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 페넬레시아의 실험
100층탑에서 자리를 잡고 출산하기 위해 일부러 임신 초기에 100층탑에 들어갔다는 페넬레시아의 말에, 은혁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하지만 곧 냉정함을 되찾고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을 질문했다.
“아, 그전에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그 초대장은 특정 사람에게 발송되는 게 아니라, 그냥 조직에 뿌려진 겁니까?”
“네. 사용되지 않은 초대장이 있다면, 자유롭게 자신의 이름을 적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 초대장을 ‘전송일’에 찢으면, 자동으로 100층탑에 전송되지요.”
“호오…….”
“물론, 초대장에 적힌 예상 전송일 숫자는 변하며, 그 전송일을 놓치면 다음번 전송일 날짜가 표시되는 식이지요.”
“편리하군요. 무척 귀하겠습니다?”
“당시 아카데미에는 초대장이 무척 많이 와서…… 크게 귀하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어요.”
“그렇군요.”
은혁은 내친김에 아카데미의 조직 수장이 누구인지, 본부 위치가 어디인지도 물었다.
하지만 페넬레시아는 그 정도 정보는 갖고 있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지부는 여러 개가 있었고, 페넬레시아는 그리스 지부의 말단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임신 초기 상태로 온 저는, 5층에서 피스메이커를 출산했습니다.”
“힘드셨겠군요.”
“무척 힘들었지요.”
당시의 5층은 길드연합국이 없던 시절이다.
관리국의 별다른 개입이 없는, 플레이어끼리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공간.
살인, 강도, 방화, 폭행…….
온갖 일들이 횡행하는 와중에, 페넬레시아는 혼자서 피스메이커를 낳았다.
“힐링 포션과 마나 포션이 없었다면, 혼자서 애를 출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요.”
오늘날 5층의 공동묘지 지역.
당시 페넬레시아는 비명을 억누른 채 탯줄도 스스로 끊었다.
하지만 그만한 가치는 있었다.
-축하합니다! 플레이어 최초로 원정 출산을 성공하셨습니다!
비아냥 같은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막대한 레벨업 보너스가 주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축하드립니다! 생명의 성좌, 비타가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생명의 성좌, 비타가 금화와 아이템을 지원해 줍니다!
-생명의 성좌, 비타가 [젊은 어머니의 축복]을 제공합니다!
다양한 보너스를 얻은 페넬레시아는, 당시 기준에서 5층 랭킹 10위 안에 들 정도로 강해졌다.
외모가 젊어진 것도 이 영향이었다.
그녀는 강력한 힘을 주로 스스로를 숨기는 일에 썼고, 여력이 있을 때면 처지가 어려운 노약자, 여성들을 보호했다.
그리고 피스메이커를 보살폈다.
두 살이 된 피스메이커를 보며, 페넬레시아는 자신이 100층탑에 오게 된 목적이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피스메이커는 그냥 조용하고 우울한 아이였을 뿐, 평범한 사람과 크게 다른 건 없었어요.”
“음. 그게 좋은 거 아닐까요?”
“당시의 저는 그러질 못했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피스메이커가 평범한 아이라는 사실을 견디지 못했고, 당시에 이미 매우 강하고 유명했던 윌리엄, 훗날의 연구 길드장 빌에게 갔어요. 그리고…….”
페넬레시아는 가슴을 치며 말했다.
“2살이던 피스메이커에게 성장 촉진제를 먹였죠.”
“으음……!”
빌은 사악한 자는 아니지만, 필요하다면 위험한 실험을 행하며, 그에 대한 가책을 느끼지 않는 자다.
“마침 빌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나도 요즘 인공 플레이어인 레나를 만들려고 하는데, 자꾸 어린아이의 모습이라 골치가 아프다. 성장촉진제 실험에 동의한다면 당신의 아이에게도 먹여 보겠다.’라고요.”
“허……!”
확실히 길드장들은 윤리관이 매우 일그러졌다.
3군주에 비하면 낫다지만, 그래도 방심해서는 안 될 터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압니다, 강은혁 플레이어. 아이에게 그런 걸 먹일 수는 없다는 거죠?”
“네.”
“하지만 그 당시 5층은 폭력의 세계였습니다. 유치원도, 소아과도, 일회용 기저귀를 파는 곳도 없는 세계. 어린아이가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세계였어요.”
길드연합국이 있는 지금의 5층도, 조금만 후미진 곳으로 가면 무법이 횡행한다.
초창기의 5층은 말할 것도 없다.
“저는 어머니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겁니다. 아이가 살 수 없는 세계이므로, 아이를 단숨에 강력한 어른으로 만들어준 겁니다.”
페넬레시아가 단호히 말하자, 은혁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죠?”
“그 결과, 피스메이커는 단숨에 2세에서 20세가 되었죠.”
“그만큼 강해졌습니까?”
“네…….”
하지만 부작용은 있었다.
아이가 유치원을 다니고, 초중고를 거쳐서 20세가 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 과정에서 바보짓도 하고, 짝사랑도 하고, 공부와 취미 활동도 해야 한다.
그 모든 걸 뛰어넘은 피스메이커는 차가운 어른이 되었다.
어른으로 자라났다기보다는, 어른으로 재탄생되었다고 봐야 한다.
어른의 눈으로 처음 본 세계, 5층에는 평화가 없었다.
5층을 본 피스메이커는 결심했다.
‘평화를 만들겠다.’
이름 없는 피스메이커는 그때부터 힘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피스메이커의 평화 추구 사상은 점점 더 기괴하게 변질되었다.
그건 피스메이커 혼자만의 잘못이라기보다는 100층탑의 탓에 더 가까웠다.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약자가 강자를 속였다.
지구에서도 그런 일은 빈번하지만, 100층탑처럼 노골적이고 게임처럼 즉각적으로 이뤄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 뒷이야기는 강은혁 플레이어, 당신도 잘 아실 겁니다.”
“네.”
피스메이커는 위험한 연금술로 백사의 독 포션을 만들어 힘을 폭증시키고, 평화 길드를 만들기에 이른다.
의외로 평화 길드는 또 정상적인데, 이러한 전말을 보면 이해가 간다.
피스메이커가 추구하는 평화는 대량 학살을 통한 평화다.
하지만 페넬레시아는, 자식 뒷바라지하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자신이 부길드장으로 빠지고, 아들이 욕먹을까 봐 평화 길드의 이미지를 가꾼 것이다.
평화의 미궁에 대한 것도, 전말을 알고 보면 더욱 엽기적이다.
평화의 미궁은 피스메이커의 요청으로 다카노가 만든 것이다.
단, 페넬레시아는 피스메이커가 들어간 평화의 미궁의 출입 권한을 쥐고 있었는데, 이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식을 요람 속에 넣고 보살피는 어머니가 할 법한 짓이다.
“안타까운 과거사는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니까 봐달라는 건 아니죠?”
“…….”
은혁의 예상은, 페넬레시아가 차마 그렇게 해달라는 말은 못 할 것이다, 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상상을 초월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피스메이커와 승부를 벌여주세요. 피스메이커가 회복을 마친 다음에요.”
“하?”
“이 정도는 요구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평소의 페넬레시아가 할 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뻔뻔한 요구였다.
은혁이 어이없어하자, 페넬레시아는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만약 제 제안을 거절한다면.”
휙.
페넬레시아가 인벤토리창에서 어떤 부적을 꺼냈다.
생명의 성좌, 비타의 문양이었다.
“그건?”
“생명의 성좌께서는 제게 ‘어머니의 마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표현이 이토록 기괴하게 들릴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다.
“제 제안을 거부하면, 이 권능으로 피스메이커와 제가 지닌 생명을, 그 존재 자체를 소멸시키겠습니다.”
“……!!”
은혁은 7인의 길드장 중 과반수를 꺾거나 동의를 얻어야 한다.
현재까지 슬레이버, 저스티스로부터 패배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피스메이커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채로 그냥 죽어 버린다면?
일반적으로 부길드장인 페넬레시아가 길드장직을 승계받지만, 페넬레시아까지 동시에 죽어 버린다면?
그때는 약간 골치 아파진다.
남은 길드장은 연구 길드의 빌, 상승 길드의 어센션, 행복 길드의 해피, 구원 길드의 올마스크다.
이들 넷은 애매하다.
일단 빌의 경우, 은혁과 협력의 여지가 크다.
당장 빌에게 연락해서 피스메이커가 죽어가니 와달라고 연락하면, 빌은 공짜로 은혁을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은혁을 위해 길드장으로서의 패배를 쉽게 인정할 것 같지는 않다.
나머지 셋은 현재 위치부터가 애매하다.
어센션은 심연에, 해피는 드래곤 컬트의 흑룡파와 전쟁 중, 올마스크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중…… 으로 추정될 뿐.
즉, 은혁으로서는 피스메이커에게 패배를 인정시키는 것이 최선이다.
그래야 7인의 길드장 중 우선 3인을 꺾은 게 되므로.
“좋습니다, 페넬레시아 부길드장님. 피스메이커를 회복시키십시오.”
은혁은 피스메이커가 담긴 [그림자 감옥]을 자신과 페넬레시아의 중간 지점에 놓았다.
“단, 제게도 조건이 있습니다.”
“이번에 또 피스메이커가 패배하면 반드시 그 패배를 인정하도록 할 것을 요구하는 거겠죠?”
“네.”
“물론입니다. 이 또한 어머니로서 맹세하겠습니다.”
“지금 맹세 하십시오.”
페넬레시아는 피스메이커를 끌어안은 뒤, 스탯창을 열고 어머니의 [맹세]를 했다.
파앗!
-생명의 성좌, 비타가 보는 앞에서 [맹세]가 이뤄졌습니다!
-어머니인 페넬레시아는 물론, 아들인 피스메이커 또한 반드시 [맹세]를 지켜야 합니다!
“쿨럭.”
피스메이커가 정신을 차렸다.
“내가 졌나…… 보군……?”
“아니, 아직 아니야!”
페넬레시아가 소리쳤다.
“아직 할 수 있어! 다시 싸우면 될 거야!”
“…….”
피스메이커는 페넬레시아의 시선을 피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우리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해서도 다 들은 것 같군.”
“네.”
“강은혁. 나와 한 번 더 싸워주겠나?”
“그래 봤자 제가 이길 텐데요.”
드래곤 파워드 아머를 안 쓴다면 모를까, 그걸 쓰면 압도적으로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건 사기더군.”
“저야 늘 사기템을 준비하는 편이죠.”
“바이러스가 애초에 불침이던데.”
“모든 7대 길드장은 물론, 3군주와 싸울 때도 써먹을 정도로 강하게 제작했습니다.”
실제로 드래곤 파워드 아머를 만든 직후, 운명치 관련 이슈가 터지면서 관리국 차장이 직접 찾아왔다.
강력한 아이템 좀 만들었다고 관리국 차장이 올 정도라는 건, 드래곤 파워드 아머가 이미 규격 외의 사기템이라는 뜻이다.
“드래곤 파워드 아머 없이 일대일 대결을 하세나. 거기서도 내가 지면 패배를 인정하지.”
“흠.”
은혁이 고민하자 페넬레시아가 얼른 말했다.
“강은혁 플레이어, 방금 생명의 성좌에게 한 맹세를 들으셨잖아요? 이번에는 절대 거짓이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 제가 이미 이겼는데, 굳이 또 싸운다는 게 묘하게 불공평하게 느껴져서 말입니다.”
은혁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만약 슬레이버나 빌, 저스티스 같은 이들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뭘 고민하냐! 당장 다 죽여 버려! 피스메이커는 범죄자에, 미친놈이다!’ 하면서 성화를 부렸을 것이다.
하지만 은혁으로서는 길드장이나 부길드장을 죽이는 부담을 지고 싶진 않았다.
‘통합 길드장’이라는 칭호를 좀 더 깨끗하게 얻고 싶었으므로.
“그럼 이렇게 하죠. 두어 시간 뒤에 다시 한번 붙어봅시다, 피스메이커 님.”
“정말인가?”
“네. 대신에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제삼자를 위험에 처하게 하지 말 것.
둘째. 이미 오염시킨 바다를 정화할 것.
셋째. 두 시간 뒤에 싸우기로 한 약속을 지킬 것.
“이 세 가지를 조건에 모두 동의한다면. 받아들이죠.”
“동의하겠다.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하지. 맹세를 어기면 죽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