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 100층탑의 출입구
“느껴지는가, 강은혁? 여긴 진짜일세.”
“네.”
은혁은 [고고학 숙련] 스킬을 지니고 있었다.
해저 동굴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이곳이 100층탑의 초창기부터 존재한 곳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통로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
아이보리색 실내장재로 마감된 통로.
아무리 봐도 자연적인 동굴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통로다.
“제대로 왔군.”
“혹시 모르니 [함정 탐지] 스킬을 건 채로 가죠.”
-그럴 필요 없다.
성좌, 리바이어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보니 통로 곳곳에 스피커가 달려 있었다.
즉, 성좌는 다이렉트 메시지로 말하는 게 아니라, 본체가 스피커를 통해 직접 말하고 있는 것이다.
“풉.”
은혁은 뜬금없이 웃었다.
“뭐가 웃김? 이 상황에서?”
염훈이 어이없어하자, 은혁은 쿡쿡거리며 설명했다.
“성좌의 본체가 마이크 잡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갑자기 웃겨서.”
“전혀 안 웃긴데.”
-그렇다. 전혀 안 웃기다.
성좌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염훈도 웃었다.
“원래 안 웃겼는데 갑자기 웃겨졌어. 푸하하하!”
“그치? 크크크.”
자기네들끼리 웃는 염훈과 은혁을 내버려두고, 슬레이버가 한 걸음 걸어갔다.
“위대한 성좌, 리바이어던이여. 당신의 입장도 이해하오. 보아하니 여긴 관리국이 만든 일종의 기밀 구역인 것이겠지?”
-그러하다.
“허락 없이 들어온 점은 사과드리지만, 우리는 플레이어요. 플레이어는 미션에 도전하는 자. 우리는 정당하게 히든 미션을 얻어서 온 자들이오.”
-알고 있다. 나 또한 계약대로 행하고 있을 뿐이다.
“계약? 관리국과 계약을 맺었소?”
-계약이라.
리바이어던의 목소리에 회한이 어렸다.
-비슷하다고 해두지. 하여간 자격 없는 자들은 절대 들여보낼 수 없다.
“허허. 만약 우리가 억지로 들어간다면?”
슬레이버가 슬쩍 도발하듯 물었다.
-그대들이 보고 있는 통로는 그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길다. 한참을 걸어야 내가 있는 ‘데이터 룸’에 도달할 수 있을 터. 나는 그것을 보고만 있을 생각이 없다. 분명히 경고한다.
성좌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그 통로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온다면, 설치해 둔 함정을 이용해 그대들을 죽이리라. 함정이 안 통한다면, 그때는 통로를 부수는 한이 있어도 그대들을 막아서리라.
그러자 이번에는 은혁이 나섰다.
“만약 자격이 있다면?”
-무슨 의미인가?
“이런 의미지요.”
은혁은 절대 열쇠를 꺼냈다.
-그, 그것은!
“이 열쇠가 있다면 당신이 수호하고 있는 출입구 또한 열 수 있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것으로 뭘 열 수 있는지도 다 아는 모양이군. 하지만 함부로 열어서는 안 된다.
“압니다.”
-안다고?
“오늘은 출입구를 열려는 게 아니라, 그 출입구까지만 가려는 겁니다. 우리가 받은 히든 미션 내용도 출입구를 찾아내는 것까지고요. 맞죠, 슬레이버 님?”
“맞네. 나로서는 아예 온 김에 출입구까지 열어 버렸으면 하지만, 강은혁이 원치 않는다면 그 문을 여는 건 다음 기회로 미뤄둬야겠지.”
슬레이버는 아쉬움을 숨기진 않았지만 과하게 요구하진 않았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게, ‘오늘 황금알을 낳으면 어떨까?’ 하고 재촉할 수는 있어도, 그 이상으로 강요하지는 않을 정도의 인내심과 지성은 갖추고 있었으므로.
-좋다, 강은혁 플레이어. 그대의 짐작대로, 나는 단순히 바다를 지키는 성좌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인, 100층탑과 바깥 세계를 연결하는 비상용 출입구를 수호하는 자다.
진실이 밝혀졌다.
슬레이버는 부르르 떨었고, 은혁은 침착하게 들었다.
-또한 그대는 진실로 자격을 지닌 자로다. 그러므로 출입을 허락한다.
“이 사람들도 같이 가도 됩니까?”
-안 된다.
칼같이 거절했다.
“그렇다는군요.”
은혁은 염훈과 슬레이버를 돌아봤다.
“조심해서 다녀와라.”
염훈은 그렇게만 말했지만 슬레이버는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은혁은 얼른 이렇게 말했다.
“안에서 보고 들은 건 가급적 전부 전해드리지요.”
“으음, 부탁하네.”
“아, 아니다. 이렇게 하면 되겠네. [메탈 서전트 소환].”
파앗!
메탈 서전트와 은혁은 교신이 가능했다.
[텔레파시] 스킬을 얻은 이후로는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매우 효율적인 교신이 가능했다.
“제가 보고 들은 걸 그대로 메탈 서전트에게 전송하겠습니다.”
은혁이 슬레이버와 스피커를 향해 말했다.
“으음. 마음은 고맙지만, 리바이어던이 그걸 허락할 것 같진 않군.”
슬레이버가 의기소침하게 말했지만.
-…….
의외로 리바이어던은 별 반응이 없었다.
“묵인하는 것 같습니다, 주인님.”
메탈 서전트가 말했다.
은혁은 씨익 웃은 뒤 통로 안으로 걸어갔다.
스르륵.
끝없이 펼쳐진 것 같은 통로였지만 실제로는 투명한 막이 처져 있었다.
은혁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 * *
웅웅웅웅……!
삐빅…….
오래된 서버실에 들어왔을 때와 비슷한 기계음.
주변에는 은혁이 스팀펑크 메카닉의 스킬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기계 장치들이 있었다.
기계 장치들은 마치 도서관의 서가처럼, 서버실의 서버들처럼 일정 간격으로 세워져 있었다.
-내가 관리하는 차원, 데이터 룸에 온 것을 환영한다.
리바이어던의 목소리는 사방에서 들려왔다.
‘데이터 룸?’
딱 와닿지 않는 명칭이었다.
“여긴 뭐 하는 곳입니까?”
-비상 출입구 사용자의 출입 시 동기화를 하는 곳이다. 필요한 데이터가 많기에, 외부와 단절된 데이터 룸이 필요하지.
“출입 시 동기화?”
-그대는 알 것 없다. 그대의 목적은 출입구를 찾는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저기를 보아라.
파앗!
한쪽 벽에 조명이 켜졌는데, 사실은 창문이었다.
조명이 없을 때는 불투명한 벽처럼 보이다가, 적절한 파장의 빛이 닿으면 통유리로 변했다.
은혁이 유리 너머를 본 순간, 아주 거대한 발판이 드러났다.
그걸 본 순간 깨달았다.
‘저게 출입구인가.’
큼직하고 둥근 모양의 발판형 전송 장치였다.
크기는 방석 서너 개 크기.
두께도 그 정도 되어 보였다.
-축하드립니다! 54층 히든 미션을 클리어하셨습니다!
54층 히든 미션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보너스나 페널티가 없기에 추가 메시지는 없었다.
하지만 소문으로만 들려오던 100층탑의 출입구를 확실히 찾아냈다는 것 자체가 큰 보상이었다.
-그것이 비상용 출입구다. 관리국의 핵심 인물이 100층탑 밖으로 나갈 일이 있을 때 사용하는 물건이지.
“사용 이력도 알 수 있습니까?”
-총 14건이다.
‘그냥 알려주는 거야? 와.’
은혁은 두근거림을 감추기 어려웠다.
‘침착하자. 14건이면 적은 숫자는 아니다.’
아마 시험 삼아 들락날락한 횟수도 포함된 숫자일 터.
“자세히 알려주십시오.”
-‘특급 보안 처리됨’ 13건과, ‘일반 플레이어의 외출’ 1건이다.
“…….”
-후후후. 기밀 정보를 그냥 다 알려줄 것 같았는가?
리바이어던이 얄밉게 은혁을 약 올렸다.
사용자에 대해 아무리 캐물어도 대답하진 않을 터.
은혁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하여간 무려 14회나 사용된 적이 있다는 거군요.”
-그러하다.
“저도 이용할 수 있습니까?”
-그대는 스스로의 자격을 증명했다.
절대 열쇠의 소유자임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대는 출입구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고, 그냥 떠날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자유롭게 선택하라.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가?
“제가 지금 절대 열쇠를 사용하면, 반드시 즉시 출입구를 사용해야 합니까?”
-꼭 그렇지는 않다.
“그리고 이 출입구라는 명칭 말인데요, 단순히 출구로만 쓰는 게 아니라, 다시 이곳을 입구로 써서 되돌아오는 것도 가능합니까?”
-모른다. 이곳을 통해 나간 횟수는 앞서 말한 대로 14회다. 그러나 이곳을 통해 들어온 횟수는 아직 0회로 기록되고 있다. 이곳 말고 다른 입구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모른다고 답해야겠지.
‘역시 함부로 나가면 안 되겠네.’
들락날락이 가능하다면 시험해 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럴 수 없었다.
그때, 슬레이버가 메탈 서전트를 통해 질문을 해왔다.
‘나 슬레이버일세. 자네 소환수로 말을 걸고 있네.’
‘네. 말씀하시죠.’
‘자네 덕분에 그곳 내부 상황 내용을 다 들을 수 있었네.’
‘네. 용건은?’
‘나 대신 질문 좀 몇 개 해주면 안 되겠나?’
[텔레파시]를 통해 전달되어서 그런지, 슬레이버가 무척 절실한 심정으로 요구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뭐, 안 될 건 없지만…….’
은혁은 솔직히 귀찮았다.
리바이어던이 은혁의 편법을 묵인해 주고 있긴 하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질문까지 대신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다.
‘부탁이다.’
‘후우, 부탁을 하셔도 곤란합니다. 리바이어던이 우리 모두를 강제 추방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네가 지금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길드장으로서의 나는 네게 패배한 걸로 해도 좋다.’
‘정말입니까?!’
은혁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슬레이버는 진지했다.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기회는 두 번 올 것 같지 않군.’
‘그럼 저야 엄청 이득인데.’
은혁은 너무 큰 이익을 보게 되어서 겁이 날 정도였다.
‘나, 슬레이버는 도전자 강은혁에게 패배했다. 그 대가로 강은혁은 나의 질문을 리바이어던에게 대신해 줘야 한다.’
슬레이버가 말한 순간.
-자유시장 길드장 슬레이버가 패배를 인정했습니다!
정말로 슬레이버가 패배를 인정한 것으로 되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좋다. 내 질문은 이거다.’
슬레이버가 은혁에게 질문을 전해줬다.
“크흠, 위대한 성좌 리바이어던이여.”
-뭔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 목소리군.
“하하. 티 많이 납니까?”
-그대는 자격을 지닌 자이니, 질문 몇 개 정도는 상관없다.
“예, 제 질문은…….”
사실은 슬레이버의 질문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절대 열쇠의 소유자가 아니면, 이 출입구를 사용하는 건 불가능합니까?”
-기본적으로 그러하다.
그 말에 은혁은 전율했다.
‘절대 열쇠를 얻고 사용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만약 절대 열쇠를 별 조심성 없이 사용했다면 큰 낭패를 볼 뻔했다.
“반복 사용 가능한 열쇠는 없습니까?”
-알려줄 수 없다.
그밖에도 은혁은 슬레이버의 대리 질문을 끈기 있게 했다.
그때마다 리바이어던은 답해주기 어렵다, 모른다, 불가능하다 등의 부정적인 답변만 했다.
은혁은 태연했지만, 정작 [텔레파시] 중인 슬레이버가 불안감과 미안함을 내비쳤다.
‘미안하군, 강은혁. 내 질문 때문에 시간을 뺏어서.’
‘아닙니다.’
‘리바이어던이 내 질문에 분노한 것처럼 보이나?’
‘슬슬 귀찮아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만.’
‘그럼 마지막으로 이 질문을 해주게.’
은혁은 그렇게 했다.
“이 출입구를 통해 바깥 세계와 자유로운 상거래를 하는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하하! 역시나 자유시장 길드장다운 질문이로군.
리바이어던은 역시 다 꿰뚫어 보고 있었다.
-답을 정말 원하는가? 실망만 할 것 같은데?
“네. 자유시장 길드장의 소원과도 같은 질문입니다. 답을 알려주십시오.”
-분명히 말해주지. 그런 시도는 붕괴를 유발할 것이다.
철컥!
은혁이 서 있는 곳 뒤편의, 큰 서랍형 하드 렉에서 디스크가 튀어나왔다.
-그대라면 읽을 수 있을 터. 그 안에 담긴 것을 읽어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