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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모든 직업-333화 (333/434)

333화 : 56층으로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라!’

염훈은 광장의 하늘에 띄워진 스크린을 통해, 워잭, 테일러, 레나, 브라이언이 힘을 합쳐 59층을 뚫던 모습을 중계로 본 적이 있었다.

59층 공략대가 59층의 보스를 처치하는 모습을 보고 염훈은 물론 다른 플레이어들도 모두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때, 염훈은 은혁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돈이나 명성도 좋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역할을 맡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은혁은 웃으며 방송국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며 넘어갔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구나.’

염훈은 갑자기 감개무량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은혁이 녀석이랑 함께하면 뭐든 할 수 있…… 얼래?’

기억을 더듬던 염훈은 이상함을 느꼈다.

‘방금 본 영화에서 은혁이는 왜 안 나왔지?’

아무리 기억의 일부가 블러 처리되었다곤 해도 은혁의 얼굴이 전혀 나오지 않는 건 이상했다.

‘아무리 나 자신에 관한 미래라 해도, 내가 지도자가 되는 거면 은혁이가 옆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장면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은혁이한테 물어봐야지.’

염훈은 그렇게 생각하며 극장을 나왔다.

저벅저벅…….

극장을 나와보니 가관이었다.

“저작권 침해입니다!”

천사들이 마구 은혁을 향해 화를 냈다.

“[사이코 메트리] + [괴식 요리] 융합.”

은혁은 무시한 채 퓨전 스킬을 썼다.

-히든 이펙트 발동!

“퓨전 스킬 [레시피 복사]!”

번쩍!!

섬광과 함께 은혁의 손에는 천국 팝콘의 레시피가 생성되었다.

“으음. 이렇게 만드는 거였나. 뭐, 옥수수 농사도 짓고 있으니까 걱정 없어.”

은혁은 이 맛 좋은 팝콘을 팔 생각이었고, 우선 공짜로 뿌릴 생각이었다.

‘나랑 빌이 싸우는 장면이 생중계될 때, 부하들 시켜서 팝콘 무료 시식 코너를 만들어서 뿌릴까? 중독성 있는 맛이라 모두가 잔뜩 사 먹겠지?’

이름도 아예 ‘불패불굴 팝콘’으로 바꿔서 팔까 생각 중이었다.

그러자 천사들은 악을 썼다.

“강은혁 플레이어. 아무리 그래도 너무 하지 않습니까!”

“맞아요! 우리 천사들의 팝콘 요리법을 훔쳐 가다니!”

“우리도 여기서 관리국 측에 월세 내고 장사하는 거라고욧!”

하지만 은혁은 코웃음 쳤다.

“음식 관련 레시피에는 저작권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마, 말도 안 돼!”

“레시피는 그 자체로 사상이 담긴 창작물이라기보다는, 요리 제작을 위한 지시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즉, 남의 요리를 훔치는 건 절도지만, 요리 만드는 법을 훔치는 행위는 기술이다, 이거죠.”

“이, 이 나쁜 도둑아!”

“제 직업 중에 도적이 있으니, 뭐, 그렇게 부르셔도 되겠네요. 하하핫!”

은혁이 웃자, 천사들은 분한 마음을 못 이기고 팝콘을 던지고 바닥을 굴렀다.

은혁은 얄밉게도, 날아오는 팝콘을 입으로 받아먹다가 염훈을 발견했다.

“어, 왔냐?”

“허참. 먼저 나와서 이러고 있었냐.”

루핑은 천사들을 말렸고, 그동안 은혁은 쓰윽 몸을 뺐다.

“자, 그럼 가자.”

“음. 답은 얻었어?”

“답?”

“빌하고 싸울 때를 대비한 미래 지식을 얻으려고 여기 온 거 아님?”

“응? 아닌데?”

“그럼 왜 온 거야?”

“그야 기본적으로 한 층씩 오르는 게 답이니까.”

“엥?”

“56층에 가려면 55층을, 57층에 가려면 56층을 클리어해야 하는 법.”

“서, 설마.”

“그래. 56층과 57층까지 단숨에 뚫자!”

* * *

-56층 : 서부의 현상금 사무소

황톳빛의 탁 트인 평야.

말라비틀어진 관목들과 회전초.

멀리 보이는 산맥과 가파른 계곡.

그리고 고독한 개척 도시.

“와, 서부 영화에 자주 나올 법한 배경이네.”

염훈이 중얼거렸다.

56층의 대기실은 서부 지형이 훤히 보이는, 높은 산꼭대기였다.

팻말 하나만 달랑 꽂혀 있었다.

‘데스 밸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음울하고 불길한 필채로 적혀 있었다.

“내려가자.”

조금 걸어 내려가니 곧 마을이 나타났다.

100층탑에서는 비교적 이질적인 무기인 6연발 권총, 리볼버를 허리에 차고 다니는 이들이 많았다.

대학생 시절의 염훈이라면 권총 차고 다니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에 좀 놀랐어야 하지만.

‘딱히 안 무섭네?’

총을 찬 이들은 대부분 험상궂은 사내들.

현상범인지 현상금 사냥꾼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외모들을 하고 있었지만, 염훈은 그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을 태연히 받아냈다.

“옳지. 여기 게시판이 있네.”

마을 한복판에 커다란 게시판이 세워져 있었다.

현상금 포스터를 붙였다 떼었다 한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게시판을 본 순간 미션창이 개방되었다.

파앗!

<56층 메인 미션 : 현상범 사냥>

-목표 : 56층에 존재하는 현상범을 사냥할 것.

현상범은 크게 NPC와 플레이어로 나뉘며, 현상금 또한 천차만별이다.

-성공 시 보너스 : 현상금 포스터에 적힌 현상금 획득.

-실패 시 페널티 : 현상범의 손에 의해 죽거나 노예가 된다.

-제한 시간 : 3일.

“과연. 본격적이네.”

염훈은 중얼거리는데, 카우보이모자를 쓴 보안관과 보안관보들이 다가왔다.

“비켜주시오.”

아주 큰 새 현상금 포스터 하나를 한가운데 붙였다.

-범죄 개요 : NPC 섀넌은 알콜 증류소를 습격, 파괴, 방화하였으며, 증류소의 경비대원들을 다수 살해하였다.

-현상금 : 5,500 골드.

-추정 난이도 : 매우 높음.

보안관보들이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어 주변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보안관은 우렁차게 외쳤다.

“다들 들으시오! 특히 새로 온 플레이어들이 있다면 꼭 들으시오!”

은혁과 염훈은 귀를 기울였다.

“일부 플레이어들은 ‘히든 미션’을 찾아서 계곡 너머까지 가는 경우가 있소이다! 강조하지만 절대 그러지 마시오!”

“왜요?”

가까이 있던 염훈이 불쑥 물었다.

성기사 특유의 갑주 차림새의 염훈을 위아래로 훑어본 보안관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보이는 이 사람처럼 직업이 성기사이거나 성직자인 사람도 절대 가지 말란 말이오! 계곡 너머는 야만족과 그 야만족이 섬기는 혼령들의 구역이니까!”

보안관의 말이 끝나자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맞아. 거긴 가면 안 돼.”

“총에 맞아도 안 죽는 혼령 새끼들.”

“게다가 야만족들은 한 번 총을 쏘면 소리를 듣고 죄다 우르르 몰려오니까…….”

“하긴. 마을에까지 피해 끼치면 민폐가 따로 없지.”

다른 이들이 납득하는 걸 본 보안관은 염훈에게 작게 말했다.

“당신의 명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염훈 플레이어와 강은혁 플레이어. 하지만 이 경고를 귀 기울여 들어주십시오.”

“아, 네. 플레이어이신가 봐요?”

염훈이 호기심을 갖고 묻자 보안관은 카우보이모자를 슬쩍 매만지며 말했다.

“서부극 팬이라, 어쩌다 보니 보안관으로 정착하게 됐습니다. 이래 봬도 상승 길드 1군의 감독관까지 했던 사람이지요.”

“아, 상승 길드…….”

브라이언이 은혁에게 꺾인 뒤로 존재감이 확 줄어든 길드다.

“혹시 브라이언에 대한 소식 아는 것 있습니까?”

은혁이 물었다.

“약간은.”

“안다고요?”

“당신에게 패배한 뒤, 혼자서 59층까지 가셨소. 그런 뒤, 다시 여기 내려오셨지요.”

“다시 내려왔다……?”

“그렇습니다.”

보안관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나셨는데, 무척 만족스러워 보였습니다.”

“흠. 그 이유도 짐작이 갑니까?”

“전혀 모릅니다. 다만 머리카락이 백발로 바뀌신 뒤라 그런지, 무척 분위기가 다르게 변하셨더군요.”

“뭐, 그렇겠지요.”

물론, 브라이언이 강해지는 속도보다 은혁이 강해지는 속도가 훨씬 빠르기에, 브라이언이 힘을 길러서 은혁을 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은혁이 말하자, 보안관은 경계심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드리겠습니다. 보안관으로서, 마을에 위험을 가져오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재차 경고합니다.”

“염려 마십쇼.”

“정말입니다!”

“알았다니까요.”

보안관은 미심쩍어하며 물러났다.

염훈은 은혁에게 소곤소곤 물었다.

“또 무슨 깽판을 계획 중인 거야?”

“잉? 전혀 아닌데?”

“음. 나한테까지 비밀로 해야 하는 수준의 깽판이구나? 으으.”

“진짜 아니래도 그러네.”

은혁은 그렇게 말하며 선즈 리볼버를 총잡이처럼 빠르게 뽑았다.

“현상범들만 골라 죽이면 되는 미션인데, 마을에서 깽판을 칠 이유가 없잖아?”

지형지물을 모조리 갈아 없애는 식의 플레이를 좋아하는 은혁이었지만, 이번에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이번 층은 빠르게 간다!’

* * *

마을에 위치한 고즈넉한 바, ‘웨스턴’은 조용했다.

낮 시간대라 손님이 없었던 것이다.

끼이…….

문을 열고 두 사람, 은혁과 염훈이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댄디한 콧수염을 지닌 바텐더가 말했다.

은혁과 염훈은 자연스럽게 스툴에 앉았다.

“처음 오신 분들이시군요?”

“하하. 티가 많이 납니까?”

“낮 시간대부터 이곳에 오는 분들은 매우 드뭅니다. 현상범들을 밤중에 잡는 건 특히 어려우니까요.”

“음, 하긴 그렇겠군요.”

“처음 오신 분들이니 하우스에서 한 잔 올리지요.”

옥수수 향이 진한 위스키 두 잔이 은혁과 염훈 앞에 나왔다.

은혁과 염훈은 향을 음미하며 마셨다.

짤그랑.

골드를 몇 개 내미는 은혁.

바텐더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음? 위스키는 무료 서비스입니다만.”

“위스키값이 아니라 정보료요.”

바텐더가 히죽 웃었다.

“서부극에 대해 좀 아시는 분이군요.”

-바텐더 NPC 버튼의 호감도가 상승하였습니다!

바텐더는 기쁜 듯이 빈 잔을 행주로 닦았다.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뭐든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비밀 현상범의 위치라든가, 이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NPC의 마음을 훔칠 수 있는 비법이라든가, 그것도 아니면 차기 보안관으로 선출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법이라든가.”

바텐더는 싱긋 웃었다.

“뭐든 가능합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물어봐야겠군요. 술의 성좌, 바쿠스의 차원으로 가는 법을 알려주십시오.”

“……!!”

바텐더는 경악했다.

“왜, 왜 제가 그런 걸 알 거라고 생각합니까?”

“여기가 바쿠스의 신전이라는 것은 잘 압니다. 당신이 그분의 신도 중 하나라는 것도.”

“음……!”

56층은 척박한 자연환경 속의 개척 도시다.

그런 곳일수록 술 소비량이 많을 수밖에 없다.

술 소비량이 많은 곳일수록 ‘술의 성좌’가 관심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

이 웨스턴이라는 바와 바텐더의 정체는 바쿠스의 신전이며 신도인 것이다.

“다 알고 오신 모양이군요. [신성력 감지] 스킬에도 들키지 않도록 교묘하게 운영해 왔는데.”

바텐더는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염훈이 호기심에 질문했다.

“꼭 숨겨야 할 이유가 있나요?”

“편하게 술 마시던 바의 정체가 사실은 신전이었다고 하면, 술 마시는 사람들의 마음이 불편해지지 않겠습니까?”

“음, 그렇겠군요.”

“하지만 술에 물을 타거나, 질 나쁜 증류주를 손님들께 내놓은 적은 없습니다.”

“압니다. 당신이 양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부탁하는 겁니다.”

“도대체 바쿠스 님의 차원에는 왜 가고 싶은 겁니까?”

“술 받으려고요.”

“술? 특별히 찾는 술이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거라면 그냥 제가 만들어드리거나, 대신 받아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바텐더는 말끝을 흐렸다.

은혁의 표정을 보니 그가 원하는 건 그런 간단한 요구가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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