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화 : 위대한 구원자 염훈
[추신 : 유서를 원래는 딱 한 장만 썼는데, 혹시 몰라서 올마스크에게 한 장 더 남긴다.
사실 이건 두 번째 장이고, 다른 한 장은 관리국의 루핑에게 맡겼으니 시간 남으면 읽어 봐라.
이상이다!]
[추추신 : 아차차, 가장 중요한 거.
이 추추신 부분은 다른 길드장들에게도 보여줘.
아마 올마스크는 이미 멋대로 펼쳐 봤겠지만.
‘나, 강은혁은 염훈을 나의 뒤를 이을 임시 통합길드장으로 임명함. 내가 충성을 맹세한 불패불굴 길드의 길드장이자 군주로서, 자격은 충분하다고 봄. 본 유서가 발표된 날로부터 24시간 이내에, 5층 길드연합국에 머무르고 있는 길드장들 중 반대하는 자가 없다면 염훈을 정식 통합길드장으로 임명한다. 반대자가 나오는 경우 5층의 전체 플레이어와 NPC를 대상으로 통합길드장 선거를 치른다.’
진짜 이상!
그럼, 뒷일을 부탁한다!]
유서를 다 읽은 염훈은 무표정하게 잠시 서 있었다.
그 순간, 조건을 확인한 시스템 메시지가 발동했다.
-염훈 플레이어는 임시 통합길드장이 되었습니다!
-현재 5층에 있는 7대 길드장 중, 반대자가 24시간 이내에 나타나지 않는 경우, 염훈 플레이어는 정식으로 통합길드장이 됩니다!
“…….”
유서인데도 빈틈이 없었다.
자신이 죽은 뒤의 권력 공백을 막기 위해 추추신까지 붙였다.
“그런 건가.”
염훈은 은혁에 대한 슬픔보다, 은혁의 각오를 깨달았다.
‘은혁이는 자신의 생명보다 100층탑 정복을 더 우선시한 거구나.’
뭐라 말하기 힘든 감명을 받으면서도 서글펐다.
‘100층탑의 정상을 정복하는 게 그 정도로 중요한가? 정작 자신이 죽으면 무슨 소용이야?’
“내 생각에.”
올마스크가 탄식하는 염훈의 곁으로 왔다.
“강은혁은 매우 자기중심적인 놈이다.”
“네. 이렇게 허무하게 멋대로 죽어버릴 정도로……!”
“하지만 그 이상으로, 놈은 100층 구원을 추구하고 있었다……!”
올마스크의 목소리에 작은 감동마저 어려 있었다.
은혁이 남긴 유서대로라면, 구원의 의지는 오히려 올마스크보다 은혁이 더 거대했다.
이미 죽어 버린 자들까지도 부활시키려 하는 것이므로.
“그리고.”
올마스크가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킨 뒤 말했다.
“그 이상으로, 염훈 너를 진심으로 믿는 것 같다.”
은혁 자신은 죽고, 자신의 모든 염원을 염훈에게 넘긴 것이므로.
염훈은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다음날.
은혁의 죽음이 길드연합국 전체에 공표되었다.
이 사실을 알리느냐 마느냐로 이야기가 많았지만 염훈이 결정했다.
“모두가 알 권리가 있습니다. 이걸 비밀로 해야 할 것이었다면, 은혁이가 유서에 적어뒀겠지요.”
염훈은 은혁이 남긴 유서들을 모두 읽었다.
“그리고 모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다들 불러 모아 주세요.”
그렇게 은혁의 죽음은 모두에게 공표되었다.
염훈은 중앙 광장에 마련된 연단 위에 섰다.
수많은 이들이 조의를 표하고 염훈의 말을 듣기 위해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길드연합국의 플레이어 및 NPC 여러분. 임시 통합길드장이 된 염훈입니다.”
염훈은 일종의 데자뷰를 느꼈다.
‘천국 극장’에서 보았던 6개월 이내의 가장 좋은 미래…….
그 미래의 기억은 상당량 지워졌었지만, 지금 되살아났다.
그때 본 미래가 지금이었다.
눈물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팝콘 냄새 가득한 그곳에서 은혁과 시시덕거리던 때가 떠올랐다.
“소식을 들으셔서 아시겠지요. 통합길드장 강은혁은 60층~69층 구간을 뚫기 위해 무리한 작전을 수행하던 중, 3군주 세력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였습니다.”
염훈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아시다시피, 강은혁은 오직 한 가지 목적, 100층탑의 정복을 위해서만 살아왔습니다.”
자리에 모인 이들 중에는 추억과 악연으로 얽힌 이들이 많았다.
모인 이들은 뭐라 말하기 힘든 감정 속에서 염훈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에에…… 사실 저는 강은혁의 동료였지만, 왜 그렇게 열심히 100층탑을 올라야 하는가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사실, 지금도 잘 모릅니다. 여러분들 중에 냉철한 분들은, 100층탑에 끌려왔으니, 좋든 싫든 100층탑 꼭대기까지 오르는 게 당연한 한 일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그렇게 그냥 납득하기가 어렵더군요.”
염훈은 말을 하면서 머리가 점점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연설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려니 똑바로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빌어먹을……!”
염훈은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강은혁 그 자식이 왜 죽었는지 아십니까?”
웅성웅성…….
“자신이 미끼가 되어야 제가 70층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죽어야, 그래야 3군주 놈들이 방심할 것이고, 제가 70층~89층 영역에 도전하기 위한 교두보를 70층에 확실히 마련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제, 길드연합국의 모든 플레이어들은 60층~69층을 거치지 않고 70층으로 바로 진격할 수 있었다.
단위전투력은 3군주 세력이 위지만, 머릿수는 길드연합국 측이 더 많다.
길드연합국이 60층~69층의 늪을 극복하고 물량 공세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
그것이 은혁의 플랜 D부터 A까지의 일 전체였고, 자신의 죽음으로써 성공시켰다.
“그러고는 그 자식이 유서에 뭐라고 썼는지 아십니까?”
염훈이 물었고, 모두가 답을 기다렸다.
“100층을 정복하면 얻게 되는 소원 빌 수 있는 권리로, 소원 100개 이룰 수 있게 해주세요~ 라고 빌라더군요. 이게 자기 목숨을 버린 놈이 할 소립니까?”
염훈은 화를 냈다.
“어이가 없지요? 그걸 읽고 저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애새끼가 할 법한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지 목숨이 자기 것인 줄로만 아는 애새끼가 할 법한…… 그런 멍청한 소리였기 때문에……!”
염훈은 부들부들 어깨를 떨었다.
쾅!!
참지 못하고 단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모인 이들이 흠칫했다.
“강은혁처럼 멍청한 놈이 여기 또 있습니까!!”
염훈이 물었다.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나 혼자 죽어서 길드연합국이 승리하면 목적 달성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멍청한 게임 중독자 같은 애새끼가 또 있습니까!!!”
모인 이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했다.
“강은혁의 멍청한 죽음은……!!”
염훈은 부들부들 떨면서 울음을 겨우 삼켰다.
“저는 그놈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을 위해 100층탑을 정복하겠습니다! 그리고 모두를 구원하겠습니다! 강은혁 놈만 특별 취급 따윈 하지 않을 겁니다!”
염훈은 어느새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광장에 모인 이들 중 꽤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살아난 그놈을 찾은 뒤에는 이렇게 외칠 겁니다! ‘이 멍청하고 유치한 놈아!!’ 그런 다음 다시 죽을 때까지 두들겨 패고……! 으흐흑……!”
슬픔을 견디지 못한 염훈의 무릎이 꺾였다.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했다.
길드장들이 염훈을 부축하려 하자, 염훈이 눈물을 흩뿌리며 혼자 힘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본래 목적과는 다른 외침을 내질렀다.
“복수다!!”
쾅!!
“3군주 새끼들! 절대로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직접 패 죽이건! 놈들보다 100층탑을 먼저 정복하건!! 어떤 식으로든 한 방 제대로 먹여주겠어!!!”
염훈이 외치자 모두가 함성을 내질렀다.
“옳소!!!”
“3군주를 무찌르자!!!”
“100층을 정복하자!!!”
5층 길드연합국이 생긴 이래로, 100층 정복과 3군주에 대한 적대심이 가장 높게 들끓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그대로 염훈에 대한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지지율로 승화했다.
멀리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길드장들은 모두 전율했다.
“으음……!”
“엄청나군……!”
모든 걸 가치로 따지는 슬레이버의 눈에는 염훈의 모습이, 길드연합국의 정신을 ‘절대 독점’한 것으로 보였다.
정의를 기준으로 해석하는 저스티스의 눈에 염훈의 모습은, 길드연합국의 ‘절대 법령’ 그 자체로 승화한 것으로 보였다.
100층탑의 현상을 과학적 접근법으로 해석하는 빌의 눈에는, 염훈이 일으키고 있는 현상이 해석 불가능한 연구 대상으로 보였다.
마지막으로, 구원 길드장 올마스크는 작은 수첩을 꺼냈다.
지구인 중학생 시절 영어 단어 암기장으로 쓰던 수첩 맨 뒤편에는 ‘구원자 순위’가 적혀 있었다.
<구원자 추정 순위>
-제1위 : 없음.
-제2위 : 올마스크.
올마스크는 자신의 이름 위의 빈칸을 수정했다.
-제1위 : 염훈.
수첩을 접어 넣은 올마스크는 염훈을 향해 포권해 보였다.
‘지금과 같은 구원의 의지를 보이는 한, 염훈, 나는 그대를 지지하겠다.’
우우우우웅……!
올마스크가 마음속으로 보낸 지지 성명은, 성황제이며 통합길드장인 염훈의 힘을 더 강하게 했다.
지금의 염훈은 7대 길드장 3인을 합친 것보다 강했다.
즉, 3군주 중 하나와 일대일 대결을 벌여도 이길 수 있는 수준.
강은혁의 죽음으로서 염훈은 엄청난 효율로 강해진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
“염훈!! 염훈!! 염훈!!!”
“성황제여!! 당신의 군단에 들어가겠습니다!!!”
환호와 열광은 끊이질 않았다.
성황제의 슬픔은 곧, 길드연합국 플레이어와 NPC들의 슬픔이었다.
성황제의 목표가 곧 그들의 목표였고, 성황제의 분노가 곧 그들의 분노였다.
길드연합국의 모든 인적 자원과 성황제이자 통합길드장인 염훈은 하나로 융합되었다.
그 압도적인 정신 에너지를 느끼며, 염훈은 울면서 생각했다.
‘만족하냐, 은혁아? 이제 이들이 주는 힘을 [광역 홀리 채널링]으로 받아 내면, 나 혼자서도 3군주와 일대일 대결은 어렵지 않게 가능하겠지.’
모두의 마음이 3군주에게 분노하고 있는 지금 당장의 염훈의 전투력은, 이미 은혁을 상회했다.
‘이따위 힘 바라지도 않았다. 딱히 모두를 지휘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그러나 염훈은 100층탑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그냥 너랑 시시덕거리면서 느리게 탑을 올라도 상관없었는데.’
눈물로 흐려진 염훈은 5층의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를 지켜봐라, 은혁아. 네가 원하는 대로 정말 해낼 테니까.’
염훈은 은혁이 천국 같은 곳에서 쉬고 있기를 바랐다.
* * *
지구.
대한민국.
서울 외곽의 한 잡거 빌딩.
지하에는 천국 사우나&찜질방이 있었다.
평일 오전이라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한 청년이 혼자서 남탕의 가장 큰 온열탕을 독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어우~ 뜨끈~하니 좋다.”
청년은 누가 봐도 20대 초반의 외모였으나, 묘한 관록이 돋보였다.
또한,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온몸이 미세한 상처투성이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팔다리에는 절단됐다가 붙인 흔적까지 있었다.
청년은 탕에서 나온 뒤 마지막으로 샤워기로 갔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청년은, 보통 인간은 쓸 수 없는 기이한 힘, ‘스킬’을 썼다.
“[피구름 생성]. [피의 지배].”
쏴아아아아!
거세게 쏟아지는 샤워기 물이 핏물처럼 변했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았지만, 청년은 그 핏물을 전부 몸으로 흡수했다.
핏방울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청년의 몸으로 흡수되었고, 청년의 컨디션은 최적으로 회복되었다.
‘힐링 포션은 아껴야지. 100층탑 바깥에서는 인벤토리창이 안 열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