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 빙천대제를 찾아서
차원은 생겨나기도, 파괴되기도 한다.
그 여러 차원에 존재해 온 방식 중 공기 중의 마력을 내면에 체화한 방식, 내공을 이용해 무술을 행하는 방식을 무공이라 한다.
이 무공은 매우 강력하지만, 이에 관련된 차원이나 존재들은 지고의 위상에게 침략당하거나, 악한 성좌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으며 스러졌다.
그리고 망하기 직전의 차원, 또는 각 무공의 고수들의 존재의 파편을 100층탑 관리국이 거두어 만든 곳이 이곳, 57층이다.
“이 무공의 고수라는 자들은 대부분 성격이 매우 괴팍하지요. 수련을 빙자한 괴롭힘도 한둘이 아니오.”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게임과 현실의 중간인 100층탑에서도 레벨을 올리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그런 시스템의 보정 없이 순수한 노력과 재능만으로 무공의 깨달음을 얻었다면,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쉽게 주진 않을 터.
“그러니 주의하십시오. 여기 존재하는 무공의 고수들은, 무투가 숙련도가 높은 자일수록 더 험하게 굴리는 자들이니까. 저도 여러 번 실패했습니다.”
톡스릴은 실패담을 일일이 말하진 않았다.
대신, 실패 횟수가 누적되면, 방금 본 것처럼 사당 앞에 모여 앉아 오랫동안 참선을 강제로 하게 된다고만 말했다.
“아! 그리고 무투가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무투가 전용 히든 미션 말이지요?”
“아! 다 알고 계셨군요? 그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불패불굴 길드는 정보에 강하거든요.”
직업이 무투가인 자가 일반 미션을 클리어한 경우, 추가로 더 난이도가 높은 히든 미션에 도전이 가능하다.
은혁은 오늘 추가 미션을 할 생각은 없었다.
“혹시 브라이언 보셨습니까?”
“브라이언이라면 상승 길드의 부길드장 말입니까?”
“네.”
“언뜻 보긴 했습니다. 그분, 머리가 하얗게 셌더군요. 다만 말 그대로 잠깐이고, 그 이후로는 보지 못했습니다. 이곳에 계신지, 다른 곳으로 떠나셨는지.”
“조언 감사합니다. 들어야 할 건 다 들었군요.”
은혁은 염훈을 돌아봤다.
염훈은 더 묻기보다는 바로 미션에 도전해 보고 싶어 하는 듯했다.
은혁과 염훈은 톡스릴에게 감사를 표한 뒤 금화를 넉넉히 선물했다.
톡스릴은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5층으로 돌아가 영약이라도 사 먹어야겠군요.”
“더 좋은 용도 알려드릴까요?”
“음? 그게 있습니까?”
“영약을 사서, 미션에서 만나는 스승에게 바치는 겁니다.”
“엥?”
“조언은 끝. 가자, 염훈.”
* * *
사당으로 들어가자, 톡스릴이 가르쳐 준 것과 동일한 미션창이 떴다.
뒤이어 시스템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고수의 사당에 들어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1분 뒤 고수가 배정될 것입니다!
-남은 시간 : 60초.
-남은 시간 : 59초.
-남은 시간 : 58초.
그때, 은혁은 염훈에게 눈짓하더니, 금화를 꺼내라 했다.
염훈은 어리둥절해하며 금화를 꺼냈다.
“여기 올려놔.”
“엥? 5만 골드를?”
“날 믿어.”
은혁의 말대로 염훈은 값비싼 금화와 금괴를 올려놓았다.
그 순간.
-여러 고수들이 예의에 감탄합니다!
-준성좌급 고수들이 제자로 삼겠다며 제안해 옵니다!
-취권의 고수, 룽 페이.
-도룡도의 검성, 강운.
…….
…….
-무당살수객, 칠종검.
-정통 펜싱의 대가, 루카스.
별별 이름이 다 있었다.
“엄청 많네.”
“그나마 금화를 냈기에 수준이 정말 높은 고수들만 나온 거야.”
만약 금화를 지불하지 않았다면 랜덤으로 배정된 고수가 스승으로 붙는다.
‘으으, 또 옛 기억 떠오른다.’
회귀 전 은혁에게 붙었던 고수는 혈왕백검 중 한 명인 ‘유문기’라는 고수였다.
말이 고수지, 혈왕의 부하 100명 중 말단 중에서도 말단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처발렸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은혁이 지금 혈인술사 스킬로 발현하는 [피구름 생성] 스킬과 비슷한 [혈검화]를 쓰는데, 순수한 노력형 전사였던 은혁은 [패링]도 안 통해서 졌다.
그리고 두들겨 맞으며 수련을 했었다.
“은혁아. 넌 누굴 고를 거야?”
“정해져 있지.”
내일 있을 빌과의 대결에 앞서, 무리해서라도 57층에 오려고 했던 이유.
“그보다 염훈, 네가 걱정인데.”
염훈 성격상, 어떤 스승이 걸리건 꾀부리지 않고 계속 열심히 수련할 게 뻔하다.
또한, 염훈의 특성상, 스승이 염훈의 기를 꺾으려 시도해도 꺾이지 않을 터.
‘차라리 한 번 꺾여주는 게 나을 수도 있는데.’
스승은 스승대로 지치고, 염훈은 염훈대로 오래 걸리는 수련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은혁은 고민했고, 염훈은 은혁이 고민하는 걸 보고 덜컥 겁이 났다.
“제일 쉬운 스승으로 하면 되지 않나?”
“음…….”
은혁은 각오를 마쳤다.
“염훈. 조만간 너도 승급을 할 때가 온 것 같다.”
지금의 염훈은 4차 각성 성기사였다.
“오옷! 드디어?!”
“그래. 5차 각성 직전까지 간다고 생각하고, 이번에 열심히 하자.”
“물론!”
“좋아! 그럼 난이도가 좀 있는 혈왕으로 하자.”
혈왕은 사특한 무공을 쓰는 존재.
아마도, 57층의 무공 고수 중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다.
“아, 근데 그건 너무 강할 거 같은데?”
“걱정 마. 파훼법 알려줄 테니까.”
은혁은 혈인술사 스킬과 무투가 스킬을 연계하여, 허공에 시연해 보였다.
“하여간 [혈풍]만 주의하면 돼. 네게는 [지크리엘의 날개]와 [2초 무적]이 있으니 할 수 있을 거다.”
“으음.”
“그리고 본체는 의외로 약하다던데, 하여간 뭐, 맞아가며 싸워!”
사실 그게 목적이다.
사특한 혈왕의 공격에 맞으면 맞을수록 숙련도가 오를 테니까.
어지간한 강적과 싸워도 성기사 숙련도가 오르지 않는 염훈에게는 오히려 적당한 상대다.
“좋아! 혈왕을 스승으로 삼겠다!”
-스승이 결정되었습니다!
-혈왕의 거처로 전송됩니다!
파앗!
혈왕처럼 강력한 존재에게는 자신만의 차원이 있었다.
그곳에서의 선택지는 혈왕에게 쫓겨나거나 혈왕을 꺾거나일 뿐.
“힘내라, 염훈.”
은혁은 심호흡을 한 뒤 외쳤다.
“빙궁의 지배자, 빙천신공의 빙천대제를 스승으로 삼겠습니다.”
-경고! 빙천대제는 스승이 되길 거부한 존재입니다.
-메인 미션 중인 플레이어에 한하여, 단 1회 도전이 가능하나, 죽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말로 57층 메인 미션 전용 스승으로 섬기길 신청합니까?
“네.”
-스승이 결정되었습니다!
-빙천궁으로 전송됩니다!
파앗!
휘오오오오오……!
영하 30도에 육박하는 냉기의 돌풍이 몰아치는 동굴.
“으으.”
은혁은 [화염 방사] 스킬을 약하게 써서 몸을 보호했다.
“여긴 진짜 처음이라 좀 걱정되네.”
회귀 전에도, 냉기를 전문으로 하는 존재와 마주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나마 빙천대제가 지닌 ‘저주’에 대해서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기에 용기를 가지고 걸어갔다.
“음?”
꽁꽁 얼어붙은 플레이어가 보였다.
통째로, 두께가 10cm는 되어 보이는 얼음에 완전히 갇혀 있었다.
“흠.”
은혁은 [염열파]를 냅다 먹였다.
화르르르륵!!
보통 냉동된 인간을 녹인답시고 불을 붙이면, 해동 과정에서 십중팔구 죽는다.
하지만 은혁은 [그림자 결속]을 걸고, [염력 부여] 스킬도 걸어줬다.
우우우우우웅……!
무형의 사이오닉 파워가 얼어붙은 플레이어의 생명력을 유지시켜줬다.
“으……으으으.”
얼음의 대부분이 녹자 고통스러워했다.
“[피구름 생성]. [피의 재생].”
슈우우우욱.
은혁이 만든 피구름이 플레이어 몸속에 들어갔고, 그것이 재생되었다.
“허억, 허억! 여, 여긴?”
플레이어가 힘겹게 눈을 떴다.
하지만 안구는 얼었다 녹은 탓에 회복되려면 더 시간이 필요했다.
때문에 그에게 은혁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괜찮습니까? 여긴 빙천궁으로 가는 통로입니다.”
“으으, 당신이 날 구한 거요?”
“그렇습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구려. 아아, 하지만 운이 없소.”
“왜 그렇습니까?”
“당신은 내 손에 죽어줘야 하니까!”
파바바박!
그가 시전한 것은 방금 얼었다 부활한 자치고는 엄청나게 빠른 무투기 스킬 [연쇄파옥수]였다.
문제는 상대가 은혁이라는 점이지만.
“[멀티 패링].”
파바바바바박!
은혁은 청염백관단검을 이용해 전부 빠르게 쳐냈다.
“끄아악!”
단검 칼날로 한 [멀티 패링]이다.
당연히 부활한 자의 손은 피투성이가 됐다.
은혁은 금화를 꺼냈다.
“읏차.”
팅!
은혁은 튕긴 금화를 손등에 안 보이게 얹었다.
“원래는 날 기습한 놈은 안 살려두는데, 지금은 솔직히 호기심이 생기는군. 금화가 앞면인지 뒷면인지 맞히면 살려주마.”
“으으, 죽이려면 죽여라. 어차피 내가 널 못 죽이면 내가 죽으니.”
“흠, 그래?”
뻐억! 뻐억!
은혁은 일단 말없이 좀 두들겨 팼다.
1분 뒤.
“……죄, 죄셩함미다.”
잔뜩 맞고 나니 정신이 나는 듯, 그는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당신은 누구고, 왜 여기 얼어붙어 있었고, 왜 날 죽이려 한 건지 일목요연하게 말해봐.”
“네, 제 이름은.”
그의 이름은 ‘포스트’라고 했다.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100층탑에 들어온, ‘3기’ 플레이어라고 했다.
“저는 교황제 폐하의 대장군이신 ‘찰스’의 경호원이었습죠.”
“호오?”
교황제 관련 정보를 얻을 줄은 몰랐다.
“교황제 폐하에 대해 아십니까?”
“그의 본명이 알렉스라는 점, 의도적으로 패배하고 모습을 숨겼다는 것까진 알지.”
“그, 그걸 어떻게?!”
“이래 봬도 난, 교황제의 재상이었던 브릭스로부터 힘을 물려받은 몸이다.”
은혁은 [피구름 생성]을 보여줬다.
그런 다음 브릭스가 고대의 흡혈귀의 힘을 받은 채 잠들어 있었고, 그 힘을 물려받은 것까지 설명했다.
그러자 깜짝 놀란 포스트는 보다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네. 그럼 숨김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장군 찰스께서는 교황제 폐하의 명령에 따라 늑대인간이 되셨고, 그 힘을 통제하는 법을 알아내기 위해 100층탑의 이곳저곳을 방랑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대신, 저에게는 이곳에서 수련을 하라 하셨죠.”
“그래서 여기 온 거군? 수련하러.”
“그렇습니다. 문제는, 제가 너무 패기가 넘쳤다는 것이겠지요.”
포스트가 차가운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저는 무투가였기에 추가로 어려운 미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미션 기회를 이용해, ‘제자를 받아들이는 걸 가장 싫어하는 무공 고수는 누구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게 빙천대제였군.”
“그렇습니다. 그에게 도전했던 저는 겨우 십여 초 만에 패배했습니다. 그는 패배한 저를 죽이긴 아깝다며, 저를 임시 제자로 삼은 뒤 시험을 내렸습니다.”
“그 시험이란?”
“이곳에 찾아오는 다른 플레이어를 죽일 것.”
“꽤 잔혹한 시험이군.”
“문제는, 이곳에 찾아오는 플레이어 자체가 극히 드물다는 것이었죠. 저는 전송 위치인 이 동굴 근처를 서성이며 다른 플레이어가 빨리 찾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포스트는 부르르 떨었다.
“빙천대제는 저를 갖고 놀 작정이었습니다. 덜덜 떨며 기다리는 저에게, 갑자기 거대한 냉기의 폭풍을 방출했습니다. 아아, 그리고 저를 통째로 얼어붙게 한 것이지요. 저는 얼마 안 가 의식을 잃었고…….”
“오늘, 내가 널 구한 거군.”
“그, 그렇습니다.”
“그럼 빙천대제에 대한 정보 좀 더 내놔 봐.”
“정보라고 해봤자…….”
워낙 순식간에 패배한 터라, 빙천대제의 스킬이 뭔지, 약점이 뭔지 같은 것은 알지도 못했다.
“너, 빙천대제의 제자가 되었다며?”
“임시 제자입니다만.”
“구배지례라든가, 뭐 그런 예법을 요구하지 않았나?”
“간단히 삼배를 하는 것으로 마쳤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게…….”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