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 세븐 칼리버 제6형태
자폭의 포션 설명창을 본 은혁은 기가 막힌 듯이 말했다.
“……이런 위험한 걸 나보고 먹으라고?”
“설마요! 원래는 제가 진작 마셨어야 할 물건이지만, 저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놈입니다. 어차피 영원히 쓸 일이 없을 것 같으니, 차라리 강은혁 님께 드리는 겁니다.”
“실제로 쓸 일이 없길 바라지만, 뭐, 고맙게 쓰지.”
그렇게 세 사람은 게이트 밖으로 나갔다.
* * *
연구 길드장 빌은 50층으로 잠시 이동했다.
50층의 오염된 바다와 피스메이커가 모 호텔에 쌓아 두고 간 독극물을 복구하느라 바쁜 자유시장 길드장 슬레이버가 빌을 맞이했다.
“바쁜데 와서 미안하군.”
“허, 네가 미안하다 소리를 먼저 하는 걸 보니 보통 용건으로 온 게 아닌가 보군?”
“두 가지, 아니, 세 가지 용건 때문에 왔는데.”
빌이 졸린 눈으로 말하자, 슬레이버는 푸른 눈썹을 치켜떴다.
빌은 손가락 셋을 펼친 다음 하나씩 말했다.
“첫째. 강은혁에 대한 인상이 듣고 싶어서. 둘째. 돈 좀 빌리고 싶어서. 셋째. 대련 신청을 하려고.”
“헐.”
슬레이버는 길바닥에 털썩 앉았다.
비싼 양복이 더러워질 테지만, 빌의 요구는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셋 다 아주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텐데?”
“각오는 했다.”
빌은 사업 계획서를 한 장 내밀었다.
“그게 뭐지?”
“슬레이버, 네가 가장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건 지구로 나가는 것, 그리고 100층탑과 지구의 모든 플랫폼을 장악하는 것인데.”
“정정하지. 현실적인 차원에서 네가 가장 원하는 것.”
빌의 말은 슬레이버가 추구하는 이상이 비현실적이라는 소리나 다름없었지만, 슬레이버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내가 원하는 거라.”
“여유로운 운명치 아닌가? 거기에 대한 답이 이 사업 계획서 안에 있다.”
은혁을 통해 전달받은 3군주 인치의 ‘인공 운명석 제작법’을, 빌은 보다 발전시켰다.
윤리적으로 생산하려니 돈이 생각보다 많이 필요했고, 슬레이버가 돕는다면 더욱 쉽게 할 수 있을 터였다.
“이건 꽤 위험한 내용 아닌가, 빌?”
“비윤리적인 내용은 없을 텐데?”
“그게 아니라, 이 방법이 알려지는 경우…….”
“행복 길드장 해피가 더 날뛰는 경우 말인가?”
해피는 7대 길드장 중에서도 특히 괴물 같은 강함을 자랑했다.
사실상 길드연합국의 최강자.
그가 5층에서 먼 곳에서 날뛰는 이유는 오직 두 가지.
첫째. 드래곤 컬트나 성좌 연합, 지고의 위상 등의 차원에서 깽판치는 게 더 재밌으니까.
둘째. 운명치 폭풍 때문에.
길드 대전에서 날뛴 뒤로, 관리국은 해피에게 운명치 적용점을 다른 길드장보다 15배 가까이 적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해피는, 저레벨 플레이어와 약한 NPC가 많은 5층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길드 대전의 생존자들과 7대 길드의 길드장, 부길드장들 대부분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실은 더 끔찍하지.’
빌은 그 이상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
‘해피가 운명치의 제약을 받는다지만, 그마저도 혼돈을 다루는 힘으로 뚫고 올 수 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운명치 제약은 종잇조각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빌이 오랜 연구 끝에 도출한 결과였다.
슬레이버는 그런 빌의 표정을 보고 눈치 빠르게 알아챘다.
‘역시. 해피는 인공 운명석 따위가 있건 없건 멋대로 깽판을 칠 수 있는 건가.’
슬레이버는 격이 다른 해피의 강함을 생각하며 묘한 허무감을 느꼈다.
빌이 인공 운명석 제작법을 가져왔을 때, 돈벌이를 먼저 생각하는 대신 유출되었을 때 해피에 의해 악용될 가능성을 먼저 떠올렸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으므로.
빌 또한 해피의 길드연합국 침공을 걱정하면서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3군주의 인치가 인공 운명석 제작법을 공짜로 전달해 준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슬레이버가 묻자, 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좋은 의도는 아니겠지.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할 목적이거나, 단순히 길드연합국 안에 혼란을 부추기고 싶었는지도.”
“즉, 놈들도 우릴 크게 경계하기 시작했다는 건가.”
“뭐, 내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지. 내가 강은혁과 싸우려면, 그동안 모은 운명치를 전부 써도 모자랄 테니까. 인공 운명석이라도 필요하다면 쓴다.”
“으음…….”
슬레이버는 틀림없이 그럴 거라 생각했다.
“안 싸우면 안 되나?”
“저스티스도 그렇게 말했다더군.”
“어?”
저스티스 또한 은혁에게, 빌과는 싸우지 말라고 말했다.
하지만 은혁은 고집을 부렸다.
빌은, 그 사실을 저스티스에게서 들었다.
“녀석도 나도 물러날 수 없어.”
“그러다 네가 지면?”
“내가 길드연합국을 세운 뒤로, 전력을 다할 때 누구한테 져본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군.”
빌은 사실을 말하듯 무덤덤했다.
슬레이버 또한 동의했다.
“하지만 자넨 전력을 다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잖아?”
“그것도 그렇군.”
빌의 [원자 지배] 스킬은 피스메이커 만큼이나 대량 학살에 능한 스킬이다.
길드 대전 때도 [아토믹 블래스트]를 딱 네 번, 그나마도 길드연합국 외곽에서 썼을 뿐인데 방사능이 들끓어서 후회했다.
지금은 그 지역을 시멘트로 완전히 뒤덮은 뒤, 추모 구역으로 설정해 뒀다.
“하여간 내 세 가지 부탁은 들어줄 건가, 말 건가?”
“들어주지. 조건은 하나.”
“뭐지? 1억 골드 정도라면 당장 줄 수 있는데.”
“돈은 필요 없어. 내 요구 조건은 단 하나, 가능한 강은혁을 죽이지 말 것.”
“의외군. 강은혁이 마음에 드나?”
“전혀. 하지만 놈은 통합길드장에 가장 가까운 존재지. 7대 길드 간의 반목이 가져오는 경제적 손실에 비하면, 마음에 안 드는 통합길드장이 더 나을 거라는 결론이다.”
“어차피 내가 이기면 강은혁의 통합길드장 건은 물 건너가는 건데?”
“아니지. 강은혁이 너 말고 다른 길드장들을 꺾으면 되잖나.”
은혁은 이미 정의 길드장, 평화 길드장, 자유시장 길드장에게서 패배 선언을 받아냈다.
그러니 반드시 연구 길드장 빌을 상대로 이겨야 하는 건 아니다.
“그건 나를 꺾는 것보다 더 힘들 텐데. 뭐, 하여간 좋다. 그 조건대로 하지.”
그렇게, 빌은 슬레이버를 통해 많은 걸 얻었다.
전투에 필요한, 은혁의 전투력과 드래곤 파워드 아머에 관한 정보.
내일 전투에 필요한 만큼의 인공 운명석 제작.
슬레이버와의 일대일 대련까지.
그 결과, 빌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내일, 강은혁은 내 손에 죽지 않을 정도로 치명상을 입고 패배한다.’
* * *
염훈 또한 57층 메인 미션을 클리어하고 나타났다.
“휴, 기다렸냐?”
“약간.”
은혁은 미리 나와서 기다렸고, 염훈도 힘겹게 57층 메인 미션을 클리어하고 나왔다.
“깨달음은 많이 얻었냐, 염훈?”
“훗. 글쎄?”
한 단계 성장한 강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염훈도 며칠 이내에 5차 각성에 도달하겠군.’
이번 5차 각성은 등급 올리기가 아닌 승급을 택하게 할 생각이었다.
“어? 근데 이 사람은?”
염훈이 백주천을 보고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길드장님! 저는 백주천이라고 합니다!”
빙천대제 백주천이 한쪽 무릎을 꿇고 포권했다.
염훈은 자신이 길드장인데도, 강력한 길드원이 새로 가입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어, 그래. 아주 강해 보이네. 불패불굴 길드에 잘 왔다.”
“넵! 분골쇄신하겠습니다!”
그 모습을 다른 이들이 바라보며 경악했다.
“세상에! 저 사람 소문 속의 빙천대제 아닌가……!”
“헉, 진짜?!”
“불패불굴 길드가 또 한 건 했구만.”
“대세는 역시 7대 길드가 아니라 불패불굴 길드 쪽으로 기울었나…….”
수련 중인 플레이어들은 그렇게 수군거렸다.
은혁과 염훈은 못 들은 체하고, 빙천대제와 함께 게이트로 향했다.
백주천은 NPC였기에 게이트 이용이 제한되었으나, 불패불굴 길드에 가입했고, 길드장과 부길드장이 곁에 있으니 자유롭게 이용 가능했다.
그렇게 28.5층으로 돌아간 뒤, 은혁은 바로 제인을 찾아갔다.
“해신의 트라이던트를 안정화할 해결법을 가져왔습니다.”
빙천무극창을 꺼냈다.
‘냉기의 힘으로, 해신의 트라이던트의, 통제하기 힘든, 공간을 비트는 힘, [스파이럴]을 중화시킨다.’
그렇게 완성된 세븐 칼리버 제6형태는, 공간을 비트는 힘에 냉기를 지배하는 힘까지 더해질 것이다.
“그럼 제작하죠.”
문제를 깨닫고, 생각이 정리되어 있어서인지 제작 속도는 빨랐다.
은혁은 부길드장실의 무기 제작대 위에, 해신의 트라이던트와 빙천무극창을 올려놓았다.
우우우웅……!
쩌저저적……!
‘역시 보통 무기들이 아니군.’
공간을 왜곡하는 힘과 모든 걸 얼리는 힘이 서로 부딪히고 있었다.
‘마정석을 하나 추가해야겠지?’
세븐 칼리버와 벤카우스의 마정석을 중간에 두었다.
벤카우스는 오랜 세월 빙하 밑에 잠들어 있던 몰락한 지고의 위상이었으므로, 이번 업그레이드와 궁합이 더욱 잘 맞았다.
“[초월 설계]. [무기 업그레이드].”
우우우우웅……!
콩나무 길드 본부 전체에 진동이 찾아왔다.
“꺅!”
제인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고, 오리 지배인의 목소리로 경고 방송이 흘러나왔다.
-으악, 경고! 경고! 강은혁 부길드장이 또 뭔가를 저질렀음! 알아서 주의하셈!
은혁은 무시한 채, 스킬에 마력을 더 쏟아부었다.
“하앗!”
번쩍!!
-세븐 칼리버 제6형태, ‘프로스트 스파이럴’이 완성되었습니다!
“좋았어!”
푸른색과 흰색의 금속이 꽈배기처럼 얽힌 형태의 파이크였다.
“와오…….”
은혁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마치 몸이 둥둥 뜨는 거 같은데……?”
“헐! 진짜로 뜨고 있음!”
제인이 경고했다.
은혁은 둥실둥실 뜨고 있었다.
“아차.”
은혁이 정신을 집중하여, 프로스트 스파이럴에 내장된 고유 스킬을 발동했다.
“[냉기 지배].”
스으으으으……!
하얀 냉기가 뿜어져 나오고, 은혁의 몸이 천천히 내려왔다.
“휴, 역시 다루기 어렵네.”
하지만 꼭 필요한 무기였다.
‘한번 실험해보자.’
“세븐 칼리버 제6형태 고유 스킬! [동시 변신]!!”
우우우웅……!
프로스트 스파이럴 주변의 시공이 일그러졌다.
마치 홀로그램처럼, 세븐 칼리버의 제1 형태인 뱀프릭 체인 소드가 일렁거렸다.
“헉! 뭐임?!”
제인은 바라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한 번에 한 형태만 발동 가능한 세븐 칼리버가, 제6형태를 유지한 채로 제1형태를 흐릿하게 불러냈기 때문이다.
“으그극……! 이건 도저히 무린가.”
은혁은 얼른 해제했다.
‘하지만 이론상 가능하다.’
시공과 차원을 비트는 게 가능한 것이 제6형태, 프로스트 스파이럴의 힘.
은혁은 그 힘을 이용해, 한 번에 한 형태로만 변신 가능한 세븐 칼리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직은 무리네.’
더는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은혁은 이어서 방어구 등을 전부 점검하고 수리가 미진한 부분은 전부 다시 수리했다.
한 시간 뒤.
“이제 준비는 끝난 거네?”
제인이 물었고, 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질 것 같진 않군요.”
다른 길드장들과 싸워보면서 자신감도 많이 붙었다.
‘이젠 푹 쉬고 싸우는 것뿐.’
* * *
은혁과 염훈은 28층 게이트에서 바로 10층으로 향했다.
5층에 들렀다가 가면 구름처럼 몰려든 기자들 때문에 귀찮아지므로.
저벅저벅.
은혁은 산책 나가듯 게이트 앞에 섰다.
“되게 긴장되네.”
염훈이 대신 발을 동동 굴렀다.
“여기서 이기면 사실상 바로 통합길드장 되는 거지?”
“그렇지.”
길드장 7인 중, 과반수인 4인을 쓰러뜨리는 게 되므로.
게다가 은혁이 아직 만난 적 없는 길드장의 경우에도, 은혁은 그 길드의 부길드장들을 모두 쓰러뜨렸다.
법적 문제나 정통성 문제는 없을 터.
“한참 멀었다고 해서 아직 못 물어봤는데, 네가 통합길드장 되면 뭐 할 거임?”
“후후.”
은혁은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10층에 도착한 순간.
“일찍 왔군.”
바로 게이트 앞에 빌이 서 있었다.
염훈이 흠칫 놀라며 방어 자세를 취했고, 은혁은 손을 들었다.
“이런. 마중 나오시지 않아도 되는데.”
“착각하지 마라. 마지막으로 한 가지 확인하고 싶어서 온 거니까.”
은혁이 약속 장소인 빌의 연구소 안에 일단 들어가게 되면 너무 늦을 수 있으니, 빌이 미리 나와서 말하기로 한 모양이다.
“들어보죠.”
“강은혁. 혹시 인류 구원에 관심이 있나?”
“너무 거창하군요. 여러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구원까지는 좀…….”
“다행이군.”
“엥?”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미친놈이 아니라서 안심했다는 거다.”
빌은 그렇게 말하더니 연구소로 안내했다.
염훈이 따라가려 했지만.
“아, 염훈 길드장은 밖에 남고.”
빌은 그렇게 말하더니, 은혁과 함께 [퀀텀 리프] 스킬로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파앗!
“으음……!”
은혁은 나름 대비를 했는데도, 빌이 [퀀텀 리프] 스킬을 자신에게도 쓰는 것을 막지 못했다.
‘플레이어가 지닌 정보 양자의 분해, 재조립을 순식간에 하다니.’
플레이어의 각종 정보는 시스템이 지배하므로, 일반 플레이어가 멋대로 조작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
은혁의 경우도 그나마 회귀 지식과 각종 꼼수를 통해 조작해 왔을 뿐.
그나마 최근에 얻은 ‘시스템을 해킹하는 혼돈술사’ 직업으로 이해도와 범위가 늘어났다.
“전투 상황이 아니니까 쉽게 쓴 거다. 네가 경계하고 정신을 집중하면 이렇게 쉽게 [퀀텀 리프]를 쓸 수는 없지.”
빌이 은혁의 우려를 들여다본 것처럼 말했다.
“자, 여기도 몇 번 왔으니 익숙하지?”
빌의 개인 연구실 겸 길드장실이었다.
레나를 [그림자 감옥]으로 생포하고 협상할 때 처음, 빌과 함께 이곳에 왔었다.
“네. 처음 왔을 때는 기억력에 문제가 있으셨죠.”
빌이 가상 두뇌를 펼쳐놓고 기억을 조작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생생했다.
“메모리 누수 문제는 지금도 있어. 너의 경우는 메모리 할당 순위가 최우선으로 되어 있을 뿐이지. 그럼 앉아서 대화나 나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