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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모든 직업-375화 (375/434)

375화 : I’m not dead yet

청년은, 세븐 칼리버를 포함한 여러 아이템은, 새로 얻은 [그림자 주머니] 스킬로 숨겨뒀다.

[그림자 주머니]를 유지하고 있는 동안 극미량의 마력이 소모되지만, 마력 회복 스킬도 많이 갖고 있었기에 청년에게는 큰 부담은 아니었다.

“같은 물이라도 지구의 물이 훨씬 좋군. 3군주 속이랴, 같은 편 속이랴, 몇 달 동안 피로가 쌓였었는데 싸악 풀리네.”

청년은 한 번 더 주위를 살핀 뒤 탕을 나왔다.

옷을 입고, 탈의실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나가려는데, 탈의실에 놓인 TV에서 뉴스가 나왔다.

100층탑에 관한 뉴스였다.

“안녕하십니까. ‘60분 특별 토론’의 진행을 맡은 최영모입니다. 오늘은 100층탑 전문가분들과 함께 100층탑에 관한 토론을 나누어볼 텐데요. 두 분, 모시겠습니다.”

양측 패널에는 한국인 한 명, 미국인 한 명이 나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한국 대학교 이상현상연구학과의 강만수 교수입니다.”

“안녕하세요. 100층탑 연구 세미나의 알렉산더 도슨입니다.”

강만수와 알렉산더가 서로 인사했다.

강만수는 평범한 인상의 중년 사내였고, 알렉산더는 수염이 회색인 백인 남성이었는데 한국어가 유창했다.

‘재밌네.’

흥미를 느낀 청년은, 커피 우유를 하나 산 다음, 탈의실용 평상 위에 아예 앉아서 TV를 마저 보기로 했다.

진행자가 첫 번째 주제를 꺼냈다.

“첫 번째 주제는 100층탑 발광 현상입니다. 요즘 또다시 시작된 발광 현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으면 합니다.”

100층탑은 1년에 1~2회 번쩍이며, 그렇게 번쩍일 때마다 무작위의 사람들이 전송된다.

그리고 100층탑이 번쩍이기 전, 한 달 전부터 미리 은은한 빛을 내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전송 예고’라고도 부른다.

“이 전송 예고 현상에 대해, 먼저 강만수 교수님부터.”

“먼저 제 입장을 말씀드리자면, 100층탑의 ‘전송’이란 현상은 실체가 없는 환상입니다.”

강만수 교수가 말했다.

“100층탑이니 전송이니 하지만, 우리는 그 실체를 모릅니다. 그저, 100층탑이 번쩍이고 실종자가 늘어나니까, 100층 안으로 전송되었구나~ 라고 짐작할 뿐, 두 사건의 상관관계는 입증된 바 없습니다.”

그러자 알렉산더가 쓴웃음을 지었다.

“100층탑의 번쩍임과 대규모 실종이 우연의 일치란 말입니까?”

“인과 관계가 입증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논리적 오류 중에, 선후 인과의 오류라는 것이 있는데…….”

“논리 교육을 요청한 바는 없습니다. 다만, 이래서는 토론이 진행되기 어렵겠군요.”

알렉산더는 왜 이런 사람을 토론 패널로 참석시켰냐는 듯이, 사회자 쪽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강만수는 발끈했다.

“100층탑과 전송 현상이 관계있다는 증거 있습니까? 있으면 대보시죠.”

“수많은 정황 증거와 연구 자료가 있죠.”

“하! 검증 불가능한 정황 증거 말씀이지요? 한발 양보해서, 100층탑이 번쩍인 순간, 사람이 사라진다고 해도, 그 사라진 사람들이 100층탑 내부로 들어갔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렇게 목소리 키우시지 않아도 됩니다. 실제로 100층탑 안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이 없으니, 증명하기 어렵지요. 그건 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알렉산더는, 어째선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100층탑과 전송 사이의 인과 관계가 증명되지 않았으니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한다면, 사실상 우리는 100층탑에 관해 아무것도 대화할 수 있는 게 없을 겁니다. 상호 작용이 불가능하니까요.”

“아니, 가능합니다.”

강만수가 갑자기 노트북을 꺼내 화면을 보여줬다.

“제가 몇 년 전부터 추진 중인 ‘드릴 프로젝트’입니다.”

“자, 잠시만요.”

사회자가 얼른 끼어들었다.

“강만수 교수님. 그 일로 인해 체포되신 적도 있지 않습니까? 그걸 방송 중에 말씀하시면…….”

“뭐, 어떻습니까! 까짓거, 드릴로 100층탑의 밑동아리를 통째로 드러내서 확 뽑아 버리는 겁니다!”

강만수는 100층탑의 힘을 평가절하하면서도 동시에 제거하거나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렉산더는 그때마다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사회자는 쩔쩔맸다.

강만수가 목이 타는 듯,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순간, 알렉산더가 툭 내뱉었다.

“교수님은 아카데미 소속이셨죠?”

그 순간 강만수가 캑캑거렸다.

“무, 무슨 소리요?”

“아시잖습니까? 100층탑에 관한 극단주의자들. 요즘 들어 100층탑 자체를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는 극단주의자들이 늘어났다죠? 교수님도 거기 소속 아닙니까?”

“증거도 없이 자꾸 무슨 소립니까!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뮤튜브를 통해서, 100층탑과 공존해야 한다고 젊은이들을 선동하고 있지!”

“그게 어째서 선동입니까? 100층탑은 존재하고, 우린 실제로 이미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저, 인식의 변화를 추구하는 세미나를 열 뿐.”

“오호라! 이제 알았다! 이번 토론에 나온 것도 젊은이들을 끌어들일 홍보 차원이었구나!”

“교수님이야말로 그런 것 같아 보입니다만.”

“에이잇! 시청자들이여! 각성하라! 100층탑의 윗부분이 튼튼하다면, 그 아래를 파내서 쓰러뜨립시다!”

그 뒤로 토론은 엉망진창으로 변했다.

“후후.”

청년은 웃으며 커피 우유를 쭈욱 마셨다.

‘대략 한두 달 안에 대규모 전송이 또 있을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청년이 이 모든 걸 미리 알고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청년의 정체는 시간을 거슬러 온 회귀자였고, 이름은 강은혁이었기 때문이다.

* * *

수일 전.

올마스크와의 대화 직후.

은혁은 올마스크에게 가면을 하나 부탁했다.

새로 제작한 그 가면에는 은혁의 통합길드장으로서의 권한과 정체성을 담았다.

그 가면을 빌려서 퓨전 스킬을 썼었다.

‘[그림자 분신 6.0] + [가면 생성]! 퓨전 스킬 [그림자 분신 7.0]!’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자 분신 7.0]은 ‘진짜 통합길드장 강은혁’이 되어 활약했다.

최선을 다해 3군주의 화신들과 맞서 싸웠고, 결국 죽었다.

물론, 3군주의 화신은 그것조차 가짜 분신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죽는 순간까지 통합길드장의 목걸이를 걸고 있는 것을 확인했으며, 그의 죽음으로 인해 통합길드장의 목걸이가 5층 길드연합국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했다.

3군주의 화신들은 가짜 은혁의 시체를 소멸시키는 한편, 시체가 있는 공간 자체를 지워 버리기까지 했다.

그동안 은혁은 박살 난 [그림자 분신 6.0]의 파편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은신] + [초월 명상]을 융합시킨 퓨전 스킬 [초월 은신]으로 숨어 있었다.

‘진짜 아팠지.’

사실, 3군주의 화신이 박살 낸 은혁의 여러 분신들 중에 진짜 은혁이 하나 섞여 있었다.

죽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은혁의 [피의 지배] 스킬은 상당했기에 죽기 직전 상태로 장시간 버틸 수 있었다.

3군주의 화신들이 [그림자 분신 7.0] 상태의 은혁을 쫓으러 간 사이, 은혁은 최소한의 응급처치만 한 뒤, 자신이 빠진 만큼 [그림자 분신 6.0]의 시체를 하나 더 만들고, 자신은 [그림자 숨기]로 캄캄한 다차원성계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림자 분신 7.0]으로 만들어진 가짜 은혁을 죽인 3군주의 화신들은 되돌아와서, [그림자 분신 6.0]으로 제작된 다수의 분신들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질량의 양은 동일하군.’

그렇게 확인까지 한 뒤 시체들을 소멸시켰다.

멀리 숨어서 본 은혁은 내심 식은땀이 흘렀지만,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그 상태로 꼬박 하루 동안 몸을 숨긴 은혁은 3군주 세력이 확실히 떠난 것을 확인했고, 염훈 일행이 와서 [그림자 분신 7.0]이었던 가짜 은혁이 죽었던 곳을 찾아가 위기에 처한 것까지 전부 확인했다.

‘미안하다, 염훈.’

은혁은, 당장 뛰쳐 나가서 사실은 자신이 살아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계획이 흐트러진다.

은혁이 죽음을 위장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첫째. 염훈의 길드연합국 절대 장악.

염훈과 은혁이 길드연합국 플레이어를 반씩 나눠 갖는 것보다, 성황제이며 통합길드장이 된 염훈이 모든 물질적 정신적 권한을 손안에 쥐는 것이 효율이 훨씬 높다.

염훈이 유일한 정신적, 세속적 지도자가 됨으로써 받는 절대적인 지지는 그 자체로 염훈이 사용 가능한 에너지로 전환된다.

그 위력은 가히 최상급 성좌와 비견될 정도가 될 것이다.

새로 얻은 그 힘과 기존 염훈의 힘을 합치면, 전투력으로만 따져도 길드연합국 최강자다.

둘째. 3군주 세력의 방심.

은혁을 죽였다는 사실, 특히 꽤나 힘들게 죽였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만족감을 줄 것이다.

이는 은혁을 죽이기 위해 연합했던 3군주 세력을, 은혁이 죽음으로서 다시 분열시키는 효과가 있다.

셋째. 은혁이 지구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일과 파생된 비밀 계획.

특히 세 번째 계획은 상당히 방대하므로, 은혁은 같은 편조차 속여야 했다.

염훈이 실신하고, 길드장들이 염훈을 호위하여 떠난 것까지 확인한 은혁은, 그제야 행동을 시작했다.

안전을 확인한 뒤, 미리 날려 보낸 ‘비상 출입구’를 찾았다.

이전에 피스메이커가 노렸던 그 비상 출입구를, 은혁이 퓨전 스킬 [관리국 자산 추방] 스킬로 날려 보낸 바 있었다.

다차원 성계 어딘가로 날려 보냈기에 관리국 요원들도 그것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미리 [피의 표식]을 발라뒀지.’

좌표를 확인한 은혁은 [그림자 터널]을 반복하여 그곳까지 갔다.

혹시라도 [그림자 터널] 이동 흔적이 3군주나 지고의 위상들에게 들킬까 봐 은혁은 주의하며 이동했다.

그리고 마침내 비상 출입구에 도달한 은혁은 절대 열쇠를 꺼냈다.

그것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비상 출입구는 반응을 보였다.

-자격 확인!

-비상 출입구를 이용하면 지구의 원하는 장소로 전송됩니다!

-정말로 비상 출입구를 작동시키겠습니까?

-YES/NO

“YES.”

-원하는 장소를 선택하십시오!

-단, 건물의 실내는 좌표 겹침의 위험이 있으니 지양해 주십시오!

은혁은 자신이 다니던 크라브마가 도장이 있는 건물의 옥상을 지정했다.

옥상은 탁 트여 있었고, 대부분 옥상 문이 잠겨 있어서 사람도 없었다.

‘아차. 잊을 뻔했네.’

은혁은 [그림자 주머니] 스킬을 발동, 각종 아이템들을 그 안에 넣었다.

‘지구에 돌아가면 인벤토리창이 열리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 뒤, 원하는 장소 선택을 마무리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파앗!

그렇게 은혁은 지구로 돌아왔다.

파란 하늘.

인근 분식점 환풍구에서 나는 냄새 섞인 공기.

전형적인 서울 외곽의 한 잡거 빌딩 옥상의 느낌.

“흠.”

은혁은 건물 옥상에서 하늘을 보며 뭐라 말하기 힘든 기분을 느꼈다.

“인벤토리창. 스탯창.”

어느 것도 발동되지 않았다.

하지만.

“[화염 지배].”

화륵!

손바닥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인벤토리창은 안 열려도 스킬은 발동된다.’

다만 위력은 조금 약했고, 마력 소모가 무척 빨랐다.

‘지구의 공기에는 마립자가 부족한 건가?’

은혁은 넉넉히 챙겨 온 마나 포션을 마셔봤다.

‘마력 회복은 정상적으로 잘 되네.’

가장 중요한 걸 체크한 은혁은, 그 건물 지하에 있는 목욕탕으로 향했다.

앞으로 한 달간 진행할 지구에서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서였다.

* * *

다시 현재.

은혁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태백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태백산에 숨겨진 미래 전략 연구소를 찾아냈다.

은혁이 지닌 [사이코 메트리] 스킬과 소환수의 힘으로 잔류 사념을 읽어 내고, 폐허가 된 건물 위주로 찾아 나서니, 두어 시간 만에 찾아낼 수 있었다.

건물은 완전히 황폐화되어 있었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100층탑 강림 순간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연구소의 폐허를 보자 묘한 감회가 들었다.

‘외부 구조는 본 적이 없지만 내부 구조는 다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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