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 피스메이커의 집념
피스메이커는 가치를 지배하지만, 가치에 지배당하기도 했다.
“크윽! 이 자식이!”
슬레이버는 손해를 감수하고 벽을 부술 생각이었다.
그리고 피스메이커를 단숨에 박살 내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시스템 바이러스의 정령 소환].
화악!
슬레이버에게 시스템상의 불이익을 주는 바이러스의 정령을 뿌렸다.
-저희가 플레이어에게 불이익을 드릴께여!
-맞을 때마다 체력이 10% 감소할 꺼에여!
-저한테 맞으면 10초간 시력이 상실해영!
-저희를 죽이면 꼐쏙 증식할찌도 몰라영!
벽과 천장을 뚫고 흐릿한 시스템 메시지의 정령들이 마구 슬레이버를 공격해 왔다.
“제기라알!”
벽을 부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시스템 바이러스의 정령’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하하하하!
피스메이커는 일부러 큰 소리로 슬레이버를 비웃었다.
피스메이커 기준에서도 [시스템 바이러스의 정령 소환]은 막대한 체력과 마력을 소모했기 때문이다.
‘일단 슬레이버는 묶어두는 데 성공했군.’
피스메이커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렸지만.
콰두두두두!
벽이 무너지고, 슬레이버가 나왔다.
“어딜 등을 보여?”
-음?!
슬레이버의 곁에서 시스템 바이러스가 춤을 추고 있었다.
어느새 슬레이버의 부하가 된 것이다.
“내 이름이 왜 슬레이버인 줄 잊었냐, 피스메이커?”
-…그래, 그 스킬이 있었지.
스킬명이 매우 우스꽝스러운, [신용신무]였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신용 매수와 달리, 길드장으로서의 강함과 격에 걸린 신용의 힘을 이용해 상대를 무용으로 설득하는 스킬.
몰락한 지고의 위상조차 부하로 부리는 게 가능했다.
만기 기일이라는 게 존재해서 제한 시간이 존재했지만, 스킬로 적들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귀한 스킬이다.
-마음을 지닌 정령으로 만든 게 실책이었나.
피스메이커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또 무슨 술수를 벌일 생각이지? 그게 뭐든 간에, 쉽게 통하진 않을 거다.”
슬레이버는 이제 시스템 바이러스의 정령을 조종할 수 있다.
슬레이버의 전투력에 피스메이커가 본래 갖고 있던 시스템 바이러스의 정령을 연계하면, 확실히 피스메이커보다 강했다.
-보험을 들어두길 잘했군.
피스메이커가 웃으며 말했다.
슬레이버는 듣지 않고 바로 돌진 공격을 가했지만, 피스메이커는 벽을 세워서 막았다.
시스템 해킹을 통해 세운 벽이라 함부로 부술 수 없었지만.
-정령들이여! 이 벽을 치워라!
-넹!
-맡겨주세영!
슬레이버가 지배하게 된 시스템 바이러스의 정령들은 빠르게 벽을 치웠다.
여기에 몇 초가 걸렸는데, 피스메이커에게는 이 몇 초면 충분했다.
-원래는 강은혁의 동료인 염훈을 위협하기 위한 거였는데, 이 위협은 자네를 위해 쓰게 되었군.
파앗!
허공에 스크린이 떴다.
스크린은 50층 해양 도시의 한 호텔을 가리키고 있었다.
“거긴……!”
슬레이버도 아는 호텔이었다.
-이 호텔 수영장은 바이러스 풀로 변했다네. 신호만 하면, 배수 장치가 가동되어, 하수도를 통해 뿌려지지. 물론, 바이러스 증식 속도는 엄청나서, 상수도까지 역류할 걸세.
상하수도가 전부 녹색 바이러스로 물든다면 도시는 전멸이다.
“그깟 협박으로 날 막을 수 있을 거 같나?”
-크크크. 슬레이버. 우린 길드장이야.
“그래서?”
-일반 플레이어들은 길드장을 부길드장보다 몇 배나 강한 존재로 알고 있지만, 사실 매우 부자유스러운 존재지. 각자의 이상에 얽매여 있고, 운명치에, 역할에 매몰되어 살아가고 있지 않나?
피스메이커는 슬레이버의 얼굴을 가리켰다.
-자네는 편리하게 시장 NPC의 장점만 뺏어 써옴으로써, 정체를 효율적으로 숨기고 운명치 관리를 해올 수 있다고 믿고 있겠지? 글쎄. 예전에 구원 길드장 올마스크가 내게 해준 이야기들을, 조금 변용해서 들려주고 싶군.
피스메이커는 아주 달콤한 사탕을 물고 있을 때처럼 웃었다.
-슬레이버. 자네는 도시의 시장이라는 가면을 너무 오래 쓰고 있었어. 이미 도시가 바이러스에 절멸했다면 몰라도, 아직 괜찮다면 시장으로서 구하러 갈 수밖에 없지 않겠나?”
슬레이버는 입을 다물었다.
피스메이커는 통로의 숨겨진 벽 하나를 열어주었다.
-리바이어던의 지식으로 알게 된 건데, 이 통로는 50층 해안 도시의 지하와도 비상 통로로 연결되어 있더군. 자네라면 순식간에 도시를 구하러 갈 수 있을 걸세.
“……그래야겠군.”
슬레이버는 통로로 향했다.
“황금으로 네놈이 있던 호텔을 전부 뒤덮어서 바이러스를 막겠다. 빈틈이 없다는 게 확인된 직후, 다시 와서 네놈을 똑같은 방식으로 죽이겠다.”
-흐흐흐. 재밌군. 기대하겠네.
피스메이커는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소리를 했다.
슬레이버가 다시 돌아올 때쯤이면, 피스메이커는 100층탑 바깥, 지구로 나가 있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타앗!
슬레이버는 전력으로 도시를 향해 되돌아갔다.
대조적으로 피스메이커는, 유유히 스스로를 데이터 룸으로 전송시켰다.
파앗!
이번에는 가짜가 아니라 진짜였다.
-엄청 낡은 방이군. 어디 보자….
정면에 유리벽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전송 장치가 보였다.
전송 장치를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비상 출입구이며, 어떻게 활용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비상구라고 해서 문처럼 생긴 건 줄 알았는데 아니군.
피스메이커는 간단한 감상을 말한 뒤 손가락을 유리 벽에 가져다 댔다.
-으음…!
단순히 튼튼한 유리 벽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무려 13개에 달하는 보안 방화벽이 설치되어 있었다.
키이잉……!
피스메이커의 머릿속에 방화벽에 관한 정보가 들어왔다.
그중에는 리바이어던 자체가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에 대응하는 방화벽도 있었다.
-경고! 13중 방화벽에 대한 침투 시도 확인!
-물러나지 않을 시 관련 경보가 관리국에 전송됩니다!
피스메이커는 내심 철저하다 생각하면서도, 이미 감염시킨 시스템 바이러스를 통해 숨겨진 해제 방법을 알아냈다.
-해제.
덜컹!
유리 벽이 서서히 옆으로 밀려났다.
한 걸음 내디디려는 순간.
-……함정이군.
“네.”
스륵. 스륵.
은혁과 염훈이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맞춰볼까? 강은혁 자네는 절대 열쇠의 소유자로서, 이미 이 유리 벽 너머에 한 걸음 들어온 적이 있겠지?
“몇 걸음이긴 하지만, 맞습니다.”
그 직후 피스메이커가 바다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텔레파시]를 듣고 바로 나와야 했다.
-그리고 자네는 한 번 가본 적 있는 곳이라면, [그림자 도약]과 [그림자 터널]을 어디라도 쓸 수 있었지?
“하하. 저에 대해 공부 많이 하셨군요. 다 맞습니다.”
-그리고 함정을 잔뜩 깔아둔 모양이군.
방심할 수밖에 없는, 비상 출입구 바로 앞.
무심결에 은혁이 잔뜩 그림자 함정을 깔아둔 것을 밟았다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으리라.
그림자는 바이러스를 통째로 집어삼켰을 테니까.
-[시스템 바이러스 생성].
화악!
바이러스는 은혁이 아니라, 인근 공간의 시스템 자체를 감염시키고 효력을 발휘했다.
-드래곤 파워드 아머의 소환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그렇게 피스메이커는 규칙을 부여했다.
‘으음.’
피스메이커는 일시적인 어지럼증을 느꼈다.
단 한 줄짜리 규칙을 만드는 일인데도 상당한 심력 소모가 있었다.
“하하하! 드래곤 파워드 아머가 무섭긴 무서운가 보군요.”
-무섭지. 방심하면 확실히 죽을 테니까.
피스메이커는 솔직히 인정한 뒤, 길드장의 위엄을 담아 물었다.
-그래, 싸울 생각인가?
피스메이커가 물었다.
이번에는 염훈이 답했다.
“싸울 이유가 넘치지 않나? 100층탑 내부에 바이러스를 뿌리는 것만 해도 나쁜 짓인데, 아예 지구로 나가서 감염시킬 작정이라며?”
-내가 해온 일과 앞으로 할 일을 잘 요약해줬군.
“이거 머리에 제대로 한 방 먹여줘야 정신 차리겠군. 덤벼!”
염훈은 빅 썬더를 힘껏 움켜쥐었다.
-두려움을 모르는군. 자네 둘은 강하지만, 나도 많이 강해졌다네. 지금의 나는 자네들보다 강해.
“그딴 건 싸워 봐야 아는 거지!”
-으음. 정말 열정적이군. 왠지 나와는 상성이 안 맞을 거 같아. 미안하지만 자네들과는 싸우지 않겠네.
“뭐?! 여기서 또 도망이라도 치겠다는 건가!”
-아니. 자네들을 이 데이터 룸에서 추방하겠네.
피스메이커가 리바이어던의 권능을 이용해, 데이터 룸에서 염훈과 은혁을 쫓아내려 했다.
둘 다 동시에 [추방]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염훈은 추방할 수는 있었다.
그렇게 되면 은혁을 확실히 죽일 수 있으리라.
하지만 피스메이커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숨어 있던 누군가가 더 빨랐기 때문이다.
턱!
그 누군가는 손이 바이러스에 감염되건 말건 피스메이커의 어깨를 짚었다.
그 누군가의 정체는 빌이었다.
“[원자 분해].”
번쩍!!
쿠콰콰콰콰쾅!!!
피스메이커의 상반신 대부분이 터졌다.
-커억…!!
“뭔 엄살이야?”
빌은 추가로 양손에 마력을 모아 스킬을 쏘았다.
“[타키온 블래스트].”
슈쾅!!
꽈아아아아아아앙!!!
[타키온 블래스트]는 가상의 광속 입자인 타키온을 모아 냅다 쏘는 스킬.
대부분은 피스메이커의 몸을 뚫고 데이터룸의 벽을 박살 냈고, 일부는 피스메이커의 몸과 함께 광속으로 벽으로 돌진했다.
콰콰콰쾅!!!
피스메이커의 몸통은 4분의 1 토막 나더니, 뚫린 벽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쿠구구구구구궁……!!
데이터 룸과 인근 통로가 마구 흔들렸다.
“아, 너무 세게 날렸나? 무너지려나 보네.”
빌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고, 염훈은 기막혀했다.
“아니, 이게 무슨 전개야?! 응? 은혁아!”
“아, 너한테는 말 안 했지?”
은혁은, 관리국 차장 노리의 머리통을 날린 뒤 빌에게 도망친 바 있었다.
그때, 이런 대화도 함께 나눴었다.
“그렇다면 거래를 하죠.”
“무슨 거래?”
“피스메이커의 현재 위치와 피스메이커가 지닌 정신적인 약점. 그리고 ‘피스메이커를 죽이지 않고 굴복시키기 위해 무력을 이용하는 일에 관한 동맹’을 제의하겠습니다.”
“셋 다 관심이 동하긴 하는군.”
그렇게, 피스메이커의 약점에 관해 논하고, 함께 쓰러뜨리자는 구두 약속을 한 바 있었다.
그리고 재판 도중 빌이 뛰쳐나갈 때, 은혁은 3군주 인치의 쪽지와 함께 개인적인 쪽지도 함께 보냈다.
‘피스메이커를 상대로 싸울 때만은, 부르면 무조건 서로 돕기로 약속합시다.’
그 이후에도 피스메이커를 상대로 한 암묵적인 대항 협정을 맺어 둔 상태였다.
“그리고 방금 [텔레파시]로 호출한 뒤, [그림자 터널]로 불러낸 거야.”
“야, 그런 작전이면 미리 가르쳐 줬어야지!”
“…….”
“…양심에 찔리게 쳐다보지 마라. 쳇. 내가 미리 다 알고 있었으면 들켰겠지.”
의심 많은 피스메이커였기에 염훈이 작전을 알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으면 다 들켰을 수도 있었다.
“지금 그런 이야기 할 때 아닌데. 여기 곧 무너질 거 같은데.”
빌이 남 이야기 하듯 말했다.
-경고! 경고!
-데이터 룸의 외벽이 완파되었습니다!
-자체 복구 불가능!
-수리의 책임자여야 할 리바이어던의 기능이 일시 정지된 상태!
-바닷물이 들어옵니다!
콰아아아아아…!!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원자 분해 필드].”
빌이 밀려드는 바닷물에 손을 뻗었다.
파앗!
빠지지지직!
밀려드는 바닷물은 수소 산소 염소로 분해되고 기타 잔해물이 빠지직 소리를 내며 바닥에 쌓였다.
“와!”
염훈이 감탄했다.
“미리 말해두는데, 오래 못 버틴다.”
빌이 말했다.
아무리 ‘원자를 지배하는 사이오닉 메이지’라고 해도 마력이 무한한 것은 아니었다.
“강은혁. 네가 날 불렀으니 네가 책임져라.”
“벽은 빌 길드장님이 부순 거잖습니까.”
“그야 네가 [텔레파시]로, ‘제일 강력한 한 방을 준비해 주십시오.’라고 요구했으니까.”
“허참.”
은혁은 [메탈 벙커 소환]과 [돌 생성] [암석 변환] [광역 돌 합치기] 등의 스킬을 난사하여 벽을 틀어막았다.
콰르르르르……!
마구잡이로 쏟아져 들어오던 바닷물이 줄어들더니, 마침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