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 교황제와의 대결 (1)
“사실은 먼저 아카데미를 찾은 뒤 족쳐서 교황제를 찾아낼까 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교황제 본인이 교수가 되어 TV에 나와준 덕분에 찾는 시간을 아낄 수 있었죠. 즉.”
은혁은 운명의 가혹함을 느끼면서도 분명히 말했다.
“인간의 운명과 성패는 아주 사소한 선택에 따라 결정되며, 이 경우에는 당신이 나의 악수를 받아줬기에 모든 게 결정났다…… 라는 겁니다.”
“그렇군. 악수를 하면 상대의 기억을 모조리 읽어 내는 능력인가.”
“그거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만, 뭐, 그렇죠.”
“좋아. 자네 말이 다 맞아. 나는 100층탑 밖에서 힘을 키우고 다시 100층탑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여러 사람들을 세뇌해, [홀리 채널링]으로 힘을 키우려는 거죠?”
“흠, 그 스킬도 아는가? 뭐, 그렇다.”
100층탑 바깥의 사람들은 일정 확률로 100층탑으로 전송된다.
만약 알렉스가 지구인들을 ‘미리’, 전부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수를 꾸준히 세뇌한다면?
그 경우, 교황제 알렉스의 부하들이 플레이어가 되어 100층탑 안으로 서서히 전송된다.
그 수가 점차 쌓이면, 가히 병력이라 부를 정도가 될 것이다.
100층탑 1층에 전송되는 플레이어의 총인원은 매년 조금씩 다르지만, 지난번 은혁의 기수 때는 전송된 총원이 약 1만 명 정도였고, 26개 구역에 수백 명 단위로 나뉘어 들어갔었다.
그리고 5층에 도착했을 때는 총 4,800명 정도였다.
‘전송은 보통 1년에 2회 정도니까……. 교황제가 꾸준히 세뇌한 이들을 100층탑 안에 넣는다면 무시할 수 없는 숫자군.’
“가만, 그러고 보니 교황제라는 칭호가 혹시……?”
“자네가 생각하는 그 교(敎) 맞네. 종교 할 때의 교이면서, 교육 할 때의 교일세.”
즉, 교황제란 뜻은, 교주 역할, 교사 역할, 황제 역할을 모두 골고루 하는 지배자라는 뜻이다.
“진정한 지도자란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고, 또 가르쳐주는 존재여야겠지.”
“그래서, 이상한 ‘세미나’를 통해 사람들을 세뇌하고 있었습니까?”
“세뇌라고 하니 좀 이상하군. 적어도 나는 거짓말로 그들을 세뇌한 적은 없다네. 100층탑의 현실…… 숨겨진 가치…… 내 정복 욕구까지. 전부 다 사실대로 말했어. 물론, 마지막에 약간 그들의 정신을 자극하긴 했지만.”
“스킬로?”
“음. 그렇지.”
교황제는 스킬의 힘으로 거대한 무구나 도구를 만들 수 있었는데, 최면에 도움이 되는 도구 또한 제작할 수 있었다.
“일반 지구인들에게 스킬 저항력이 없는 걸 알면서 스킬을 썼다면 그게 세뇌죠.”
“작은 부추김 정도라네. 실제로 학교의 교사들도 학생들을 자극하려 동기 부여를 하고, 교단의 교주도 비슷한 방식으로 신도들을 현혹하지. 입장의 비대칭성을 이용한 현혹은 지구에서도 흔한 일 아닌가.”
은혁은, ‘그래도 스킬을 써서 현혹하는 건 불공평하다.’라고 반복하려다가 그냥 관뒀다.
“윤리는 둘째치고, 매우 과감한 계획이군요.”
사실은 은혁도 생각해 본 적 있는 전략이지만 속내를 미리 드러내진 않았다.
교황제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게 좋은 거 아닌가? 그리고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성공률은 꽤 높아.”
알렉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은혁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지구에서 알렉스 말고 스킬을 쓸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리고 스킬은 과학을 초월한 힘.
그 힘으로 수많은 지구인들을 미리 세뇌해 둘 수 있다면, 힘을 키운다는 목적만 봤을 때 상당한 메리트가 있다.
7대 길드장이나 3군주 같은 존재가 지구에는 없으니, 교황제 혼자 독보적으로 세력을 키울 수 있다.
문제는…….
“자네 같은 존재지.”
설마 자기 말고도 100층탑을 탈출하는 존재가 있다니.
알렉스는 자기 자신의 안일함에 화를 내고 싶었다.
“이제 선택지를 드리죠.”
“말해 보게.”
“첫째. 제 부하가 되어 제게 충성을 맹세하는 선택지.”
“둘째를 고르지.”
“듣지도 않고요?”
“첫째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네.”
“왜입니까?”
“내 소중한 부하들을 볼 낯이 없으니까.”
“…….”
“왜?”
“아직도 절 속이려 드는군요. 당신의 부하들은…….”
그 순간.
투쾅!!
알렉스는 은혁이 말하는 순간을 노려 [강타]를 날렸다.
“큭.”
은혁이 맨손 [패링]에 능하지 않았다면 치명상을 입었을 강력한 일격.
알렉스는 추가 공격을 가하는 대신 크게 뒤로 뛰었다.
“자네는 날 너무 몰아붙였어. [마갑 소환]!!”
번쩍!!
알렉스의 직업은 ‘SS+급 고유 무장을 제작하는 교황제’였다.
마치 대장장이 직업을 활용하는 은혁과 신성력을 활용하는 염훈의 장점을 조금씩 합친 듯한 직업.
자신의 권능이 담긴 핵심 무구와 자잘한 도구를 생성하는 고유 스킬을 지니고 있다.
성기사 직업으로 시작했던 알렉스는, 지구에서부터 들고 온 총기류가 지닌 힘에 새삼 감탄했고, 아이템을 직접 제작하는 일의 상당한 잠재성을 깨달았다.
하여, 부하들을 모으는 한편 무구를 제작했다.
그중 최고의 역작이 ‘교황제의 검’이다.
‘문제는 너무 최고의 역작이라는 것이지만.’
교황제의 권능이 모조리 담긴 검은 말 그대로 양날의 검이다.
그 검을 잃었을 경우, 힘이 절반으로 뚝 떨어지기 때문이다.
은혁은 자신이 아는 정보를 속에 감춘 채, 알렉스가 갑옷을 장착하는 것을 지켜봤다.
철컹!
철그럭……!
고대의 전쟁 군주가 입었을 법한 전신 갑주가 알렉스의 몸을 감쌌다.
투구와 면갑까지 완전 장착된 알렉스의 모습은 가히 전설적인 존재다웠다.
“후아암. 엄청 오래 걸리는군요.”
은혁은 일부러 하품까지 하며 기다려줬다.
알렉스는 화가 났지만 도발을 견뎌야 했다.
그 순간.
“[미완성 시간 되감기].”
파앗!
장착 중이던 알렉스의 갑옷이 갑자기 되감기며 해제되었다.
“앗?!”
“하하하하!”
은혁은 크게 웃었다.
“뭘 이거 가지고 놀랍니까?”
은혁은 놀리기만 하고 이 틈을 노려 공격하진 않았다.
“장난이었습니다. 마저 다시 장착하십시오.”
“……!”
알렉스는 이를 갈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맨몸으로 싸우면 절대 이길 수 없으므로.
‘두고 보자. 내가 갑옷을 다 장착하면 후회할 거다.’
철컹!
철그럭!
그리고 마침내 알렉스는 갑옷을 다 입었다.
“갑옷 장착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습니까? 그래서야 적들이 공격할 텐데요.”
“그래서 내가 교황제로서 군림하던 시절에는 갑옷을 벗지 않았다.”
“샤워는?”
“입은 채로 했지. 탈수 기능이 있으니까.”
“흠.”
“더 물어볼 건 없나? 자네가 죽기 전 마지막 질문이 되겠지만.”
“제가 왜 당신이 갑옷을 다 입도록 기다려줬는지, 그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기묘한 메타 질문이었다.
알렉스는 모욕감을 느꼈지만, 솔직히 궁금했다.
“솔직히 궁금하군. 왜 그렇게까지 여유를 부리는 거지?”
“그야 시간이 남기도 하고, 실력 차이를 확실히 각인시켜주려면 기습해서 이기는 걸로는 불충분하니까.”
“……자네는 첫인상보다 훨씬 더 오만한 자로군.”
기이이잉……!
지구에서 충성 서약을 받은 일반인들의 정신 에너지가 알렉스에게 부여되었다.
100층탑의 부하 플레이어들의 힘을 부여받을 때에 비하면 미약하지만, 이것도 몇만 명에 달한다.
개개인의 정신 에너지가 아무리 작아도, 한 명에게 집중되면 막강할 수밖에 없다.
‘흠.’
알렉스의 힘이 몇 배로 강해졌다.
‘맞으면 아프긴 하겠네.’
물론, 은혁은 맞아줄 생각은 없었다.
“각오하게.”
투쾅!!
알렉스는 근거리에서 주먹을 날리며 돌진해왔다.
은혁은 [그림자 도약]으로 가볍게 피했다.
‘전투 방식은 워잭을 닮았군.’
육중한 갑옷과 엄청난 가속력.
그리고 맨주먹을 이용한 타격 기술 위주다.
부웅! 부웅!
타탓!
육중하지만 유연하고,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하지만.
‘위압적이지만, 왠지 무섭지 않아. 왜일까?’
은혁은 그 답 또한 알고 있었다.
‘첫째. 전투 방식이 구식이라 세련됨이 없어. 둘째. 교황제의 검이 없으니까.’
은혁의 전투에 관한 눈은 매우 높았고, 지금의 교황제는 전설적인 명성에 비해 약했다.
‘접근전 실력만 봐서는, 딱 워잭보다 조금 더 강한 수준이네.’
평가를 마친 은혁은 히죽 웃으며 세븐 칼리버를 꺼냈다.
제1형태인 뱀프릭 체인 소드를 본 알렉스는 주춤했다.
“기묘한 무기군. 전기톱인가?”
“글쎄요.”
은혁은 가볍게 휘둘렀다.
‘어리석은 놈!’
알렉스는 한 팔을 들어 막았다.
아무리 강력한 무기라 해도 칼날 형태의 무기로는 갑주를 뚫을 수 없다.
하지만.
콰콰콰콰콰콱!!
“엇?!”
알렉스의 예상보다 위력이 훨씬 강했다.
일반 전기톱과 달리, 뱀프릭 체인 소드는 소형화된 마나 엔진 병기에 기반을 둔 무기였다.
‘이런 건 처음 볼 거다.’
마정석의 힘으로 가동되는 마나 엔진 병기는 다루기 어렵지만, 겉보기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낸다.
“큿!”
교황제의 갑주에서 불꽃이 튀며 갈려 나가자, 알렉스는 뒤로 뛰어 피하려 했다.
그 순간.
슈르르륵!
전기톱처럼 회전하던 피의 칼날은 일부가 액체로 변했다.
촤악!
알렉스의 갑옷의 틈새를 파고들어 살을 찢었다.
“큭?!”
촤악! 촤악!
촤아악!
방심한 알렉스에게 피해를 잔뜩 입힌 은혁은, 반격을 피해 뒤로 크게 뛰었다.
“고대의 흡혈귀의 피와 심장을 모두 흡수해서 업그레이드한 칼날입니다.”
“으음. 그런가.”
알렉스는 조금 놀랐지만 빠르게 동요를 가라앉혔다.
스르륵.
‘교황제의 갑옷’에 자가 수복 기능과 착용자를 위한 고속 재생 기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드래곤에게 잘근잘근 씹혀서 소화가 될 정도가 아니라면, 교황제는 죽을 위험이 전혀 없다.
‘좀 더 정신을 흔들어 볼까?’
“이 칼날에 흡수된 게 누군지 아십니까?”
“글쎄, 모르겠…….”
그아아아아아……!
뱀프릭 체인 소드가 갑자기 울부짖었다.
브릭스의 영혼은 그레이 월드라는 곳에 가 있었지만, 그의 피와 심장은 뱀프릭 체인 소드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에, 교황제의 피를 맛본 뱀프릭 체인 소드가 포효했다.
그아아아악!
키아아아아아악……!
울분과 원한.
애증과 회한이 가득한 울부짖음.
알렉스는 흠칫했다.
“서, 설마.”
“네. 당신의 재상이었던 브릭스입니다.”
“브릭스를 죽인 건가!”
“아뇨. 서로 계약을 맺은 사이입니다. 그리고 제 입장에서는 그 계약 자체가 엄청난 정보였죠.”
은혁은 정보 우위를 이용해 알렉스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교황제의 검은 심연 어딘가에 있다. 그러므로 지금 내 앞의 교황제 알렉스의 손에는 교황제의 검이 없다. 즉, 약하다.”
“깔보지 마라!!”
알렉스가 용감히 외쳤지만, 지금의 은혁은 전성기의 교황제보다도 강했다.
하물며 교황제의 검조차 없는 알렉스는 훨씬 약했다.
뻐억!!
은혁의 기본 주먹 공격.
‘뭐? 지금 뭐였지?’
주먹이 교황제의 투구 위에 꽂혔는데도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역시, 3중 승급이 사기네.”
은혁은 임시 통합길드장이 될 때, 100층탑의 설계자로부터 승급 기회를 받고, 꼼수를 써서 3중 승급을 한 적이 있다.
은혁은 직업이 하나 늘어날 때마다 모든 직업의 효율이 극도로 향상되는데, 3중 승급 보너스는 특히 압도적이었다.
“뭐, 맨주먹으로도 이길 수 있겠군요. 여기기 100층탑이라면 [계약 대결]로 확실히 했겠지만…….”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린 은혁은 이내 투지 넘치는 눈빛으로 노려봤다.
“시스템이 없으니, 그냥 제가 됐다고 판단할 때까지 두들겨 패겠습니다. [무아연환격].”
투타타타타타타타탕!!!
은혁의 주먹과 교황제의 갑주가 충돌할 때마다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나고 불꽃이 튀었다.
“크억……!”
100층탑 내부가 아니기에 갑옷 내구도 감소 경고 메시지는 뜨지 않았지만, 교황제는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플레이어라지만, 이게 사람 주먹인가?!’
은혁의 무투가 숙련도는 높았고, 3중 연속 승급 당시 얻은 화염권사 직업과 [적류초열공] 덕분에 한 방 한 방이 용광로에서 갓 꺼낸 강철 망치보다 강력했다.
“100층탑에서는 부하들의 힘을 빌리고, 지구에서는 힘을 비축한다면서 평화에 찌든 채 살았죠? 그러니 실전에 이골이 난 나 같은 놈한테 처발리는 건 당연한 겁니다.”
“닥쳐라!!”
콰쾅!!
알렉스는 크게 도약해서 천장을 부수고 건물 2층으로 올라갔다.
불리하니 거리를 두고 싸우려는 계획.
하지만 은혁은 뱀프릭 체인 소드를 간단히 드릴 랜스로 변신시켰다.
철컹!
“[택티컬 디깅].”
쿠콰콰콰콰콰쾅!!
은혁은 건물의 벽과 천장을 마구 꿰뚫으며 돌진했다.