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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모든 직업-319화 (319/434)

319화 : 피스메이커의 권한 탈취

‘무슨 거래를 원하십니까?’

은혁이 묻는 순간.

우우우웅.

해신의 석벽이 물처럼 일렁이더니, 그 안에서 트라이던트가 살짝 비어져 나왔다.

-그대는 인공 성좌 리바이어던의 육신을 파괴했지. 만약 정신까지 제거해 주겠다고 약속하면, 신화급 아티팩트인 ‘해신의 트라이던트’를 주겠다.

‘꼭 리바이어던을 완전히 죽여야 합니까? 어차피 육신을 처리했으니 영원히 반쪽짜리로 남을 텐데요.’

리바이어던의 정신과는 꽤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은혁은 리바이어던의 정신까지 죽이고 싶진 않았다.

-개인적인 원한이다. 그 존재 자체가 내게는 굴욕이다.

‘겨우 그런 이유로 죽일 수는 없습니다.’

-나를 바보로 알지 말라. 리바이어던의 정신을 파괴하면 ‘출입구’ 이용이 어려워질 것을 우려하는 것 아닌가?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

-리바이어던의 정신이 파괴되면, 내가 바다를 지배할 것이다. 즉, 리바이어던의 두뇌인 이 바다를 내가 물려받게 된다. 출입구는 통제 가능하다.

‘그래도 싫습니다.’

-어째서인가?

‘청부하는 꼴이 마음에 안 듭니다.’

-뭐라고?

‘리바이어던의 정신 또한 수상쩍은 존재이지만, 그래도 누구를 죽여 달라는 식의 청부를 한 적은 없습니다. 좀 거칠긴 해도, 오히려 묵묵히 맡은 일을 하는 존재더군요.’

-흠. 그러한가.

‘하지만 당신은 리바이어던을 인공 성좌의 반쪽짜리라고 취급하면서도 진심으로 미워하는군요.’

-그, 그런 것은 아니다. 실제로 리바이어던의 육신은 드래곤의 형상으로, 이곳을 지키지 않았나? 나를 가두기 위해서……!

‘리바이어던의 본체는 정신이 없는 존재, 말 그대로 뇌가 없는 드래곤이었습니다. 그 리바이어던의 육신을 이곳에 배치한 것은 리바이어던의 정신이 한 일이 아닙니다. 관리국이 방치하고 떠난 것일 뿐이지요. 오히려 리바이어던의 정신은 책임감을 느끼며, 저보고 위험하니 이곳에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

‘다 아시면서 리바이어던에 대해서 미움을 투영하십니까?’

-으음…!

‘제 성격상, 당신의 청부 행위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만약 제가 그 청부를 받아들이고 정말 리바이어던의 정신까지 파괴한다고 쳐도, 그때가 오면 당신은 소인배 같은 청부를 한 것을 뒤늦게 후회할 겁니다.’

해신은 은혁의 말에서 틀린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미안하지만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과연. 네 말이 맞다.

해신이 회한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해신이다. 해신이면 말 그대로 자신의 능력으로 바다를 지배해야 한다. 하지만 내 권능을 잃고 바다를 뺏긴 다음, 기껏 한다는 짓이 바다를 차지한 인공 성좌를 처리해달라는 거였군.

해신은 석화가 부르르 떨릴 정도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는 온건한 어조로 내 제안을 거절했지만, 도량이 좁은 나를 속으로 얼마나 비웃고 깔보고 있을지.

‘깔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랜 세월 석화 속에 갇혀 계셨으니 초조한 마음을 이해합니다만….’

-그러나 해신이라는 자가 할 법한 소리는 아니었다. 잊어다오.

‘이미 다 잊었습니다.’

-강은혁.

스르륵.

해신의 트라이던트가 8할 가까이 석화 밖으로 나왔다.

-그것을 가져다오.

‘그 대가는?’

-그 대가로, 너희가 스테이지라 부르는 이 바다를 지켜다오. 바다에서 살아가는 자들. 그저 바다를 좋아하는 자들. 그런 이들을 지켜주고, 관리국이나 다른 강자가 멋대로 바다를 증발시키거나 오염시키려 한다면, 그때….

해신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잊힌 해신이 남기는 이 무기로 그들을 꾸짖어다오. 해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그야말로 해신에게 어울리는 일일 겁니다.’

-좋다. 뽑아가라!

스윽.

은혁은 해신의 트라이던트를 뽑았다.

“큭……!”

은혁은 비틀거렸다.

해신이 웃음기 가득한 어조로 설명했다.

-해신의 트라이던트에 담긴 힘은 ‘비트는 힘’이다.

‘비트는 힘…?’

-그렇다. 나와 함께 봉인된 그 트라이던트에 담긴 힘은 나도 온전히 통제하기 힘들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섬 근처에는 소용돌이가 발생하고 있을 터.

바다에 발생하는 거대한 소용돌이는 해신의 트라이던트에 담긴 힘 때문에 생기는 것이었다.

-그대라면 그것을 온전히 쓸 수 있겠지.

‘노력해보겠습니다.’

-바다를 부탁하네.

스으윽.

빛을 내던 석화는 마침내 빛을 잃었다.

모두에게 잊힌 해신은 마지막 힘으로 트라이던트를 맡긴 뒤 떠난 것이다.

“으음. 생각보다 평화롭게 받긴 했는데.”

해신의 트라이던트를 쥔 순간.

우드득.

“크악.”

손가락, 무릎, 팔꿈치가 멋대로 꺾이려 했다.

“이, 이건 그냥은 못 쓰겠네. 역시…….”

계획대로, 세븐 칼리버의 제6형태로 편입시켜, 안정성을 확보하기로 했다.

그때였다.

쿠르르릉…!

해저 지진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역시 피스메이커가 싸움을 일으킨 모양이군.’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하니, 슬레이버가 가만히 참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 * *

스르르륵…!!!

피스메이커가 해저 동굴에 부드러운 구멍을 뚫고, 단숨에 리바이어던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콰아아아아아아…!!

꿀렁꿀렁…!!

해수가 구멍으로 쏟아져 들어왔지만, 유속이 느렸다.

피스메이커는 이제 주변의 모든 걸 바이러스로 만들 수 있었으니까.

액체 상태인 바닷물은 물론, 돌조차도 부드러운 죽처럼 만들었다.

유기체에만 기생하는 바이러스의 속성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놓칠까 보냐!”

슬레이버가 뒤를 쫓았다.

-이것은 마지막 경고다! 두 놈 다 여기서 나가라!!

리바이어던이 외쳤다.

피스메이커는 히죽 웃었고, 슬레이버는 리바이어던의 목소리에 화를 냈다.

“보고도 모르는 거요?! 성좌 리바이어던이여! 나는 당신을 도우려고 하는 거요!”

-그대가 품은 뜻이 뭐든 간에, 자격 없는 자들이 그 통로에 들어온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노라!

-자격이라 했나? 인공 성좌여?”

피스메이커가 경멸하듯 코웃음 쳤다.

-네놈이야말로 진정한 성좌의 좌를 얻지 못한 반쪽짜리 아닌가? 그대는 비상 출입구의 관리 시스템일 뿐이다. 자격도 없이 성좌인 척하는 네놈이야말로 이곳을 지킬 자격이 없다.

-감히……!

-내가 지금 출입구로 가겠다. 그리고 그 핵을 감염시켜주지.

타앗!

피스메이커는 통로를 달렸다.

슬레이버는 [황금 방벽]을 피스메이커의 이동 경로 앞에 생성해서 방해했다.

그 순간, 리바이어던은 90도로 인사하듯 허리를 숙였다.

스르륵.

어깨 부위에 생체 포대가 생성됐다.

-[바이러스 캐논].

투확!!!

농축 바이러스 덩어리가 쏘아져 나갔다.

촤아악!!

황금 방벽에 적중되더니, 황금을 분해했다.

“젠장! 이젠 황금을 당연하다는 듯이 녹이는군!”

슬레이버는 혀를 찼다.

[가치 변환 : 패킷]을 쓴다면 순간적으로 피스메이커보다 두 배 이상 강한 힘을 낼 수 있지만, 그동안 쌓아 둔 가치와 체력을 너무 빨리 소모하게 된다.

‘어쩐다?’

힘을 아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하는 찰나의 순간.

타앗!

피스메이커는 과감하게 데이터 룸 안으로 뛰어갔다.

-기묘한 방이군.

각종 데이터 디스크가 잔뜩 쌓인 허름한 방이었다.

하지만 통유리 너머에 전송 장치 형태의 출입구가 있는 것을 확인한 피스메이커의 눈에 욕망이 들끓었다.

한 걸음 내디딘 순간.

스르륵.

공간 전체가 일렁이더니 서서히 좁아지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놈! 욕망에 눈이 멀었구나!

피스메이커가 들어온 데이터 룸처럼 보인 것은 리바이어던이 만든 함정용 가상 차원이었다.

물리 함정이 안 통하는 적을 방심시킨 뒤 가두는 염력의 방.

강력한 사이오닉 능력을 갖춘 자가 아니면 탈출이 불가능하다.

쿠구구구구구구…!

뜨드드드드드드…!

가짜 데이터 룸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완전히 찌그러뜨려 죽이는 단순하고 잔혹한 함정이었다.

-흠. 욕망에 눈이 멀었다는 것만은 인정해야겠군.

피스메이커는 그렇게 말하더니 손으로 벽과 바닥을 쓸었다.

가상 공간이었지만 피스메이커를 짓누르기 위한 물리적인 속성을 갖고 있었기에 만질 수 있었다.

-뭘 하는 건가?

-이해라네.

-이해?

-그래. 이해는 평화의 시작이자 끝이지. 안 그런가?

주르르륵.

피스메이커의 손바닥이 바닥을 쓸고 지나갈 때마다 녹색 점액이 묻어났다.

가상 공간 표면적이 녹색으로 변할 때마다 피스메이커는 분석할 수 있었다.

지이이이잉.

-강은혁 흉내를 내볼까? [바이러스 생산] + [평화의 이해] 융합.

-히든 이펙트 발동!

피스메이커의 스킬과 페넬레시아의 스킬이 하나로 합쳐지며, 기존에 없던 힘이 발휘됐다.

-퓨전 스킬 [맞춤형 바이러스 생산 : 시스템 바이러스].

파앗!

유기체 형태의 바이러스가, 이제는 100층탑 관리국만이 관리하는 시스템 일부를 오염시키는 가상의 바이러스로 진화했다.

-뭣…!

-100층탑의 피조물인 반쪽짜리 인공 성좌여. 너를 위해 제작된 바이러스다.

-으… 아아악…!

리바이어던은 생소한 감각을 느꼈다.

-그게 바로 고통이라는 거다.

피스메이커는 시스템 바이러스로 리바이어던을 감염시킨 뒤, 확인 삼아 ‘고통’이라는 개념을 주입했다.

-으아아아악!

-매우 성공적이군.

피스메이커는 리바이어던이 느끼는 고통을 통해, 시스템 네트워크의 한계와 범위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건가?

파앗!

피스메이커는 바이러스를 심어서, 관리자 권한을 일부 탈취했다.

‘압축.’

피스메이커는 리바이어던의 자아를 압축시킨 뒤, 더 효과적으로 시스템 바이러스를 뿌렸다.

-리바이어던의 자아가 최소한으로 압축되었습니다!

-플레이어 피스메이커는, 성좌 리바이어던의 권한을 탈취하였습니다!

-크크큭.

이제, 피스메이커는 리바이어던이 지닌 힘의 대부분을 빼앗아 쓸 수 있었다.

-가상 차원 해제.

스르륵.

피스메이커는 자신을 가뒀던 함정용 가상 차원을 해제했다.

피스메이커가 나온 순간.

“공간변환식 [황령파혼장]!!!”

가상 차원에서 밖으로 나오는 타이밍을 맞춰 날린 필살기.

왼손으로 공간을 금화로 만들어 지우고, 오른손으로는 공격.

적중한다면 [강제 평화]를 무시하고 피스메이커에게 치명상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피스메이커는 태연했고, 회피도, 방어도 하지 않았다.

터텅!!

[사이오닉 필드]가 발동하여 막아 냈기 때문이다.

“뭣?!”

-이제, 리바이어던에 대한 관리자 권한은 내게 있다네.

피스메이커는 이제 리바이어던의 강력한 사이오닉 에너지까지 쓸 수 있었다.

-오오, 이런 느낌인가. 이것이 성좌의 감각인가.

부글부글…!

높이 솟은 머리통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안테나를 닮은 촉수가 여러 개 돋아났다.

-시스템에 간섭한다는 건 이런 거였군. 관리국 놈들은 이런 식으로 100층탑의 세계를 인지해온 건가.

일반 플레이어는 볼 수 없는, 성좌나 관리국 고위층만이 인지할 수 있는 것이 피스메이커의 눈에 보였다.

스윽.

철컹!

피스메이커와 슬레이버 사이의 통로에 벽이 솟았다.

슬레이버는 단숨에 그 벽을 부수려 했지만.

-경고! 인공 성좌 리바이어던이 특수 자산을 지정했습니다!

-특수 자산을 파괴하는 경우, 관리국의 이름으로 막대한 손해 배상이 청구될 수 있습니다!

-필요한 경우, 유무형의 자산을 즉시 압류할 수 있습니다!

“뭣?!”

슬레이버는 기가 막혔다.

힘으로 부수지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부쉈다간 손해 배상을 청구한다는 게 문제다.

가치를 축적하고 그 자체를 힘으로 변환해 온 슬레이버였기에, 이 제약은 꽤 컸다.

-하하하하! 약점이 없는 길드장은 없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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