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 바닷물 아래로 (1)
-54층 : 끝없는 바다.
54층은 42층의 다차원 교차로와 비슷했다.
이론상 무한하게 펼쳐진 공간이다.
차원의 벽이 얇은 탓에, 54층의 바닷물은 다차원 성계로 흘러가거나 흘러왔다.
덕분에 기이한 광경을 많이 목격할 수 있었다.
외차원의 거인이 바다 위를 걸어다니는가 하면, 별빛을 입으로 받아먹는 거대한 소용돌이형 괴수가 헤엄을 쳤다.
드워프를 닮은 이종족이 셔틀을 타고 와서 여기가 어디냐고 묻기도 하고, 바다를 걸으며 다차원 성계의 종말을 예언하는 하플링이 다리에 쥐가 나서 빠져 죽기도 한다.
54층의 바다는 이미 신화적인 바다였다.
이토록 위험한 탓에 54층 구간은, 오히려 플레이어가 많지 않았다.
촤아아악…….
촤아아악…….
은혁과 염훈, 슬레이버도 어느새 입을 다물고 선박이 바다를 가르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그때, 미션창이 떴다.
<54층 메인 미션 : 무한한 바다 탐험>
-목표 : 54층으로 구분되는 무한한 바다를 탐험하여,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곳을 새롭게 찾아낼 것.
-성공 시 보너스 : 찾아낸 새로운 장소에 따라 다름.
-실패 시 페널티 : 어떤 페널티를 줄 것인지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지고의 위상 또는 성좌가 결정한다.
-제한 시간 : 3일.
“쉬운 건지 어려운 건지 모를 미션이네.”
염훈이 중얼거린 순간.
펑!
펑!
허공에서 탐험 지도가 나타나, 은혁과 염훈의 손에 쥐어졌다.
탐험 지도는 일종의 자동 기록형 지도로, 게임 속 지도에 가까웠다.
플레이어가 이동하면, 어둡게 표시되어 있던 지역이 자동으로 드러나는 식이다.
탐험 지도에는, 다른 플레이어에 의해 이미 탐사가 끝난 장소가 표시되어 있었다.
“켁! 아까 했던 말 취소! 늦게 할수록 겁나 어려운 미션이잖아, 이거!”
염훈이 혀를 내둘렀다.
탐험 지도에는 이미 밝혀진 장소가 빼곡할 정도로 많았다.
“3일 거리에 있는 모든 장소는 죄다 밝혀졌잖아!”
그랬다.
이미 다른 플레이어들이 죄다 새로운 장소를 밝혀냈다.
‘특히 3군주 새끼들이 와서 클리어해댔지.’
이번 54층 메인 미션도 반복 가능한 미션이었다.
지도를 확대해서 보면 누가 새로운 지역을 밝혀냈는지 나오는데, 죄다 3군주인 카인, 인치, 미치오의 세력들이다.
3군주의 수하들이 일부러 반복 클리어해서, 길드연합국에서 올라오는 다른 플레이어들이 클리어하기 어렵게 만든 것이다.
“염려 말게, 염훈 길드장. 우리가 갈 곳이 남아 있으니까.”
“아, 뭔지 알겠네요.”
염훈이 비싼 선박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배는 엄청난 엔진이 달려 있는 배죠? 그러니까 엄청난 초스피드로 이동해서 3일 거리 밖에 있는 신규 장소로 파바박 순식간에 이동한다든가…….”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긴 하지. 하지만 나와 강은혁 부길드장의 노림수는 다르지.”
슬레이버는 슬쩍 난간 바깥의 깊은 바다를 내려다봤다.
“우리는 저 아래에 숨겨진 곳으로 갈 예정이라네. 나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지.”
그랬다.
사실 은혁이 처음에 잠수함을 빌리려 했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우린 숨겨진 해저 동굴로 갈 거야.”
“맙소사.”
염훈이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막 갇혀서 영원히 못 빠져나오면 어쩌지?”
염훈은, 어두컴컴한 지하 동굴에 갇힌 채 마구 차오르는 바닷물에 어푸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자 숨이 막혀 왔다.
“걱정 마, 염훈. 재수 없으면 그걸 걱정해야 하지만, 날 믿어.”
은혁은 자신의 그림자를 터널처럼 만들어 보였다.
“아, 맞다. [그림자 터널]이 있었지.”
“그래. 그러니 갇힐 걱정은 별로 할 필요 없어.”
은혁과 염훈이 대화하는 동안, 슬레이버는 선박의 선미에 부착되어 있던 해저탐수용 잠수함을 해제했다.
풍덩!
잠수함은 반쯤 가라앉았고, 위의 해치가 열렸다.
“자아, 이제 모두 탑승하세나.”
그리고 그들은 잠수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레저용 잠수함이라 그런지 작은 강화 창문이 몇 개 있었고, 염훈은 그 창문으로 바깥을 바라보며 신기해했다.
하지만 1분도 안 되어서 빛이 통하지 않는 캄캄한 바닷속 깊이 가라앉자, 염훈은 입을 닫았다.
“슬슬 창문을 막겠네.”
슬레이버는 [마이더스의 손]으로 창문을 황금으로 만들어 막아 버렸다.
“으으.”
염훈은 가벼운 폐소공포증을 느꼈고, 스스로 [정화] 스킬을 걸어서 물리쳤다.
뚜드드드…….
잠수함의 어디선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괜찮은 겁니까?”
은혁이 물었다.
“레저용으로 만든 잠수함이지만 괜찮을 거야. 정 불안하면 황금으로 바꿔서 더 보강하도록 하지.”
쩌저적…….
슬레이버가 잠수함에 손을 대자, 일반 황금이나 강철보다 훨씬 단단한 금속으로 코팅되었다.
“피곤하면 자도 된다네. 한참 아래로 내려가야 하니까.”
“얼마나 아래입니까?”
“글쎄. 나도 히든 미션에 나온 좌표만 받고 실제로 가는 건 이번이 처음일세.”
슬레이버가 대충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슬레이버는 히든 미션 전용 버프와 아이템으로, [좌표 시야]와 [해저 터널 전용 나침반]을 얻었는데, 전부 아래쪽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꽤 내려온 것 같은데도 방향은 아래만 가리키고 있다네. 차원 경계면까지 가야 할지도 모르겠어.”
그때였다.
-성좌, 리바이어던이 경고를 보내옵니다!
모두가 흠칫했다.
-성좌, 리바이어던은 금지 구역을 침범하는 플레이어들에게 엄중히 경고합니다!
-즉시 돌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음…….”
세 사람 모두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세 사람 모두 성좌의 화신과도 싸워 봤고, 특히 은혁과 염훈은 재난의 성좌를 죽이고 힘의 절반까지 흡수한 적도 있다.
하지만 잠수함 속에서 듣는 경고는 무척 위압적이었다.
-성좌, 리바이어던은,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꽤나 적나라한 경고군.”
슬레이버가 히죽 웃으며 말했고, 은혁도 웃었다.
“바꿔 말하자면, 저희가 가는 이 방향이 맞다는 뜻이겠지요.”
“어떻게 할까?”
“일단 가보죠.”
은혁의 회귀 지식 속에도, 성좌 리바이어던에 관한 지식은 거의 없었다.
막연히 굉장히 강력한 성좌일 거라 짐작할 뿐.
우우우우웅……!
잠수함은 잠항을 계속했다.
그 순간.
꾸궁……!
뭔가에 부딪힌 듯했다.
“으악! 돌인가?!”
염훈이 호들갑을 떨자 슬레이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물일세. 엄청 무거운 물.”
“그런 게 어딨어요?!”
“여기.”
물의 무게는 기본적으로 다 같다고 하지만, 리바이어던은 비중이 다른 물을 만드는 게 가능했다.
꾸궁!
꾸구궁!
바위처럼 무거운 물의 덩어리를 밑에서 위로 자꾸 쏘아 올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잠수함은 흔들거렸다.
슬레이버는 나름 열심히 잠수함을 조종했고, 몇 개는 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은혁은 한계라고 생각했다.
“일단 작전상 후퇴를 해야 할 것 같군요.”
은혁이 말했다.
“하지만 한번 물 위로 올라가면 다시 내려오긴 더 힘들 걸세.”
“성좌가 어떤 작자들인지 알잖습니까?”
“무슨 의미인가?”
“슬레이버 님이 열심히 물 덩어리를 피하면, 성좌는 더 약이 올라서 다음번에는……!”
콰콰쾅!!
은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물 밑에서 거대한 뭔가가 솟구쳐 올라왔다.
“해류가 분수처럼 치솟아 오르는 건가!”
뚜드드드득……!
잠수함의 아래쪽 몸체가 찌그러졌다.
부글부글부글부글……!!
프로펠러가 헛돌고, 엔진에서 심상치 않은 거품이 흘러나왔다.
“큭! 자네 말이 맞았군. 일단 후퇴해야…….”
일부러 후퇴할 것도 없었다.
밑에서 올려 보내는 해류는 순식간에 수면 위로 잠수함을 튕겨 올렸으니까.
“으악!”
첨벙!
성좌의 분노에 당한 것치고는 그래도 무사히 올라왔다.
“으윽. 머리 아파.”
염훈은 [광역 치유] 스킬을 모두에게 걸어줬다.
잠수함이 급하게 튕겨 올라오느라, 안에 있던 세 사람도 잠수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성좌, 리바이어던이 큰 소리로 비웃습니다!
“허참.”
슬레이버는 멋쩍게 웃었다.
“이런 경우도 있군요. 하하하!”
은혁도 웃었다.
“지금 웃을 일이야?!”
염훈은 화를 냈다.
이대로 가면 슬레이버의 히든 미션을 깨느냐 못 깨느냐가 아니라, 은혁과 염훈의 메인 미션이 실패다.
“진정해라, 염훈.”
“…….”
“왜, 왜 날 그렇게 봐?”
“내가 화를 내면서 ‘야! 진정하게 생겼어?!’라고 하면, 너는 ‘응. 이 상황도 다 예상 범주 안이니까.’라고 말할 거지?”
“허참. 이젠 패턴을 아예 다 외웠구나?”
“그러니 화를 내지 않겠다.”
염훈은 팔짱을 턱 낀 채,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지켜보겠다는 포즈를 취했다.
그걸 본 슬레이버는 낄낄 웃었다.
“자네들이 어떤 식으로 역경을 해쳐 왔는지 알 만하군.”
“아는 척하지 마시죠. 나랑 은혁이랑 얼마나 고생했는지 본 것도 아니면서. 하여간 이 일은 당신 책임이니까 당신이 알아서 하시죠.”
염훈이 그답지 않게 마구 틱틱거렸다.
슬레이버는 머쓱해져서 은혁을 돌아봤다.
“이번에는 우리 둘이 힘을 합쳐야겠군요.”
“음, 그러지.”
은혁과 슬레이버가 몸을 풀기 시작했다.
“알았다!”
염훈이 답을 알았다는 듯이 손을 들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서, 고장 난 잠수함을 더 튼튼하게 만들려는 거지?”
은혁의 스팀펑크 메카닉로서의 스킬과 슬레이버의 [마이더스의 손]을 연계해서 아주 빠르고 튼튼한 잠수함을 만들어 돌파한다…… 라는 것이 염훈의 예상이었다.
하지만 은혁과 슬레이버는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다네.”
타앗!
슬레이버는 단숨에 하늘 높이 튀어 올랐다.
그러더니 [황금여래신장]을 4회 연속 발동했다.
번쩍!!!
4회 발동되자, 황금의 격벽이 4개 생성되었다.
막대한 양의 황금이므로 당장 가라앉아야 했지만, 슬레이버는 [허공섭물]의 힘으로 잠시 머무르게 했다.
“흡!”
슬레이버는 그 격벽 사이에 존재하는 황금을 향해 [마이더스의 손]을 발동한 관수를 찔러 넣었다.
촤르르르륵.
바닷물이 황금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50m가 넘는, 최소한 50㎥에 달하는 황금 정육면체가 생성된 것이다.
“흡!”
은혁은 그 황금 정육면체 위에 스킬을 발동했다.
“퓨전 스킬 [그림자 분신 양산]!!”
파앗! 파앗! 파앗!
파앗! 파앗! 파앗!
최대 108체에 달하는 [그림자 분신 5.0]이, 황금 정육면체 위에 양산되었다.
그 그림자 분신들이 동시에 스킬을 썼다.
“[거대화]!!”
퍼펑!
퍼퍼펑!
여기저기서 폭음이 일어났다.
그림자 분신 자체가 반발력을 못 이기고 터지는 소리.
그리고 황금 정육면체가 기형적으로 부풀어 오르며 스스로 터지는 소리였다.
퍼펑!
퍼버버벙!
하지만 터지건 말건 분신들은 [거대화] 스킬을 마구 써댔고, 황금의 정육면체는 아주 기형적인 기하학 건축물에 가까운 무언가로 변했다.
“세상에, 내가 지금 뭘 보는 거야?”
염훈은 경악했다.
바다 위에 금속 건축물 덩어리…… 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게 갑자기 생겨났으므로.
“다시 올라탈 시간이군!”
슬레이버는 이번에는 모두가 탄 선박을 통째로, 부풀어 오르는 황금 덩어리 속으로 밀어 넣었다.
“으악?!”
염훈은 놀랐지만, 부풀어 오르는 황금은 마치 거품처럼 선박을 통째로 삼켰다.
그리고.
꾸르르르릉……!
황금 덩어리는 통째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내부에 산소는 충분하니 염려 마시게.”
슬레이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진짜 미친 발상이네.”
염훈은 기막혀하며 감탄했다.
그동안 은혁과 슬레이버는 덕담을 주고받았다.
“역시 길드장급은 화끈하군요.”
“하하! 자네야말로. 아주 능숙한데? 그냥 부피만 뻥튀기시키는 건 쉽지만, 질량까지 같이 거대화시키는 건 어려운데.”
“아, 일전에 한 번 해봤거든요.”
은혁은 몬스터 룸 관련 층에서 노숙자들을 돌봐주던 사무엘레에게 금화를 [거대화] 스킬로 키워서 준 적이 있었다.
사소한 경험이지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때였다.
-성좌, 리바이어던이 다이렉트 메시지를 보내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ES/NO
어째선지 은혁을 향해 메시지가 왔다.
“흠, 일단 받아보겠습니다.”
은혁이 YES를 선택한 순간.
-이 어리석은 놈들!!!
성좌는 바로 화를 냈다.
-너희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기는 하는 것이냐!
“그냥 질량으로 밀어붙이는 중입니다.”
은혁은 공손히 말했고, 슬레이버는 웃음을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