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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모든 직업-321화 (321/434)

321화 : 최종벽

“으윽, 어지러워.”

염훈이 앓는 소리를 냈다.

빌이 쓴 스킬 탓에 산소와 수소, 염소의 농도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광역 정화] 스킬을 써.”

“아, 그렇지! [광역 정화]!”

파앗!

순식간에 공기가 정화되었다.

빌이 질문했다.

“강은혁. 탈출하는 대신 벽을 틀어막은 이유는?”

“짐작하실 텐데요.”

“피스메이커가 이곳에 숨어 있다는 건가.”

빌이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바이러스의 핵심은.

어디선가 시스템 메시지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끊임없는 변이다.

뜨드드드드……!

차원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런 망할.”

빌이 가장 먼저 낌새를 눈치채고 스킬을 발동했다.

“[단분자 벙커 소환].”

파앗!

은혁, 염훈, 빌은 거대한 다이아몬드를 연상시키는 단분자 벙커 속으로 들어왔다.

“내가 설마설마하던 일이 벌어졌다.”

늘 졸린 듯한 얼굴의 빌이 이번만은 진지했다.

“이건 차원 감염 바이러스……하고 비슷한데, 더 강해 보이는군요.”

은혁이 말하자,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현실 감염 바이러스]겠지.”

“으음.”

현실 그 자체를 피스메이커의 의지대로 감염시키는 바이러스.

현실 조작 관련 능력은 관리국이 출동할 정도로 심각한 능력인데, 리바이어던을 압축해서 흡수한 피스메이커였기에 관리국을 속이고 현실 감염 바이러스를 소환해 냈다.

“이건 꽤 으스스한 경우라 할 수 있지.”

피스메이커는 빌의 첫 공격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 상태에서도 여전히 피스메이커는 더 싸울 수 있었으나, 빌이 날리는 제2의 공격을 그냥 맞았다.

일부러 맞음으로써, [바이러스 생산] + [평화의 이해]를 융합한 [맞춤형 바이러스 생산] 퓨전 스킬을 발동한 것이다.

그 결과물이 [현실 감염 바이러스]다.

“강은혁, 염훈 그리고 나의 연합 공격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겠지. 그게 현실적인 결론인 거야. 그리고.”

“그런 현실 인식하에 피스메이커가 내린 결론이 현실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를 만드는 거로군요.”

“믿기 어렵지만 그게 답이겠지. 젠장.”

빌은 바이러스와 백신의 전쟁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은혁이 만든 백신 덕분에, 기존의 피스메이커가 자랑하던 호흡기 감염식 바이러스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피스메이커 놈을 궁지에 몰아넣은 건 좋은데, 문제는 피스메이커 놈이 거기에 대응한다는 점이지.’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라.”

은혁은 어디선가 주워들은 주역의 한 구절을 읊었다.

그러자 염훈이 핀잔을 줬다.

“지금 신선처럼 말할 때야? 현실 자체를 감염시킨다니,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솔직히 잘 몰라.”

은혁의 사이오닉 런처는 사이오닉-차원 병기라서, 차원 자체를 통째로 날려 버리는 게 어느 정도 가능하다.

문제는 피스메이커가 감염시킨 현실이, 어느 수준인가 하는 점인데…….

“아, 걱정이네. 사이오닉 런처로 날렸는데, 바이러스가 더 멀리 퍼지면 어쩌지?”

“엥?!”

“54층의 차원뿐만 아니라, 막 55층이나 56층까지 바이러스가 퍼지면 그건 보통 민폐가 아니거든?”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어?”

“그걸 모른다니까 그러네.”

현실을 피스메이커의 뜻대로 감염시키는 바이러스의 확산은 100층탑의 누구도 생각지 못한 사태였다.

“즉, 대재난이라는 거지.”

은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세븐 칼리버를 제5형태, 칼라미티 해머로 만들었다.

우우우웅……!

칼라미티 해머는 마치 재난을 감지하듯 떨었다.

현실을 왜곡하는 바이러스라는 이름의 재난은, 칼라미티 해머도 쉽게 상대할 수 없는 재난이므로.

‘여기서부터가 진짜 도박인가.’

은혁은 각오했다.

“실수를 인정합니다.”

“어?”

“피스메이커를 [맹세]나 [계약 대결]로 묶어두려 한 게 제 오만이었습니다.”

은혁은 빌에게, 드래곤 파워드 아머를 이용해 싸워서 이겼던 일과 그 이후의 일을 빠르게 설명했다.

빌은 흠 소리를 냈다.

“맞아. 네 실수고 네 오만함이다.”

“…….”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다는 표정이군. 하지만 바이러스를 지배하는 놈이 저렇게 막 나갈 줄 몰랐다고 할 생각인가? 저놈 혼자만이라면 몰라도, 페넬레시아까지 돕는 형국이었다며? 오히려 난 자네가 이렇게 허술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군.”

‘그렇겠지.’

물론, 이는 은혁의 실수도 아니고, 계획일 뿐이었다.

‘피스메이커는 회귀 전의 제2차 길드 대전 때도 시스템 바이러스와 현실 감염 바이러스를 사용했거든.’

피스메이커는, 회귀 전 빌과의 대결에서도 그렇게 했다.

은혁이 피스메이커를 반쯤 죽인 뒤 봐준 것도, 빌을 부른 것도 전부 계획대로다.

일부러 피스메이커로 하여금 빌의 공격에 당하게 해서, 극심한 ‘바이러스 변이’를 유도한 것이다.

마치 제약 회사 실험실의 약학자가 특정 바이러스의 반응 유도 실험을 하듯.

회귀자인 것을 감안해도 매우 오만하고 위험한 실험인 셈이다.

‘최대 이득을 얻기 위해 가하는 꼼수는 원래 좀 위험한 법!’

이것은 은혁의 회귀자로서의 방침이기도 했다.

회귀자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안전하게 완만한 이득만 쏙쏙 뽑아 먹고 가는 방법.

혹은, 회귀 지식을 이용해 더 위험하게 최대 이익을 뽑아 먹는 방법.

은혁의 선택은 절대적으로 후자였다.

‘여기까진 계획대로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빌이 피스메이커보다 은혁을 먼저 죽이려 들 것이 뻔하니, 은혁은 얼른 실수였다고 말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 탓하지 맙시다.”

염훈이 끼어들어 한마디 했다.

뚜드드드……!

뚜드드드드……!

단분자 벙커에서 심상찮은 소리가 났다.

단단한 강도를 지닌 단분자였지만, 현실을 왜곡하는 바이러스 앞에서는 조금 두꺼운 도화지나 다름없다.

그나마 지금까지 버틴 것이 대단한 일이다.

빌은 쯧 소리를 한 번 낸 뒤 염훈에게 말했다.

“자네 말이 맞아. 염훈 길드장. 여기서는 강은혁을 추궁할 게 아니라, 작전을 요구하는 게 낫겠지.”

“작전이라면 있습니다.”

“거봐. 내 이럴 줄 알았어. 보나 마나 전부 다 계획대로라는 거겠지.”

“후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말로 설명할 시간이 없었기에 [텔레파시]로 빠르게 설명했다.

1단계. 빌이 단분자 벙커를 해제한다.

2단계. 강은혁은 절대 열쇠를 던진다. 단, 이 절대 열쇠에는 저격 모드 상태인 차원의 낚싯대의 낚싯바늘이 걸려 있다.

3단계. 피스메이커는 절대 열쇠를 뺏기 위해 현실 왜곡 바이러스를 약하게 하거나 아예 없앤다.

이 부분이 핵심인데, 피스메이커가 현실 왜곡 바이러스를 강하게 뿌려둔 상태라면, 절대 열쇠마저 감염되어 변질 될 수 있다.

절대 열쇠라고 해서 내구도 또한 절대적인 것은 아니므로.

즉, 피스메이커는 잠깐이라도 바이러스의 위력을 약하게 할 수밖에 없다.

4단계. 염훈이 달려들어서 피스메이커를 [정화]시킨다.

5단계. 일시적으로 약해진 피스메이커를 셋이 힘을 합쳐 쓰러뜨린다.

“간단한 작전이네. 잘될 거야!”

염훈이 용기를 불어넣었다.

“재수 없으면 단분자 벙커를 해제한 직후 즉사할 수도 있지만.”

빌이 중얼거렸다.

“제가 신호하면 해제하십시오.”

은혁이 차원의 낚싯대와 절대 열쇠를 준비하며 말했다.

스윽.

낚싯바늘에 절대 열쇠가 단단히 끼워졌다.

“셋, 둘, 하나! 해제!”

파앗!

단분자 벙커가 해제되었다.

그 순간, 세 사람은 작전과는 정반대 상황에 직면했다.

의외로 [현실 감염 바이러스] 농도는 매우 약했고, 피스메이커도 근처에 없었다.

“앗, 저기!”

데이터 룸에서도 가장 깊은 곳.

스테이지 경계면과 맞닿은 벽이 있었다.

그 벽에 피스메이커가 달팽이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슈르르르르르르르…….

“세상에.”

“지금 우리가 뭘 보는 거야?”

은혁과 염훈이 중얼거렸다.

그것은 100층탑 내부 차원과 바깥 세계인 지구를 나누는 ‘최종벽’이었다.

벌집을 연상시키는 육각 무늬가 한없이 펼쳐진 새하얀 벽.

피스메이커는, 일반 플레이어는 100층탑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현실을 감염시키더니, 100층탑 내부 시스템이 작용하는 차원을 벗겨 내고, ‘최종벽’에 도달한 상태였다.

이 최종벽의 재질은, 지구에서 100층탑 건물 외벽을 관찰했을 때의 벽과 사실상 같은 것으로서, 여기서 저 최종벽을 주먹으로 두드릴 경우, 100층탑 외벽 밖에 설치한 과학자들의 음파 탐지기가 소리를 감지하는 게 가능할 정도다.

“시스템에 의해 가려진 경계면이고 뭐고 다 벗긴 다음 최종벽마저 드러내게 하다니. 저게 도대체 무슨 집념이란 말인가.”

빌은 혀를 찼다.

이 순간만은 적대 관계임에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보아하니 우리는 안중에도 없군.”

바깥 세계 지구를 감염시키고 싶다는 피스메이커의 욕망은 이제 스스로도 통제 불능이었다.

빌, 은혁, 염훈이 단분자 벙커에 들어가서 시야에서 사라진 직후, 피스메이커는 100층탑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욕망으로 벽에 달라붙은 것이다.

주르륵.

주르르륵.

피스메이커는 거대 달팽이를 연상시키는, 5미터짜리 반투명한 은색 촉수 괴물이 되어, 최종벽을 뚫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물론, 최종벽은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의외로 우리를 죽이려고 하지 않네?”

염훈이 중얼거리자 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장들, 특히 피스메이커 같은 자는 욕망에 휩쓸리면 눈이 돌아가거든.”

[현실 감염 바이러스]로 차원을 일그러뜨릴 때, 그것은 사실 강은혁 일행을 죽이려는 목적으로 한 일이 아니었다.

[맞춤형 바이러스 생산] 스킬은 [평화의 이해] 스킬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오히려 은혁, 염훈, 빌의 연합을 싸워서 이기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얻었을 터.

피스메이커는 싸우는 대신, 진짜 목적인 지구로 향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바이러스를 먼저 만들게 된 것이다.

현실 감염은, 저 최종벽의 표면을 이루는 물질계 차원의 벽을 찢어내는 용도였다.

“난 저 최종벽을 본 적 있지.”

빌이 말했다.

“5층, 길드연합국의 본래 면적은 지금보다 훨씬 좁았지. 하지만 7대 길드의 길드장 일곱이 힘을 합쳐, 면적을 키운 적 있다.”

“저도 들은 적 있습니다.”

“그때, 5층을 강제로 넓힐 때 저것에 닿은 적 있다. 저 최종벽까지 부술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는데, 관리국이 접근해 오더군. 그래서 관리국과의 협력을 통해 5층의 넓이를 넓혔지.”

즉, 관리국은 저 최종벽마저도 넓히는 게 가능하고, 그 흔적은 바깥 지구에서 관측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음, 7대 길드의 길드장들이 힘을 합치면 저 최종벽까지 뚫는 게 가능한가요?”

“아마도? 하지만 뒷감당이 두려웠던 나, 저스티스, 어센션, 올마스크는, 최종벽을 함부로 건드리는 일에는 강력히 반대했지. 해피, 슬레이버, 그리고 저 피스메이커는 최종벽을 부수는 일에 강력히 찬성했고.”

그리고 다수결의 원칙과 관리국과의 협상을 통해 차원벽은 건들지 않기로 했다.

“지금의 피스메이커가 혼자서 차원벽을 뚫는 게 가능할까요?”

“더 이상한 건 관리국이 경고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는 점이야.”

“피스메이커가 리바이어던을 흡수한 상태이기 때문이겠지요.”

평소였다면, ‘-경고! 최종벽이 드러났습니다!’ 같은 메시지가 연신 튀어나왔어야 한다.

하지만 인공 성좌 리바이어던은 비상 출입구를 보호하고 관리하는 역할도 하기에, 일반 관리국 요원을 웃도는 상당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상할 정도로 시스템 경고가 없었다.

“음. 네 말대로 관리국은 이 사태를 관측하지 못하고 있거나, 관측해도 함부로 해결사를 보내지 못하는 상황인 것 같군.”

빌이 말했다.

이어서 염훈이 말했다.

“그럼 더 말할 것도 없네요. 다 같이 달려들죠!”

“할 수 있으면 해보게.”

“네?”

“해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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