래의 여지는 있습니다.”

“거래?”

“그 히든 미션을 파시죠.”

“허! 내가 자유시장 길드장인 걸 알고 하는 소린가?”

“도저히 팔기 싫으시다면 함께 그 히든 미션을 깨는 건 어떨까요?”

은혁은 다시 협력을 요청했다.

“흐음.”

슬레이버는 이미 한 번 협력을 거절하고, 조건 없는 [계약 대결]을 벌였다.

결과는 무승부였지만 은혁의 가치는 충분히 증명되고도 남았다.

‘사실은 내 쪽에서 부탁을 해야 하지. 강은혁은 출입구의 존재도 이미 알고 있는 데다가, 절대 열쇠까지 쥐고 있으니까.’

“히든 미션을 함께하는 거라면 오히려 바라던 바지.”

마침내 타협점을 찾게 되어 기쁜 듯이 말했다.

부드럽게 협상을 마무리하려는 순간.

“단.”

은혁은 딱 잘라 선을 그었다.

“비밀 출입구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까지만 함께할 겁니다. 그 비밀 출입구를 당장 열겠다는 건 아닙니다.”

은혁에게는 [그림자 도약]과 [그림자 터널]이 있었기에, 일단 특정 장소에 직접 가보는 일이 중요했다.

한번 가본 장소는 나중에도 쉽게 갈 수 있었으므로.

슬레이버는 은혁이 지닌 절대 열쇠로 아예 출입구까지 열어 젖히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내가 자네에게 절대 열쇠를 달라고 강요할 순 없겠지.”

“물론, 팔라고 해도 안 팝니다.”

“하는 수 없지. 그 히든 미션에 적힌 대로 출입구까지 가는 일까지만이라도 협력하세.”

슬레이버는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모든 밑천만 다 드러내고 말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은혁은 표정에 속지 않았다.

‘역시. 모든 정보를 주진 않는군.’

히든 미션을 공유하겠다는 제안에 흔쾌히 동의한다는 건, 슬레이버가 아직 히든 미션을 클리어하지 못했다는 것.

여태 클리어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것.

그렇기에 은혁의 도움을 내심 바라고 있었다는 의미다.

‘히든 미션 자체가 어렵거나… 아니면 더 큰 장애물이 있거나.’

은혁은 짐작할 수 있었다.

아카식 제로에게서 자유시장 길드장의 위치에 관한 정보를 얻을 때 평화 길드장 피스메이커에 대한 정보도 같이 얻었었다.

‘-평화 길드장 ‘피스메이커’의 현재 위치 : 50층 해안가의 어느 휴양 호텔에서 휴식 중.’

은혁과 평화의 미궁에서 싸운 뒤, 피스메이커는 50층으로 떠났다.

50층은 슬레이버가 지배하는 영역.

이곳에 피스메이커가 있다는 것을 슬레이버가 모를 리가 없다.

피스메이커 또한 길드장이므로 슬레이버가 지배하고 있음을 알고 있을 터.

그런데 둘은 아직 싸우고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실력은 아마도 호각이겠지. 각자 자신에게 유리한 변수를 기다리고 있었을 터.’

은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변수는 아마 나겠지.’

은혁은 이번에도 얼른 마음을 추슬렀다.

100% 이득만 보려 해서는 안 된다.

딱 절반 정도만 이득을 볼 생각이었다.

‘슬레이버와 피스메이커를 적절히 이용해서 두 사람을 모두 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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