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 해신의 신전으로
피스메이커는 즉시 은혁의 조건에 동의하고 스탯창을 열어 [맹세]를 했다.
대부분의 스탯창 [맹세]가 그러하듯, 어기는 순간 생물학적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물론, 은혁은 피스메이커에게 위의 맹세들을 회피할 수단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과연 피스메이커가 정말로 [맹세]를 지킬까?’
맹세를 요구하는 은혁 자신도 조금 회의적이었으나 내색하진 않았다.
‘크크크. 순진한 놈이군.’
피스메이커는 은혁을 비웃었다.
‘아마 내가 정말 약속을 지킬까 안 지킬까 의심하고 있겠지. 그 막연한 의심이 네놈의 패착이 될 것이다.’
물론, 은혁은 피스메이커의 생각대로, 막연한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 내용에는 차이가 있었다.
‘대놓고 날 배신하면 그게 더 좋은데. 제발 나를 배신했으면.’
은혁은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은혁은 처음부터 피스메이커와 두 번 싸울 생각이었다.
‘일단 한 번 압도적인 힘으로 반쯤 죽이고, 일정 시간 뒤 더 강해진 피스메이커와 싸운다.’
단순히 피스메이커의 정신을 굴복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더 큰 계산이 있기 때문이다.
피스메이커 자신도 완전히 모르는, 엄청난 가능성을 뺏기 위해.
‘무르익으려면 몇 시간이면 충분하겠지?’
물론, 은혁은 그 ‘몇 시간’ 동안 할 일이 몇 가지 있었다.
‘일단 수리부터.’
* * *
섬의 한 구석.
은혁은 드래곤 파워드 아머 수리에 쩔쩔맸다.
[긴급 수리] 스킬만으로는 온전히 수리하는 게 불가능했기에, 은혁은 연신 혀를 찼다.
“아, 첫 기동이라 너무 신이 났는지, 좀 과격하게 써먹었나 보네.”
슬레이버는 주춤주춤 다가왔다.
“그런 걸 숨기고 있었나, 자네?”
“네, 뭐.”
“그걸 입었으면, 나도 초살당했겠는데?”
“초살까진 아니었을 겁니다.”
사실, 드래곤 파워드 아머는 슬레이버를 상대로는 오히려 어렵다.
‘수리비가 엄청 비싸질 테니까.’
[마이더스의 손]은 드래곤 파워드 아머의 외장갑을 강제로 순금으로 만들어 버려서, 방어력을 낮추고 기능성을 약화시킨다.
‘억지로 싸우면 내가 이기긴 이기겠지만. 수리비가 너무 많이 들어!!’
드래곤 파워드 아머의 외장갑은 드래곤의 비늘을 조합해서 만든 ‘초 럭셔리’ 재질이다.
갑옷 걱정하면서 싸우느라, 슬레이버와 싸우는 건 더 어려웠으리라.
“으음, 그나저나 피스메이커와의 싸움은 엄청 쉽게 끝났네? 길드장 별거 아니다 싶을 정도로.”
염훈이 별생각 없이 중얼거리자, 슬레이버는 쓰윽 노려봤다.
“길드장을 무시하지 말게. 피스메이커가 패배한 건 심리적인 이유가 더 크니까.”
슬레이버가 자기도 모르게 피스메이커 편을 들었다.
같은 길드장이니까 무의식중에 편을 들게 된 모양이다.
“그동안 우리는 할 일이 있습니다.”
두어 시간이 지나면 피스메이커는 더욱 강해져 있을 것이다.
페넬레시아는 피스메이커를 치료해 주는 중인데, 그것만으로도 피스메이커는 더 강해진다.
이는 피스메이커의 힘이 ‘바이러스’에 근본을 두고 있기 때문이며, 증식, 변이, 강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은혁아. 다시 싸워도 이길 자신 있는 거지? 그 아머를 입으면 말이야.”
염훈이 말했다.
염훈 자신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별 요령 없이 드래곤 파워드 아머의 힘만 이용해서 개싸움을 벌여도 70% 확률로 은혁이 이긴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은혁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 안 했나? 두 시간 있다가 싸울 때는 드래곤 파워드 아머 안 쓰고 싸우기로 했는데.”
“켁! 왜 그런 약속을 해?”
두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은혁은 그중 한 가지만 가르쳐주기로 했다.
“그래야 정신적으로 완전히 굴복시키지.”
통합길드장이 되려고 생각했을 때 그렇게 마음먹었다.
기존의 길드장들을 가급적 죽이지 않겠다고.
살려둬서 부하로 부리겠다는 마음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들이 기존 길드연합국에서 쌓은 업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업보도 갖고 간다.’
은혁은 그것이 길드연합국을 계승하는 자로서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피스메이커가 완전히 돌아 버릴 거라는 점일세. 민간인 학살도 개의치 않을 거야.”
슬레이버가 말했다.
“그래서 스탯창 열고 [맹세]를 시켰습니다만.”
“피스메이커가 스탯창 [맹세]를 우회하는 게 가능하다는 걸 모르나? 그리고 난 자네가 너무 피스메이커를 깔보고 있는 것 같군.”
그러자 염훈이 끼어들었다.
“음? 이미 은혁이가 압도적으로 이겼는데, 깔봐도 되는 거 아닌가요?”
“그렇지 않아. 자네들은 길드 대전을 직접 눈으로 보질 않아서 그래. 연구 길드장 빌이 피스메이커를 몇 번이나 죽였는 줄 아나?”
“엥?”
“빌은 [아토믹 블래스트] 스킬로 피스메이커를 여러 번 태워 죽였다네. 그 과정에서 민간인 NPC들이 수천 명이나 죽었지만, 어쨌거나 피스메이커는 그때 완전히 타죽었어. 하지만 계속 부활했지.”
“배양액 말이군요.”
“알고 있군그래?”
피스메이커에게는 궁극 스킬 [자기 배양]이 있다.
수명을 소모해가며 만든 배양 수조에, 자기 자신의 복제를 따로 두는 스킬.
본체가 죽으면, 그 배양 수조에서 부활한다.
이 스킬에도 약점은 있는데….
‘완전히 죽어 버리면 부활 못 한다는 거. 그리고 전투 경험치를 많이 잃어버린다는 거.’
이러한 이유로, 은혁은 피스메이커가 부활을 노리진 않을 거라 판단했다.
모든 전투 경험을 간직한 채, 부상당한 몸을 회복하고 은혁과 싸우려 들 것이다.
여기까지가 은혁이 회귀 전 지식만으로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며, 이번 삶에서 다카노를 통해 알게 된 추가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피스메이커는 자기 목적이 달성되기 전에 죽는 것을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삶에 집착한다. 바꿔 말하자면, 삶의 목표를 부수면 부활이나 재도전을 시도조차 못 하게 될 것이다.’
즉, 은혁은 피스메이커가 부활을 시도하지 못하게 할 방법까지 계획하고 있었으니, 나름 만반의 대비를 한 셈이다.
반면에, 은혁이 아는 사실에 대해 잘 모르는 슬레이버는 다르게 생각했다.
“피스메이커는 자네와의 약속을 어기고, 죽은 다음 부활해서 싸울 걸세. 지금 회복하느라 힘들어하는 건 연기일 수도 있어.”
은혁은 그 말을 적당히 흘려 들었다.
“걱정 마십쇼.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대비한 보험도 있고.”
“오, 보험까지? 그게 뭔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슬레이버 님! 바로 당신입니다.”
“음?”
“저랑 염훈이 해신의 신전을 클리어하고 올 때까지, 피스메이커가 딴짓 못 하게 감시해 주십시오.”
“……나를 부려먹을 생각이었군.”
슬레이버는 이제 와서 몸을 빼기도 그랬으므로, 은혁이 뭘 어디까지 하나 지켜보기로 했다.
“그래, 두 번째 보험은 뭔가?”
“해신의 신전에 숨겨진 아이템입니다.”
“그게 뭔데?”
“그야 아직 모르죠. 누구도 가본 적이 없으니….”
“이봐, 뭔지도 모르는 걸 보험이라고 하다니.”
“그래도 정황상 뭔가가 숨겨져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하긴, 해신의 신전이면서 아무것도 없을 것 같지는 않다만….”
슬레이버는 말끝을 흐렸지만, 은혁은 확신했다.
‘해신의 트라이던트. 그건 분명히 해신의 신전에 숨겨져 있을 거야.’
은혁은 해신의 신전 내부에 대해서는 회귀 전 지식으로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회귀 지식과 지금까지 얻은 정보를 종합했을 때, 해신의 트라이던트는 해신의 신전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회귀 전, 달리 적수가 없었던 해피가 재미 삼아 뚫은 곳이 해신의 신전이었지.’
그리고 그는 평소 사용하던 주력 무기인 ‘빅 배트’와 함께 해신의 트라이던트도 사용하곤 했다.
‘가히 무적이었지.’
안 그래도 7대 길드장 중에서 가장 강하고 제멋대로인 것으로 손꼽히는 해피인데, 해신의 트라이던트까지 뺏기면, 무척 곤란해진다.
‘뿐만 아니라 리바이어던의 몸체를 죽이건 제압하건 해서 비늘을 얻어야 해.’
드래곤 파워드 아머의 외부 장갑을 보강하기 위해서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은혁은 염훈을 데리고 해신의 신전의 전송석 앞으로 향했다.
“들어가겠다.”
-플레이어 강은혁은, 플레이어 피스메이커를 꺾은 강자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옆에 계신 플레이어 염훈의 강함은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야, 염훈.”
“응?”
“나 한 대 때려.”
“어?”
염훈은 이해를 못 했다.
“나 원 참.”
은혁은 괜히 염훈에게 다가가서는, 자기 어깨로 툭 부딪혔다.
“어억. 염훈이 너무 강하다. 으으.”
그리고 은혁은 혼자 알아서 비틀비틀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털썩!
-플레이어 강은혁은, 완전히 고의로 플레이어 염훈에게 패배하였습니다.
-……플레이어 염훈 또한 강자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기가 찬다는 말투로 말했다.
화악!
두 사람 모두 자격을 획득했기에, 해신의 신전으로 전송되었다.
* * *
두 사람이 전송된 곳은 섬으로부터 10km 아래의 해저 동굴이었다.
진짜 해신의 신전으로 가는 계단이었는데, 계단은 끝도 없이 이어진 것 같았다.
두 사람에게 경고문이 재차 나타났다.
-경고! 이 앞에는 어느 인공 성좌의, 마음을 잃은 본체가 있습니다!
-대화도, 통제도 불가능한 괴물이며, 가능한 것은 오직 전투뿐입니다.
-그래도 안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지금 다시 섬으로 돌아가는 경우, 어떤 불이익도 없습니다.
“물론 안으로 가겠다!”
은혁이 외치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쿠르릉!
콰르르르…!
계단의 벽과 천장이 무너지며 갑자기 바닷물이 쏟아졌다.
-오만한 플레이어임을 확인!
-오만한 플레이어가 현실 인식에 실패했을 가능성 높음!
-플레이어의 생명을 위해, 통로를 파괴합니다!
“뭐야, 그게! 강자 인증까지 시켰으면서!”
염훈은 화를 냈고, 은혁은 혀를 찼다.
“[광역 돌 합치기]! 연속!”
쩌저저적……!
금이 가던 통로가 다시 붙기 시작했다.
“오옷?!”
염훈은 감탄했다.
“큭. 못 움직이겠네.”
깨져 나가는 해저 계단을 봉합하듯 붙잡아 두긴 했지만, 은혁도 움직이기 어려워졌다.
콸콸콸콸…!
게다가 모든 통로를 다 커버할 수는 없어서 계단이 침수되고 있었다.
“10초만!”
염훈은 즉시 [영수 소환]을 해서 폭포 유니콘에 탑승했다.
“가즈아!”
타앗!
폭포 유니콘은 물에 잠긴 계단을 오히려 평지보다 빠르게 달렸고, 비행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해신의 신전의 봉인된 문까지 도달했다.
문에는 기계식 넘버 패드가 달려 있었다.
보통 사람은 당황할 법도 하지만.
“[홀리 라이트닝]!!”
빠지지직!!
염훈은 냅다 전기로 지져서 터뜨리고는, 문을 열었다.
“은혁아!! 이제 와라!!!”
멀리서 외침을 들은 은혁은 지체 없이 스킬을 썼다.
“[그림자 도약]!”
파앗!
단숨에 염훈의 그림자로 나왔다.
[광역 돌 합치기]가 해제되어 바닷물이 쏟아져 내렸다.
“얼른 들어가!”
은혁과 염훈은 문 안으로 들어갔고, 은혁은 문을 닫은 뒤, 반대편에서 [긴급 수리]로 넘버 패드를 수리했다.
철컹!
문을 단단히 봉한 순간.
촤아아악……!
문 너머에서 바닷물이 가득 차는 소리가 들렸다.
꾸르르르….
다행히 문은 단단한 감압식 문이라서, 거품 소리만 조금 날 뿐 단단히 버텼다.
-54층 히든 루트 : 해신의 신전
아주 캄캄하고 거대한 고대의 신전이었다.
차갑고 소금기 가득한 공기 냄새에, 두 사람은 전율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주변을 제대로 살필 틈도 없었는데.
“쿠오오오오오!!!”
고막을 찢는 듯한 괴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은혁은 과장 없이, 100층탑 전체를 통틀어 가장 큰 괴성을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잃은 괴물, 리바이어던의 본체가 나타났습니다!!
쿵!! 쿵!!
쿵!! 쿵!!
리바이어던의 본체는 회색과 하늘색의 비늘로 덮인 거대한 드래곤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으…… 아……!”
[불패불굴] 특성을 지닌 염훈도 순간 겁에 질릴 정도.
하지만 은혁은 활짝 웃었다.
“그래! 이거야, 이거!!”
“엥?”
“[드래곤 파워드 아머 소환]!!”
파앗!!
소환되는 순간, 은혁은 이미 장착 과정에 들어갔다.
철컹! 철컹!!
-재료다!!!
은혁의 눈에 비친 리바이어던의 본체는 드래곤 파워드 아머의 안정적인 수리를 위한 재료에 불과했다.
* * *
은혁과 염훈이 해신의 신전으로 떠난 직후, 슬레이버는 피스메이커와 페넬레시아를 감시했다.
페넬레시아는 피스메이커에게 바닷물을 끼얹어 주며 회복을 촉진시켰다.
피스메이커는 그때마다 눈에 띄게 빠르게 회복했다.
-죽음의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바이러스화된 육신은 빠르게 수복합니다!
-이전보다 강한 존재로 거듭납니다!
피스메이커의 눈앞에는, 이런 불길한 시스템 메시지들이 나돌아다니고 있었다.
“허튼 생각 하지 말게, 피스메이커.”
슬레이버가 경고하듯 말했다.
“허튼 생각이라니 무슨 말인가?”
“강은혁과 염훈이 안 보이는 동안, 이미 맹세한 세 가지 약속을 잘 지키란 말일세.”
그러자 피스메이커가 큭큭 웃었다.
“자네도 참 순진하군, 슬레이버. 평화로운 해양 도시의 시장 노릇을 너무 오래 해서 순진해진 건가? 아니면 순진한 척하는 건가?”
“무슨 의미로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