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 피스메이커의 계략 (2)
목적은 서로 다르지만, 슬레이버와 피스메이커 모두 100층탑 밖으로 나가는 출입구에 관심이 많았다.
길드 대전 이전에는 중간에 나가는 출입구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다.
물론, 54층 해저의 히든 미션과 관련이 있다는 건 슬레이버도 비교적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출입구에 관심이 많은 우리가 서로 협조하지 않은 이유……. 자네는 아는가?”
피스메이커가 물었고 슬레이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에는 이런 날이 올 것 같아서였지.”
“바로 그거야. 그러니 나는 그대와의 협력이 끊긴 것을 슬퍼하되, 싸워야 한다는 사실에는 슬퍼하지 않고 전력을 다하겠네. 온갖 더러운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겠어.”
피스메이커의 눈은 이제 은혁을 향했다.
절대 열쇠를 지닌 은혁의 존재는 그 자체로 위태로운 평화 협정을 깨뜨렸다.
“오랜만입니다, 피스메이커.”
은혁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리 셋은 힘을 합쳐 당신을 무력화시킬 겁니다. 그냥 항복하시죠?”
“나도 반갑네, 강은혁 플레이어.”
피스메이커가 싱긋 웃었다.
“자네가 지닌 절대 열쇠는 내가 가져야겠네.”
“호오.”
“자네는 이렇게 묻고 싶겠지? ‘어떻게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습니까?’ 하고 말이야.”
“아, 그건 압니다.”
“음?”
“두 종류의 채널로 정보를 수집했겠죠? 첫째는 바이러스를 이용한 정보 수집.”
“후후. 두 번째 채널이 뭔지는 자네도 모를 걸세.”
“알 것 같은데요? 아마 페넬레시아가 알려줬겠죠.”
은혁이 태연히 말하자 피스메이커가 흠칫했다.
“그녀는 내 부길드장이지.”
“그보다 더한 사이일 텐데요? 모자지간이란 각별한 사이죠.”
은혁의 말에 모두가 경악했다.
특히, 피스메이커의 눈이 커졌다.
“……그 모든 걸 도대체 어떻게 다 아는 거지?!”
은혁은 페넬레시아가 제2차 길드 대전에서 죽는 걸, 회귀 전 지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페넬레시아는 마지막까지 피스메이커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그 이유는…….
‘가족이니까.’
페넬레시아의 무조건적인 피스메이커를 향한 충성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빌과 저스티스는, 페넬레시아의 일기장 확보는 물론 시체 해부까지 해가며 답을 찾아냈다.
그리고 페넬레시아가 피스메이커의 어머니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역시 자넨 대단하군.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하니.”
피스메이커는 은혁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정작 염훈과 슬레이버는 놀랐지만 적 앞이라 알고 있던 척했다.
“그렇다네, 강은혁 플레이어. ‘나를 제외한 평화 길드’는 착한 자들이지. 그리고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경계 받지 않지. 그게 핵심이야.”
피스메이커는 광기를 담아 히죽 웃었다.
“내가 평화 길드에 없는 동안, 페넬레시아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평화 길드원들을 통해 정보를 자유롭게 수집할 수 있었지.”
“그랬죠.”
평화 길드는 7대 길드 중 나머지 6대 길드로부터 경계를 받긴 하지만, 그 이유는 피스메이커가 저지른 짓 때문이다.
나머지 일반 플레이어나 NPC는 평화 길드원을 보면 오히려 안심한다.
가령, 재난 관련 층이었던 46층~49층 구간에서도, 가장 수가 많고 오래 머무르던 이들은 평화 길드원들이었다.
그들 모두가 스파이는 아니지만, 굳이 스파이 노릇을 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사실들은 매우 많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은 부길드장인 페넬레시아에게 일상적으로 보고된다.
그것만으로도 페넬레시아는 다른 7대 길드 못지않게 정보를 모을 수 있다.
‘아마, 내가 절대 열쇠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토론 층에서 전해졌겠지.’
토론에 참관한 플레이어와 NPC들은 절대 발설하지 않기로 각자의 명예를 걸고 맹세했었다.
‘그것도 예상대로지.’
스탯창을 열고 하는 [맹세]도 아니고 적당히 명예를 걸고 하는 맹세는 구속력이 매우 약하다.
당연히 알음알음, 45층 이상의 고급 정보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정보가 팔렸을 터.
평화 길드의 부길드장인 페넬레시아 정도면 은혁이 가진 비밀을 전해 들었으리라.
그 밖에도 해신의 신전이나 리바이어던에 관한 정보도 모종의 방법으로 알아냈을 것이다.
‘가령 [평화 교환]이라든가.’
[평화 교환]은, 상대에게 선공을 절대 하지 가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대신 원하는 것 하나를 가져가는 페넬레시아는 히든 스킬.
상대가 잘 모르게 쓰는 것도 가능했다.
여간해서는 쓰지 않아서, 페넬레시아가 그런 스킬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를 잘 모른다.
페넬레시아가 25층에서 음악회를 열며, 다른 7대 길드의 고위층과 만나 몰래 정보를 얻어낸다면, 50층~54층 구간 심해에 숨겨진 비밀을 알아내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왜 공격을 안 하나?”
피스메이커가 웃으며 물었다.
염훈은 화를 내며 답했다.
“이 인간아! 싸우면 괜히 사방에 바이러스 뿌릴 생각이잖아!!”
염훈을 비롯한 세 사람은 바다 오염을 막는 게 목적이다.
하지만 피스메이커는 본격적으로 싸움을 시작하면 도망치면서 오염을 확산시킬 터.
피스메이커로서는 바다 한복판에서 시간을 끌면서 오염을 확산시키는 것 자체가 목적이자 수단인 셈이다.
“그래서 제안할 게 있네.”
피스메이커가 [계약 대결]창을 열었다.
“강은혁 플레이어. 모든 길드장을 차례로 꺾겠다고 했던가?”
“네.”
“내게는 [도전] 안 하나?”
“기회를 살피는 중입니다.”
“후후. 그 기회를 내 쪽에서 주겠네. 이 조건대로 나와 싸우세나.”
<계약 대결>
-목표 : 강은혁과 피스메이커는 일대일로 싸운다.
-조건 : 일대일 대결이므로, 제삼자는 개입하지 않는다. 만약 제삼자가 개입하는 경우, 계약 대결은 즉시 무효가 된다.
-강은혁이 이기는 경우 : 피스메이커의 죽음. 또는 강은혁에게 항복하고 패배를 인정한다.
-피스메이커가 이기는 경우 : 강은혁의 죽음. 또는 피스메이커에게 항복하고 패배를 인정한다.
“어떤가?”
피스메이커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저 계약 대결에서 이기면, 은혁 쪽에서 먼저 [도전] 권한을 쓰지 않아도 자동으로 이긴 게 된다.
하지만 아쉬울 게 없는 피스메이커가 먼저 대결 제안을 거는 게 수상했다.
“받지 마시게.”
슬레이버가 은혁에게 조언했다.
“뭔가 꿍꿍이가 있어. 분명…….”
“먼저 가지.”
타앗!
피스메이커는 멋대로 어디론가 이동했다.
“큭, 쫓아가자!”
염훈이 외쳤지만, 은혁과 슬레이버는 신중했다.
“작정하고 왔군요.”
“그렇군.”
피스메이커가 여태 숨죽이고 있다가 대놓고 나오는 걸 보면, 달리 생각하기도 어렵다.
사실, 염훈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신중하게 굴면 신중하게 군다고 또 깽판칠 분위기야! 그냥 우리 셋이 동시에 덤벼서 조져 버리자고!”
과격한 주장이지만 묘하게 합리적이기도 했다.
“확실히 우리 셋이라면 가능하긴 한데.”
은혁과 염훈은 어지간한 길드장을 상대로 크게 꿀리지 않는다.
게다가 실제 길드장인 슬레이버도 있었다.
3 대 1로 싸운다면, 피스메이커가 함정을 마련했다고 해도 할 만하다.
“좋아! 가자!”
은혁은 [사냥감 추적] 스킬을 썼다.
염훈은 [영수 소환] 스킬을 써서 폭포 유니콘 위에 탑승했다.
슬레이버는 자신의 선박을 복구한 뒤 탑승했다.
은혁은 [피구름 생성] 스킬로 커다란 열기구 같은 구름을 만든 뒤 그걸 붙잡고 하늘로 떠올랐다.
세 사람의 추적을 받는 피스메이커는, 마치 소금쟁이처럼 도망쳤다.
파바바바바박!
발길이 닿는 곳마다 푹신한 젤 형태의 바이러스 종괴로 바꾸면서, 그것을 밟을 때의 반발력으로 빠르게 앞으로 튀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느려!”
파팟!
폭포 유니콘은 바다 위를 엄청난 속도로 달렸고, 탑승한 염훈은 프리즘 랜스로 피스메이커의 등을 노렸다.
하지만.
꿀렁!
이미 피스메이커의 발밑은 전부 바이러스 덩어리였다.
터텅!
바이러스 덩어리는 마치 슬라임처럼 솟아서 프리즘 랜스를 막아냈다.
“제길! 이거 문제네!”
바다 위에서 싸우는 것도 힘든데, 피스메이커는 그 바닷물을 바이러스 덩어리로 만들어 이리저리 활용하고 있다.
“하하하! 다들 조급하군그래?”
피스메이커가 웃었다.
“조금만 더 가면 내가 봐둔 섬이 나온다네! 차례로 덤비라고!”
타앗!
피스메이커가 이동 속도를 더 높였다.
“섬? 어디에도 안 보이는데?”
54층은 정말로 끝없이 펼쳐진 바다였고, 멀리 나갈수록 섬이 오히려 드문 구조였다.
하지만.
“[평화의 장막] 해제.”
파앗!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가려져 있던 섬이 드러났다.
망망대해 같은 54층 스테이지의 경계면 근처에 존재하는 아주 작은 섬이었다.
‘아! 여긴 기억난다.’
은혁은 회귀 전, 소용돌이가 자주 발생하던 곳을 떠올렸다.
각종 정보를 준 고고학자를 구했던 곳이다.
‘근데 왜 소용돌이가 없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타앗!
피스메이커는 섬 안으로 뛰어들어 숨었다.
대신, 가면을 쓴 여인이 섬의 해안가에 서 있었다.
페넬레시아였다.
“어서 오세요, 여러분.”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마치 뮤지컬 배우의 것처럼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은혁, 염훈, 슬레이버는 조용히 해안가에 섰다.
“은혁아. 저 목소리는……!”
“맞아. 평화 길드 부길드장 페넬레시아야.”
“으으, 역시.”
염훈은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신음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찌 보면 당연한 거네. 길드장인 피스메이커가 불렀으니, 부길드장 페넬레시아가 오는 건 당연하네.”
“그렇게 단순한 요인은 아닐 걸세. 그녀가 피스메이커의 어머니라는 걸 기억해야 할 걸세.”
슬레이버가 말했다.
페넬레시아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났음에도 가면을 벗지 않았다.
“이곳은, 54층의 또 하나의 히든 루트인 해신의 신전으로 가는 입구입니다.”
페넬레시아가 설명했다.
“평소에는 소용돌이가 잦은 곳이지만 [강제 평화]로 소용돌이를 일시 정지시켰답니다.”
그리고 [평화의 장막]으로 섬 전체를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오시지요.”
페넬레시아는 무방비하게 등을 보였다.
이들이 공격하건 말건 관심 없다는 듯이.
그녀가 안내한 곳은 커다란 동굴이었다.
동굴은 학교 운동장 크기였고, 천장도 매우 높았다.
우우우우웅……!
2층짜리 전원주택만큼 커다란, 빛나는 돌이 하나 있었다.
조건부 전송석이었다.
가까이 접근한 순간, 보호막이 펼쳐지며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오직 진정한 강자만이 해신의 신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후후. 보는 바와 같다네.”
피스메이커가 어느새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나도 들어가려 해봤지만 들어갈 수 없더군. 단순히 레벨 제한 같지는 않던데 말이야. 자, 이곳을 보게.”
사람의 손바닥만 한 버튼이 전송석 옆에 있었다.
피스메이커는 버튼에 손을 얹었다.
-강력한 자격을 확인!
-비슷한 수준의 다른 강적이 필요합니다!
-두 플레이어가 인증한 뒤, 싸워서 겨뤄주십시오!
-승자만이 입장 가능합니다!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가겠지?”
“과연. 일정 수준 이상의 두 강자가 이 앞에서 인증을 하고 일대일로 싸워야 하는 거군요.”
“그래. 그렇게 싸워서 이긴 자만이 전송석을 개방시킬 수 있는 걸세.”
“아마 맞을 겁니다.”
은혁이 전송석 표면을 보더니, [고고학 숙련] 패시브 스킬과 고대의 사전을 이용해 읽어냈다.
일반인은 해석할 수 없었지만, 전송석 표면에는 고대 문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해신을 영접하려는 자, 강함을 증명하라.’
먼 옛날에 새겨진 고대 문자였다.
피스메이커의 속임수가 아님이 확인되었다.
“어떤가, 강은혁. 우리가 꼭 싸워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추가되었군? 자네도 해신의 신전 속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
피스메이커가 조용한 어조로 제안했다.
“피스메이커. 차라리 나와 싸우지 않겠나?”
슬레이버가 나섰지만 피스메이커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자네는 2순위일세. 같은 길드장끼리 싸워서는 이득이 없지. 반면에.”
피스메이커는 은혁을 바라봤다.
“강은혁 플레이어는 절대 열쇠의 소유자인데다가, 나와는 서로 인연이 있지.”
“네. 한 방 갚아드려야 하는 인연이죠.”
은혁은 씨익 웃었다.
이전에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을 뻔했다.
물론, 그건 은혁이 백신을 만들기 위해 반쯤 일부러 당했던 거였지만, 당한 건 당한 것이다.
피스메이커도 씨익 웃더니, 전송석 옆에 손을 댔다.
은혁도 같이 손을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