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 60층~69층이 파괴되다
“그냥 기뻐서 말입니다.”
시리우스는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대답했다.
해피는 미심쩍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 희노애락 다 잃었다고 하지 않았음?”
“대부분의 감정과 의욕이 봉인되었을 뿐, 완전히 잃은 건 아닙니다.”
“허참, 뭐가 그럼 기쁜 건데? 행복 길드 길드장이랑 부길드장이 같이 갇힌 게 기쁘냐? 낄낄!”
해피는 말하다 보니 왠지 웃음이 나와서 웃었다.
시리우스 입장에서는 그건 또 재미가 없는지 무표정해졌다.
한참 혼자 킥킥거리던 해피는 조용히 말했다.
“이 감옥에도 행복 길드원들 많이 들어오겠네?”
“네. 몰래 노예 NPC 부리던 놈들이 우리 위층에 잔뜩 갇혔더군요.”
“흠. 그 말은 뒷골목 노예제도 완전히 뿌리 뽑힌다는 것이고…….”
“길드연합국이 정상 국가가 되어간다는 뜻이겠지요.”
기존의 길드연합국은 말이 되는 구조가 아니었다.
7대 길드가 제멋대로 이상과 이익을 추구해 왔다.
행복 길드가 노예 NPC를 무대로 끌고 와서 공연을 하는 것도 합법, 그런 행복 길드를 급습해서 단속하는 정의 길드도 합법.
뭐가 불법이냐고 묻고 싶을 정도로 제멋대로인 사법 해석과 집행.
그럼에도 길드연합국이 국가 비슷한 형태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상식적인 길드장과 부길드장 일부가 힘들게 일해서, 그리고 다수의 NPC들이 존재한 덕분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은혁은 자신과 염훈의 기준을 길드연합국의 기준으로 삼았다.
“강은혁의 목적은 뭘까? 길드연합국의 중앙집권화?”
“글쎄요. 감옥에 있는 우리 귀에 들릴 정도로 엄청난 일을 또 하려는 것이겠지요.”
“흠. 지금쯤 59층까지 공략 완료했을 테니, 강은혁의 계획은 3군주 세력권에 맞서는 무언가라는 뜻인데? 뭐, 그전에 3군주가 제대로 방해를 해올 거란 뜻이지만.”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도 자폭 테러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알아. 그게 실패했으니, 이번에는 아주 제대로 일어날 거다.”
그 순간.
쿠구구구구구구궁……!!
세계가 흔들렸다.
“음? 지진일까요?”
“아아, 그냥 지진은 아니야. 차원 지진 현상이다.”
“차원 지진 현상?”
“작은 차원이나 스테이지 하나가 통째로 파괴될 때 발생하는 현상이지. 나도 몇 번 일으킨 적 있다.”
쿠구구구구궁……!!
쿠구구구구구궁……!!
진동은 몇 분이고 그칠 줄을 몰랐다.
* * *
길드연합국에 상주하는 관리국 대사관에는 다시 이스트 대사가 와 있었다.
이스트는 자신이 복귀했다는 사실에 기뻐할 틈도 없이, 부임하자마자 충격적인 업무를 맡게 되었다.
‘성명문. 그것도 세 장이나.’
인치, 카인, 미치오.
각 세력별로 한 장씩 보냈으나, 내용은 동일했다.
‘다가올 전쟁을 막기 위해 선제적 조치를 취했으니 이해 바람. 그 선제적 조치란 다음과 같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이스트는 그 ‘선제적 조치’ 부분은 눈으로 읽어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서 일단 덮어뒀다.
“이걸 왜 나한테 보낸 거야?”
이스트는 곤혹스러워했다.
이런 내용을 길드연합국이 아닌, 관리국 대사관 앞으로 보낸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은혁이 들어왔다.
“혹시 3군주 측에서 연락을 해오지 않았습니까?”
“아! 맞습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이스트는 고민하는 대신 바로 성명서를 은혁에게 내밀었다.
은혁도 바로 받아 읽었다.
“음……!”
놀랍게도, 은혁은 충격을 받았다.
‘흠.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예상한 가능성 중 하나였다.
조만간 이런 걸 받을 줄 알았기에, 미리 이야기를 나누려 이스트를 찾아왔다가 바로 성명서를 받아 읽게 된 것이다.
‘예상했는데도 충격을 받다니.’
은혁은 굳은 표정으로 성명서를 여러 번 읽었다.
“괜찮은 겁니까?”
“전혀요.”
은혁은 길드연합국을 장악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우려하던 일이 발생했다.
물론, 그에 대한 대처법 또한 미리 구상해뒀다.
‘길드연합국을 점프대로 삼겠다.’
이번 위기를 극복하려면 아주 크고 강력한 점프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통합 길드장의 권능 발동. 5층에 상주 중인 7대 길드의 길드장은 30분 이내로 모일 것.”
* * *
저스티스, 슬레이버, 빌, 피스메이커, 그리고 해피가 황금 궁전 회의실에 모였다.
피스메이커는 병원 침대에 묶인 채 의식 불명 상태라 오지 않았다.
감옥에 갇혀 있다가 나온 해피는 싱글벙글 웃었고, 저스티스, 슬레이버, 빌은 어이없어했다.
“저 죄수 놈은 어떻게 나온 거야?”
“강은혁이 불렀으니까.”
“도대체 왜 부른 걸까?”
해피는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은혁과 염훈이 곧 도착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저희들은 더 이상 정상적으로 탑을 오를 수 없습니다.”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00층탑을 오르는 건 플레이어의 권리이자 책임이다.
“어째서지?”
빌이 물었다.
“층을 오를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60층부터 69층까지의 모든 스테이지와 게이트가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해피가 두 발을 원탁 위에 올리며 말했다.
“얼마 전 발생한 차원 지진이 그거였구만?”
“그렇습니다. 그리고 발은 원탁에서 내려주십시오.”
“싫다면?”
“당장 발을 내리지 않으면 염훈을 시켜서 으깨 버리겠습니다.”
“…….”
해피는 은혁은 무섭지 않아도 왠지 염훈은 껄끄러운 듯했다.
해피는 얌전히 두 발을 내렸다.
그러자 빌이 손을 들고 설명을 이어 갔다.
“해피 놈이 말한 그대로다. 차원 지진 현상은 5층에서도 관측되었지. 연구 길드는 60층~69층의 스테이지, 차원, 게이트가 모조리 파괴되었음을 확인했다.”
“흠, 그러면 복구하면 되는 거 아닌가?”
슬레이버가 물었다.
“현재 대사관의 이스트 대사를 통해 알아보는 중입니다. 하지만 즉각적인 답변이 없는 걸 보면, 관리국으로서도 골치 아픈 사태인 것 같습니다.”
“헐, 그 정도라고?”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3군주 세력이 보내온 성명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통합길드장의 권능으로 성명서 내용을 허공에 띄웠다.
<길드연합국의 통합길드장 강은혁에게 보내는, 카인, 인치, 미치오의 공동 성명문.>
친애하는 통합길드장 강은혁에게.
100층탑에도 엄연히 국가는 존재한다.
모든 국가는 영토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에 맞춰 경계선을 갖는다.
이를 국경선이라 하는데, 100층탑의 경우에는 특수한 규칙이 적용된다.
100층탑은 층으로 구성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여, 귀국과 우리들의 국경선은 ‘국경층’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다행히 귀국과 우리 3군주 세력 사이의 국경층은 밀접하지 않았다.
완충 지역 역할을 하는 층이 60층~69층으로, 상당히 넓었고, 이 높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길드연합국의 일부 강자, 해피, 올마스크 등이 있어도 직접적인 갈등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보 환경이 바뀌었다.
지금까지의 길드연합국은 여러 길드의 통합체였을 뿐, 진정한 국가라 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대에 의해 통합된 길드연합국은 단일 국가로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대가 이뤄낸 업적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내지만, 이대로 가다간 양 국경층이 충돌하여,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것임은 자명한바.
다가올 전쟁을 막기 위해 선제적 조치를 취했으니 이해 바란다.
그 선제적 조치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60층부터 69층의 공간을 모조리 파괴하여 다차원 성계의 진공 공간으로 만들어 버림.
둘째. 60층~69층 공간에 다수의 지고의 위상들을 미끼로 유인해 둠.
셋째. 기타 필요한 조치.
알다시피, 길드연합국 플레이어는 메인 미션과 게이트 미션을 클리어해야만 층을 오를 수 있다.
같은 국가 소속의 선발 주자가 클리어한 게이트 미션의 경우 면제를 받을 수 있으나, 이 경우에는 메인 미션과 게이트 미션이 모두 파괴된 상태이므로 클리어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는 길드연합국 플레이어의 상승을 막는 조치로서, 양국의 갈등을 예방할 것이다.
이해와 협조를 바람.
이상.
특수과학실험국의 군주 인치가 서명함.
금속지배왕국의 군주 카인이 서명함.
공간교주국의 군주 미치오가 서명함.
그렇게 공동 성명문은 끝이 났다.
뒤에 첨부 사진이 붙어 있었다.
우주 공간을 연상시키는 텅 빈 다차원 성계 공간과 그 공간을 날아다니는 지고의 위상들의 사진이었다.
“미친놈들이 아주 제대로 저질러 버렸군.”
저스티스가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혁이 질문했다.
“어딜 가십니까?”
“전쟁할 것 아닌가?”
“전면전이라면, 아닙니다.”
“아니라고?”
“네. 어차피 할 수도 없잖습니까.”
전면전을 벌이려면, 적국의 국경선 근처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킨 뒤, 선전 포고와 함께 단숨에 쳐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3군주가 저지른 짓은 그러한 전면전 자체를 봉쇄하는 일이었다.
“너나 빌이 마음만 먹으면……!”
“무리하면 가능한 방법이 있긴 하지만, 60층~69층을 전부 뛰어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70층까지 도달하기 전에 죽겠지요.”
“으음……!”
저스티스는 당장 싸우고 싶다는 의욕을 보였지만, 3군주와의 거리가 너무 멀다.
애초에 3군주가 노린 것이 바로 그 부분이다.
길드연합국과 3군주 세력 사이에 도약 불가능한 물리적 거리를 만드는 것.
“내가 궁금한 건.”
슬레이버가 입을 열었다.
“관리국은 이 문제를 왜 해결하지 않는가 하는 부분인데.”
“두 가지로 설명 가능합니다. 첫째.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다.”
“관리국조차 못 한다고?”
“관리국이라고 해서 전지전능한 존재는 아닙니다. 지구에서 컴퓨터로 하는 온라인 게임에서도, 관리자의 권한은 막강하지만, 해커나 크랙 파일 등을 전부 막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젠장, 쓸모없는 관리국 놈들. 내가 자고 있을 때나 깨어 있을 때나 바뀐 게 없구만!”
그러자 해피가 히죽 웃었다.
“웃기고들 있군.”
“뭐, 이 새끼야?”
저스티스가 해피를 노려봤지만, 해피는 피식피식 웃어댔다.
“너희 수준에서는 3군주 세력과 안 싸워도 되니 다행이다~ 라고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닌가? 3군주는 하나하나가 방심하고 있을 때도 나와 맞먹는 강자들인데?”
“그래서? 저런 악질 놈들을 그냥 두자고?”
“허참,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니깐? 올라갈 수 있는 건 그냥 여기까지구나~ 하고 길드연합국 놀이 하면서 살면 되잖음?”
해피는 하품을 해댔다.
“무섭습니까?”
은혁이 도발적으로 물었다.
해피는 은혁의 도발에 피식 웃었다.
“뭔 개소리야? 난 60층~69층이 파괴되기 전에, 70층까지 도달한 적 있어. 그것도 혼자 힘으로.”
“그리고 그때부터였죠? 층을 오르는 대신, 옆으로 빠져서 다른 차원에 전쟁 걸기 시작한 때가.”
“……70층에 도달하고 쫄아서 옆길로 샜다, 이건가?”
“아니면 뭡니까?”
“내가 70층 위를 올려다보지 않은 건 3군주 놈들의 견제와 눈치 싸움이 지루해서다.”
해피는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루해 죽겠다는 듯이 말했다.
“자신들은 군주입네 안전한 곳에 있고, 부하들을 보내서 끝없는 전쟁을 벌이는데, 거기 가서 학살극을 벌여봐야 영 재미가 없을 것 같더군. 게다가 군주와 신민이었나? 하여간 미션 자체가 좀 나랑 안 맞더군.”
해피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뿐이야. 차라리 머저리 같은 너희 놈들이랑 노는 게 지금은 더 재밌을 것 같군. 60층~69층이 박살 난 탓에 한데 모여서, 오또케 오또케 거리는 너희 꼴 구경하는 게…….”
콰쾅!!!
염훈이 원탁을 박살 냈다.
“적당히 해.”
염훈이 해피를 노려봤다.
“모두가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자꾸 냉소적으로 훼방 놓을 거면, 길드장 직위 공식적으로 반납하고 다른 곳으로 가라. 안 막을 테니까.”
염훈이 노려보며 말하자, 해피는 조금 움찔했다.
“쳇. 일단은 닥치고 있지.”
“아니, 제대로 의견을 주십쇼.”
은혁이 말했다.
“층이 무려 10개나 파괴된 미증유의 사태이니만큼, 그리고 차원을 많이 부숴 본 경험 있는 분이시니만큼, 좋은 의견을 주시겠습니까?”
“놈들이 어떻게 60층~69층을 부순 건지는 나도 모르고, 구체적인 상황도 직접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지.”
“그럼 직접 정찰을 나가 주셔야겠습니다. 당신이라면 진공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견딜 수 있지요?”
“흠. 거긴 지고의 위상들이 득시글거리는데. 나만 보낸다고?”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