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화 : 교황제를 만나다
은혁은 태백산 미래 전략 연구소와 관련된 옛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본 적이 몇 번이나 있으므로, 대충 내부 구조를 유추할 수 있었다.
은혁은 성큼성큼 다가간 뒤, 출입구 바로 앞에서 [그림자 분신 7.0]을 발동하려 했다.
파즈즈즈…….
하지만 실패했다.
“아차차. 혼자 힘으로 쓸 수 있는 건 [그림자 분신 6.0]이었지.”
은혁은 다시 마음을 집중한 뒤 [그림자 분신 6.0]을 다섯 개체 정도만 생성했다.
마력이 많지 않았기에 한 번에 너무 다수를 소환하는 것은 위험했다.
스르르륵.
그들은 그림자처럼 내부를 정찰했고, 수상한 함정이 없음을 확인했다.
“읏차.”
은혁은 일부러 환기구를 통해 들어갔다.
옛 기억 속을 탐험할 때도 그랬으니, 왠지 이번에도 그렇게 하는 게 순리(?)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휴, 먼지투성이네.’
그리고 환풍구의 일부를 잘라 내고, 옛 기억 속에서 본 실험실로 들어갔다.
“음.”
100층탑 강림 시기를 계산하던 컴퓨터는 먼지와 거미줄로 뒤덮여 있었고, 훗날의 연구 길드장 빌이 사용하던 머그컵 따위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
수십 년의 세월이 그대로 방치된 폐허를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소장의 책상을 찾아야지.’
어렵지 않게 이곳의 소장이며, 동시에 아카데미의 수장이었던 자의 책상을 찾아냈다.
“[사이코메트리].”
우우우웅……!
“찾았다.”
은혁은 책상의 가장 아래쪽 서랍을 통째로 뽑아냈다.
그리고 서랍의 틈새에 숨겨져 있던 ‘100층탑 초대장’을 찾아냈다.
“소장은 겁을 먹었고, 올마스크는 실망했다고 했지…….”
소장은 떠나기 전, 자신의 초대장을 이곳에 숨겨놓고 떠난 것이었다.
은혁이 이곳에서 초대장을 찾지 못했다면, 그때는 아카데미의 본부를 쳐들어가서라도 하나 획득할 생각이었다.
<100층탑의 초대장>
이 초대장을 받으신 분께 무한한 축원을 보냅니다!
아래에 적힌 날짜에 이 초대장을 찢으시면, 100층탑의 1층으로 전송됩니다!
만약 이번 전송 날짜를 놓친 경우에도 상심하지 마십시오.
전송은 매년 1회 또는 2회 있을 예정이므로 다음 기회에 들어오시면 됩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
그리고 초대장의 하단에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종이에 적힌 남은 시간이 카운트다운처럼 실시간으로 줄어들었다.
‘한 달 뒤인가.’
한 달 뒤에 맞춰 초대장을 뜯으면 다시 100층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염훈이 잘하고 있으려나?’
염훈을 떠올리자 마음이 조금 울적해졌다.
지금쯤 심적으로 매우 힘들 터.
‘하지만 해야 한다, 염훈. 너라면 할 수 있다.’
은혁이 자신의 죽음을 위장하고 100층탑 밖으로 혼자 나온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은혁이 지구에서 진행할 계획을 제외하면, 3군주를 방심시키고, 길드연합국을 성황제 염훈의 기치 아래 절대적으로 결합시키는 게 가장 중요하다.
‘내 통합길드장의 목걸이까지 챙겼겠지? 지금의 염훈이 [광역 홀리 채널링] 한 번 쓰면, 일반 플레이어와 NPC의 마음은 물론, 7대 길드의 길드장들의 정신력까지 모조리 받아서 힘으로 전환할 수 있을 거다.’
지금의 염훈이라면, 방심하지 않은 해피조차도 맨주먹으로 때려잡을 수 있을 것이다.
‘과장 좀 보태서 하급 성좌의 본체급과 스파링을 벌일 수 있을 정도다.’
격만 따졌을 때 하급 성좌급이라는 거고, 실제 전투력은 상급 성좌의 본체도 하루 안에 죽일 수 있다.
‘즉, 나의 죽음이 염훈을 치트 캐릭터로 만들어주는 열쇠가 된다…… 라는 게 내 생각이긴 한데.’
은혁이 조마조마한 이유는, 염훈이 완전히 무너져내릴 가능성 때문이었다.
‘염훈 성격에 막 흑화할 것 같진 않고. 뭐, 괜찮겠지.’
은혁은 염훈이 잘해 낼 거라 믿었다.
‘나는 여기서 할 일만 잘하면 돼.’
은혁이 가장 먼저 할 일은 이 100층탑 초대장을 얻는 일이었다.
‘다시 돌아가야 하니까.’
그리고 그다음 할 일은….
* * *
울산시 시립 외국어 교육 센터의 2층 세미나실.
이곳에서는 평소와 달리 특별 강의가 진행 중이었다.
100층탑 전문가인 알렉산더가, 100층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세미나를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수강생들은 열정적으로 강의를 들었다.
“……이상의 정황 증거를 볼 때, 100층탑은 인간과 어떤 초월자와의 연결 고리라고 해석할 여지가 큽니다.”
알렉산더는 설명을 마쳤다.
“질문 있으십니까?”
있을 리가 없다.
플레이어가 아닌 이들이 알렉산더의 교묘한 최면 요법을 당해낼 리가 없었으므로.
“그럼.”
알렉산더는 종이를 한 장 꺼내어, 맨 앞 사람에게 내밀었다.
“지금부터 제가 칠판에 적는 것을 종이에 그대로 적은 뒤 서명하십시오. 그리고 옆 사람에게 넘기시면 됩니다.”
알렉산더가 칠판에 적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교황제에게 충성한다.’
“소리 내서 읽을 필요는 없고, 그냥 종이에 적으면 됩니다.”
수강생들이 종이에 맹세를 적을 때마다 알렉산더의, 군주로서의 힘은 강해졌다.
‘아직 모자라.’
생각보다 머릿수 확보가 쉽지 않았다.
‘100층탑을 나온 지 수십 년이나 지났는데, 새로 확충한 부하가 겨우 몇만 명 정도라니.’
알렉산더는 창밖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부상이 심했어.’
흑룡파의 헬카리우스와의 격전을 치른 뒤, 격전 끝에 검을 잃고 소멸당한 척, 이른바 ‘죽은 척’을 시도했었다.
문제는 죽은 척이 그냥 척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죽음 직전까지 갔다는 것이었다.
‘지구로 돌아와서 회복하려 했지만,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지.’
지구는 저마력 지대였고, 인벤토리창은 열리지 않았다.
혼자 몰래 100층탑에서 나온 알렉산더로서는 크게 당황했다.
일반 의료진의 도움을 받을 수도, 힐링 포션을 쓸 수도 없었기에, 혼자 서서히 마력을 축적해서 회복 스킬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장기 요양으로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기간을 떠올리자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알렉산더가 그동안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벌컥.
누군가가 허락도 없이 들어왔다.
화가 난 알렉산더가 노려보자, 한 청년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들어왔다.
20대 초반 나이대로 보이는 청년이었는데, 뭔가 이질적이었다.
“안녕하세요? 강은혁이라고 합니다.”
인사하며 악수를 청해왔다.
알렉산더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악수를 받아줬다.
먼 훗날, 알렉산더는 이날을 회상한다.
강은혁에게 패배한 가장 강력한, 어쩌면 유일한 이유는, 이 악수를 아무 경계 없이 받아줬다는 것 하나뿐이었다고.
“알렉산더. 일명 알렉스.”
은혁은 악수한 손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사이코메트리] 스킬을 오래 발동할수록 이득이므로.
“100층탑에서는 본명을 숨기고 교황제로 활동하다가 죽은 척하고 탈출한 유일했던 플레이어.”
“뭐……!”
“놀랄 거 없습니다.”
은혁은 교황제의 손을 더욱 꽉 잡은 채로 히죽 웃었다.
“저도 플레이어거든요.”
“큭!”
그제야 알렉산더, 진짜 정체는 교황제인 알렉스가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그림자 터널].”
슈르르륵.
은혁은 자기 자신과 알렉스를 모두 그림자 속으로 집어삼켰다.
그리고 터널 밖으로 나온 곳은 폐허가 된 태백산의 연구소였다.
“여, 여긴?!”
“자아, 대화 좀 하실까요, 위대하신 교황제 폐하?”
은혁이 빈정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자, 자넨 도대체 누군가!”
그걸 본 은혁은 확신했다.
‘역시 정보는 단절되어 있군.’
교황제 알렉스는 100층탑 내부의 일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강은혁입니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플레이어고요.”
“……맙소사.”
알렉스는 무척 당황해했다.
‘나 말고 이렇게 쉽게 100층탑을 탈출하는 놈이 있었단 말인가?’
교황제는 자신의 죽음을 위장하고 탈출했다.
그것도 수십 년 전의 일이므로, 누구도 자신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은혁은 눈앞의 알렉스가 100층탑을 탈출한 존재이며 교황제라는 것도 다 알고 있었다.
“초면에 비판부터 해서 미안하지만, 당신은 조심성이 너무 없었습니다. 본래 얼굴과 이름을 거의 그대로 쓰시다니요.”
그 말에 알렉스는 억울해했다.
“조심성이 없었다니. 그건 좀 지나치군. 공식적으로 100층탑을 탈출한 이는 나 말고 없었다네.”
“그건 오만 아닙니까? 당신이 탈출할 수 있다면, 남들도 할 수 있겠죠.”
“으음…….”
알렉스는 괴로워하며 은혁을 관찰했다.
‘이놈은 모르는 게 없나?’
알렉스는 은혁의 정보 습득 수준을 검증해 보기로 했다.
“그래, 자네 말이 맞다고 치지. 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나?”
“저만의 정보 획득 수단이 있다고 해두죠.”
“그럼, 내가 100층탑 밖으로 나왔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그야 내가 회귀자니까.’
회귀 전 지식으로 볼 때, 교황제는 너무 활약이 없는, 옛 전설적 존재였다.
은혁이 99층까지 갈 정도면, 그 전에 교황제가 다시 일어나 어부지리를 취한다든가 할 수 있었을 터.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교황제가 100층탑의 정세를 다 알면서도 진출 타이밍을 놓쳤다고 보긴 어려웠다.
반대로, 100층탑의 정세를 모르는 곳에 있기에 활약을 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이 회귀 전 지식으로 은혁은, 죽은 척한 교황제가 심연 아니면 100층탑 바깥에 있다고 추측했다.
그리고 은혁이 인공 성좌 리바이어던의 정신과 대화하면서 얻은 지식을 떠올렸다.
그때, 리바이어던은 이렇게 말했다.
-‘특급 보안 처리됨’ 13건과, ‘일반 플레이어의 외출’ 1건이다.
아마도 특급 보안 처리됨은 관리국 관련 인사일 것이고, 일반 플레이어의 외출 1건이 바로 교황제일 가능성이 컸다.
‘즉, 교황제는 블랙 드래곤 헬카리우스에게 패배한 뒤 지구로 탈출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한 결론을 내린 은혁은 생각보다 쉽게 교황제 알렉스를 찾았다.
은혁이 알렉스를 예상보다 훨씬 쉽게 찾은 부분은 우연의 힘이 컸는데, 교황제 알렉스가 숨어 지내기는커녕 아예 방송에 출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황제 나름의, 저마력 지대인 지구에서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한 수단이었겠지만, 자신을 대중 매체에 조심성 없이 노출시키는 치명적인 실책을 범한 꼴이 되었다.
“대답하기 곤란한 건가?”
생각을 정리하는 은혁을 보며 교황제가 물었다.
“예, 뭐. 나름의 방식으로 당신이 100층탑 밖에 있음을 알아냈다고 해두죠.”
“……그렇군. 그럼 날 찾아온 이유는?”
“당신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온 겁니다.”
“협조?”
“사실, 저와 교황제 폐하의 목적은 같습니다. 세부적으로는 다르지만, ‘보다 강한 힘을 얻고 유리한 입지를 위해 100층탑 밖으로 일단 나왔다가 다시 복귀해서, 단박에 100층을 정복하는 것.’ 맞지요?”
“만약 아니라고 한다면?”
“이름. 알렉산더 도슨. 마약 중독인 아버지와 알콜 중독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서 가출. 홈리스 생활을 하면서도 M 대학교에 들어가 의학을 전공. 미국의 한 제약 회사의 인턴이 된다. 하지만 근무 중 개인 실험을 한 탓에 해고된다.”
“뭐, 무슨 소릴……!”
“불만을 품고 엽총과 권총을 챙겨서, 다니던 회사에 들어간 순간, 100층탑 플레이어가 되어 전송됨. 지니고 있던 총기의 힘으로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빠르게 미션을 클리어하고, 경쟁자를 죽여서 성장. 의외의 자기 적성을 피악한 알렉스는 훗날 교황제가 된다.”
은혁은 알렉스의 인생 요약을 마무리했다.
‘나는 당신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거짓말은 안 통합니다.’
은혁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듯했다.
알렉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누구도 교황제의 과거를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낸 자는 없었다.
알렉스는 죽일 듯이 은혁을 노려봤지만, 은혁은 무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